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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24화 (24/257)
  • 24화 제4장 마지막 숙제 (4)

    할 말을 정리한 나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1살 때부터 키워 온 물 오른 연기력을 오랜만에 선보일 차례였다.

    “할아버지.”

    “왜? 우리 손주.”

    “할아버지, 담배 끊으면 안 돼요? 할아버지가 담배 피우니까 제 눈이 너무 매워요. 기침도 나올 것 같아요. 그리고 할아버지가 가래 뱉고 기침하는 것도 싫어요.”

    “…….”

    내 말에 할아버지는 침묵을 지킨 채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뒷머리만 긁적거렸다.

    ‘이 정도면 심각하지.’

    내 시선이 재떨이에 머물렀다.

    가정부가 매일매일 재떨이 청소를 할 테니 지금 재떨이에 있는 담배꽁초는 아마 오늘 피운 담배일 것이다.

    눈으로 어림잡아 꽁초의 숫자는 열다섯 개.

    한 갑에서 딱 다섯 개비가 모자란 양이었다.

    거기에 자기 전까지 피울 담배까지 계산해 보면, 족히 2갑은 나올 것 같았다.

    회귀한 후 12년 만에 보는 할아버지는 심한 골초였다.

    어쨌거나 내 중요한 목표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할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금연을 유도할 것.

    다른 하나는 기관지 확장증 진단을 위해 상세한 진료를 받게 만들 것.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이뤄 낼 작전이 지금 막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왜 말이 없으세요?”

    “아무리 믿음이 말이라도 그건 들어주기가 힘들겠는데?”

    “저 약속할게요. 할아버지가 담배 끊으면 신원대학교에 1등으로 들어갈게요. 멋있는 의사 선생님이 될게요.”

    나는 당차게 선언했다.

    ‘이번에 성적 잘 받으면 게임기 사 줄게’가 어른들의 수법이라면.

    내가 지금 펼치는 수법은 그 반대였다.

    성적을 보여 줄 테니 금연을 하시오.

    “녀석, 꿈이 큰 건 좋지만 신원대 수석은 힘들걸?”

    “저 국민학교 입학한 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전교 1등이었어요. 저 엄청 똑똑해요.”

    “…….”

    “또 저는 나중에 의사 선생님이 돼서 할아버지를 치료하고 싶지 않아요.”

    “응? 그건 무슨 뜻이니?”

    할아버지가 의외의 발언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사가 되면 응당 가족을 치료해야 하는 게 당연한 발상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 발상을 뒤집어 버릴 것이었다.

    “의사한테 치료 받는 사람은 아픈 사람이잖아요. 할아버지가 건강해야 제가 의사가 돼도 할아버지를 치료 안 하죠.”

    국민학생답지 않은 감각적인 화술에 할아버지는 감탄한 듯한 기색을 보였다.

    곁에 있던 아버지도 흡족한 듯 빙그레 웃었다.

    이것이야말로 국민학생의 몸에 갇힌 흉부외과의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 아니겠는가.

    대화의 주도권을 쥔 나는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화술에도 흐름과 리듬이 있다는 걸 회귀한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 담배는 못 끊더라도 병원에 가 보면 안 돼요?”

    “…….”

    “큰 병원 호흡기내과에서 금연을 도와준대요.”

    21세기야 금연 돌풍이 불면서 보건소 또는 전문 금연 클리닉에서 금연 치료를 진행하지만.

    이때만 해도 전문적인 금연 클리닉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병원 진료를 유도했다.

    호흡기내과라면, 할아버지의 기관지 확장증을 확진할 수 있을 테니까.

    결정타를 날린 나는 초조하게 할아버지의 반응을 기다렸다. 내 말발은 과연 어디까지 효과가 있을까 긴장됐다.

    “휴… 우리 손주가 끊으라면 끊어야지. 못난 할아비가 별수 있나.”

    “할아버지, 사랑해요.”

    나는 할아버지 품에 안겨서 있는 애교, 없는 애교를 다 부렸다.

    내가 할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가 먹힌 것이다.

    간신히 한고비를 넘기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대신 믿음이도 할아비랑 약속한 거다? 학교 공부 열심히 해서 꼭 의사가 되어야 한다?”

    “네! 약속할게요.”

    나는 활짝 웃으며 할아버지와 손가락 약속을 했다.

    이미 전직 흉부외과의로 살아 봤던 내가 아닌가.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내 운명이기도 했고.

    세 남자 간의 대화가 끝난 뒤 식구들이 다시 옹기종기 모였다.

    두 시간 가까이 더 대화를 나누다가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눴다.

