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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40화 (40/257)
  • 40화 제3장 균열 (5)

    복싱 수련과 약국 플렉스를 마친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형아, 왔어?”

    나를 가장 반갑게 맞아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전생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사랑스러운 동생.

    “형아, 왔지. 사랑이는 부모님 속 안 썩히고 잘 있었어?”

    “응!”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랑이의 모습에 나는 바보처럼 웃었다.

    그리고 사랑이를 두 팔로 안은 채 거실로 들어와서는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끼야호, 신난다.”

    자지러지게 웃는 사랑이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은 뒤 나는 부모님께 인사를 했다.

    작업 중이던 아버지는 안방에서 나왔고.

    저녁을 준비하던 어머니는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평화로운 가정에 돌아오자, 마음이 한결 푸근해졌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바로 가정이었다.

    나는 집에 들어오면 언제나 방전됐던 에너지가 충전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된다는 말은 분명 진리일 것이다.

    전생의 나와 이번 생의 나의 차이가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지점도 바로 가정이었고.

    “믿음이 왔니?”

    “오늘은 체육관에 다녀온 모양이구나. 근데 손에 든 건 뭐니?”

    아버지가 내 손에 들린 봉지를 궁금하게 여겼다.

    “어머니 바쁘세요? 잠깐 와 보실래요?”

    나는 저녁 식사를 준비 중인 어머니까지 기어이 거실로 불러냈다. 그리고 거금을 들여서 산 영양제를 부모님께 선물로 드렸다.

    “믿음아, 너무 무리한 거 아니니?”

    “으음… 이걸 한 번에 다 챙겨 먹기는 힘들 것 같은데?”

    부모님의 반응은 내가 예상한 것과 조금 달랐다.

    영양제를 드리면 덮어놓고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살짝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긴 돌이켜 보면, 1999년에 영양제를 다섯 종류나 챙겨 먹는 성인이 몇이나 될까 싶긴 했다.

    이를테면 나는 시대를 너무 앞서나간 것이다.

    “두 분도 슬슬 건강에 더 신경 쓰셔야죠. 그리고 나눠서 드시면 생각보다 양이 많지도 않아요.”

    나는 청산유수 같은 언변으로 부모님을 구워삶기 시작했다.

    “아침 기상 직후 공복에 미지근한 물 한 잔과 유산균부터 드시고요.”

    “…….”

    “위장 장애가 있을 수 있으니 아침 식사 직후에 비타민 B랑 비타민 D를 드세요.”

    “…….”

    “점심은 건너뛰고 저녁 식후에 오메가 3하고 칼슘·마그네슘 복합제제를 드시면 돼요. 어때요? 쉽죠?”

    나는 복용법에 이어 영양제의 효과에 대해서도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나의 해박한 영양제 지식에 놀란 듯 부모님은 그저 눈만 깜빡거릴 따름이었다.

    “이런 건 또 언제 공부했니?”

    “친한 친구 중에 부모님이 약국을 운영하는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한테 도움을 받았어요.”

    나는 말을 하면서도 내 자신에게 조금 놀랐다.

    이렇게 그럴듯한 하얀 거짓말을 순식간에 지어내다니…….

    1살부터 키워 온 순발력과 말발은 이제 가히 사기꾼의 뺨을 때릴 경지에까지 올라섰다.

    이 능력은 반드시 환자를 구하고 불구대천의 원수 강태섭에게 복수하는 데 사용할 것이다.

    “어쨌든 잘 먹으마.”

    “고맙다, 믿음아.”

    “아니에요. 뭘, 이 정도 가지고.”

    내가 머쓱해하는 사이, 사랑이가 입술을 뾰족하게 내민 채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형아, 형아.”

    “우리 사랑이 왜?”

    “내 거는 없어? 나도 맛있는 거 먹고 싶어.”

    혼자 소외를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사랑이가 삐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하게 씌었는지 그 모습마저 어여뻐 보이는 나였다.

    “형아가 사랑이 걸 잊어버릴 리가 있겠니? 자, 이건 사랑이 거.”

    나는 사랑이에게 ‘키가 쑥쑥’ 젤리와 씹어 먹는 비타민을 건네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중간에서 재빠르게 두 영양제를 가로챘다.

    “잠깐, 이건 엄마가 보관할게. 사랑이 손에 뒀다간 하루 만에 한 통이 다 날아갈걸?”

