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34화 (34/257)
  • 34화 제2장 기호지세 (4)

    오후 진료가 끝났음에도 명태랑은 진료실에 남아 있었다.

    그는 지난 6개월 동안 직접 실시한 약물 방출형 관상동맥 스텐트 시술에 대한 데이터를 살피는 중이었다.

    드르륵. 드르륵.

    마우스 휠이 시원시원하게 내려갈 때마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짙어졌다.

    다른 심장내과의들은 40건을 할까 말까 한 시술을 그는 벌써 120여 건 가까이 해치웠다.

    비록 시술 성공률은 60퍼센트 정도에 그쳤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성공률이 아니라 시술 건수였으니까.

    시술을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환자들은 그를 더욱더 신뢰하게 될 것이다.

    맛집이 맛집인 이유는 음식이 맛있어서가 아니라 손님이 많기 때문이라고 명태랑은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입지를 넓히다 보면 방송계에서도 연락이 올 테고.

    병원 내 그의 입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것이다.

    내년 공석이 되는 심장내과 과장 자리도 그의 차지가 될 게 분명했다.

    명태랑은 앞으로 자신에게 펼쳐질 길이 오로지 꽃길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벽시계를 확인한 그는 의사 가운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느긋한 걸음으로 병원 회식 자리로 자주 사용되는 한식당으로 이동했다.

    “뭐야. 벌써 도착했다고?”

    -…….

    “그래. 최대한 빨리 갈게.”

    통화를 끊은 그의 발걸음이 분주해졌다.

    한식당이 가까워질수록 명태랑은 사소했던 걱정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느꼈다.

    오늘 저녁 약속이 잡힌 녀석은 대학교 후배였다.

    동아리 활동으로 얼굴과 이름을 적당히 알고 있는 녀석인데.

    명태랑은 최근 녀석의 어머니에게 약물 방출형 스텐트 수술을 했다.

    그런데 급성 심장마비와 혈전증으로 녀석의 어머니는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땐 욕심이 지나치긴 했다.

    흉부외과로 전과시켜야 할 환자를 본인 손으로 처치했으니까.

    선배로서 잘난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는 영웅 심리.

    환자의 상태 정도면 그래도 약물 방출형 스텐트 시술로 어떻게든 치료할 수 있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

    그 두 가지가 명태랑의 가장 큰 패착이었다.

    ‘그래도 설마 제까짓 게 나를 의심하겠어?’

    곽준호가 갑자기 보자고 하는 게 꺼림칙했지만.

    까놓고 보면 별거 아닐 거라고 명태랑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곽준호가 제아무리 잘난 변호사라고 한들 어쩌겠는가.

    정작 의료 쪽은 그의 손바닥 위에 있고, 곽준호는 의학 쪽으로는 거의 백치나 다름없는 것을.

    “쓰읍, 후우우.”

    식당 근처 골목에서 명태랑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니코틴이 뇌로 전달되자, 몸의 긴장이 풀어지면서 걱정이 저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결국 물 흐르듯이 술술 흘러갈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고, 앞으로도 쭈욱.

    “선배, 오셨어요?”

    미리 잡아 둔 룸으로 들어가자, 곽준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는 척을 했다.

    “그래, 오랜만이지?”

    “거의 한 달 만이네요. 근데 의사가 무슨 담배입니까? 환자들한테는 맨날 담배 끊으라고 하면서 본인이 담배를 피우면 어떻게 합니까?”

    “너도 하루 종일 병원 생활에 찌들어 봐. 담배 생각이 나나, 안 나나.”

    “이게 다 선배를 생각해서 하는 소리입니다.”

    명태랑은 자리에 앉은 후 곽준호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음식이 차려지고 술잔이 오가면서 이야기도 함께 무르익어 갔다. 명태랑은 적당히 취했을 때 악어의 눈물을 흘렸다.

    나 때문에 너희 어머니가 허망하게 돌아가셨다.

    두 손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빌어도 용서를 받을 수 없을 만큼 미안하다 등등.

    실제로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몇 배나 부풀려서 전달했다.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일은 명태랑이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근데 선배, 저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뭔데?”

    “제가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인데요. 관상동맥 질환은 스텐트 시술 말고 수술을 하는 경우도 의외로 많다면서요?”

    질문을 던지는 곽준호의 표정이 순간 싸늘해졌다.

    명태랑은 곽준호와 재회를 한 후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곽준호의 표정도, 말투도, 질문의 내용도 무언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설마 이 녀석, 나를 의심하고 있는 건가?

    알딸딸했던 정신이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듯 확 깨어났다.

    “물론이지. 하지만 너희 어머님은 고령이셨어. 수술보다는 시술이 훨씬 안전했단 말이지. 안 그랬으면 내가 직접 스텐트 시술을 하지도 않았을 거야.”

    “그래요? 관상동맥우회술이라는 거 고령인 환자가 받아도 상관없다고 하던데요?”

    곽준호는 일반인이 알기 힘든 의료 정보로 명태랑을 공격해 왔다.