    해묵은 앙금을 푼 어머니와 외조부모님의 표정이 퍽 밝아 보였다.

    실수는 만회할 수 있고, 오해는 풀 수 있다.

    이 단순한 것을 나는 왜 전생에 알지 못했을까.

    왜 한 번 실수한 것을 평생 자책하고 다른 사람이 내게 가진 편견과 오해를 풀지 않고 그냥 방치했을까.

    ‘다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것이 있다’는 말이 이제는 가슴에 와 닿았다.

    부르르릉.

    가족의 애마 르망이 시동 소리와 함께 차도로 나왔다.

    뒤를 돌아본 나는 점점 작아지는 외가의 단독주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들리길 바라면서.

    * * *

    “하… 괜히 왔나?”

    유철환은 신원대학교 병원 입구에서 담배를 입에 문 채 중얼거렸다.

    사랑스럽고 똑 부러진 손주의 말에 일단 병원에 오긴 했지만, 도무지 발걸음이 내키질 않았다.

    솔직히 담배를 끊고 싶지 않았다.

    건강검진 결과도 멀쩡한데 굳이 진료까지 받아야 하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그런 소리 말아요. 믿음이랑 약속까지 했다면서요. 약속을 안 지킬 거면 애초에 약속을 하지 말았어야죠.”

    곁에 있는 부인이 혀로 채찍을 휘둘렀다.

    유철환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12년 만에 처음 본 손주와 한 약속이었다.

    할아버지라는 작자가 약속을 어겨서야 되겠는가.

    그는 약속을 할 때 뛸 듯이 기뻐했던 손주의 얼굴을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약속을 어겨 자신에게 실망할 손주를 상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아팠다.

    “콜록, 콜록.”

    유철환은 한바탕 기침을 하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감기에 걸린 것도 아니건만 요즘 들어 부쩍 기침이 잦아졌다.

    “이게 내 마지막 담배가 될 거야. 아마도.”

    “그래요. 잘 생각했어요.”

    그는 아내와 함께 병원 입구를 통과했다. 접수를 하고 대기석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다가 진료실로 들어갔다.

    호흡기내과 의사는 40대쯤으로 보였는데, 꾀돌이 같은 인상을 풍겼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기침이 심하고 가래가 많이 끓어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고 금연을 하러 왔습니다.”

    “그러세요? 담배는 언제부터 피우셨어요?”

    “20살부터입니다.”

    “하루에 얼마나 피우세요?”

    “보통 2갑은 피우는 편이죠.”

    문진을 하던 의사가 차트에 무언가를 적다가 유철환의 손가락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곤봉지시네요?”

    “곤봉지? 그게 뭡니까?”

    “쉽게 말하면 손가락 말초 부위까지 혈액 전달이 잘 안 되어서 손가락이 곤봉처럼 뭉뚝해지는 증상입니다.”

    “…….”

    “가만히 있어 보자. 좀 의심되는 게 있는데 검사 좀 받아 보시죠.”

    “검사요? 난 건강합니다. 건강검진에서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어요.”

    유철환은 가슴을 내밀며 당당하게 말했다.

    기침이랑 가래야 흡연자에게 숙명처럼 따라오는 것이니 어쩔 수 없을 뿐.

    그는 스스로를 건강 그 자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환자분, 아까부터 기침도 너무 잦으신데 잠깐 상의를 걷어 보시겠어요?”

    의사가 다가와 청진기를 그의 가슴에 대었다.

    자리로 돌아간 의사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유철환은 덜컥 겁을 먹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진탕음(Rhoncal fremitus)이라고 기관지가 좁아지거나 폐쇄됐을 때 느껴지는 진동이 들리네요. 환자분, 기관지 확장증이 의심됩니다.”

    “그건 또 무슨 질병이죠?”

    의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기관지 확장증은 쉽게 말해서 기관지가 탄력을 잃고 늘어지는 질환이다.

    이로 인해 기관지가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해 다양한 후유증을 앓게 된다.

    “허허, 이게 무슨 경우인지…….”

    의사의 설명을 듣고도 유철환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저 손주와 금연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병원을 찾았을 따름인데.

    갑자기 기관지 확장증이란 병이 의심된다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 이러할까.

    “일단 검사부터 받으시고요. 확진이 되면 금연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

    “폐 CT 검사와 객담검사 진행하겠습니다. CT 결과 나오면 다시 뵙죠.”

    얼떨떨한 표정으로 진료실을 나온 유철환은 아내와 함께 검사실로 이동해 검사를 받았다.

    의사가 착각을 해도 단단히 착각한 것이라고 유철환은 생각했지만.

    정작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건 유철환이었다.

