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제1장 시간을 달려서 (5)
“야, 넌 내 말이 좆같이 들리냐? 엉?”
3학년 화장실. 심병수는 눈앞에 있는 박정훈의 정강이를 발끝으로 톡톡 찼다.
지금 심병수의 심기는 몹시 불편했다.
요즘 들어 남몰래 괴롭혀 온 반 친구 박정훈이 상납금을 챙겨 오지 않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꼬박꼬박 들어오던 특별 용돈이 끊기자 심통이 났다.
아니, 어쩌면 아침에 마주친 이믿음과의 신경전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 화풀이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 용돈은 벌써 다 너한테 줬어. 이젠 줄 돈이 없어서 그래. 없는 돈을 만들어 낼 순 없잖아.”
심병수의 기에 눌린 박정훈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했다.
“히야, 이 맹랑한 새끼 좀 보소? 없으면 그만이다? 없으면 네가 방금 지껄인 대로 돈을 만들어서라도 가져와야지.”
심병수는 검지로 박정훈의 어깨를 툭툭 밀었다.
잔뜩 겁에 질린 박정훈의 모습에서 그는 야릇한 쾌감을 느꼈다.
심병수는 친구 위에 군림해 그들을 제멋대로 부리는 것을 좋아했다. 모든 것을 통제하고 제 손으로 마구 주무르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그러면 자신이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야. 들어오면 안 돼! 들어오면 안 된다니까.”
실랑이가 벌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망을 보던 일진 한 명이 뚫렸다.
선생님이 들어왔나 싶어서 잔뜩 졸았는데,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이믿음이었다.
“너희, 뭐 하냐?”
화장실 안을 훑는 이믿음의 눈빛이 싸늘했다.
그와 반대로, 이믿음을 향한 심병수의 눈빛은 뜨거워졌다.
심병수는 이믿음이 싫었다.
아니, 싫어하는 것을 넘어서서 증오했다.
이믿음은 그가 갖고 싶었던 성적과 반 친구들의 명망을 독차지해 그를 초라하게 만들었으니까.
이믿음 때문에 만년 2등 자리에 머무르자, 몇몇 친구들은 심병수를 ‘심지터’라고 놀리기도 했다.
손오공에게 허구한 날 밀려 2인자 소리를 듣는 ‘드래곤볼’의 베지터에 그의 성을 덧붙인 것이다.
심병수가 박정훈을 괴롭히게 된 이유 중에는 그런 사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반장 나리가 화장실엔 웬일이셔?”
“웬일이 있으니까 화장실에 들어왔지. 정훈아, 수업 시작한다. 빨리 교실로 들어가.”
이믿음의 말에 박정훈이 심병수의 눈치를 살폈다.
이에 심병수는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였다간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초리로 박정훈을 노려보았다.
그와 이믿음 사이에서 낀 박정훈은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화장실을 휘감는 팽팽한 긴장감.
“빨리 들어가라고. 병수랑은 내가 이야기할 테니까.”
“으… 응.”
박정훈은 끝내 그가 아닌 이믿음의 말을 따르며 교실로 돌아갔다.
‘결국 이믿음을 따랐다 이거지?’
심병수는 심사가 꽈배기처럼 배배 꼬이는 것을 느꼈다.
“유치하게 반 친구들 좀 괴롭히지 마라. 괴로운 건 네 인생 하나로 족하지 않냐?”
“이믿음, 네가 반장이고 모범생이면 못 건드릴 것 같아?”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돈으로 산 일진 친구 몇 명 데리고 다니면 내가 널 못 건드릴 것 같아?”
이믿음은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보면 볼수록,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재수가 없는 이믿음이었다.
“야, 그만 가자.”
수업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심병수는 일진 친구들과 함께 교실로 돌아갔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래기 위해 이믿음을 골탕 먹일 수 있는 방법들을 노트에 끼적거렸다.
잠시 후 담임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얼마 전 본 전국모의고사 성적이 나왔다.”
담임선생님의 말에 심병수의 귀가 번쩍 뜨였다.
드디어 이믿음의 코를 납작 눌러 줄 메인 이벤트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 반에서 놀라운 성적을 거둔 학생이 두 명이 있다. 우선 심병수.”
“네, 선생님.”
심병수는 어느새 모범생으로 변신해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우리 병수 성적이 많이 좋아졌구나. 모의고사 성적이 전국에서 30위야. 다들 병수에게 박수!”
