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23화 (23/257)
  • 23화 제4장 마지막 숙제 (3)

    ‘야단났네.’

    나는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노심초사했다.

    어머니의 얼굴은 벌써부터 붉으락푸르락했으며 말아 쥔 주먹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현관을 박차고 뛰어나갈 듯한 격렬한 반응이었다.

    나는 황급하게 고사리손으로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곁에 내가 있다는 것을 확인시킨 것이다.

    내 존재를 의식하고 있으면, 어머니도 감정을 억제하기가 한결 편해질 테니까.

    “여보, 그런 말은 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를 타박하자, 외할아버지는 무안한 듯 헛기침을 했다.

    보아하니 외할아버지도 어머니와 화해할 의도는 있어 보였다.

    단지 수년 동안 연락이 없던 딸에게 서운한 감정을 과격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였다.

    외할아버지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서전을 나는 전생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오서진.

    나보다 2년 후배인 녀석의 별명은 군기 반장이었다.

    거친 입담과 직설적인 화법으로 많은 후배들의 미움을 샀다.

    녀석의 언사에 사실 악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때는 내가 레지던트를 수료한 뒤였다.

    -선배,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전 그냥 말이 예쁘게 안 나와요. 제가 그렇게 듣고 자라서 그런가 봐요.

    오서진은 자신의 순탄치 않았던 가정환경을 넌지시 내비쳤다.

    외할아버지도 오서진처럼 아마 권위적인 증조할아버지 밑에서 자라지 않았을까.

    물론 그렇다고 이런 화법을 가진 사람을 옹호한다거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엄마, 나 화장실 가도 돼요? 나랑 같이 가요.”

    “…그래.”

    나는 어머니가 함께 1층 화장실로 이동했다.

    어머니와 할아버지를 떼어 놓는데, 간신히 성공한 것이다.

    감정이 격해질 때는 잠시 냉각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필요했다.

    그럼 어머니와 단둘이 있게 되었으니 슬슬 작전을 시작해 볼까.

    회귀한 나는 수술 봉합뿐만 아니라.

    인간 사이의 관계 봉합에도 꽤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엄마, 할아버지가 엄마를 많이 좋아하나 봐요.”

    “믿음아, 방금 전 할아버지가 한 말을 듣고도 그렇게 생각하니?”

    어머니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차며 물었다.

    “네, 그럼요!”

    “…….”

    “할아버지가 엄마가 좋아하는 느티나무를 정성껏 키우셨다고 했잖아요. 분명 할아버지는 엄마를 볼 수 없으니까 느티나무를 엄마 대신으로 생각했을 거예요.”

    나는 내가 읽은 할아버지의 속내를 어머니에게 전했다.

    생텍쥐페리는 보이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한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의과 의사들은 이렇게 말을 하곤 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나는 건강하게 자란 느티나무를 통해 느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할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을.

    내 해석에 일리가 있다고 느꼈는지 어머니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달아올랐던 감정까지 제법 진정된 듯 보였다.

    “어쩌면 믿음이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이제 돌아가자꾸나.”

    나는 어머니와 함께 거실로 이동했다.

    외가는 거실만으로도 이미 우리 집 아파트보다 훨씬 큰 평수를 자랑했다.

    부자는 망해도 3대까지 편하게 산다는데.

    먼 미래의 외가는 한순간에 폭삭 주저앉고 만다.

    IMF라는 놈은 그만큼 두렵고 끔찍한 괴물이었다.

    “네, 네. 그렇죠.”

    아버지는 혼자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질문을 받아 내고 있었다.

    소설가 특유의 재기발랄한 입담은 오늘은 찾아볼 수 없었다.

    외가에 들어오고 나서 아버지는 잔뜩 위축되어 있었다.

    어머니와 내가 돌아오자, 할아버지 또한 살짝 긴장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까는 내가 심했다. 사과하마.”

    “아빠도 사과할 줄 아시네요? 해가 서쪽에서 뜬 줄 알았어요.”

    “사람이 진심을 말하면 똑바로 들을 줄 알아야지.”

    “그냥 해 본 소리예요. 저도 여기까지 와서 아빠랑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어머니의 눈과 입에서 독기가 빠진 것을 알아보고 할아버지도 안심한 눈치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까는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인사를 못 드렸어요. 안녕하세요. 이믿음입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바로 아이의 천진난만함 아니겠는가.

