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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36화 (36/257)
  • 36화 제3장 균열 (1)

    오늘은 오전부터 이상하게 운이 좋았던 명태랑이었다.

    심장내과 오전 컨퍼런스가 끝나자.

    진료부원장은 그를 불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양산대학교 병원 심장내과에 약물 방출형 스텐트 시술 건수가 국내 최고라는 것이다.

    -자네 덕분에 다음 신(新)처치법 예산도 따올 수 있을 것 같군.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열심히 하게.

    명태랑은 분에 넘치는 말씀이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일 때, 그의 입이 귀에 닿을 듯 찢어졌던 건 비밀인 듯 비밀이 아니었다.

    오전 라운딩(의사가 병동을 돌며 환자와 보호자를 직접 살피는 일) 때는.

    입원 환자와 보호자 몇 명에게서 음식과 옷 선물을 받았다.

    선생님 덕분에 시술을 잘 받았고.

    병원에 나가서도 건강하게 지낼 수 있겠다고 그들은 감사해했다.

    정규 진료 시간도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흔히 말하는 진상 환자는 오늘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들 얌전하고 고분고분해서 그가 짜증 낼 필요가 없는 환자가 대다수였다.

    얼마 전 만났던 곽준호도 차트를 떼어 간 후에는 얌전해졌다.

    법전을 꿰차고 있다고 한들 지가 차트까지 볼 줄 알겠는가?

    설령 다른 의사에게 해석을 부탁한다고 해도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났다.

    레지던트의 손을 거친 차트는.

    이미 조작된 차트는 무조건 명태랑의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즉 명태랑의 왕국은 더욱더 높고 견고해졌으며, 그 누구의 침입도 불가능했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모든 것이 완벽했던 그날.

    명태랑은 귀가해서 그 완벽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청객처럼 찾아온 한 통의 전화로 그의 행복했던 하루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우 교수, 무슨 일이야?”

    전화를 걸었던 건 같은 과 조교수 우민식이었다.

    -명 교수님, 지금 뉴스에 교수님이 나온 것 같은데요? 뉴스 한번 확인해 보실래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최근에 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명태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일단 확인부터 해 보세요. 조금 길게 다루는 것 같으니까요.

    “알았어. 확인하고 연락 줄게.”

    통화를 끊은 그는 보고 있던 채널을 뉴스 채널로 돌렸다.

    -국내 유명 대학에 근무하는 한 심장내과 전문의 M씨가 실적을 위해 무리한 시술을 감행해 논란을 빚고 있습니다. 심지어 M씨는 해당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차트까지 조작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윤대기 기자.

    뉴스를 시청하던 명태랑은 깜짝 놀라 눈을 치켜떴다.

    모자이크 처리를 했지만,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모자이크로 가리고 있는 병원이 양산대학교 병원이라는 것을.

    그리고 영상 속 의사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충격을 받은 뇌세포가 잠시 활동을 중단했다.

    한동안 넋을 잃고 뉴스를 바라보던 그는 퍼뜩 정신을 되찾았다.

    곽준호.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그 이름 석 자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곽준호가 아니고서야 누가 이런 발칙하고 대담한 짓을 벌이겠는가.

    하지만 대체 무슨 수를 썼던 거지?

    조작된 차트를 복사해 간 것이 아니었나?

    자신이 부정한 스텐트 시술이 들킨 이유를 명태랑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건이 이 이상으로 커지면 돌이킬 수 없어.’

    명태랑은 갈대처럼 흔들리는 정신을 붙잡았다.

    곽준호가 자신의 잘못된 시술을 알게 된 연유를 찾는 것은 그다음의 일이었다.

    당장은 사건이 확대되는 것부터 막아야 했다.

    이대로라면 그의 손에 세상을 떠난 환자의 보호자들이 단체로 소송을 걸어올 것이다.

    그러면 그의 명예는 땅바닥으로 떨어질 것이고.

    사람들은 그를 손가락질하며 의료 윤리를 어겼다고 비난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앞으로의 의사 생활까지 위협을 받을지 몰랐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준호야, 방금 뉴스 봤다. 설마 네가 나한테 비수를 꽂은 거니?”

    명태랑은 다급하게 곽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벼랑에 몰렸던지라 인사도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네. 형님을 엿 먹인 사람이 바로 접니다.