    이쯤 되면 자신을 추궁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만들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자식, 어느 정도 감은 잡은 것 같다만 너 따위가 감히 나를 몰아붙일 수 있을 것 같아.

    명태랑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준호야.”

    “네, 선배.”

    “나 양산 병원 심장내과 조교수다. 그동안 전공의 마치고 진료한 환자들이 대체 몇 명인 줄 알아?”

    “…….”

    “급도 안 되는 의사들이 지껄이는 소리를 믿지 말고 나를 믿어.”

    명태랑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4대 우상 중 극장의 우상을 사용했다.

    쉬운 말로 하면, 권위에 호소한 것이다.

    대한민국만큼 권위가 강력하고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나라가 또 어디 있을까.

    “저도 다 알고, 선배를 믿는데요. 주변에서 저를 자꾸 부추기는 사람이 있지 뭡니까.”

    “어떤 새끼가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하는데?”

    “지금 말씀드리긴 뭐하고,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곽준호는 인상을 확 찌푸리곤 소주잔을 단번에 비웠다.

    “근데 선배, 내일 병원 가면 차트 받을 수 있어요?”

    “차… 차트?”

    “네, 형님과 저 사이를 이간질한 그 몹쓸 놈한테 차트를 보여 주고 싶어서요. 차트를 보여 주면 형님이 옳았다는 사실을 그 자식도 알 거 아닙니까.”

    곽준호의 돌발 발언에 명태랑은 적잖이 당황했다.

    설마 곽준호가 이렇게까지 공격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왜요? 갑자기 표정이 불편해 보이시는데… 제가 차트를 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요?”

    “바보 같은 소리. 제발 차트 좀 떼서 그 망할 놈한테 보여 줘라.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는지 시시비비를 따져 보자고 말이다.”

    “그럼 내일 반차 내고 오후에 차트 떼러 가겠습니다.”

    “암, 당연히 그래야지.”

    명태랑은 자정이 될 때까지 곽준호와 술을 마셨다.

    그리고 취해서 진탕이 된 곽준호와 헤어진 뒤 레지던트 4년 차 치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교수님,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연락을…….

    “너, 지금 기숙사에 있지?”

    -네.

    “이순자라고 이번 달에 약물 방출형 스텐트 시술을 받은 환자가 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그대로 적어서 차트 고쳐 놔.”

    -…….

    “진단검사 의학과에 이야기해서 검사 자료까지 싹 다.”

    -아무리 교수님 말씀이라도 그건…….

    “너, 내가 말대답하라고 가르쳤나? 전공의 마치고 쫓겨날래?”

    -아… 아닙니다. 말씀해 주세요. 지금 노트에 적겠습니다.

    명태랑은 스텐트 시술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의 조작을 지시하고 통화를 끊었다.

    차트를 조작한다면, 더 이상 곽준호가 그를 의심할 여지가 없을 테니까.

    물론 이는 명백히 의료법에 저촉되는 행위였지만, 보호자가 차트 조작 사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없었다.

    ‘귀여운 자식, 넌 아직 내 밑이야.’

    명태랑은 후련한 기분으로 택시를 잡아 귀갓길에 올랐다.

    정작 함정에 빠진 건 본인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 * *

    다시 주말 아침이 밝았다.

    나는 느지막하게 기상한 뒤 씻고 아침 식사를 한 후 아파트 단지를 나섰다.

    오늘은 모처럼 김지원과 까불이, 그리고 김요한과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명태랑 교수의 일이 마음에 걸렸지만 내가 걱정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장은 곽도안 아버지의 수완을 믿는 것이 최선이었다.

    ‘작전대로만 되면 크게 한 방 먹일 수 있을 텐데…….’

    나는 며칠 전 곽도안의 아버지와 나눴던 통화를 떠올렸다.

    곽도안 아버지는 타 병원 흉부외과의를 통해 내 말이 옳았다는 것을 검증했다고 한다.

    그리고 명태랑과 본격적으로 싸우겠다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런 그에게 나는 한 가지 발칙한 제안을 했다.

    “술자리를 잡아서 은근히 명 교수를 떠보는 건 어떨까요?”

    -떠본다고?

    “명 교수는 아버님이 보험 때문에 차트를 미리 출력했다는 걸 모르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그러니까 그 점을 이용하는 겁니다. 노파심에 말씀드리면, 명 교수와의 통화는 전부 녹음해 두시고요.”

    내 작전은 이랬다.

    우선 곽도안의 아버지가 명태랑 교수를 만나서 자신이 명태랑 교수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부러 흘린다.

    그러면 제 발이 저린 명태랑 교수가 차트를 조작한다.

    이 시기에는 차트를 조작하는 일이 비교적 쉬운 편이니까 명태랑 교수는 분명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차트를 조작할 것이다.

    -진료기록 원본과 수정본 보관 의무화

    -환자의 요청에 의한 열람 및 복사 의무화

    -전자의무기록의 접속 기록 작성 및 보관 의무화

    위와 같은 의무기록 관련 법안이 통과되는 것은 2010년 중후반은 되어야 한다.

