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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33화 (33/257)
  • 33화 제2장 기호지세 (3)

    ‘어쩐지 처음부터 너무 적대적이다 싶긴 했지.’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내 행동이 버릇없고 예의 없어 보일 수 있다는 건 처음부터 알았다.

    제삼자가 가족의 죽음에 의문을 품는다면 그 누가 좋다고 반겨 주겠는가.

    그럼에도 곽도안 아버지의 반응은 유난히 공격적이라고 느꼈다.

    그랬더니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숨어 있었다.

    설마 명태랑 교수가 곽도안 아버지의 대학 동문 선배일 줄이야.

    솔직히 상상도 못 했다.

    거대한 장애물을 만난 나는 초조함을 느꼈다.

    자신의 어머니와 학교 동문 선배를 욕보인 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싸가지 없는 놈.

    곽도안의 아버지는 분명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 설득이 가당키나 할까.

    차라리 오늘은 물러나고 기회를 봐서 다시 찾아오는 게 좋지 않을까.

    ‘안 돼. 기회는 오늘뿐이다!’

    나는 갈대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당장의 불편함을 회피한다면 지금 당장은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같은 자리가 또 만들어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저 후레자식하고는 상종도 하지 마. 다시는 집에 발도 들이게 하지도 말고.

    내가 떠난다면, 곽도안의 부모님은 그렇게 선언하지 않을까.

    그러니 지금 물러선다면 곽도안의 부모님을 설득할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물러설 수 없지.’

    곽도안 할머니의 억울한 죽음도.

    앞으로 명태랑 교수의 손에 목숨을 잃을 수많은 환자들의 원한도 이 자리에서 풀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의사였고, 이렇게 회귀한 것은 과거에 일어났던 비극을 막기 위해서니까.

    어떤 비극이냐고?

    수술 중 아버지를 잃어 상실감에 빠져 살아가는 비극이다.

    비록 지금은 그 비극을 극복했지만.

    나는 이 비극을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겪지 않기를 바란다.

    “기분이 많이 상하셨고, 제가 못돼 처먹은 놈으로 보이실 겁니다. 제가 아버님의 입장이라도 그랬을 겁니다.”

    “모의고사 전국 수석이라고 하더니, 말은 잘하는군.”

    곽도안의 아버지는 콧방귀를 뀌며 어디 더 말해 보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드릴 말씀은 사과밖에 없습니다. 안 그래도 상심이 크실 텐데, 제가 두 분의 상처를 들쑤셔 놓은 것 같아 저도 괴롭습니다.”

    나는 대략 5분에 걸쳐 나를 욕했다.

    왜냐고?

    타인을 설득하고 싶다면 내가 들려주고 싶은 말을 하기 전에 남이 듣고 싶은 말을 해 줘야 한다.

    마음의 빗장을 여는 기술은 내가 인턴 때부터 제일 잘했던 화술 중 하나였다.

    수술 동의서 서명 성공률 100퍼센트.

    심지어 수혈 거부나 수술을 거부한 보호자마저 설득시키는 마성의 혀.

    내 주특기가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흐음… 아주 못돼 먹은 녀석인 줄 알았지만, 최소한 경우는 아는 아이로구나.”

    내가 5분 동안 내 욕만 하자, 곽도안 아버지와 어머니의 표정이 슬며시 풀어졌다.

    본 게임은 지금부터였다.

    “아주 잠깐만 제 이야기를 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외가 쪽에 필립 리라고 미국 대학 병원에서 일하시는 흉부외과 친척분이 계십니다.”

    “…….”

    “우연치 않게 통화를 하던 중 도안이 할머님 이야기가 나왔고, 친척분은 의심 가는 부분이 있다며 혹시 차트를 받아 볼 수 없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래서 염치 불고하고 이런 송구스런 일을 벌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친척분께서는 뭐라고 하셨지?”

    “또 한 번 두 분의 상처를 헤집는 것 같아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친척분께서는 의료사고가 의심된다고 하셨습니다.”

    “뭐라고? 의료사고?”

    곽도안 아버지가 눈을 부릅떴다.

    평온을 되찾았던 안색이 다시 돌덩이처럼 굳어지기 시작했다.

    곽도안의 어머니도 충격을 받은 듯 입이 딱 벌어졌다.

    “검사 서류 복사본을 건네드리겠습니다. 일단 보시면서 제 이야기를 들으시면 이해가 빠르실 겁니다.”

    나는 곽도안 부모님에게 검사 서류 복사본을 건넨 뒤 차근차근 설명에 나섰다.

    약물 방출형 스텐트 시술의 정의와 방법.

    약물 방출형 스텐트 시술을 해야 하는 경우와 피해야 하는 경우.

    -Left Anterior Descending artery(LAD, 좌전하행동맥), Stenosis 72%

    -Right posterolateral Branch(RPB, 우측 후측방 분지), Stenosis 40%

    또한 차트에 형광색으로 칠한 부분을 가리키며.

