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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22화 (22/257)
  • 22화 제4장 마지막 숙제 (2)

    “여보, 우리 잘 생각한 걸까?”

    유희애는 안방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친정에 전화를 하고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은 게 몇 년 만인지 몰랐다.

    사실 수화기 버튼을 누를 때만 해도.

    차라리 번호가 바뀌어서 연락이 안 됐으면 하고 바랐던 것도 반쯤은 사실이었다.

    -희애니? 오랜만이구나.

    전화를 받은 어머니의 목소리는 의외로 살가웠다.

    건강하냐며 잘 지내냐고 안부를 물어 왔는데, 그 목소리가 사근사근했다.

    마치 어제까지도 통화를 주고받은 사이처럼.

    -엄마, 나 이번 주말에 남편하고 아이 데리고 집에 찾아갈게. 그래도 되지?

    -그럼 되고말고.

    -아빠가 뭐라고 하지 않을까?

    그녀의 결혼을 극구 반대한 것은 사업가인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가족이 당신의 뜻대로 행동하지 않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래서 남편이 처음 아버지에게 인사하러 갔을 때도 아버지는 남편의 면전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가난한 소설가 나부랭이에게 내 딸을 줄 수 없네. 자네한테는 더 들을 것도, 더 기대할 것도 없으니까 그냥 돌아가게.]

    제왕인 아버지의 말에 남편은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몰랐을 것이다.

    그 무례한 행동 때문에 자신이 아버지에게 영영 등을 돌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딸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서 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떻게 그렇게 매몰차고 무참하게 남편을 짓밟을 수 있단 말인가.

    -아빠가 이제 와서 우리 가족을 만나겠다고 할까?

    유희애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통화 중인 어머니에게 물었다.

    -내가 잘 말해 놓을 테니까 너 그냥 오기만 해. 알았지?

    -응, 알았어. 고맙고 미안해.

    -미안하긴 내가 더 미안하지. 아빠 때문에 네 편을 들어 주질 못했으니까.

    반쪽짜리 허락을 받고서 유희애는 어머니와 한 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눴다.

    친정을 향한 마음속 앙금이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왜? 오지 말라고 하셔?”

    남편이 그녀에게 다가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니. 오라고 하시니까 더 문제지.”

    “뭐야. 잘 풀렸네.”

    “잘 풀리긴… 우리 집에 가면 또 당신이 모욕당할 것 같단 말이야. 난 그게 너무 싫어.”

    “언제고 풀어야 할 숙제였어. 그리고 당신, 은근히 부모님을 뵙고 싶어 하지 않았어?”

    “내가?”

    “우리 둘 다 멋지게 성공해서 당신 친정에 가면 좋겠다고 말한 적 있잖아. 나는 아직 기억하는데?”

    남편의 치밀한 기억력에 유희애는 혀를 찼다.

    연애할 때부터 남편은 그녀의 말을 허투루 듣는 법이 없었다.

    밥상에서 편식하는 것과 방 청소를 귀찮아하는 것만 빼면 말이다.

    어쩌면 남편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고 유희애는 생각했다.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부모님과 화해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성격이 불같고 말투가 사나워서 그렇지, 아버지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다.

    “당신이야말로 정말 괜찮겠어?”

    “물론이지. 오히려 장인어른하고 장모님을 하루빨리 보고 싶은 지경인걸? 나도 이제 자랑할 게 생겼잖아?”

    “이해해 줘서 고마워.”

    “고마워할 사람은 나야. 지금까지 내 곁을 지켜 주고 믿음이를 안겨 준 사람은 당신이니까.”

    “당신도 참.”

    유희애는 남편의 허리를 끌어안고 한동안 남편의 체온을 느꼈다.

    아버지라는 큰 벽도 맞닥뜨려 보면 의외로 별거 아닐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 * *

    주말 아침.

    드디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만나는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나는 어머니가 골라 준 단정한 코르덴 바지에 니트를 입었다.

    먼 미래에서 보면 촌스러울지도 모르는 패션이지만.

    지금 시대에서는 꽤 유복한 도련님 패션이었다.

