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39화 (39/257)

39화 제3장 균열 (4)

수업이 끝난 후, 나는 강제로 야간 자율 학습을 해야 하는 친구들과 달리 학교를 떠났다.

그런 나를 친구들은 부러움에 가득 찬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내가 얼마 전에 세운 전국모의고사 전국 수석.

이 타이틀은 야간 자율 학습을 통과할 수 있는 프리패스로 작용했다.

내 위로 아무도 없는데, 과연 누가 나를 야자에 잡아 둘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나만 학교를 나왔던 것은 아니었다.

과호흡 증후군으로 고통 받았던 박정훈도 담임의 배려로 하교하게 되었다.

계획을 논의하기에는 절호의 찬스였으나 나는 박정훈과 거리를 두었다.

박정훈에게 살가운 말 한마디 붙이지 않았다.

박정훈은 오늘 하루 너무 고된 일을 겪었다.

심병수를 물리칠 계획을 논하는 것으로 박정훈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교실 창문에서 심병수가 나와 박정훈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이 감시임을 내가 모를 리 없었다.

죄질이 나쁘고 악랄한 놈.

양심과 죄책감을 악마에게 팔아먹은 놈.

이제 나는 심병수를 물리쳐야 하는 급행열차에 내가 올라탔음을 직감했다.

저 쓰레기를 처리하지 않으면 내 완벽한 고3 생활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수 없었다.

“정훈아, 내 쪽 보지 말고 듣기만 해.”

“어? 응.”

“너랑 중요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주말에 연락할게.”

“알았어.”

힘없이 대답하는 박정훈.

자타 공인 우리 반의 분위기 메이커였던 박정훈의 풀 죽은 모습은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나도 인턴 때 박정훈과 비슷한 경험을 했으니까.

담뱃불에 지짐까지 당하지는 않았지만.

선배들에게 수시로 정강이를 까였고, 숱한 폭언과 욕설에 시달렸다.

자존심이 땅바닥까지 곤두박질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내가 박정훈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박정훈에게서 전생의 나를 발견해서.

어쨌거나 박정훈이 고통 받는 날도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박정훈과 헤어진 뒤 내가 찾은 곳은 집 근처 복싱 체육관이었다.

* * *

“안녕하세요. 관장님.”

“믿음이 왔냐? 수능이 얼마 안 남아서 이제 안 나올 줄 알았는데.”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의 관장이 나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관장은 텅 빈 체육관에서 미트와 글러브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복싱 잠깐 한다고 해서 성적이 떨어지지는 않거든요. 스트레스를 좀 풀고 싶기도 하고요.”

나는 신발장에 신발을 벗은 뒤 체육관에 들어섰다.

“관장님, 오늘은 줄넘기 생략하고 미트부터 쳐도 될까요?”

“좋을~ 대로 하십쇼.”

익살맞은 관장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라커룸으로 들어가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복싱을 배운 지도 어언 2년이 지났다.

영어 말하기·듣기가 일정 궤도에 오르자, 여유 시간이 늘어났는데.

그 시간을 나는 복싱으로 채우게 되었다.

흉부외과와 복싱.

듣기만 해도 낯설고 어색하고 기괴한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치 민트초코 치킨처럼 말이다.

솔직히 복싱을 택한 것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내가 의미를 둔 것은 육체를 단련하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마음과 지식을 단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육체를 단련하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굳센 마음은 굳센 몸에서 나오지 않던가.

흉부외과의로 살아온 전생의 16년 동안, 나는 몸이 건강하지 않은데 마음이 건강한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또한 육체 단련은 흉부외과의에게 꼭 필요한 미덕이기도 했다.

아주 짧게는 2시간.

아주 길게는 한나절까지.

흉부외과의는 마냥 수술실에서 서 있어야 한다.

그냥 서 있어도 죽을 맛인데, 고도의 집중력을 유지하며 손을 써야 한다.

그 저력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바로 체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복싱을 꾸준히 계속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의대에 들어가서도, 그리고 병원에 들어가서도 꾸준히 운동을 할 계획이었다.

환복을 마친 나는 글러브를 끼고 링 위에 올랐다.

관장은 이미 링 중앙에 서 있었다.

“녀석, 오늘은 눈빛이 제법 살벌한걸?”