    곽도안 할머니는 스텐트 시술이 아닌 관상동맥우회술 수술을 받으셨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럴 리가… 선배가 우리 어머니께 그런 실수를 저질렀을 리 없어.”

    곽도안의 아버지는 현실을 부정했다.

    명태랑 교수의 가면 뒤의 모습을 모르는 그였다.

    내 말을 순순히 인정하긴 힘들 것이다.

    “믿음아, 나이 많은 할머니가 심장 수술을 받는 건 무리 아니겠니?”

    잠자코 있던 곽도안 어머니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흔히들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고령의 환자분이 다른 수술도 아니고 심장 수술을 받는다면 당연히 위험할 거라고 생각하시죠. 하지만 사실은 다릅니다.”

    나는 국립중앙도서관까지 발품을 팔아서 얻은 논문을 곽도안 부모님에게 전달했다.

    [고령 환자에게 실시한 관상 동맥 우회술의 장단기 성적]

    이 논문에 따르면, 60세부터 70세까지의 고령 환자에게 실시한 관상동맥우회술의 생존율은 그보다 어린 환자, 즉 대조군과 큰 차이가 없었다.

    5년 생존율은 무려 88퍼센트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보이고 있었고.

    그러니까 고령이라는 이유로 관상동맥우회술을 받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아마 명태랑은 이런 보통 사람들의 상식을 이용했으리라.

    수술이라는 단어로 보호자에게 공포심을 자아낸 뒤 자기의 실적을 채우기 위해 스텐트 시술을 했으리라.

    “…….”

    “…….”

    설득이 막바지에 이르자, 곽도안의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손을 올렸다.

    아마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내 설명은 초등학생이 들어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쉬웠고.

    자료 중 중요한 부분에는 모두 형광펜으로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의료 지식을 숟가락을 떠서 먹여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도안이 할머님을 시술한 의사는 명백하게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수술이 필요했음에도 시술을 했고, 흉부외과에 협진 한 번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

    “이런 말씀을 드리는 제 마음도 편치 않지만… 저희 친척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안이 할머님이 돌아가신 것은 사고가 아니라 인재라고.”

    나는 쐐기를 박듯이 모든 것을 정리했다.

    길었지만 동시에 논리적인 설득의 결과물은 과연 어떻게 나올까.

    이제 칼자루는 곽도안의 부모님에게로 넘어갔다.

    “허허, 너도 참 대단하구나. 아직 의대에 들어간 것도 아닌데 어려운 의료 지식을 이렇게 쉽게 설명하다니…….”

    “그야 제가 의사… 선생님께 들은 내용이니까요.”

    나는 가까스로 실수를 모면했다.

    모처럼 의료 지식의 보따리를 풀어놓다 보니 살짝 흥분했던 모양이다.

    중요한 건 처음과 달리 대화의 주도권이 완벽하게 내 쪽으로 넘어왔다는 사실이었다.

    곽도안의 부모님은 더 이상 나를 철천지원수로 여기지 않았다.

    내 말을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어쨌거나 결론은 우리 선배가 흉부외과 수술을 받아야 할 어머니께 시술을 펼쳤다는 뜻이지?”

    “네.”

    “하… 너무 충격적이라 선뜻 믿기 힘들구나. 내가 후배니까 무리를 해서라도 본인이 직접 해결하고 싶었던 건가?”

    곽도안의 아버지가 잘나가다가 옆길로 샜다.

    진실로 인한 충격으로 심리적인 방어기제인 부정이 작용하는 모양이었다.

    “아버님을 위해서였다면 더더욱 본인이 시술하면 안 됐던 거 아닐까요? 친척분은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정상적인 내과의라면 그 상황에서 결코 스텐트 시술을 하지 않을 거라고 말입니다.”

    “…….”

    “말씀하신 대로 아직 많이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우실 걸로 압니다. 제 말이 완전히 믿기지도 않으시겠죠.”

    “…….”

    “천천히 고민하시고 교차 검증도 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차트를 가지고 다른 대학 병원의 흉부외과 선생님께 자문을 구해 보세요. 그분도 아마 저희 친척분과 비슷한 결론을 내리겠지만 말입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명태랑 교수와 곽도안 아버지가 동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많이 당황했지만 나름 슬기롭게 문제를 해결하는 중이다.

    이제 곽도안 부모님은 내 설득에 어느 정도 수긍한 눈치였으니까.

    “오자마자 폭언을 퍼부은 건 사과하마. 그땐 네게 선입견이 있었고, 화도 잔뜩 난 상태였단다.”

    “아니에요. 제가 아버님이라도 그랬을 겁니다.”