    “인마. 맺힌 게 있으면 얼굴을 보면서 풀어야지. 이건 좀 아니잖아. 우리가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닌데, 제 어머니께는 왜 그러셨어요?

    되묻는 곽준호의 말투가 한겨울 눈발처럼 매서웠다.

    그 목소리에 귀가 다 시릴 정도였다.

    “나는 스텐트 시술로도 충분히 치료가 가능할 줄 알았어.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오판이었던 거지. 절대 고의는 아니었어. 맹세해.”

    -어떻게 내가 예상한 답변에서 토시 하나 안 틀리지? 신기하네? 혹시 내가 텔레파시 능력이라도 있나?

    반말로 빈정거리는 곽준호.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은 성질을 부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준호야, 우리 만나서 이야기하자. 응?”

    -선배가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할 수 없네요. 조만간 봅시다. 법. 정. 에. 서.

    뚜우우~ 뚜우우~.

    전화가 맥없이 끊겼다.

    그 후 수차례 연결을 시도했지만, 더 이상 통화는 되지 않았다.

    명태랑은 신경질을 부리며 소파에 휴대폰을 내던졌다.

    물은 이미 엎질러졌고, 다시 주워 담을 방법은 없어 보였다.

    이렇게 소송과 가십거리로 내 의사 생활은 종지부를 찍고 마는 건가.

    지이이잉.

    지이이잉.

    내팽개친 휴대폰이 요란하게 몸을 떨었다.

    아마 그의 뉴스를 확인한 지인들이 문자나 전화를 보내고 있는 것이리라.

    ‘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거야. 대체 어디서부터.’

    명태랑은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자신의 몰락이 이믿음과 필립 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명태랑이 알 길은 없었다.

    * * *

    ‘속이 다 후련하네.’

    등교 준비를 마친 나는 집을 나서기 전에 뉴스를 시청했다.

    저번 주부터 뜨거운 감자가 된 명태랑 교수의 사건이 오늘 아침 뉴스에서도 반복적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스텐스 시술이 옳으냐, 아니면 관상동맥우회술이 옳으냐.

    그 부분은 기를 쓰고 우겨 볼 수 있다고 해도 차트 조작만큼은 덮을 수 없는 죄였다.

    명태랑이 미꾸라지가 아니라 미꾸라지의 할아버지라고 한들.

    이번 사건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방법은 없어 보였다.

    ‘이 모든 게 전생부터 쌓아 온 당신의 업보라고. 달게 받아.’

    조사를 받기 위해 경찰서로 향하는 명태랑의 모습이 비치는 TV 화면을 지켜보며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의료계의 적폐 세력을 미리 퇴치할 수 있어서 참 다행스러웠다.

    저런 악독한 인간 때문에 성실하게 제 몫을 다하고 있는 의사들까지 욕먹는 법이니까.

    ‘잠깐, 그러고 보니…….’

    생각의 방향을 바꾸자, 목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혹시 전생의 아버지도 의료사고로 돌아가신 건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생각이 그의 뇌세포를 잠식했다.

    전생의 아버지는 불안정성 협심증으로.

    신원대학교 흉부외과에서 OPCAB(무인공심폐관상동맥우회술)를 받았는데, 수술 중 테이블 데스를 당했다.

    그때의 나는 의료 지식이 무르익지 않은 의대생 시절이었다.

    수술 받은 병원이 모교인 데다 수술 난이도도 워낙 높아서 아버지의 죽음은 어쩔 수 없다고만 여겼다.

    하지만 명태랑의 사건을 경험하고 나니 의혹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의심이 가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닌데…….’

    앞으로 만나게 될 몇몇 교수들을 떠올리며 나는 턱을 쓸어내렸다.

    이번 생의 아버지는 건강하기 때문에 OPCAB를 받지 않겠지만.

    흉부외과에 돌아간다면 진실을 밝혀 보고 싶었다.

    만약 아버지의 죽음이 의료사고로 인한 것이었다면 내가 받은 것을 두 배, 세 배, 아니 억만 배로 갚아 주리라고 결심하며.

    “큰아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니에요. 별거 아니에요.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오늘도 공부 잘하고 다치지 말고.”

    “네.”

    어머니와 아버지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김지원은 오전 촬영이 있기에 오후 수업만 듣는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은 모처럼 혼자서 등교를 하게 되었다.

