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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42화 (42/257)
  • 42화 제4장 매듭 (2)

    터벅. 터벅.

    6교시 수업이 끝난 후, 학교 복도를 걷는 심병수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의 목적지는 교무실도 아닌 무려 교감실이었다.

    교감실이 주는 무게감은 그를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전교에 학생이 몇 명인데, 교감이 굳이 자신을 콕 집어서 보자고 했단 말인가.

    갑작스러운 소식은 보통 나쁜 소식이기에.

    심병수는 자신에게 닥칠 수 있는 나쁜 소식을 어림잡아 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걸리는 건 하나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찜찜한 건 하나뿐이었다.

    박정훈.

    박정훈을 괴롭힌 것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박정훈 건은 담임선생님의 선에서 잘 마무리된 걸로 알고 있었는데.

    대체 어떤 이유에서 교감의 호출이 있는 걸까.

    그에 대한 답은 막 도착한 교감실 문 안에 있었다.

    똑. 똑. 똑.

    “3학년 심병수입니다.”

    “들어와라.”

    교감실에 들어가자, 응접용 소파에 앉은 교감이 보였다.

    심병수를 바라보는 교감의 표정은 어두웠다.

    착각인지 몰라도 자신을 한심하다고 여기는 것 같은 눈초리였다.

    심병수는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거기 앉아라.”

    “네, 교감 선생님.”

    “병수, 너 믿음이랑 더불어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라고 들었는데 알고 보니 정반대였더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심병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오리발부터 내밀었다.

    정치인들도 궁지에 몰리면 늘 기억이 안 난다.

    잘 모르겠다고 하지 않는가.

    “시치미를 떼고 넘어갈 수준은 이미 지났어. 그랬다면 내가 애초에 너를 보자고 부르지도 않았겠지. 친구를 괴롭힌 것도 모자라 학교 망신까지 시키다니… 너란 녀석은…….”

    교감의 목소리에 은근한 노기가 깃들었다.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은 심병수는 잔뜩 목을 움츠렸다.

    뭐야? 대체 왜 이렇게 되는 거지?

    이 정도면 나를 완전히 학교 폭력 가해자로 인정하고 있다는 건데?

    제대로 된 증거는 갖고 날 몰아붙이는 건가?

    “너희 부모님이 아무리 학부모회에서 힘쓰고 계시다고 해도 이것까지 덮진 못하실 거다.”

    교감은 그의 속마음에 화답하듯 탁자에 사진 몇 장을 던졌다.

    화상을 입은 박정훈의 손목 사진.

    정강이에 멍이 든 사진.

    사진을 확인한 순간, 심병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머저리에 순둥순둥한 박정훈이 이런 증거를 남겨 놓았다니 믿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설 심병수가 아니었다.

    분명 사진은 박정훈이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는 것을 나타냈다.

    하지만 박정훈을 괴롭힌 사람이 누구인지는 증명하지 못한다.

    쉽게 말해 반쪽짜리 증거인 셈이다.

    심병수는 빠져나갈 구멍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교감 선생님, 이건 모함입니다. 저는 병수를 괴롭힌 적이 없습니다.”

    “한심한 놈, 이게 다가 아니야!”

    일갈한 교감이 양복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왜, 또 마음에 안 든다고 담뱃불로 내 손목을 지지려고?

    -한 번 했던 걸 두 번 못 할 것 같으냐?

    -넌 진짜 못됐어. 네 본모습을 선생님들이 모르시는 게 진짜 내 천추의 한이다.

    -이 씹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짜아아악!

    며칠 전 옥상에서 박정훈과 나는 대화의 녹음 파일.

    거기에 캠코터로 촬영한 영상이 더해지자, 심병수는 할 말을 잃었다.

    하늘은 무너졌고 솟아날 구멍이 없는 상황에 빠져 버린 걸 깨달았기에.

    그날 박정훈 새끼가 이상하게 개기더니…….

    전부 이것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네가 오기 전에 정훈이랑도 대화를 나눠 봤다. 소송도 이미 들어갔고, 이번 주 안으로 이번 일이 뉴스로 보도될 것 같다고 하더구나.”

    “네? 그건 너무…….”

    “이번엔 나도 네 뒤를 봐줄 수 없어. 넌 최하 퇴학이다. 부모님께 잘 말씀드려서 합의를 보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난 모르겠으니까.”