    “엄마, 이거 형아가 나한테 준 건데…….”

    “엄마도 알아. 엄마가 밥 먹고 나서 하나씩 줄 테니까 아껴 먹자. 형아 선물이잖아. 그렇지?”

    “…네.”

    어머니는 인심을 썼다는 듯 씹어 먹는 비타민 한 개를 사랑이에게 건넸다.

    이에 사랑이가 야무지게 포장을 벗겨서 비타민을 입에 넣었다.

    “아이… 셔!”

    신맛에 몸부림치는 사랑이를 보며 부모님과 나는 그 자리에서 박장대소를 했다.

    과거 가정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갔다면.

    요즘은 사랑이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예전과 지금 중 어느 쪽이 더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지금이었다.

    * * *

    일요일 오후.

    점심 식사를 마친 나는 2시쯤 집을 나왔다.

    평소라면 빈손으로 나와 근처 공원에서 산책을 했겠지만,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목적지는 공원이 아니었고, 목적 또한 산책이 아니었다.

    등에는 비장의 물건들을 넣은 가방을 메고 있었다.

    오늘은 박정훈을 만나서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는 날이었다.

    심병수가 제멋대로 날뛰는 꼴은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었다.

    나는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박정훈에게서 과거의 나를 보고 있었으니까.

    인턴 시절부터 레지던트 2년 차까지.

    나 역시 박정훈과 비슷한 괴롭힘을 당해 봤다.

    폭언과 욕설은 기본이었고, 병원 내 으쓱한 곳에 불려 가서 선배에게 정강이를 까인 적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는 동안, 내 마음은 서서히 붕괴되어 갔고, 그로 인해 업무 능력은 바닥을 기었다.

    바닥을 기고 있는 업무 능력 때문에 또 괴롭힘을 당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러니 박정훈을 구하는 것은 곧 과거의 나를 구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 일을 물렁물렁하게, 그리고 대충대충 할 수는 없었다.

    “일찍 왔네?”

    약속 장소인 학교 근처 PC방 앞에 박정훈이 서 있었다.

    내가 말을 걸자, 박정훈도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했다.

    담뱃불로 지짐을 당한 상처를 감추기 위해 착용한 팔 토시 또한 여전했다.

    하… 심병수.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진짜 인간 말종이다.

    네게는 용서라는 단어도 아까워.

    “점심은 먹고 나왔어?”

    “어? 응.”

    “그럼 어디 가서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이 근처 빵집으로 가자.”

    나는 박정훈과 함께 5분 거리에 있는 빵집으로 이동했다.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오렌지 주스 두 잔을 시켰다.

    우리가 나눌 화제는 단 하나밖에 없었고, 그 화제는 그리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박정훈이 불편하게 침묵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괜히 내 가슴이 더 아팠다.

    하지만 상처란 방치하면 방치할수록 더 악화되는 법.

    이제는 그 상처에 직접 손을 대야 했다.

    메스는 피부와 장기를 가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상처를 치료하는 것처럼.

    “정훈아,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나랑 같이 병수한테 복수하자. 나한테 좋은 방법이 있다.”

    “무… 무슨 수로?”

    박정훈이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담임선생님은 병수가 공부 잘하고 착한 아이인 줄로만 알고 계셔. 걔, 저번에 담임한테 불려 간 뒤로는 나를 더 괴롭힌단 말이야.”

    “…….”

    “그냥 졸업할 때까지 버티는 게 제일 나아. 믿음이 네가 나를 신경 써 주는 건 고마운데, 이러다가 너까지 당할 수 있어.”

    박정훈은 지금 상황을 체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건 박정훈의 잘못이 아니었다.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고백해도 가해자가 처벌 받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난 네가 남은 2개월 동안 고통 받는 것도 싫다. 그리고 고통이라면 네가 아니라 심병수가 받아 마땅하지.”

    나는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곽도안의 아버지가 변호사이니 소송을 거는 게 좋겠다는 계획을 털어놓았다.

    “소… 소송? 그거 하는데 돈 엄청 많이 들지 않나? 우리 집은 그 정도로 여유가 있지는 않은데…….”

    소송이라는 단어에 놀란 박정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심해. 이번 건은 무료로 해 주시겠다고 약속했어. 벌써 이야기까지 다 끝냈으니까 너는 나만 믿고 따라오면 돼.”

