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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27화 (27/257)
  • 27화 제1장 시간을 달려서 (2)

    “저는 이믿음을 반장으로 추천합니다!”

    김지원이 손을 번쩍 들어 당돌하게 말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봄기운이 완연한 4월의 어느 날, 아침 조회 시간에 반장 선거가 있었다.

    반장에 대해서 말하면, 나는 신물이 올라올 것 같았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단 한 번도 반장을 빼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걸출한 인물(?)이 없다는 이유로 1학기와 2학기 반장을 두 번 다 맡은 적도 있었다.

    내가 진짜 초등학생이면 반장으로 뽑혔다는 사실에 우쭐해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무늬만 국민학생일 뿐, 의식은 이미 어른이었다.

    반장 따위는 귀찮고 영양가 없는 감투일 뿐이었다.

    “저는 심병수를 추천합니다.”

    나 다음으로 심병수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이름이 호명된 심병수는 나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래, 어디 한번 붙어 보자.’ 하는 도발적인 눈빛이었다.

    심병수는 내게 라이벌 의식을 지닌 아이였다.

    심병수는 김지원을 좋아했는데, 김지원은 나를 좋아했다.

    심병수는 전교 1등이 되고 싶었는데, 전교 1등은 항상 내 차지였다.

    나를 좋아하고 싶어도 좋아할 수가 없다고 할까.

    전생과 달리 나와 심병수의 위치는 정반대가 되었다.

    ‘역시 환생을 했다고 꼭 좋은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건 아니구나.’

    나는 착잡함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내가 그저 나답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에게 원한을 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심병수가 그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심병수는 나로 인해 질투의 화신이 되었다.

    전생에서는 남부러울 것 없는 우등생이었는데 말이다.

    “이믿음 한 표. 이믿음 한 표. 심병수 한 표. 심병수 한 표.”

    초반 개표 결과는 대선에 버금갈 정도로 박빙이었다.

    바를 정(正)자가 2개나 만들어질 때까지 나와 심병수는 팽팽한 줄다리기를 했다.

    “쟤 진짜 치사한 거 알아?”

    옆자리에 앉은 김지원이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며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뭐가?”

    “며칠 전부터 친구들을 자기 집에 데려가서 놀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 주더라. 반장이 그렇게 되고 싶었나 봐.”

    “…….”

    “그런 것만 아니면 믿음이 네가 무조건 반장인데.”

    김지원이 뜻밖의 정보를 전해 주었다.

    아까 자신만만한 눈빛을 보냈던 건 다 그 때문이었나.

    하지만 투표 결과, 35대25로 결국 내가 반장으로 뽑혔다.

    감투뿐인 반장을 심병수에게 그냥 양보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랬다면 심병수는 자존심에 더욱 상처를 입을 테니까.

    “그럼 반장은 이믿음, 부반장은 심병수다. 두 사람 다 앞으로.”

    선생님의 부름에 나는 교탁 앞에 섰다.

    “다들 반장으로 뽑아 줘서 고마워. 불편하거나 힘든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말해.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

    짝. 짝. 짝.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특히 까불이와 김요한의 박수 소리가 요란했다.

    반장 연설을 마치고 물러서는데, 심병수와 다시 한번 눈이 마주쳤다.

    열등감과 질투로 불타오르는 심병수의 눈은 이미 국민학생의 눈이 아니었다.

    심병수는 나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고 있었다.

    아마도 의사가 되어서도 심병수와 같은 인물들을 나는 수도 없이 맞닥뜨리게 되리라.

    그렇다면 지금부터 미리미리 준비를 해 두는 것도 좋을지 모르겠다.

    미움 받을 용기를.

    * * *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김지원, 까불이, 김요한과 도시락을 펼쳐 놓고 함께 점심을 먹었다.

    도시락이 가장 화려한 사람은 누가 뭐래도 김지원이었다. 도시락 자체가 보온이었고, 반찬통은 무려 3단이었다.

    “자, 계란 프라이.”

    김지원은 내 도시락 위에 계란 프라이를 올려 주었다.

    최근 김지용이 다쳤을 때 병원까지 같이 가서 위로해 준 뒤로, 김지원은 나를 더욱 살갑게 대했다.

    그 때문에 반 아이들은 물론이요, 전교생 모두.

    김지원이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거의 인증(?) 받은 커플이라고 해야 할까.

