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32화 (32/257)

32화 제2장 기호지세 (2)

“자, 여기.”

야자에 빠진 곽도안이 아파트 단지 입구에 서 있었다.

곽도안은 손을 흔들며 내게 인사한 뒤 서류 봉투를 건넸다.

녀석이 아무렇지도 않게 건넨 서류 봉투가 나는 국정원의 기밀 서류처럼 묵직하게 느껴졌다.

“땡큐. 고생 많았다.”

서류 봉투가 손에 들어온 순간, 의사로서의 책임감이 느껴졌다.

이 차트에는 곽도안 할머니의 억울할지도 모르는 죽음.

나아가서는 앞으로 명태랑 교수에게 희생당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한 글자, 한 글자 허투루 볼 수 없었다.

“이거 스캔해서 미국에 있는 친척분께 보낼게. 시간은 조금 걸릴지도 몰라.”

“네가 어련히 잘하겠지. 내 대신 고생해 줘서 고맙다. 일 끝나면 맛있는 거 사 줄게.”

곽도안과 헤어진 즉시, 나는 가까운 문방구를 찾아서 차트를 복사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복사본을 만든 것이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네.’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마저 너무 길게 느껴져서 서류 봉투에서 차트를 꺼냈다.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기록지는 당연히 진단서였다.

-진단명: Coronary Stenosis(관상동맥 협착증).

-심근 경색을 유발하지 않는 관상동맥 혈전증 I24.0

-상기 환자는 7일 전 흉통 및 호흡곤란으로 응급실을 내원하여 관상동맥 조영술을 받은 결과, 관상동맥 협착증이 확인되어 입원함.

-…….

진단서에는 곽도안 할머니에 대한 굵직굵직한 의료 정보가 담겨 있었다.

진단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말하면 입이 아픈 진단명이고, 그다음은 간략한 치료 개요였다.

매의 눈으로 살폈으나, 현재까지 의심 가는 부분은 없었다.

다음 차례는 간호 기록지였다.

간호 기록지는 환자가 병실에서 생활한 패턴이나 의사의 일상적인 처방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였다.

곽도안의 말대로 할머니는 수술 전후로 꽤 건강한 편이었다.

응급 콜은커녕 흉통이나 호흡곤란을 호소한 적도 없었다.

다만 퇴원이 예정된 날, 그러니까 수술 후 이틀 뒤 갑작스런 발작과 청색증(산소 공급이 부족해 신체가 파랗게 변하는 증상), 심정지가 찾아왔다.

급하게 CPR를 실시했으나, 할머니는 결국 심정지로 명을 달리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으로 차트를 툭툭 건드렸다.

관상동맥 스텐트 삽입 시술은 비교적 안전한 시술이었다.

전신 마취도 하지 않고 몸에 메스를 대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도 시술 후 환자가 죽었다는 건 도관으로 관상동맥을 건드렸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실력 부족.

명태랑 교수가 명예욕의 화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시대에 유행하는 시술을 급하게 좇아 하려다가 사고를 낸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해 보였다.

다음으로 나는 수술 기록지를 살폈다.

그런데 꼼꼼하게 내용을 훑던 중 그만 헛웃음이 터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시술이 A부터 Z까지 완벽했다.

적어도 수술 기록지로는 명태랑 교수의 책임을 물을 길이 없었다.

뭐, 수술실에서 있었던 일은 수술을 진행했던 의료진밖에 모르는 내용이니까.

환자가 의사와의 의료 분쟁에서 이길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고.

또한 교수가 시술을 진행한다고 해서 의무 기록까지 교수가 작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의무 기록 작성은 어디까지나 레지던트의 몫이었다.

레지던트가 감히 명태랑 교수의 실수를 수술 기록지에 적었을까.

나는 감히 그런 간 큰 레지던트는 없었을 거라고 자신했다.

‘하… 이건 악재인데…….’

나는 불현듯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수술이 완벽했다면 적어도 기록지상으로는 소송을 걸더라도 환자 보호자 측이 이길 확률은 무척 적었다.

혹시나 하는 바람으로 진료비 상세 내역서까지 샅샅이 뒤졌다.