“때려 주고 싶은 녀석이 있거든요. 이런 말을 하긴 좀 부끄럽지만 주먹이 울었어요.”

나는 심병수를 떠올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전생에 한 대 치고 싶었던 사람이 강태섭이라면.

현생에서는 심병수였다.

둘 다 약자를 악랄하게 괴롭힌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럼 조만간 일이 날지도 모르겠구나.”

“그 말씀은 혹시… 저보고 사람을 치라는 말씀인가요? 전 그럴 생각까지는 없어요.”

관장이 던진 의미심장한 말에 나는 퍽 동요했다.

누구를 때리기 위해서 배운 복싱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환자를 치료해야 할 내가 환자를 만들다니…….

그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쯧쯧쯧. 믿음아, 사람이란 말이다. 배운 건 언젠가 써먹게 되어 있는 법이란다.”

“…….”

“배운 걸 쓰기 싫어도 써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기도 하지.”

“글쎄요. 저는 사람을 때리는 능력은 딱히 쓰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네 마음대로 안 된대도?”

관장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라이트 헤비급 국가대표 선수였던 관장의 말에 묘한 자신감이 묻어났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네게 뭐랄까, 좋은 것을 알려 주마. 이걸 정말 좋은 거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관장이 본인의 옆구리에 미트를 댔다.

“훅으로 여길 쳐 봐. 양손으로 번갈아서.”

“네.”

나는 관장의 지시대로 레프트 훅, 라이트 훅으로 미트를 후려갈겼다.

전생의 나는 오른손잡이였지만, 성장하면서 각고의 노력을 통해 양손잡이로 거듭났다.

팡! 팡! 팡!

미트와 글러브가 닿을 때 터지는 마찰음이 경쾌했다.

심병수 때문에 받았던 스트레스가 싹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역시 체육관을 찾은 건 신의 한 수였다.

“조금 더 세게.”

“아니, 지금보다는 약하게.”

관장은 오늘따라 유독 힘 조절에 관심을 보였다.

힘껏 치는 데만 익숙했던 나는 관장의 새로운 가르침에 꽤 애를 먹었다.

“자, 다음은 스트레이트로 어깨를 쳐 봐라.”

“관장님. 오늘 훈련, 이상한 거 아시죠?”

나는 지시대로 10분 정도 미트를 치다가 잠시 호흡을 골랐다.

갑자기 안 하던 힘 조절을 시키는 것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데.

관장은 공격 부위로 엉덩이, 허벅지, 어깨 등등을 선정했다.

“이거 공부만 잘하지 완전 헛똑똑이구먼?”

관장은 나를 바라보며 실실 웃었다. 나는 훈련뿐만 아니라 그 웃음의 의미조차 알 수 없었다.

파바바밧.

스텝을 밟아 접근한 관장이 번개처럼 내게 다가왔다.

빠아아악!

왼쪽 옆구리에 바위처럼 단단한 주먹이 꽂혔다.

나는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옆구리에서 찌르르 울려 퍼지는 통증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눈에 별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과… 관장님,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갑자기 왜…….”

“이렇게만 해.”

“네?”

“때리고 싶은 놈이 있으면 이렇게 때리라고. 때릴 부위를 잘 고르고 힘 조절까지 잘하면 맞은 티가 아예 안 나게 팰 수 있지. 고통은 고통대로 주면서.”

“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관장이 전수하고 있는 것은 때리고도 때린 티를 남기지 않는 요령이었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힘 조절을 시키고, 엉덩이나 어깨 같은 부분을 공격하게 했던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믿음아, 룰을 벗어난 놈은 결코 룰로 처벌할 수 없단다. 그럴 때는 너도 적당한 범위 안에서 룰을 벗어나야 하지.”

관장의 철학이 담긴 한마디는 내 가슴에 진한 여운을 남겼다.

상황과 상대에 따라서는 적당히 룰을 어겨야 한다라…….

모범생에다 바른생활 사나이인 나였지만, 관장의 가르침은 되새겨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 * *

2시간 정도 훈련을 하고 체육관을 나오자, 온몸이 뻐근했다.

그래도 후련하고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고통스러운 후련함.

이것이 바로 운동이 주는 묘한 매력이 아닐까 싶었다.

