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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35화 (35/257)

35화 제2장 기호지세 (5)

영화관을 나온 우리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햄버거 프랜차이즈점을 찾았다.

먼 미래에는 일상적인 음식이 되는 햄버거이지만.

이 시절의 햄버거는 꽤 괜찮은 외식 메뉴였다.

“야, 이비듬. 사람 궁금하게 하고 입 싹 닫기냐? 내가 왜 병원에 가야 하는지 이야기를 해 줘야 할 거 아니야.”

까불이의 성화에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너, 코를 너무 심하게 골아. 큰 병원 이비인후과에 가 봐.”

“엥? 코 고는 걸로 이비인후과를 가라고? 그것도 큰 병원으로? 짜식, 뭔가 대단한 걸 말할 것처럼 해 놓고 형님 물 먹이네.”

“네가 하도 코를 심하게 고니까 농담하는 거잖아.”

“하긴, 심하긴 했어. 괜히 나까지 부끄러워지더라.”

까불이가 내게 반발했지만, 김지원과 김요한이 곧장 지원사격에 나섰다.

3대1로 수세에 몰린 까불이는 머쓱한 표정으로 쪽쪽쪽 콜라만 들이켰다.

하지만 큰 병원 이비인후과에 가라는 내 말은 100퍼센트 진심이었다.

코골이도 중요한 질병 증상 중 하나로, 정도가 심하다면 결코 우습게 봐서는 안 된다.

코골이를 통해 수면무호흡증의 중증 여부를 대략적으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면무호흡증.

말 그대로 자는 도중 기도가 좁아져 환자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질병이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비약적으로 높아지는 21세기부터.

수면무호흡증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만, 이 시절에는 수면무호흡증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너 자도 자도 피곤하지 않아? 푹 잔 것 같은데도 몸이 찌뿌드드하고.”

“무당이네. 그걸 어떻게 알았어?”

“일단 코 고는 소리가 너무 컸어. 그리고 너처럼 얼굴이 작고 턱이 뒤로 들어간 사람은 기도가 좁아져서 잘 때 숨을 잘 못 쉬는 경우가 많아.”

“역시 내 남자야, 똑똑하네.”

“믿음이는 준비된 의사라니까.”

내 말에 김지원과 김요한이 자랑스럽다는 듯 한마디 씩 덧붙였다.

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계속했다.

코골이를 너무 가볍게만 보지 말고 병원에서 정확한 진단을 받는 게 좋다는 이야기였다.

수면무호흡증은 삶의 질을 떨어트릴뿐더러.

부정맥이나 고혈압 등 심장 관련 질병을 일으킬 수도 있다.

세상에는 인간을 단번에 무너트리는 질병도 있지만, 서서히 좀먹는 질병도 있는데.

수면무호흡증은 후자 쪽이었다.

“뭐, 예비 의사 선생님이 가라면 가야겠지. 알았어. 이번 주에 시간 내서 가 볼게.”

“그래. 다 너를 위해서 하는 소리다.”

점심 식사를 마친 우리는 여의도 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산책을 하고 자전거도 타고 간식도 사 먹었다.

지극히 일상적인 행동이었지만, 나는 이런 일상적인 것들이 특별하게만 느껴졌다.

전생에서도 그렇고, 회귀한 후에도 그렇고.

내 삶은 미래를 위해 달리는 삶이었지 현재에 멈춰 서서 즐기는 삶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지금 실컷 즐겨 둬야 하는 건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흔히 말하는 좋은 시절은 이 시기가 마지막일 것이다.

의대에 입학하고 인턴과 레지던트를 거쳐 전공의를 마치고 펠로우 수련을 하고…….

머지않아 나의 일상은 병원에서 시작해서 병원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벚꽃 구경을 한다거나.

2박 3일 여행을 한다거나 하는 일탈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믿음, 정말 흉부외과 의사를 다시 할 생각이니?

하루 종일 숨넘어가는 환자만 보고 24시간 응급 대기하는 빡빡한 삶이 다시 살고 싶어?

의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겠는데, 그러면 최소한 과목 정도는 바꾸는 게 어때? 너도 이젠 인간답게 살아 봐야지.」

내면의 또 다른 내가 나를 유혹했다.