만약 시술과 시술 재료에 오차가 있다면 그 점을 공략할 작정이었다.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는 일은 안타깝게도 없었다.

상세 내역서에 적힌 재료는 한정되어 있었고, 눈이 번쩍 뜨일 만한 것도 없었다.

이제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자료는 관상동맥 조영술 검사지였다.

그래, 수술 기록지까지는 조작할 수도 있다고 치자.

하지만 과연 조영술 검사지까지 조작할 수 있을까.

조영술을 펼치는 것은 심장내과의 일이지만 최종 판독과 검사 결과 기록은 영상진단의학과의 몫이다.

나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검사지를 살폈다.

-Left Anterior Descending artery(LAD, 좌전하행동맥), Stenosis 72%

-Right posterolateral Branch(RPB, 우측 후측방 분지), Stenosis 40%

‘역시!’

흥분한 나는 나도 모르게 오른손을 번쩍 하늘로 치켜들었다.

주변 행인들의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조영술 결과지에서 명태랑 교수를 박살 낼 근거를 드디어 찾아냈으니까 말이다.

-관상동맥의 분지 중 하나라도 70퍼센트 이상의 협착(좁아짐)이 있을 때.

-또는 하나 이상의 혈관에 복합적인 협착이 있을 때.

이 두 가지의 조건이 충족된다면, 환자는 CABG, 그러니까 관상동맥우회술을 받아야 한다.

재협착의 가능성이 높으니까.

약물 방출형 스텐트 시술로는 근본적인 치료가 되지 않으니까.

그런데 명태랑 교수는 수술을 받아야 하는 환자에게 시술을 행했다.

왜냐고?

이유는 아마 최근 유행하고 있는 약물 방출형 스텐트 수술 분야에서 업적을 달성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이를테면 ‘약물 방출형 스텐스 시술 건수 500회 달성!’ 같은 홍보성 문구 때문에 말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협진 기록지가 있는지 확인해 봤지만, 있을 리 없었다.

흉부외과에 협진을 요청했다면 곽도안의 할머니는 시술이 아니라 수술을 받았을 테니까.

명태랑 교수는 애써 얻은 환자를 흉부외과에 뺏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짜릿한 기분에 휩싸였던 나는 심호흡을 하며 침착성을 되찾았다.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순간일수록 냉정해질 필요가 있었다.

검사 기록지로 명태랑 교수에게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명태랑 교수는 검사 결과지에 따라 치료를 하지 않았으며.

최소한 흉부외과에 협진을 넣는 성의도 보이지 않았다.

진료 및 처치 의무의 소홀.

그리고 환자가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질병에 대한 치료 방법 등을 충분히 설명해야 하는 의무 또한 명태랑 교수는 명백하게 위반했다.

곽도안의 가족에게 스텐트 시술과 관상동맥우회술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당연히 관상동맥우회술을 선택했을 테니까.

하지만 말이다.

법정 공방과 해석 싸움으로 갔을 때, 명태랑 교수에게 얼마만큼의 불이익이 돌아갈까.

나는 그것이 심히 걱정되었다.

명태랑 교수가 고작 몇천만 원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다시 의사 생활을 하게 된다면?

시간이 지나 명태랑 교수의 악명은 금세 잊힐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양지로 기어 나와 의사 생활을 시작할 것이다.

범법 행위 및 비리를 저지른 수많은 의사들이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나는 차마 그 꼴은 볼 수 없었다.

명태랑 교수를 더 완벽하고 치명적인 파멸로 몰고 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새로운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 * *

곽도안 할머니의 차트를 받은 지 나흘이 지났다.

이번에 찾아온 주말은 그동안 보내 왔던 그 어떤 주말보다 스펙터클할 것이다.

바로 곽도안의 부모님을 만나 명태랑 교수의 의료 과실을 설명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믿음,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수화기 너머로 김지원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조아리며 김지원에게 변명했다.

“진짜, 미안. 갑자기 너무 중요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나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 이거지? 나랑 먼저 약속했잖아. 이번 주말에 영화 보러 가기로 했잖아.”