    -고맙다. 네 덕분에 이번 일이 술술 잘 풀렸어. 앞으로 네가 법과 관련된 문제에 휘말린다면 내가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 주마. 의뢰비는 단 한 푼도 안 받고 말이야.

    호탕하게 웃던 곽도안 아버지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어제저녁 곽도안 가족과 만나 저녁 식사를 했다.

    명태랑 교수에게 정의의 철퇴를 선물한 기념으로.

    성격은 집요하고 머리는 영리한 곽도안의 아버지는 이제 완벽한 내 편이 되었다.

    덕분에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든든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도착한 교실.

    몇몇 친구들이 교과서를 펴 놓은 채 조용히 공부하는 중이었다. 수능이 두 달 앞으로 바짝 다가온 교실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수능이라는 시험 하나에 인생이 좌우된다고 말하는 세상.

    그리고 그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수험생들.

    나는 그 모든 것이 불합리하다고 느꼈으나 당장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시스템을 바꾸려면 역설적으로 시스템 안에서 최고의 자리에까지 올라야 했기에.

    “이비듬. 이리 와 봐. 나 문제 하나만 풀어 주라.”

    단짝 친구 송윤호가 조용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송윤호에게 다가가 그가 골치를 썩이고 있던 수학 문제를 풀어 주었다.

    “씨발, 존나 쉽게 푸네. 갑자기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어.”

    “뭐든지 다 잘할 순 없지. 너 국어 점수는 최상위잖아.”

    “네 위로는 전혀 위로가 안 되는 거 알지? 전국모의고사 전국 수석께서 뭐든지 다 잘할 순 없다고 하면 퍽이나 가슴에 와 닿겠다.”

    송윤호가 삐죽 입을 내밀었고,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교과서를 펼치고 내용을 훑던 도중 드르륵 하고 교실 문이 열렸다.

    팔 토시를 한 박정훈이 교실로 들어왔다.

    심병수와 내가 직접 충돌한 이후, 박정훈은 심병수에게 크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아무래도 이상한데…….’

    나는 박정훈의 팔 토시에 위화감을 느끼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부터 몸에 열이 많다며 옷을 가볍게 입고 다니는 박정훈이었다.

    그런 녀석이 갑자기 팔 토시를 착용했다니 미심쩍을 수밖에…….

    짚이는 곳이 있었던 나는 박정훈을 복도로 불러냈다.

    “정훈아, 심병수가 아직도 너 괴롭히지?”

    “아니. 그런 거 없는데?”

    박정훈의 대답은 단호했으나 나와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입은 거짓말을 해도 눈은 거짓말을 못 하는 것이다.

    나는 부디 내 촉이 틀리기를 바라면서 다음 행동에 나섰다.

    “가만히 있어 봐.”

    나는 박정훈의 수상한 팔 토시를 우격다짐으로 벗겨 냈다.

    토시가 벗겨진 손목 부위에 검고 동그란 자국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것이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순간 심병수를 향한 분노가 뱃속 깊숙한 곳에서 마구 끓어올랐다.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심병수는 기어이 넘고 만 것이다.

    “가… 갑자기 왜 이래?”

    담뱃불 자국이 드러나자, 박정훈은 당황하며 팔을 뒤로 감췄다.

    “이 여름에 왜 팔 토시를 했나 싶었다. 심병수 새끼가 담배로 네 팔을 지졌지?”

    나는 본격적인 추궁에 나섰다.

    “이래도 심병수가 괴롭힌 게 아니라고?”

    “믿음아,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 난 일을 더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이미 일은 크게 벌어졌어. 이 정도면 범죄라고.”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설마 이 이상 하겠어?”

    열불이 터지게도 박정훈은 오히려 심병수를 두둔하고 있었다.

    더 큰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그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답답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쨌거나 심병수도, 박정훈도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심병수에겐 처벌이 필요했고, 박정훈에겐 보호가 필요했다.

    게다가 담뱃불로 지진 상처가 있다면 담임을 설득하기에도 좋을 것이다.

    “나랑 교무실로 가자.”

    박정훈의 팔을 이끌고 억지로 교무실로 가던 도중.

    나는 맞은편 복도에서 다가오는 심병수 무리를 마주쳤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나는 수준이었다.

    “야, 너네 어디 가냐?”

    심병수가 도끼눈을 뜨고 물었으나 나도 지지 않고 심병수를 노려보았다.

    “네가 알면 뭐 어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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