    이런 법안이 없는 1999년인 지금.

    과오를 저지른 의사는 의무기록을 마음껏 주무를 수 있었는데.

    그 점을 역이용하자는 것이었다.

    즉 진료의 의무 및 설명의 의무 위반에 더해서 차트 조작 혐의까지 추가하자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한 최고의 명태랑 퇴치법이었다.

    일이 계획대로 잘 굴러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됐어. 나는 할 만큼 했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전부 내 어깨에 짊어질 필요도 없고.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비우고 충전할 필요도 있는 법이지.

    역으로 걸어가면서 나는 복잡한 생각과 감정들을 잠시 내려놓았다.

    돌이켜 보면, 회귀 후 나의 삶은 아버지의 걱정처럼 빡빡하기 그지없었다.

    전생에서 내가 저질렀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극복하기 위해 발버둥치듯이 살아왔다.

    과거와 미래는 있는데 정작 현재는 없는, 마치 닭 가슴살처럼 팍팍한 삶이었다고 할까.

    그러니 최소한 일주일 중 하루만큼은 모든 것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일상을 보내도 좋으리라.

    “좋은 아침.”

    목동역 1번 출구 앞에 서 있던 김지원이 나를 발견하곤 손을 흔들었다.

    나도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모처럼의 외출이라서 그런지 김지원은 복장에 잔뜩 힘을 준 차림새였다.

    화장을 한 데다 상큼한 느낌의 여름 원피스를 입었다.

    지나가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김지원을 훔쳐보기에 바빴다.

    “오늘 엄청 예쁘네. 교복만큼 사복도 잘 어울린다?”

    “흥, 나도 알아.”

    김지원이 꽃처럼 눈부시게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김지원은 내게 한 걸음 바짝 다가오더니 내 옆구리를 꼬집었다.

    “아야, 아프잖아. 갑자기 왜 그러는데.”

    “모처럼 둘이서 오붓하게 데이트할 생각이었는데, 지호랑 요한이는 왜 끌어들인 거야?”

    김지원은 까불이 지호와 요한이가 동행한다는 사실이 영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오랜만에 다 같이 얼굴 보면 좋잖아? 그리고 나랑 둘이 있다가 열애설 같은 거 나면 너도 곤란할 수 있고.”

    “걱정도 팔자네. 나 아직 열애설 날 만한 배우는 아니거든? 나 알아보는 사람도 거의 없다고 했잖아.”

    “그거야 모를 일이지?”

    “하여간 입으로는 이믿음 못 당하지. 내가 졌다, 졌어.”

    김지원과 티격태격하고 있는데, 까불이와 김요한이 합류했다.

    까불이는 여전히 까불까불했고, 김요한은 예전에 비해 키가 부쩍 컸다.

    나와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

    오랜만에 뭉친 우리 넷은 가까운 극장을 찾았다.

    오늘 볼 영화는 ‘8월의 크리마스’였다.

    소설 원작의 영화로, 보고 나면 눈물이 쏙 빠지는 멜로 영화였다.

    유명한 영화였지만, 전생에 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백지 상태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불치병에 걸린 사진사와 구청 주차 단속 요원의 사랑을 그린 이야기.

    다소 흔하고 판에 박은 전개였지만, 지루하지는 않았다.

    주인공들의 감정선에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었고.

    알면서도 가슴 졸이고 보게 되는 이별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그런 생각도 해 보았다.

    전생에 독거 노총각(?)이었던 내가 이번 생에는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있을지.

    가장 편하게 생각할 수 있는 상대는 옆에 앉은 김지원이었다.

    전생에 김지원과의 인연은 국민학교 때 단 한 번 같은 반이 되는 걸로 끝났지만.

    회귀한 후 김지원은 나와 소꿉친구처럼 쭉 붙어 다니고 있다.

    내게 일편단심 민들레 같은 김지원과 가정을 꾸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 사람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신원대학교 병원 흉부외과 전공 시절 만나게 되는 한 여인이.

    그 사람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진다.

    ‘배부른 고민을 하고 앉아 있네. 이믿음, 너 많이 컸다.’

    나는 스스로를 따끔하게 꼬집고는 다시 영화에 집중했다.

    영화 중간중간에 까불이가 우렁차게 코를 고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영화는 감동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상영관을 나오자마자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김지원이 화장실로 달려갔고.

    나와 까불이, 김요한도 화장실을 찾았다.

    나는 옆 소변기에서 볼일을 보는 까불이에게 한마디 했다.

    “까불아, 너 빨리 병원 가 봐야겠다.”

    “이비듬, 그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멀쩡하고 건강한 이 몸이 왜 병원에 가야 하는데?”

    까불이가 정색하며 되물었지만, 내 표정은 단호하기만 했다.

    “아니야. 너 병원 가야 돼. 진심으로 걱정돼서 하는 소리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