    검사 결과를 두고 마주한 의사 앞에서 유철환은 빼도 박도 못할 기관지 확장증 확진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객담검사 결과는 열흘 뒤에 나오지만, CT 확인 결과 기관지 확장증은 확실하다.

    금연 패치를 줄 테니 잘 붙이고 금연을 해야 한다.

    기관지 확장증은 만성이라 완치가 불가능하니 꾸준한 관리가 중요하다.

    처방해 준 약을 먹고 다음 주에 다시 보자고.

    의사가 뭐라뭐라 말을 했지만, 유철환은 그것들을 제대로 머릿속에 담아 둘 수가 없었다.

    지난 세월 건강을 자신했던 터라 충격이 컸다.

    “당신, 의사 말 제대로 들은 거 맞아요? 넋이 나가 있던데?”

    약을 타서 병원을 나오는데, 아내가 팔을 건드리며 물었다.

    “어? 어.”

    “믿음이 말을 듣고 병원에 왔길래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폐병으로 크게 고생할 뻔했잖아요. 앞으로 담배 꼭 끊어요. 알았죠?”

    “…그래야지.”

    호주머니에 있는 담뱃갑을 더듬던 손을 유철환은 황급하게 빼냈다.

    그리고 어제 만난 손주 믿음이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신께서 더 오래 살라고 믿음이를 보낸 모양이었다.

    * * *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등굣길에 나서는 발걸음이 경쾌했다.

    할아버지를 병원에 보내는 작전이 대성공했다.

    이틀 전 병원에 갔던 할아버지가 기관지 확장증 확진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들었다.

    지금부터라도 금연하고 관리를 잘한다면 할아버지는 오래오래 사실 수 있을 것이다.

    ‘아이의 몸도 의외로 쓸모가 많단 말이지.’

    지금까지 나는 어린이의 신분을 200퍼센트 유용하게 써먹었다.

    아이 특유의 천진난만함을 내세워 수많은 문제를 해결했다.

    한 살인 주제에 아버지가 책방 청소를 하도록 유도했고.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면하도록 만들었으며.

    유치원 때는 하임리히법을 유치원 선생님에게 전수해 손승우의 목숨을 구한 데다.

    최근에는 할아버지가 기관지 확장증 확진을 받도록 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나는 성인으로 환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오히려 감사함을 느꼈다.

    한 살부터 새 삶을 시작했던 덕분에 더 많은 것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처세술까지 체득했다.

    이런 감각을 유지한다면, 의사가 되어 병원 생활을 할 때도.

    정치력 만렙으로 활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요즘 들어 부쩍 앞으로 펼쳐질 병원 생활이 기대됐던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야, 이믿음!”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김지원이 보였다.

    그런데 김지원의 곁에 평소 보지 못했던 남자 중학생이 서 있었다.

    교복을 보아하니 인근 태풍 중학교 교복이었다.

    “안녕. 지원아. 안녕하세요. 형.”

    나는 김지원의 오빠로 보이는 남학생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어, 우리 오빠 알아?”

    “아니. 그냥 네 오빠인 거 같아서 인사했는데?”

    “봐봐. 오빠. 믿음이 똑똑하고 사교성 있지?”

    “정말 그래 보이네. 난 지원이 오빠 지용이야. 반갑다.”

    김지용이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네, 형.”

    “앞으로 지원이랑 친하게 지내렴. 지원이가 너 많이 좋아하니까.”

    “뭐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마.”

    김지원이 볼을 붉히며 빽 소리를 질렀다.

    김지원이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전생에 뭇 남학생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김지원이 나를 좋아하다니…….

    예전이라면 좋아서 죽을 일이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은 몸이었다.

    국민학생인 김지원이 그저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오늘 수업 끝나면 우리 집에 놀러 와. 얼마 전에 게임기도 샀거든.”

    “네, 형.”

    “그럼 또 보자.”

    멀어지는 김지용을 지켜보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흐음… 기흉에 걸릴 상인데…….’

    호리호리한 몸매.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170센티 후반을 육박하는 큰 키.

    김지용에게서 나는 기흉의 불안한 징조를 읽었다.

    키가 크고 마른 사람은 지방이 적어서 체내 윤활액이 적다.

    따라서 폐가 자주 마찰되어 상처가 생길 수 있었다.

    특히 10대의 경우 폐혈관의 성장이 빠른 데 비해, 상대적으로 혈액 공급이 이를 따라잡지 못해 폐에 기포가 생기곤 한다.

    키가 크고 마른 10대에게 기흉이 잘 생기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김지원과 등굣길에 나서면서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직업병이 너무 심하게 도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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