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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31화 (31/257)
  • 31화 제2장 기호지세 (1)

    오후 내내 나는 학교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온통 명태랑 교수로 가득해 넘쳐흐를 정도였다.

    명태랑 교수는 빅5 병원 중 하나로 꼽히는 양산 병원의 심장내과의 교수였다.

    그런 그가 나와 간접적으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내가 레지던트 3년 차로 올라가던 시기였다.

    양산 병원 출신이었던 명태랑 교수가 신원대학교 심장내과 과장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명태랑 과장, 부병원장님이 스카우트해 왔다면서요?

    -맞아요. 실력도 좋고 수완도 좋다고 하던데.

    -제가 아는 이야기랑은 다르네요? 듣기론 소문이 썩 좋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에요.

    명태랑의 파격적인 인사 소식에 병원 안이 술렁거렸다.

    그리고 그의 부임과 동시에 흉부외과는 엄청난 직격탄을 맞고 마는데…….

    명태랑의 심장내과가 심장 질환 환자들을 독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는 수술이 필요한 환자에게도 무리하게 스텐트 시술을 고집하곤 했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부임 초반 자신의 실적을 병원 내외에 과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명태랑이 승승장구하면서 흉부외과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흉부외과의 인력을 감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흉흉한 소문까지 나돌 정도였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명태랑은 여제자 성추행, 남제자 폭언 및 폭행으로 신문과 뉴스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뜻밖의 사실이 추가로 밝혀졌다.

    명태랑과 같이 신원대학교 병원에 스카우트되어 들어온 교수가 명태랑의 또 다른 의료 비리를 폭로한 것이다.

    [과거 명태랑 과장은 실적을 쌓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시술을 감행했습니다. 의료 윤리까지 위반한 파렴치한이므로 엄벌이 필요합니다.]

    해당 교수는 명태랑 교수가 양산대학교 병원에 재직하던 시절.

    약물 방출형 스텐트 시술을 과도하게 시행했다고 폭로했다.

    또한 다량의 시술을 본인의 업적으로 포장해서 부교수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고 주장했다.

    추가 폭로로 또 한 번 발칵 뒤집힌 의료계.

    기나긴 소송과 항소를 거듭한 끝에 명태랑은 결국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교도소에 들어가게 된다.

    명태랑의 손에 환자를 잃은 보호자들이 뒤늦게 소송을 걸었으나.

    의사 면허를 박탈당한 명태랑이 파산 신청을 하는 바람에.

    단 한 푼의 배상금도 받지 못한 채 민사 소송은 막을 내리고 만다.

    ‘의사라도 다 같은 의사는 아니지.’

    명태랑을 떠올리던 나는 쓰게 웃었다.

    환자를 오로지 돈벌이 수단 또는 실험용 생쥐로 여기는 의사들이 종종 있다.

    그들은 한마디로 의료계를 오염시키는 일종의 역병이자 재앙이었다.

    의료계의 자정을 위해서라도.

    환자의 더 나은 치료 환경을 위해서라도 명태랑 같은 쓰레기는 어서 빨리 사라져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번 사건을 직접 파헤쳐 명태랑에게 큰 엿을 선물할 계획이다.

    지금 명태랑을 저지한다면, 앞으로 그가 저지를 수많은 악행을 미리 차단할 수 있을 것이다.

    먼 미래에 내가 신원대학교 흉부외과에 들어가서 하게 될 고생도 미리 막고 말이다.

    회귀한 나는 환자를 잘 치료하는 것만이 의사의 미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직하고 올바른 의료 환경을 만드는 것.

    쓰레기 의사를 처리하는 것 또한 환자를 치료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믿었다.

    “도안아, 잠깐 이야기 좀 할까?”

    “그래.”

    5교시 수업이 끝난 뒤 나는 복도로 곽도안을 불러냈다.

    곽도안 할머니의 죽음이 의심스러웠으므로.

    그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차트가 필요했다.

    차트가 있어야만 명태랑의 스텐트 시술에 감춰진 비밀을 파헤칠 수 있었다.

    “너희 할머님이 꽤 건강하셨는데 수술을 받고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했잖아. 듣고 보니 뭔가 꺼림칙한 게 있어서.”

    “…….”

    “우리 친척 중에 흉부외과 의사 선생님이 있거든. 지금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하는 대단한 분이신데, 그분께 너희 할머니 차트를 보여 드리면 어떨까 싶어서.”

    “…….”

    “만에 하나라도…….”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부탁을 했다.

    동시에 내가 가진 의혹에 대해서는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곽도안이 최대한 상처를 받지 않도록.

    곽도안이 은근히 내 의도를 알아차리도록.