    나는 화해의 전도사를 자처했다.

    “믿음이라고? 녀석, 똘똘하게 생겼구나.”

    “감사합니다. 저 근데 똘똘하게 생긴 게 아니라 진짜 똘똘해요. 시험 보면 전 과목 다 수예요.”

    “그래?”

    “우리 믿음이 보통내기가 아니에요. 애가 어떤 아이인지 알면 깜짝 놀라실 걸요?”

    어머니가 내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고 하지만, 부모 앞에서 하는 자식 자랑은 예외였다.

    “이거 보세요.”

    어머니가 내 자랑에 화룡점정을 찍었다.

    얼마 전 김요한을 구했던 신문 기사 스크랩을 할아버지에게 건넨 것이다.

    할아버지는 기사를 읽더니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마비로 쓰러진 친구를 심폐소생술로 구했다고? 허허, 엄청나게 용감하구나.”

    “헤헤. 저는 커서 훌륭한 의사 선생님이 될 거예요.”

    “의사 좋지. 믿음이 네가 의대에 들어간다면 이 할아비가 등록금과 용돈은 전부 대주마.”

    “괜찮아요. 할아버지.”

    “왜?”

    “저는 의대 수석으로 입학할 거예요.”

    내가 당찬 포부를 밝히자, 조부모님과 부모님이 동시에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진심으로 한 이야기였지만, 치기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뭐, 덕분에 분위기를 띄울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계획적으로 대화를 주도해 나갔다.

    나를 화제의 중심에 두고, 조부모님과 부모님이 대화를 하도록 만들었다.

    수술로 따지만 CABG(관상동맥 우회술) 같은 느낌이랄까.

    나라는 우회로를 통해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숨통이 트이게끔 만드는 계획이었다.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나로 인해 훈훈해진 분위기로 어머니와 할아버지의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그땐 너무 화가 나서 아빠 얼굴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어요. 나중에라도 연락을 드렸어야 하는 건데…….”

    “아니다. 내 잘못이 더 크지. 이 서방에게 말도 안 되는 폭언을 하고 말았으니… 이 서방, 이 자리를 빌려서 자네에게도 용서를 구하겠네.”

    “아닙니다. 장인어른. 제가 장인어른이라도 제가 신통치 않아 보였을 텐데요.”

    감정의 앙금이 풀리면서 어머니는 남몰래 손등으로 눈가를 찍었다.

    어머니도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이 넓은 주택과 부모를 등지고 한 남자를 선택하기까지 수많은 밤을 고뇌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이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었다.

    어머니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나는 앞으로도 계속 증명해 나갈 필요가 있었다.

    * * *

    점심 식사 후 2시간 가까이 대화가 이어졌다.

    보지 못한 기간이 길었던 만큼 할 이야기도 많았다.

    긴장이 풀린 아버지는 어느새 소설가다운 입담을 뽐내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가슴을 편 채 집안 자랑을 했다.

    목동에 번듯한 아파트를 마련했다는 것.

    남편이 소설가로서 크게 성공했다는 것.

    내가 범상치 않은 아이라는 것을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았다.

    딸의 가족이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에 조부모님은 다행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양쪽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았다.

    조부모님과 어머니 사이를 가르고 있던 해묵은 체증이 사라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이 서방은 나랑 단둘이 이야기 좀 하지.”

    “저야 좋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안방으로 자리를 옮겼고, 나는 그 뒤를 졸졸 뒤따랐다.

    할아버지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어머니에게서 주워들은 단편적인 내용들이 아닌 할아버지 입에서 나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래야 할아버지의 사업이 망하지 않도록 도울 수 있을 테니까.

    “믿음이, 너도 들어오게?”

    “네, 저도 남자예요!”

    “녀석, 귀엽기는.”

    할아버지가 억센 손으로 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안방에 자리를 잡은 세 남자가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다시금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했다. 과거 자신의 경솔했던 발언을 진심으로 사과했다.

    어머니의 말이 옳긴 옳았다.

    할아버지는 말투가 공격적이고 사나워서 그렇지 심사가 뒤틀린 사람은 아니었다.

    “자네는 담배를 피우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끊었습니다. 한 7년쯤 됐습니다.”