전생에 고생했으니 이번 생에는 좀 더 편한 길을 택해 보라고.

실로 달콤하고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으나.

나는 그 유혹을 과감하게 떨쳐 버렸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내 손에서 떠나간 환자, 내가 붙잡지 못한 동료, 열악하고 부조리한 의료 환경이 나를 괴롭혔다.

과거의 과오를 바로잡아야 현재를 살아갈 수 있고, 현재에 충실해야 미래로 나아갈 수 있었다.

도가 됐든 모가 됐든 나는 흉부외과를 다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 * *

“오늘 진짜 재미있었다. 그렇지?”

“그러게. 나도 모처럼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놀았네.”

나는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중년의 흉부외과의라고 해서 십 대 또래와 어울리는 것이 꼭 유치한 것만은 아니었다.

영화를 보고 잡담을 나누는 동안, 골치 아팠던 문제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에너지가 충전된 기분이랄까.

“사람은 원래 적당히 바깥바람도 쐬고 그래야 돼. 기분 전환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란 말이지. 특히 믿음이 너 같은 경우는.”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럴지도 모르겠는 게 아니라 원래 그래야 하는 법이라고.”

“뭐야? 학교 말고 옆에도 선생님이 있었네?”

“어쭈, 비꼴래?”

나는 김지원과 티격태격하며 동네를 거닐었다.

해가 떨어졌음에도 더위는 쉬이 물러가지 않았다. 공기는 끈적거렸고, 바람은 후덥지근했다.

그래도 나는 겨울보다는 여름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겨울에는 추위로 혈관이 좁아져 급하게 응급실을 찾는 노령층 환자가 많아서였다.

계절을 대하는 태도마저 지극히 흉부외과 의사다운 나였다.

“믿음이, 너 불교 신자였어?”

김지원의 시선이 내 손목에 머물렀다. 얼마 전 곽도안에게 받은 염주 팔찌를 이제야 발견한 것이다.

“아니. 친구한테 선물로 받은 건데?”

“혹시 여자 친구?”

“남고에 여자 친구가 어디 있어. 적당히 해. 김지원.”

내 지적이 민망했는지 김지원이 검지로 볼을 긁적거렸다.

여자 이야기만 나오면 돌변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그나저나 우리 다 같이 재미있게 놀 수 있는 날도 얼마 안 남았네. 두 달 있으면 수능이고, 넌 의대에 들어갈 거잖아. 의대 들어가면 하루 종일 공부만 한다던데.”

“확실히 지금처럼 만나기는 힘들겠지. 그래도 시간을 못 낼 건 없어.”

이미 흉부외과 교수를 했던 나라서 의대 공부에 몸을 갈아 넣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새로운 공부를 시작할 계획이었다.

훌륭한 흉부외과의가 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공부 말이다.

“그럼 다행이고. 우리 앞으로 아무리 바쁘더라도 한 달에 한 번은 만났으면 좋겠어.”

“웬일이야? 김 여사가 그 정도로 만족한다고?”

김지원의 제안이 의외라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지원과 나는 오래전부터 꽤 자주 만나고 꽤 자주 연락을 하는 사이였으니까.

“네가 바쁜데 억지로 내 감정만 생각해서 만나고 싶지는 않아. 나도 그 정도로 이해심은 있어.”

“…….”

“게다가 넌 평범하지도 않잖아? 아마 대학 가면 더 바빠지겠지.”

김지원은 곧 멀어질 우리 사이가 아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 처량한 모습이 비수가 되어 내 마음을 찔러 왔다.

“고맙다. 이해해 줘서.”

“고마울 것까지야. 널 지켜보면서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각오는 하고 있었으니까.”

“…….”

“네가 언젠가 너무 힘들어서 못 견딜 때는 나한테 기대. 너 하나쯤은 충분히 먹여 살릴 자신이 있으니까.”

“…….”

“에이, 오늘은 쓸데없는 소리가 많았네. 나 그만 가 볼게. 내일 봐.”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김지원의 뒷모습을 나는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나를 생각해 주는 김지원의 고운 마음씨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번 생에는 가족 말고도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생겼구나.

내가 1살부터 걸어온 궤적이 결코 그른 것이 아니었구나.