체육관을 나왔음에도 나는 한참 동안 체육관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관장이 내게 가르쳐 준 복싱 기술.

상대를 때리되 때리지 않은 것처럼 하는 기술.

그리고 관장이 내게 전수한 삶의 철학.

룰을 벗어난 자는 룰 바깥에서 응징해라.

새로 배운 낯선 가르침은 내게 융화되지 못하고 내 주변을 마치 주변인처럼 떠돌고 있었다.

평생 심장 질환과 폐 질환하고 싸워 왔던 내게 관장의 가르침은 이색적이고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일견 타당하다고 느껴졌던 것은 왜일까.

나는 결국 주먹으로도 심병수를 응징하게 될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과 질문을 접어 둔 채 나는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당장 답을 낼 필요는 없었다.

질문과 의문이 무르익으면 답은 자연스럽게 나오기 마련이니까.

집을 향해 걷던 나의 발걸음은 곧 약국 앞에서 멈췄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아버지가 집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몸이 약해진 것이 떠올랐다.

가족애를 다룬 아버지의 소설은 마감 직전에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아버지는 평소보다 더 많이 피곤해 보였다.

그래서 내가 자연스럽게 떠올린 것은 영양제였다.

1990년대 후반인 지금, 영양제는 크게 각광을 받지는 못했지만 시대가 지나면 지날수록 영양제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져만 간다.

실제로 영양제는 잘만 복용하면 각종 통증을 줄여 주고 질병을 예방하며 생활의 활력이 될 수 있었다.

이 기회에 부모님께 영양제를 챙겨 드리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당당하게 약국 안으로 들어갔다.

“학생, 뭐가 필요해요?”

가운을 입은 약사가 친절하게 내게 물었다.

관심은 고맙지만 나는 내가 사야 할 영양제, 부모님에게 꼭 필요한 영양제를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알아서 고르겠다고 대답한 뒤 약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유산균.

종합 비타민.

비타민 D.

오메가 3.

칼슘·마그네슘 복합제제.

내가 고르고 고른 정예 영양제는 이렇게 다섯 가지였다.

첫째로 유산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장이 면역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거의 주지의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므로 면역력과 장 건강을 위해 유산균은 필수였다.

둘째로 종합 비타민.

종합 비타민은 식사로 섭취하기 힘든 각종 다양한 미네랄을 보충해 줄 수 있었다.

솔직히 이 시대에 그것도 약국에서는 내가 원하는 종합 비타민은 없었지만.

그래도 개중 영양소 및 영양소의 함량을 봐서 가장 괜찮은 것을 골랐다.

먼 미래에 해외 직구가 활성화되면 그때 다른 종합 비타민 영양제로 바꿔 드려야 할 것이다.

셋째로 비타민 D.

비타민 D는 체내 칼슘의 흡수를 도와 뼈 건강에 도움을 주며.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의 분비에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다.

햇볕을 쐬는 것으로, 비타민 D를 체내에서 합성할 순 있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집에서 보내는 아버지는 비타민 D를 따로 섭취할 필요가 있었다.

넷째로 오메가 3.

흉부외과의인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양제였다.

혈중 중성지질과 혈행 개선에 탁월한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안구 및 뇌 건강, 염증 완화 등의 다양한 효과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칼슘과 마그네슘.

칼슘과 마그네슘이 뼈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전 국민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칼슘은 심장의 수축 작용에, 마그네슘은 이완 작용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성분 역시 필요한 영양 성분 중 하나였다.

부모님에게 필요한 영양제들을 구입한 뒤.

나는 내 동생 사랑이를 위한 영양제도 두 개 샀다.

효과가 없는 것은 알지만 맛이 좋은 ‘키가 쑥쑥’이라 영양제와 씹어 먹는 비타민 C였다.

“학생, 이걸 다 사게요?”

계산대에 영양제를 내려놓자, 놀란 약사가 눈을 깜빡거렸다.

내 나이도 그렇고.

이 시대에 이렇게 많은 영양제를 먹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것도 최대한 줄인 겁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체크카드를 내밀었다.

전자의무기록 사업으로 승승장구하는 외가에서 매년 받는 세뱃돈만 100만 원이 넘었다.

거기에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도 넉넉했고.

먼 미래에 유행할 단어, 플렉스.

나는 약국에서 미리 플렉스를 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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