    출발 준비를 하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목적 없이 방 이곳저곳을 배회했으며, 입술은 꼭 다물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 비해 여유로워 보였으나 그것도 상대적으로 그래 보였던 것뿐이었다.

    아버지는 자주 손바닥을 쥐었다 펴곤 했다.

    초조하거나 긴장할 때 자주 하는 버릇이었다.

    부모님에게 외가 부모님을 뵙는 일은 일종의 상처를 극복하는 일이었기에.

    나는 두 분의 심정을 백번 이해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 뵙지 않으면 나중에 더 후회하실 테니까요.’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 뒤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엄마.”

    “왜?”

    “아빠 소설책하고 제 기사 스크랩하고 사진첩 챙겼어요? 할아버지, 할머니께 보여 드려야죠.”

    “아, 맞다. 제일 중요한 걸 잊었네? 지금 챙길게.”

    “아니에요. 제가 엄마 가방에 넣을게요.”

    허둥지둥하는 어머니 대신 내가 아버지의 소설책과 기사 스크랩, 사진첩을 어머니 가방에 넣었다.

    이것들은 일종의 증거였다.

    우리 세 가족이 그동안 얼마나 대견하고 행복하게 살아왔는지를 반증해 줄.

    외할아버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잘 믿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잘 살고 있다고 말해도 믿지 않을 게 뻔했다.

    그래서 오늘 아침, 나는 어머니에게 조언했다.

    할아버지가 보고서 기뻐할 만한 물건을 챙겨 가면 좋지 않겠느냐고.

    어머니는 흔쾌히 승낙했다.

    “슬슬 출발할까?”

    “좋아. 가자, 믿음아.”

    “네, 엄마.”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현관을 나섰다.

    어머니의 손바닥이 오늘따라 유독 차가웠다.

    가족의 애마인 르망을 타고 향한 곳은 외가댁이 아니었다.

    그 전에 우리 가족은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가 잠들어 있는 경기도 인근의 납골당을 찾았다.

    전생에 다섯 번 정도 찾아왔던 곳이었다.

    주말 아침을 맞아 세상을 떠난 가족을 만나러 온 사람들로 납골당 안은 제법 붐볐다.

    납골당 건물 뒤로 펼쳐진 숲은 푸르렀으나.

    회색빛 건물은 우중충하고 우울해 보였다.

    삶과 죽음을 극명하게 대비해 놓은 것 같았다.

    저벅. 저벅.

    건물 내부의 콘크리트 바닥을 걷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차가웠다.

    이곳을 찾아온 이들의 마음 또한 아마 차가울 것이다.

    아버지에게 듣기로,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으니 환생한 나로서도 두 분을 어떻게 해 드릴 도리가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 믿음이 엄마하고 믿음이랑 같이 왔어요. 자주 못 찾아뵈어서 죄송해요.”

    유골함 앞에 선 아버지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눈가에 어린 애수만큼은 감추지 못했다.

    “저희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하늘에서 다 보고 계시죠?”

    “…….”

    “그러니까 앞으로도 저희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저희 가족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답니다. 두 분이 걱정 안 하시게끔 앞으로도 행복하게 살게요.”

    아버지의 독백이 끝나자, 어머니가 경건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도 고개를 숙였다.

    문득 가슴이 아파 왔다.

    생로병사.

    인간이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피할 수 없는 네 가지.

    앞으로 흉부외과의로서 살아갈 나 또한 늙는 것과 병드는 것, 죽는 것과는 질리도록 싸워야 한다.

    그 싸움이 결코 쉬울 리 없겠지만.

    나는 무릎을 꿇고 싶지도 않았고, 주저앉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죽음이라는 바위를 형벌처럼 평생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가 될 것이다.

    * * *

    돌아가신 조부모님과 짧게 인사를 나누고, 우리 가족은 납골당 주변을 크게 돌았다.

    그리고 다시 도심으로 진입했다.

    죽음이 주는 경건함은 어느새 떠나가고 삶이 주는 역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빌딩과 도로들.