    교감이 신경질을 내며 손을 내저었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우리 엄마한테 그렇게 촌지를 받아먹고 나를 이렇게 내친다고?

    심병수는 교감을 째려보다가 교감실을 빠져나왔다.

    불안함, 두려움, 긴장, 당황스러움 등등.

    휘몰아치던 감정의 종착역은 분노였다.

    박정훈이 아닌 이믿음을 향한 분노였다.

    박정훈 같은 얼빠진 놈이 이렇게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을 리 없으니까.

    언제나 그렇듯 이번 사건의 원흉은 이믿음이었다.

    ‘너 죽고 나 죽자 이거지? 그래.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심병수는 씩씩거리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 * *

    목동역 인근의 햄버거 프랜차이즈 가게 앞.

    나는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박정훈을 기다렸다. 오늘따라 유독 하늘이 맑고 파랗게 보였다.

    아마 기분 때문일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주 전 학교 내부에서 학교 폭력 자치 위원회가 열렸다.

    회의 결과, 심병수는 만장일치로 퇴학 처분을 받았다.

    심병수의 똘마니들은 정학 처분을 받았고.

    나와 박정훈이 정성껏 모은 증거 자료가 효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한편 곽준호 변호사는 증거 자료를 바탕으로 소송을 진행 중이고, 저번 주에는 기자님께 부탁한 정보들이 전파를 탔다.

    법적으로도 그리고 대외적으로도 심병수는 헤어 나올 수 없는 궁지에 몰렸다.

    물론 나는 복수가 완벽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심병수가 앞으로 겪을 고통이 박정훈이 그동안 당한 고통보다 클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현재 내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를 했다는 사실.

    그 사실 하나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기분 좋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 경험해 본 복수의 맛은 그야말로 탄산음료였다.

    짜릿하고 통쾌했다.

    이러다가 복수에 중독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될 정도였다.

    박정훈의 복수를 도우면서 나는 깨달았다.

    복수란 내 정신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는 점.

    복수는 구체적인 증거로 상대를 파멸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아마 병원에 들어가고 의사가 되어서도 복수할 일은 많을 것이다.

    크게는 강태섭부터, 작게는 레지던트 선배나 다른 교수들까지.

    숙제로 남겨진 복수를 나는 앞으로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회귀를 한 나는 조금씩, 그리고 확실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일찍 왔네?”

    저 멀리서 박정훈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달려오는 얼굴이 밝고 활기찼다.

    심병수가 퇴학당한 뒤 박정훈은 본래의 활력을 되찾았다.

    보기 좋은, 보고 싶었던 변화였다.

    “딱 10분 먼저 왔어.”

    “배고프지? 들어가자.”

    우리는 햄버거 가게로 들어가 주문을 하고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믿음아, 진짜 고맙다. 다 네 덕분이야.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까지도 심병수한테 고통 받았을 거야.”

    박정훈이 대뜸 감사 인사부터 했다.

    얼마 전부터 박정훈은 나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알았으니까 그만해. 이러다가 귀에 딱지 앉겠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내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으니까.”

    “나만 잘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야. 네가 용기를 낸 것도 중요했어. 그러니까 심병수를 엿 먹인 건 우리 둘의 합작품이라고.”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문득 전생의 나를 돌이켜 보면 조금 아쉽긴 했다.

    인턴과 레지던트 시절, 괴롭힘을 당했던 내게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주었다면 말이다.

    나도 조금 더 일찍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또 어쩌면 말이다.

    회귀한 내가 구하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지도 모른다.

    무력감과 패배감에 찌들어 고통 받던 나 자신인지도 몰랐다.

    한 사람, 한 사람과 엮이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나는 과거의 내 상처를 치유 받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니까.

    “하긴, 나도 나쁘진 않았지?”

    박정훈도 씨익 웃고는 말을 계속했다.

    “믿음이, 넌 꿈이 의사라고 했지? 넌 진짜 훌륭한 의사가 될 거야. 네 말대로 동네 내과 가서 진료 받았거든?”

    “…….”

    “위 내시경을 해 보니까 의사 선생님이 진짜 역류성 식도염이 있다고 하더라. 나는 가슴이 아프길래 심장 질환이 있는 줄 알았는데.”

    “우리 나이에 심장 질환을 앓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까. 보통은 위장 장애로 인한 흉통일 가능성이 높지. 그건 그렇고…….”