    안 그래도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고통스러워하는 곽도안이 아닌가.

    나야 명태랑 교수가 나쁜 놈이라는 걸 알고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지만.

    곽도안 입장에선 내가 철없는 음모론을 꺼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내가 가혹하게만 보일 수도 있었다.

    “…….”

    곽도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역시 내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했던 걸까.

    “그렇지? 네 생각도 그렇지?”

    곽도안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엄마, 아빠는 큰 병원의 교수님이 실수를 할 리 없다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했거든.”

    “…….”

    “수술 전에 문병 갔을 때도 분명 괜찮으셨는데 말이야.”

    “그럼…….”

    “차트 보여 줄게. 안 그래도 보험 회사에 팩스로 보냈는데 원본이 집에 있는 걸로 알아.”

    곽도안이 의외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기에 나는 한시름 덜었다.

    자세한 건 차트를 봐야 알겠지만, 최소한 차트에 조작은 없었을 거라고 나는 판단했다.

    1999년대만 해도 의료 소송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전문 의료 지식으로 무장한 의사가 환자에게 A라는 진단을 내리면 환자는 스스로 A라는 병이 있다고 굳게 믿던 시기였다.

    정보의 비대칭으로 인해 환자는 의사를 감히 의심할 수 없었기에.

    의사는 보통 차트를 조작할 필요가 없었다.

    “고맙다. 기분 나쁠 수도 있는데, 내 말을 좋게 받아들여 줘서.”

    “아냐. 나도 할머니가 너무 갑작스레 돌아가셔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

    “그런데 친척 의사 선생님은 어떤 분인데?”

    “어… 그게 필립 리라고, 미국 교포이셔.”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라 나는 엉겁결에 둘러댔다.

    당연히 친척 쪽에 필립 리라는 흉부외과의가 존재할 리 없었다.

    차트를 분석하는 건 오로지 내 몫이었다.

    나는 전생의 흉부외과 교수를 역임했던 몸이니까.

    그러니까 필립 리는 전생의 나를 뜻하는 말이었다.

    “너희 친척 의사 선생님이 차트를 잘 봐주셨으면 좋겠다. 만약에라도 수술한 교수가 나쁜 짓을 했다면 물렁하게 끝나진 않을 거야. 우리 아빠, 잘나가는 변호사니까.”

    곽도안의 목소리에 은근한 노기가 감돌았다.

    곽도안의 아버지가 잘나가는 변호사라…….

    잘만 하면 명태랑 교수를 한 번에 몰락시킬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일지도.

    “그래, 친척분 연락 받는 대로 바로 전화 줄게.”

    “나도 차트 준비되는 대로 전해 줄게.”

    띠리링~.

    수업을 시작하는 종이 울렸다.

    나와 곽도안은 각자 반으로 돌아가 수업을 준비했다.

    벌써부터 필립 리로 활약한 생각에 마음이 들뜬 나였다.

    * * *

    수업이 끝난 후 야간 자율(강제) 학습이 있었으나 나는 어렵지 않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전국모의고사에서 전국 수석을 한 나였기에 선생님들은 군말 없이 나를 보내 주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믿음이 왔니? 오늘은 웬일로 일찍 왔구나.”

    “형아, 왔어?”

    “네, 다녀왔습니다.”

    현관에 들어서자 아버지와 사랑이가 나를 반겨 주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사랑이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내가 어머니의 외모와 손재주, 아버지의 성격을 물려받았다면 사랑이는 정반대였다.

    사랑이는 엄마의 성격, 아버지의 외모를 물려받았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부터 사교적이고 활발했다.

    “우리 사랑이, 아빠 말 잘 듣고 있었어?”

    “응.”

    “사랑이 거짓말할 거야? 아빠 글 쓰는 동안, 계속 소꿉놀이하자고 졸라 놓고.”

    “헤~, 들켰다.”

    사랑이가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하지만 그 모습마저 못내 사랑스러운 나였다.

    “그럼 형이 잠깐 놀아 줄까?”

    “응. 좋아.”

    “잠깐만 기다려. 형아, 정리 좀 하고 올게.”

    나는 방에서 교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다시 거실로 나왔다.

    오늘은 공부를 할 기분도, 복싱 체육관에 갈 기분도 아니었다.

    내 정신은 온통 곽도안에게 받을 차트에 쏠려 있었다.

    그럴 바엔 모처럼 동생과 놀아 주는 게 속 편할 듯했다.

    “형이 후크 선장이고 내가 피터팬이야.”

    사랑이가 건넨 장난감 칼을 들고 나는 사랑이와 치열하게(?) 검을 주고받았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웬디와 친구들을 차지하기 위해 난타전을 펼쳤다.