짝. 짝. 짝.
쏟아지는 박수에 심병수는 활짝 웃었다.
이믿음을 꺾기 위해 밤샘 공부를 한 보람을 느끼며 전신이 짜릿해졌다.
“그리고 이믿음.”
“네, 선생님.”
“믿음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 믿음이는 전국 수석이다. 전국에서 제일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우리 반 학생이라니… 선생님도 무척 자랑스럽구나. 지금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친구들도 많이 도와주렴.”
“네, 선생님.”
이믿음이 전국 수석을 차지했다는 사실에 심병수의 팔다리는 금방 치욕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또! 또! 또!
저 거지 같은 놈에게 밀렸단 말인가.
왜 난 항상 저 새끼의 뒤통수만 바라봐야 한단 말인가.
모멸감과 시기와 증오에 심병수는 당장이라도 몸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두고 보자. 이믿음.
* * *
수업을 받는 내내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전국 수석을 한 것이야 당연한 일이니 딱히 기쁠 일은 아니었고, 문제는 심병수 때문이었다.
열등감에 뒤틀릴 대로 뒤틀린 심병수의 행동이 점점 도를 넘고 있었다.
설마 반 친구를 따로 불러내서 윽박지르고 있었을 줄이야.
소문이 사실로 드러난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4교시가 끝나고 찾아온 점심시간.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박정훈을 따로 불러 대화를 나눴다.
“박정훈, 아까 화장실에서 병수랑 무슨 이야기했어?”
“뭐, 별건 없었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급의 분위기 메이커였던 박정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 이유를 나는 화장실 사건을 통해 알 것도 같았다.
“여긴 보는 눈도 없고 듣는 귀도 없어. 나한테는 솔직하게 털어놓아도 돼.”
“…….”
“병수가 너 괴롭히고 있지? 맞지?”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박정훈은 무언가를 말할 듯 말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대답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아니, 그냥. 돈 좀 빌려 달라고.”
“심병수 같은 놈이 돈을 빌려 달라고 좋게좋게 말했다고? 강제로 빼앗은 게 아니고?”
“마… 맞아. 그러니까 믿음이 넌 신경 안 써도 돼.”
“신경을 안 쓰고 싶은데, 그게 안 되는 상황이잖아.”
나는 답답한 마음에 살짝 언성을 높였다.
정작 내가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심병수인데 말이다.
“박정훈, 네가 솔직해져야 나도 도와줄 수 있어.”
“진짜 별거 아니라서 그래. 난 그만 간다.”
대화를 뿌리치고 떠나는 박정훈을 나는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심병수에게 기가 눌려 할 말을 제대로 못 하는 듯했다.
박정훈이 내게 사실을 털어놓는다고 해도.
나 역시 결국 담임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을 테고, 담임이 솜방망이 훈계를 한다면 박정훈은 더 괴로워질 테니까.
아마 박정훈은 그 과정까지 머릿속에 다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빌어먹을 학교 폭력.
가해를 입증하기도 힘들고 처벌 수위조차 하찮은 피해자의 지옥도.
전생에는 겪어 보지 못했던 사건이 나를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
나는 그 길로 곧장 학교 옥상을 찾았다.
옥상은 심병수 일당의 아지트였다.
매점 음식으로 점심을 때우는 녀석들에게 나는 으름장을 놓았다.
박정훈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고 말이다.
아쉽지만, 그게 현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남은 건 앞으로 심병수의 꼬리를 차근차근 밟아 보복을 준비하는 것뿐.
* * *
할 일을 마친 나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교정을 거닐었다.
심병수와 박정훈의 관계를 깨달은 뒤로는 머릿속이 복잡하고 무거웠다.
잠깐이나마 한숨을 돌릴 여유가 필요했다.
운동장으로 향하던 나는 벤치에서 매점 빵을 먹고 있는 한 학생을 발견했다.
학생의 이름은 곽도안.
옆 반 학생으로, 내 단짝인 송윤호와 친한 사이라서.
몇 번 어울려서 논 적이 있었다.
“여기서 혼자 뭐 해? 고독이라도 씹고 있는 거야?”
나는 살갑게 농담하며 곽도안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냥 혼자 생각할 게 있어서. 너야말로 왜 혼자야? 오늘은 윤호랑 농구하는 날 아니었나?”