    김지원의 애정 공세가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고, 한편으로는 귀찮았지만 나는 그럭저럭 잘 받아넘기고 있었다.

    국민학생 시절의 풋풋한 감정이 어디까지 가겠냐 싶었던 것이다.

    “어. 잘 먹을게.”

    “야, 김지원 사람 차별 하냐? 믿음이 말고 우리한테도 좀 신경 써라.”

    “내조는 안사람한테 하는 거야. 바깥사람한테 하는 게 아니라고.”

    김지원이 어디서 주워들은 말로 가볍게 받아쳤다.

    “믿음아, 반장 된 거 축하해.”

    잠자코 있던 김요한이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고맙다고 대답한 뒤 화제를 돌렸다.

    “요한아, 몸은 좀 어때?”

    “멀쩡해. 처음엔 가슴에 뭔가가 있는 것처럼 불편했는데 지금은 그런 느낌도 안 들어. 속도만 빠르지 않으면 뛰어도 그렇게 답답하진 않고.”

    “다행이네.”

    페이스메이커에 적응하고 있는 김요한의 모습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몸에 기계가 심어졌다는 사실에 김요한이 자신감을 잃고 더 소극적이 될까 봐 내심 걱정했던 것이다.

    점심 식사가 끝난 뒤엔 옆 반으로 딱치 불어 넘기기 원정을 떠났다.

    저번에 당한 수모(?)를 갚아 주기 위해 야심 차게 덤볐지만, 결과는 또다시 대패였다.

    떠날 때 딱지로 볼록했던 호주머니가 돌아올 때는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야, 이믿음. 너는 반장이라는 애가 딱지놀이나 하고 있냐? 친구들한테 모범을 보여야지.”

    공격적인 말투에 고개를 돌리니 심병수가 마땅잖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녀석의 두 볼은 부반장이 됐다는 불만으로 잔뜩 부풀어 올라 있었다.

    ‘역시 어쩔 수 없는 건가?’

    내가 제아무리 날고 기고 환생을 했다고 하더라도 모두에게 다 사랑을 받을 수는 없었다.

    다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그런 일이 현실에 닥치니 뒷맛이 씁쓸했다.

    하지만 어른의 의식으로 국민학생과 다투는 건 유치하다고 해도.

    가마니처럼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국민학교 6학년생은 은근히 영악한 나이.

    기어오르는 것을 마냥 허허실실 받아 주다 보면 피해를 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많이 유치하긴 하지만, 이 기회에 아이답게(?) 코를 납작하게 해 줄까.

    “심병수, 딱지 못 치니까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야? 너 나한테 딱지 이길 수 있어?”

    내가 자존심을 건드리자 심병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내가 너한테 질 거 같아?”

    “그럼 한판 붙어 보든가.”

    “그래. 내가 쓴맛을 보여 줄게.”

    갓 선출된 반장과 부반장의 피 튀기는 딱지 넘기기가 시작됐다.

    결론부터 말하면, 딱지 넘기기는 나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옆 반에 딱지 넘기기를 잘하는 아이가 있어서 그렇지.

    내 딱지 능력도 어디에 가서 꿀리지는 않았다.

    “아휴, 짜증 나!”

    쾅!

    딱지를 잃은 심병수가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씩씩거리며 교실을 떠났다.

    아이들은 그런 심병수를 지켜보며 깔깔 웃어 댔다.

    나는 마침내 미움 받을 때 해야 할 알고리즘을 결정했다.

    팃포탯.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펼친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한 전략.

    팃포탯은 쉽게 말해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

    내게 호의적인 대상에게는 호의를 베풀고 나를 배신하거나 적대적인 대상에게는 따끔한 처벌을 내리는 전술이었다.

    나는 앞으로 팃포탯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 * *

    반장 선거를 치렀던 주말.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나는 다시 외조부모님 댁을 찾았다.

    세월 속에 묵혀 두었던 앙금을 풀었으니 이제 자주 놀러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제 슬슬 다음 작전으로 넘어갈 차례인가?’

    나는 차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할아버지가 기관지 확장증 진단을 받고 몸 관리를 시작한 것은 분명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외가에 드리운 먹구름을 모두 걷어 냈다고 볼 수는 없었다.

    곧 다가올 IMF, 그러니까 외환 위기에 할아버지의 기업은 쇠퇴기를 맞이하고 끝내 망하고 만다.