그렇게 훈훈한 마음으로 돌아온 집.

“다녀왔습니다.”

“잘 놀다 왔니?”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늦었구나.”

“형아, 왔어?”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데, 사랑하는 부모님과 동생이 나를 반겨 주었다.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귀가를 했기에 끼니를 따로 챙겨 먹지는 않았다.

대신 어머니가 깎아 준 과일을 먹으며 TV를 시청했다.

TV를 시청하면서 오늘 친구들과 놀았던 일을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사랑아, 형아가 그렇게 좋아? 벌써부터 형아 껌딱지네?”

“응. 나 형아 좋아.”

아버지의 질문에 내 다리 사이에 앉아 내 몸에 등을 기대고 있던 사랑이가 활기차게 대답했다.

“형아도 사랑이 좋아하는데.”

“헤헤, 진짜?”

나를 올려다보는 사랑이를 내려다보며 나는 행복한 불안감을 느꼈다.

사랑이가 부디 앞으로도 아프지 말고 상처도 받지 말고 올곧게 자라날 수 있기를 바라며.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때 옆자리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이 불청객처럼 떨려 왔다.

번호를 확인하니 곽도안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나는 방으로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과연 곽도안 할머님이 억울하게 돌아가신 사건은 어디까지 진행됐을까.

그 진척도가 나는 몹시 궁금했다.

“어, 도안아. 어떻게 됐어?”

-통화 연결하자마자 그 일부터 묻기냐? 이믿음, 너무 야박한데?

“아, 미안.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네 생각에는 어떻게 됐을 것 같은데?

“목소리가 밝은 거 보니까 일이 잘 풀린 것 같다?”

-빙고! 우리 할머니 수술한 교수, 좆되기 일보 직전이다.

곽도안은 들뜬 목소리로 근황을 전하기 시작했다.

곽도안의 아버지가 며칠 전 할머니의 차트를 다시 떼어 봤는데, 차트가 조작되어 있었다는 소식이었다.

다행히도 명태랑 교수가 내 계획대로 움직여 준 것이다.

스스로 제 무덤을 판 그에게 나는 감사함과 통쾌함을 동시에 느꼈다.

진료 및 설명의 의무 위반.

거기에 차트 조작까지 더해진다면 명태랑 교수가 제아무리 미꾸라지라도 법망을 피해 갈 수는 없으리라.

이로써 곽도안 할머니의 억울한 죽음이 진실로 드러날 것이고.

먼 훗날 명태랑 교수의 손에 목숨을 잃는 환자들.

그리고 명태랑에게 혹사당할 제자들까지 재앙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 말로는 차트를 조작할 것 같으니까 그걸 역 이용하자고 한 게 너였다며? 미쳤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이 분야에서 아주 대단한 분을 알고 있거든. 그분의 도움을 받았지.”

나는 말을 하면서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번 작전은 내 머리에서 나왔지만, 사실 내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기도 했다.

나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린 원수 강태섭.

역설적으로 나는 강태섭에게 빙의하여 이번 작전을 짰다.

강태섭은 사람의 어두운 심리를 기가 막히게 읽어 내는 눈과.

그 심리를 이용해 사람을 밑바닥까지 떨어트리는 데 도가 튼 인간이었다.

그래서 강태섭이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고 상상해 봤다.

그리고 탄생한 것이 바로 이번 차트 조작 유도 계획이었다.

이런 게 말로만 듣던 전화위복일까.

나는 앞으로도 강태섭에 빙의해서 의료계의 적폐들과 싸우게 될 것 같다는 확신 아닌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날카로운 무기는 전쟁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무서운 도구지만.

수술실에서는 메스가 되어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결국 나는 강태섭에게 전생에 진 빚을 전부 받아 내게 되겠지.

-어쨌거나 우리 아빠가 너한테 고맙다는 말을 전해 달래. 조만간 밥도 같이 먹자고 하더라. 주말에 시간 되지?

“그거야 시간이 없어도 내야지.”

-오케이. 너무 고맙고, 그럼 내일 학교에서 보자.

통화를 끊은 나는 후련한 기분으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수능 전까지 해결해야 할 숙제는 이제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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