    “으으으윽.”

    사랑이가 투명 검으로 배를 찔러 왔을 때 나는 그 자리에서 대자로 뻗었다.

    “와, 이겼다! 피터팬이 이겼다!”

    “분하다. 내가 다 이긴 거였는데.”

    “흥! 언제나 정의가 이겨. 이 나쁜 악당아.”

    사랑이의 호방한 말투에 나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비록 전생에서는 보지 못했던,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이었지만 사랑이와 함께여서 나는 행복했다.

    사랑이가 좋아하는 미니카로도 30분 가까이 놀아 준 뒤 나는 거실에서 숨을 돌렸다.

    사랑이는 놀다가 지쳐서 제 방에서 잠이 들었다.

    “너무 시끄러워서 글 쓰시는 데 방해되었죠?”

    거실로 나온 아버지를 보며 내가 말했다.

    “아니. 너무 듣기 좋은 소리였는데? 너희 둘이 노는 소리가 아빠한테 천국의 소리처럼 들렸단다.”

    아버지의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걸렸다.

    전생에서의 불운과 불행을 떨쳐 낸 아버지는 한결 더 여유로워 보였다.

    소설가로서의 기량을 마음껏 뽐내며 주변의 인정까지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아버지가 전생에서는 고된 노동과 빚 독촉에 시달리다가 수술 중에 돌아가셨다니…….

    요즘 나는 아버지를 보면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가슴이 짠했다.

    “작업은 잘돼 가시나요?”

    “가족애를 다룬 신작 장편을 준비 중인데, 다행히 글은 잘 써지는구나. 우리 가족 이야기를 조금씩 각색해서 쓰고 있으니까.”

    “그러셨군요.”

    “믿음아, 오랜만에 아빠랑 진지한 이야기를 해 볼까?”

    소파 옆자리에 앉은 아버지의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갑자기 진지한 이야기를 한다니 괜히 긴장이 됐다.

    평소와 다르다는 것.

    갑작스럽다는 것은 대부분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았다.

    행복은 차근차근 쌓아 올리는 것이지만, 불행은 단번에 무너지는 것이기에.

    “네, 좋아요.”

    “뭐 그리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긴장할 필요 없단다.”

    아버지가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빠는 말이야. 어렸을 때부터 네가 너무 무리한다는 느낌을 받았단다. 인형 눈을 꿰매서 집안에 돈을 보탰던 것도 그랬고, 혼자서 꾸준히 영어 공부를 했던 때도 그랬고 말이야.”

    “…….”

    “아빠는 네가 스스로를 지나치게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한다. 지금보다 더 마음의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어.”

    아버지는 나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회귀라는 절호의 기회를 얻은 나는 전생에서 겪었던 불운과 불행을 헤쳐 나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왔다.

    일분일초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기 위해 철저한 계획에 따라 움직였다.

    과거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까.

    그런 나에게 아버지는 잠시 멈추어도 된다고 이야기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섬세한 통찰과 따뜻한 조언에 나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가 아니면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세상 천지에 어디 또 있을까.

    “믿음아, 너는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고 생각하니?”

    “으음… 그런 것 같아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이야기하던데요.”

    내 유머 섞인 대답에 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그 사람 말을 100퍼센트 믿으면 곤란하지. 아빠 생각에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게 아니야. 살다 보니 행복을 느끼는 거란다.”

    “…….”

    “그러니까 무언가를 위해 너를 소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살아가렴. 다 노파심에서 하는 소리다만.”

    “명심하겠습니다.”

    “명심씩이나. 아빠 말이 명심보감도 아니고. 잔소리는 이쯤 하면 된 것 같으니 아빠는 들어가서 글을 쓰마.”

    아버지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보며 나는 아버지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아버지는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었다.

    과연 내가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아득바득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가족의 생활은 평화 그 자체였고, 외가와의 관계도 돈독했다.

    전생의 삶을 뒤엎으려는 노력은 이쯤 해도 되지 않을까.

    모든 것이 충분하고 만족스러워 보이는데?

    ‘그래도 저는 더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내가 놓친 것들, 내 손으로 망친 것들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것들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그 그림자들을 떨쳐 내지 못한다면 회귀를 한 보람이 없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때까지 나는 결코 멈출 수 없었다.

    띠리링~ 띠리링~.

    집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전화를 받은 나는 짧게 통화를 하고 집을 나섰다.

    차트를 챙겼으니 우리 집 아파트 단지 근처에서 만나자는 곽도안의 전화였다.

    이제부터는 이믿음이 아닌 필립 리로 활약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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