    할아버지의 기업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내가 풀어야 할 최후의 숙제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전직 의사였다.

    경제에 대해서는 쥐뿔도 몰랐다.

    그럼에도 할아버지가 혹할 만한 사업 아이템을 하나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오히려 내가 환생한 의사였기에 할아버지에게 물어다 줄 수 있는 아이템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전산과 서버에 관련된 기업을 경영 중이고.

    신원대학교 졸업생이라고 하니 아마 지금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으리라.

    ‘문제는 설득인데…….’

    내가 좋은 사업 아이템을 알고 있다고 해도 할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이답고 천진난만하게.

    그러면서 들었을 때 혹하게.

    나는 이 두 가지를 골자로 할아버지를 설득할 방법을 고민해 보았다.

    “믿음아, 다음 주에 운동회라고 했지?”

    어머니가 불쑥 내게 말을 걸었다.

    “네.”

    “그럼 엄마가 그때 햄버거 돌려야겠네.”

    어머니는 빙긋 웃으며 내 머리를 쓸어 주었다. 반장이 되면 반 전체 학생에게 음식을 돌리는 게 그 당시의 문화(?)였기 때문이다.

    “반장도 밥 먹듯이 하니까 지겹지?”

    “네, 이제는 진짜 지겨워요. 반장 좀 그만 했으면 좋겠어요.”

    아버지의 질문에 나는 신물이 난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아버지와 어머니가 깔깔 웃었다.

    “그건 그렇고, 엄마 아빠가 믿음이한테 깜짝 선물을 준비했단다.”

    “무슨 선물이요?”

    생일도 멀었는데 무슨 선물을 주시겠다는 걸까. 곁에 앉은 어머니를 올려다보자 어머니는 흐뭇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믿음이가 한번 맞춰 볼래?”

    “으음… 게임기요?”

    “게임기는 아니야.”

    “그럼 용돈?”

    “용돈도 아니란다. 게임기나 용돈보다 훨씬 더 대단한 선물인데 모르겠니?”

    “네.”

    “믿음이 너, 조만간에 동생이 생길 것 같다.”

    아버지의 폭탄선언에 나는 바보처럼 입을 헤 벌렸다. 기절초풍에 상상 초월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때 사용하는 듯했다.

    세상에 동생이라니…….

    “엄마, 진짜예요?”

    “그럼 진짜고말고. 엄마 배 속에 믿음이 동생이 자라고 있어. 한번 만져 볼래?”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당신의 배 위에 내 손을 얹었다.

    물론 아직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이렇게 또 삶이 바뀌는구나.’

    나는 놀란 가슴을 간신히 추슬렀다.

    전생의 이맘때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갖은 고생을 다했다.

    희대의 사기꾼인 고말숙의 빚보증을 선 후 집안이 완전히 내려앉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글을 접고 막일에 뛰어들었으며.

    어머니는 적성에 맞지 않는 식당을 다니기 시작했다. 교통사고 이후 다리가 불편하다 보니 병원 쪽에서 퇴사를 권고한 것이다.

    가족의 보금자리였던 헌책방은 팔려 나갔고, 단칸방 월세를 전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환생하면서 집안 사정은 180도로 달라졌다.

    빚보증을 서는 일은 없었고, 단칸방은 아파트로 변했다.

    그로 인해 아버지와 어머니의 금슬도 이상 무였다. 즉, 집안 형편이 좋아지다 보니 어머니와 아버지가 둘째를 갖게 된 것이다.

    전생에 없었던 동생을 갖게 됐다는 사실에 나는 살짝 흥분했다.

    남동생일까.

    여동생일까.

    어머니와 아버지 중 누구를 더 닮았을까 등등.

    앞으로 태어날 동생에 대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동생이 생긴다니까 좋지?”

    “네, 저는 동생한테 엄청 잘해 줄 거예요.”

    “암. 믿음이라면 분명 그럴 거야. 네가 얼마나 어른스럽고 대견한데.”

    “난 둘째 이름까지 벌써 생각해 뒀어. 사랑이 어때? 이름만 들어도 사랑스럽지 않아?”

    “난 좋아. 믿음이랑 딱 어울리네.”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가 공감한다는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도 나는 부모님과 나중에 태어날 동생에 대해 한참 대화를 나눴다.

    12살 차이가 나는 동생의 탄생.

    회귀를 한 후 여러 의미에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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