    “진작 말하지 그랬어. 담배를 끊을 정도의 독종이었으면 내가 자네를 순순히 인정했을 텐데…….”

    “하하하, 그런가요?”

    할아버지가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크어어억, 하고 재떨이에 노란 가래를 뱉어 내기도 했다(이때만 해도 집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잠깐만.’

    심상치 않은 징후를 읽어 낸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할아버지의 손가락에 집중했다.

    담배를 쥔 할아버지의 손가락이 몽당연필처럼 뭉뚝했다.

    곤봉지.

    손가락이 곤봉처럼 두껍고 일자로 뻗어 나가는 증상으로, 말초 부위의 혈액순환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발생한다.

    곤봉지는 그 자체로 질환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른 질환을 판별하는 중요한 신호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질환은 대부분 폐질환과 관련되어 있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외할아버지는 내가 공중보건의로 군역을 하던 중에 급성 폐렴으로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곤봉지와 폐렴.

    두 가지 키워드를 엮어 보니 무언가가 손에 잡힐 듯했다.

    “할아버지.”

    “응? 왜?”

    “평소에 가래 많이 나와요?”

    “담배 피우는 사람이 다 그렇단다. 특별할 건 없어.”

    “누워 있을 때 기침이 더 많이 나와요?”

    “그건 어떻게 알았니? 의사가 되겠다고 하더니 벌써부터 할아비 진찰해 주려고?”

    할아버지는 나와 먼 쪽으로 담배 연기를 뿜어내곤 피식 웃었다.

    나를 그저 귀엽게만 보시는 것 같은데, 정작 나는 심각하기 짝이 없었다.

    -R/O(Rule Out, 의증), 기관지 확장증(Bronchiectasis).

    나는 할아버지가 기관지 확장증을 앓고 있으리라고 예상했다.

    곤봉지와 샛노란 가래.

    누웠을 때 심해지는 기침은 기관지 확장증의 특징이었다.

    기관지 확장증이란 말 그대로 감염 등의 증상으로 기관지가 탄력을 잃고 늘어난 질환이었다.

    수술은 불가능.

    한평생 안고 가야 하는 영구 질환이기도 했다.

    일분일초를 다투는 응급 질환은 아니지만, 감기로 끝날 것을 폐렴으로 악화시키곤 한다.

    참고로 폐렴은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시무시한 질병이다.

    2020년쯤에는 암과 심장 질환에 이어 한국인의 사망 원인 3위로 꼽히기도 한다.

    폐렴 단독 사망이라기보다는 다른 질환에 의한 합병증인 경우가 대다수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제 다 말이 되는군.’

    나는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오랜 시간 방치했던 기관지 확장증이 악화되어.

    할아버지는 나중에 폐렴으로 사망한다.

    전생에 풀지 못했던 미스터리를 나는 이제야 풀어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미리미리 관리를 해야 한다는 뜻인데…….

    “할아버지는 건강검진 같은 거 안 받아요? 엄마, 아빠는 최근에 받았는데.”

    나는 슬며시 운을 뗐다.

    “작년에 받았는데, 큰 이상은 없다고 하더구나.”

    할아버지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으나, 나는 오히려 그것이 마땅찮았다.

    기관지 확장증은 폐 CT나 가래를 검사하는 객담검사에서 확진 판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검진에서 실시하는 흉부 엑스레이 또는 폐 기능 검사로는 기관지 확장증 진단에 한계가 있었다.

    어떻게 하면 할아버지가 호흡기 내과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만들까.

    내가 성인이었다면, 당연히 정면 돌파를 했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증상을 일일이 꼬집으며 제대로 된 진료의 필요성을 역설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고작 국민학생에 불과했다.

    풍부한 의학 지식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할아버지는 나를 그저 귀엽게만 볼 확률이 높았다.

    꾸준히 받는 건강검진에서조차 별말이 없는데, 할아버지가 국민학생인 내 말을 순순히 믿어 줄 거라고 기대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기관지 확장증을 방치할 수도 없으니 원.

    ‘역시 그 방법이 좋겠지?’

    나는 차분하게 할 말을 정리했다.

    국민학생은 스스로 무언가를 이루기엔 부침이 많은 나이지만, 어른들을 움직이고 조종하는 데는 오히려 탁월한 구석이 있었다.

    지금은 국민학생의 치트키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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