    나는 차분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나는 박정훈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전생에는 내 공부를 하느라 바빠서, 이번 생에는 심병수를 물리치느라 바빠서.

    “정훈이 너는 앞으로 뭐가 되고 싶어?”

    “나? 생각해 둔 게 있긴 해. 치과의사.”

    “치과의사?”

    의외의 대답에 내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응. 우리 집안 형편이 썩 좋은 편은 아닌데 특히 아버님이 돈 때문에 치과 치료를 못 받고 있어.”

    “…….”

    “내가 치과의사가 돼서 부모님 치아를 좋게 갈아 드리고 싶어. 뭐, 성적이 모자라서 쉽지는 않겠지만.”

    그러고 보니 동창회에서 치과의사가 된 친구가 하나 있다고 들은 것 같았는데…….

    그게 박정훈이었던 모양이다.

    효심으로 치과를 선택한 박정훈에게서 나는 끈적한 동질감을 느꼈다.

    “내가 만약 치과의사가 되면 네 치아는 무조건 공짜로 해 줄게.”

    “임플란트도?”

    “당연하지. 이번에 받은 은혜를 갚으려면 그 정도도 못 하겠어?”

    박정훈의 너스레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치아 보험을 들게 될 줄이야.

    사람 일이란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한동안 심병수를 화제로 삼아 쥐포처럼 씹고 뜯었다.

    박정훈이 말하길, 얼마 전에 심병수와 심병수의 부모님이 박정훈을 찾아왔다고 했다.

    제발 합의를 해 달라고 말이다.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기죽어 있는 심병수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고 했다.

    당연히 합의는 거절이었고.

    박정훈의 케이스를 보건대 정의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의사가 사람을 살리듯 사람이 정의를 살려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앞으로 의사 노릇뿐만 아니라 정의를 살리는 노릇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잠시 대화가 끊어졌을 때,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햇살이 내 쪽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이젠 정말 의대생이 되는 일만 남은 듯했다.

    * * *

    해가 지고 달이 떴다.

    나는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가는 중이었다. 밤 8시가 될 때까지 나는 박정훈과 불타는 시간을 보냈다.

    영화도 보고, 산책도 하고, 쇼핑도 하고.

    거의 데이트를 방불케 하는 수준이었다.

    심병수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준 뒤 모처럼 가진 휴식은 달콤하기만 했다.

    박정훈도 몸과 마음이 다시 건강해진 것 같아서 걱정을 덜었고.

    그런데 집으로 가는 도중에 있던 빌라촌을 지날 때쯤이었다.

    스산한 느낌이 들어 외진 골목길을 바라보니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거기 누구 없어요? 사… 살려 주세요.”

    쓰러진 사람의 꺼질 듯이 위태로운 목소리가 내 본능을 자극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옆으로 담벼락이 쳐진 외진 길로 달려갔다.

    으쓱한 길에서 퍽치기라도 당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지병으로 쓰러진 걸까.

    짧은 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나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쓰러진 사람을 살폈다.

    자세히 보니 성인이 아닌 내 또래의 학생이었다.

    적어도 겉보기에 외상의 흔적은 없었고, 의식도 또렷했으며.

    호흡과 맥박도 정상처럼 보였다.

    “미안한데…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마.”

    방금까지만 해도 앓는 소리를 내던 학생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어 내기도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영문이란 말인가.

    방금 전까지 다 죽을 것처럼 신음을 내뱉던 친구가 어째서 이렇게 멀쩡할 수 있지?

    놀랐던 감정은 이내 의심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너, 지금 무슨 소리를……?”

    “나도 협박을 받아서 이런 거니까 나를 원망 말라고. 신고는 곧바로 해 줄게.”

    학생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 으쓱한 골목길을 벗어났다.

    나는 녀석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녀석이 남긴 심상치 않은 말들의 의미가 머릿속에서 재해석되었던 것이다.

    “단순해서 좋네. 이믿음, 너는.”

    귀에 익으면서도 결코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 뒤를 돌아보자, 심병수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반대편 골목에서는 익히 얼굴을 아는 일진들이 골목을 막아섰고 말이다.

    “함정은 너만 팔 수 있는 게 아니지. 자, 쥐새끼가 된 기분이 어때?”

    가로등 불빛으로 한층 환해진 심병수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런 심병수의 모습이 나는 그저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퇴학을 당하고서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 같은데…….

    함정에 빠진 게 과연 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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