    “지금부터 이 일은 내가 알아서 진행하마. 특이 사항이 있으면 도안이를 통해 네게 전달해 줄 거다. 너도 여기까지 발을 담갔으면 결말을 지켜볼 자격이 있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그래. 조만간 다시 보자꾸나. 분명 그렇게 될 것 같구나.”

    곽도안 부모님의 작별 인사를 받으며, 나는 곽도안과 집을 나왔다.

    “야, 너 말발 뭐야? 진짜 의사 선생님인 줄 알았잖아.”

    곽도안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역시 전국모의고사 수석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 어쨌든 고맙다. 네 덕분에 나도 마음속 앙금이 풀릴 것 같아.”

    “…….”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신 게 계속 신경 쓰였거든.”

    “다 네가 솔직하게 말해 준 덕분이지.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 필립 리, 친척 어르신이 다한 거지.”

    “어쨌거나 발단은 너였잖아. 이거 받아.”

    곽도안이 뜬금없이 호주머니에서 염주 팔찌를 내밀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친한 친구 생기면 주라고 하셨어. 액운을 막아 줄 거야.”

    “고마워.”

    나는 곽도안이 보는 앞에서 염주 팔찌를 착용하고 곽도안과 헤어졌다.

    걸을 때마다 왼쪽 손목에 착용한 염주 팔찌가 출렁거렸다.

    과거 내가 집도를 했던 환자 중 불교 신자가 있었다.

    그 역시도 염주 팔찌를 차고 수술실에 들어왔다.

    본래는 수술실 반입이 불가한 물건이었지만.

    환자의 간절한 요청 때문에 소독을 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짓고 수술실에 들여보낸 기억이 있었다.

    -마음이 불안하거나 초조할 때 염주 알을 하나하나 헤아리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고요해지더라고요.

    나는 그의 말을 기억하고 손목에 찼던 염주 팔찌를 손에 쥐고.

    염주 알을 하나하나 굴리기 시작했다.

    염주 알 하나에 가족들.

    염주 알 하나에 곽도안의 할머니.

    염주 알 하나에 명태랑에게 고통 받을지도 모르는 환자들.

    번뇌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다.

    * * *

    모처럼 휴가를 낸 곽준호는 변호사 사무실이 아닌 신원대학교 병원 흉부외과 진료실을 찾았다.

    며칠 전, 아들의 친구 녀석에게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가 수술로 인한 후유증이 아닌 의료 사고로 사망했다는 이야기였다.

    아직도 그 순간을 떠올릴 때면 소름이 돋고 머리카락이 바짝 곤두섰다.

    다른 누구도 아닌 명태랑 선배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그런 몹쓸 짓을 했다니…….

    하지만 시간이 지난 뒤 곽준호는 이믿음의 지적에 조금씩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차트를 보고 또 보아도.

    명태랑 선배가 아닌 이믿음을 의심해 보아도.

    오히려 명태랑 선배에게 혐의가 갔다.

    아마 오늘 진료를 보고 나면 길고 길었던 번민의 마침표가 찍힐 것이다.

    “곽준호 환자분 들어오세요.”

    “네.”

    차례가 되자 곽준호는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제가 아파서 온 건 아니고요. 의료적인 자문이 필요해서요.”

    곽준호는 간단하게 용건을 설명하고 진료의에게 어머니의 차트를 내밀었다.

    진료의는 한참 동안 차트를 훑다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흉부외과에서 봐야 할 환자를 왜 심장내과에서 봤죠?”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 환자분은 스텐트 시술을 받으면 안 되는 환자예요. 흉부외과 의사라면 백이면 백 그렇게 말할 겁니다. 명태랑 교수님이면 꽤 이름 있는 교수인데,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진료의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료의의 확신에 찬 말투와 당황한 모습에 곽준호는 확신했다.

    결국 이믿음의 말과 필립 리의 말이 옳았다고.

    어머니는 후유증이 아닌 의료사고로 돌아가신 것이라고.

    명태랑 선배를 향한 믿음과 존경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그 자리에 용암처럼 뜨거운 분노가 솟구쳤다.

    주체할 수 없는 열기에 곽준호는 양복 외투를 벗었다.

    “선생님, 혹시 스텐트 시술이 의료 상식에 벗어난다는 소견서를 써 주실 수 있습니까?”

    “그게… 소견서를 쓰면 싸우자는 이야기밖에 안 되는데…….”

    “저희 어머니가 억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제발 선생님이 힘을 보태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 아닙니까? 그리고 소견서라는 거 엄밀히 말해서 보험회사에서도 많이 떼어 가는 거 아닙니까?”

    곽준호가 저돌적인 화술을 구사하자, 진료의가 알았다고 대답했다.

    몇 분 뒤 곽준호는 신원대학교 흉부외과의 소견서를 받은 뒤 병원 로비로 나왔다.

    선배,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사람 잘못 건드렸어.

    병원 로비를 벗어난 곽준호는 이믿음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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