“너랑 비슷해. 이것저것 정리하고 싶은 게 있어서.”
“뭐야, 너도 고독을 씹는 거야?”
우리는 짧은 대화를 나누고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축구와 농구를 하는 학생들로, 운동장은 붐볐다.
여기저기서 기쁨에 겨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듣자 하니 너 모의고사 전국 수석을 했다며? 대박이다.”
“노력도 했고, 무엇보다 운이 좋았지.”
겸손한 척이 아니라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회귀라는 행운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으니까.
“으음… 왠지 그 말이 더 재수 없게 들리는데?”
“재수하기 싫어서.”
내 말장난에 진저리를 치는 곽도안.
나는 그런 곽도안을 지켜보다가 그의 손에 걸린 염주 팔찌에 주목하게 되었다.
“혹시 너 불교야?”
“아니. 나는 아니고 할머니가 불교를 믿었어. 이건 할머니의 유품이야.”
할머니의 죽음을 입에 담는 곽도안의 표정이 쓸쓸해졌다.
곽도안의 할머니는 지금으로부터 3주 전, 심장병 수술 후 건강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전생의 아버지를 테이블 데스로 잃은 나였다.
순간 숙연한 마음과 더불어 가슴이 찌릿하게 아파 왔다.
“그랬구나. 미안, 난 그런 것도 모르고…….”
“모르는 게 당연한 거니까 너무 미안해할 필요 없어.”
곽도안이 휘휘 손을 저으며 말을 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기분이 참 묘하더라. 사실 할머니는 꽤 건강한 편이셨거든. 수술도 큰 병원에서 했고 의사는 후유증이 거의 없는 수술이라고 했는데…….”
“…….”
“수술이 끝나고 일주일 뒤 합병증으로 돌아가셨어. 진짜 벼락 맞은 기분이었지.”
이어지는 곽도안의 설명에 나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을 느꼈다.
수술 후 일주일 뒤 합병증으로 환자가 사망했다?
원내 감염 문제가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곽도안의 할머니가 앓고 있던 심장 질환은 무엇이었을지.
대체 무슨 수술을 받다가 명을 달리하셨는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할머님, 어디가 불편하셨는데?”
“자세한 건 기억 안 나는데… 심장혈관이 막혔다고 들었어. 그걸 뚫어 주는 수술을 받으셨어.”
“구체적으로 무슨 수술?”
“요즘에 되게 유행하는 수술이래. 전신 마취도 안 하고 수술 시간도 1-2시간 정도고. 할머니 나이를 생각하면 그 수술이 최선이라고 하더라고.”
곽도안 할머니가 받은 수술은 아무래도 관상동맥 스텐트 시술이었던 모양이었다.
관상동맥 스텐트 시술이란 기다란 관을 좁아진 심장혈관에 침투시킨 뒤 금속 그물망으로 넓혀 주는 시술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때쯤인 것 같네.’
1999년이면 한창 스텐트 시술에 불이 붙을 때였다.
기존 스텐트 시술은 재협착률이 높았고, 스텐트 시술을 받을 수 있는 조건에도 제한이 있었다.
하지만 1999년쯤 약물 방출형 스텐트가 개발되면서 스텐트 시술의 새로운 발판이 마련되었다.
기존 스텐트 시술에서 혈관 협착을 막는 약물이 나오는 신기술이 개발된 것이다.
짧은 시술 시간.
전신 마취 및 절개가 없어 유리한 회복.
탁월한 시술 효과 등으로 많은 심장내과의들이 약물 방출형 관상동맥 스텐트 시술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그 탓에 흉부외과의 입지는 조금 좁아지게 되었지만.
스텐트 시술은 비교적 안전한 편이긴 하지만, 의외로 사건 사고가 많은 시술이기도 했다.
스텐트 시술이 격동기를 겪고 있는 이맘때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고.
곽도안 할머니의 죽음에서 수상한 낌새가 느껴지는 것은 단순한 나의 착각일까.
“근데 우리 할머니 수술했던 교수 이름이 엄청 특이했던 거 알아?”
“이름이 뭔데?”
“명태랑. 엄마가 그 사람 이름 이야기해 줄 때 깔깔 웃었어. 성만 아니었으면 꽤 괜찮은 이름인데.”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이름이 망치처럼 내 뒤통수를 세게 때렸다.
명태랑.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이름.
하필이면 명태랑의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는지…….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