    “그렇지만 소송을 해도 어영부영 끝나는 거 아닐까?”

    “안 그러게 만들어야지. 우리 둘이서. 반드시.”

    복수의 화신이 된 나는 옆자리에 놓아두었던 가방에서 마침내 비장의 아이템을 꺼냈다.

    하나는 캠코더, 다른 하나는 사진기, 또 다른 하나는 볼펜 형태의 녹음기였다.

    이것들은 심병수의 학교 폭력을 증명해 줄 병기 중의 병기였다.

    어제 하루 만에 이것들을 사고 빌리는 데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모른다.

    “우선 토시부터 벗어 봐.”

    “어? 응.”

    박정훈이 토시를 벗자, 손목 부근에 까맣게 그을린 상처가 모습을 드러냈다.

    담뱃불로 지져졌을 때 박정훈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두려웠을까.

    내 마음이 다 찢어지는 것 같았다.

    “혹시 맞아서 멍든 데 있어?”

    “정강이에 한 군데 있기는 해.”

    “바지도 걷어 봐.”

    나는 사진기로 박정훈의 멍 자국과 화상 자국을 찍었다.

    그다음 논의 대상은 앞으로 우리 둘이 심병수를 곤란에 빠트릴 함정에 관한 것이었다.

    첫 번째 함정은 박정훈이 심병수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의 상황을 박정훈이 녹음기로 녹음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함정은 내가 그 광경을 캠코더로 촬영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자료를 수집한다면, 심병수는 이번 일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 둘이 수집한 자료가 심병수의 학교 폭력을 명확하게 입증해 줄 테니까.

    학교 내부적인 처벌과 형사 및 민사 소송을 진행할 때.

    심병수의 책임을 더 엄중하게 물을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나중에 내게 뒤통수를 맞고 경악할 심병수를 상상하니 나는 벌써부터 흥분이 됐다.

    심병수에게 복수하는 통쾌함이 이 정도인데, 훗날 강태섭에게 복수하면 그 기분은 과연 어떨까.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너 진짜 치밀하구나?”

    박정훈이 질렸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긴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2010년대 이후라면 모를까.

    현 1999년에 나와 같은 방법으로 학교 폭력을 증명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복수를 할 거면 철저하게 해야지. 심병수가 뚝뚝 눈물을 흘릴 정도로.”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정훈이 네가 심병수에게 이미 당한 고통은 어떻게 해결할 수 없어서 아쉽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라고 본다.”

    “…….”

    “어때? 이 정도면 할 수 있겠지?”

    나는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박정훈을 바라보았다.

    내가 건넨 배턴을 박정훈이 받느냐, 받지 않느냐.

    이제 남은 선택은 박정훈의 몫이었다.

    나 혼자서 심병수에게 정의의 철퇴를 내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네가 이렇게 발 벗고 준비를 다 해 줬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녹음기만 틀고 있으면 되니까 어려운 일도 아니고.”

    “고맙다. 도와줘서.”

    “아니야. 진짜 고마운 건 나지. 믿음이 네 도움이 아니었으면 아마 나는 졸업할 때까지 지옥을 맛봤을 테니까.”

    교차하는 우리의 끈끈한 시선 속에는 서로를 향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악당 심병수를 퇴치하는 배에 올라탄 동지였다.

    바람은 순풍이니 이제 남은 건 심병수가 죗값을 치르는 일뿐.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으으으윽!”

    박정훈이 갑자기 가슴에 손을 얹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박정훈의 표정은 금방 풀렸으나 박정훈이 내뱉었던 고통스러운 신음은 한참 동안 내 귓가에 남아 있었다.

    잠깐만, 과호흡 증후군이 끝이 아니었나?

    전생에서 박정훈이 심장병을 앓았다는 기억은 없었는데…….

    불길한 예감에 내 미간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정훈아,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아파?”

    “그게 사실 요즘 들어 유독 가슴이 쓰라리더라고. 커터칼 같은 걸로 이렇게 가슴을 일자로 가르는 듯한 느낌이 들어.”

    박정훈의 증상이 심상치 않았으므로 나는 전직 흉부외과의답게 문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병수를 처단하기에 앞서.

    박정훈이 느끼는 흉통의 원인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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