“친한 친구의 집안에 문제가 생겼어. 내가 반장이니까 모른 척할 수가 없더라.”

나는 곽도안에 대한 이야기를 대충 요약해서 들려주었다.

내가 없는 핑계를 둘러 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김지원은 실망한 목소리로 “그럼 어쩔 수 없지.”라고 대답했다.

“그럼 다음 주에는 꼭 영화 보러 가는 거다? 이번에도 약속 어기면 진짜 가만 안 둬.”

“알았어.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할게.”

“칫, 넌 꼭 이럴 때만 이름을 팔더라. 알았어. 일 잘 처리하고 나중에 또 연락해.”

“고마워, 지원아.”

“몰라!”

김지원을 달랜 나는 서류 봉투를 챙겨 집을 나섰다.

곽도안의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이제 곽도안의 부모님을 설득해서 명태랑 교수를 고소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지만, 문득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내 입가엔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곽도안 할머니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 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곽도안의 할머니를 살리지는 못했다.

곽도안의 할머니가 설마 명태랑 교수에게 시술을 받았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회귀를 했다고 해도 나는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었다.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회귀에도 한계는 명확했다.

‘그래도 최소한 명태랑 교수에게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다른 환자들은 구할 수 있겠지.’

나는 힘겹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모자란 능력을 하나하나 메워 나가면서 동시에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평생 나아가야 할 길일 것이다.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 단지에 진입한 나는 곽도안의 아파트 호실 앞에서 벨을 눌렀다.

“야, 잘 왔다.”

곽도안이 현관에서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부모님은 계시지?”

“응. 이야기는 대충 해 놨어. 이제 네가 말만 잘하면 돼.”

“그건 걱정 마. 난 주둥이 빼면 시체니까.”

집 안으로 들어가자,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곽도안의 부모님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나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곽도안의 부모님은 건조한 목소리로 잘 왔다고 말했다.

“…….”

“…….”

곽도안의 세 가족과 나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살얼음을 딛는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우리 사이에서 흐르고 있었다.

“이름이 믿음이라고 했지? 도안이에게 대략 이야기는 들었다.”

현직 변호사인 곽도안의 아버지가 안경을 들썩거리며 말을 이었다.

“네가 우리 도안이에게 아주 발칙한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구나. 할머니가 자연스럽게 돌아가신 게 아니라 의료 사고를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면서?”

나를 바라보는 곽도안 아버지의 눈빛이 차가웠다.

마치 나를 바퀴벌레나 모기쯤으로 여기는 눈빛이었는데.

도대체 그가 왜 내게 이토록 적개심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오늘 해야 할 설득이 그리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꼭 그런 건 아니고 그럴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저희 외가에 필립 리라고 미국에서 흉부외과 생활을 하는 선생님이 계세요.”

“…….”

“그 친척분께 종종 의료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그래서 염려되는 부분이 있어서 도안이에게 부탁을 해 봤습니다.”

“미국이 선진국이긴 하지만, 우리나라 의료도 꼭 미국에 뒤처진 것만은 아닐 텐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음… 그래?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주 주제넘고 무례한 짓을 저질렀구나. 도안이 친구가 아니었다면 넌 벌써 내 손에 혼쭐이 났을 테니까.”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나는 사죄하는 마음을 담아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곽도안의 부모님 입장에서는 내가 주제넘게 참견했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가 충분했다.

내가 곽도안 할머니의 죽음을 욕되게 한다는 기분이 드는 게 당연했고.

그 점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앞으로의 내 처신이 더욱 중요했다.

“염치 불고하고 한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내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으나, 곽도안의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다.

“듣기 싫다. 겨우 고3밖에 안 된 녀석이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나대는 거야.”

“…….”

“양산 병원은 국내 다섯 손가락에 드는 병원이다. 그리고 명태랑 교수는 내 대학교 선배이기도 하단 말이지. 설마 선배가 내 어머니를 멋대로 죽게 만들었다고 말할 셈이냐?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봤나!”

곽도안 아버지의 벼락같은 호통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명태랑 교수가 곽도안 아버지의 대학 동문이라고?

순간, 배트를 맞은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했다.

이거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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