    거리 곳곳에 서 있는 가로수와 나들이를 떠나는 차량들.

    삶은 죽음을 모른 척 외면하며 쉬쉬했고, 죽은 자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세상은 고요하고 조용했다.

    서울 중심부에 도달한 르망이 단독주택이 즐비한 부촌에 접어들었다.

    결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부모님과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사이의 불화를 해결한다.

    외할아버지의 사업이 다가올 IMF에 무너지지 않도록 한다.

    그것이 오늘 내가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엄마, 외할아버지하고 외할머니는 어떤 분이에요?”

    나는 마지막 숙제에 앞서 사전 탐사에 나섰다.

    전생에서 나는 외할아버지를 보지 못했고, 외할머님만 딱 한 번 뵈었을 뿐이었다.

    그것도 내가 병원 흉부외과에서 생활할 때라 외할머니가 직접 병원까지 와서 간신히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엄마가 그 이야기를 안 했구나.”

    어머니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외할아버지는 공부를 엄청 잘하셨어. 신원대학교라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대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셨단다.”

    “…….”

    “대기업에서 전산 관련 업무를 하시다가 증조부님의 사업을 물려받으셨지. 성격이 불같고 말을 험하게 하시지만 근본이 나쁜 분은 아니야. 사람을 살갑게 대하는 법을 모르실 뿐이지.”

    전생에 듣지 못했던 정보에 내 뇌세포가 핑핑 돌아갔다.

    신원대학교라면 나도 졸업한 국공립 대학교였다.

    어쨌든 할아버지가 전산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면.

    내가 괜찮은 아이템을 물어다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흉부외과 의사가 무슨 사업 조언이냐고 누군가는 의심할지 모르겠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의료계 역시 엄연한 산업 분야이자 각종 사업이 치열하게 펼쳐지는 곳이었다.

    회귀를 한 나는 의료 쪽 사업에 관한 괜찮은 소스 몇 가지를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내 조언을 따른다면, 의료 산업 쪽의 큰손이 될 수도 있었다.

    할아버지가 고작 12살인 내 조언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게 가장 큰 문제겠지만.

    어머니는 할머니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할머니 역시 학식이 풍부한 분으로 할아버지가 근무한 대기업에서 같이 일했다고 했다.

    “믿음이가 손재주가 좋은 건 어쩌면 외할머니를 닮아서 그런 걸지도 모른단다. 외할머니 손재주가 끝내주거든.”

    “와, 진짜요?”

    “암. 그렇고말고. 외할머니는 손도 엄청 고우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이야기를 하는 어머니는 조금 들떠 보이고 조금 흥분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번 일을 성공시켜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었다.

    “근데 엄마, 나 또 궁금한 게 있어요.”

    “뭐니?”

    “엄마는 왜 간호사가 되기로 했어요?”

    어머니는 가정이 유복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굳이 간호사라는 고된 길을 택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전생에서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던 것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회귀한 나는 전생의 나보다 조금은 더 성숙해졌다는 뜻이겠지.

    “아, 그거? 엄마가 중학교 때 충수돌기 절제술… 믿음이는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어머니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충수돌기 절제술이 무엇인지를 넘어서.

    충수돌기 절제술을 직접 집도도 할 수 있었지만, 그냥 모른 척 넘어갔다.

    입이 근질거려도 참아야 하는 나이였다.

    “어쨌거나 엄마가 그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간호사 선생님이 엄마를 엄청나게 잘 돌봐 줬단다.

    “…….”

    “그 선생님이 너무 멋있어 보여서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했지. 지금도 후회는 안 한단다.”

    “아, 그렇구나. 엄마 멋있어요!”

    “고마워. 우리 믿음이.”

    “여보. 저기, 집 맞지?”

    아버지가 불쑥 검지로 단독주택 하나를 가리켰다.

    넓고 높은 돌담 위로 주택의 2층 끝자락이 간신히 보였다.

    “응. 맞아.”

    “나도 조금 긴장되는데?”

    “아빠, 괜찮아요. 제가 있잖아요. 제가 지켜 줄게요.”

    내가 천진난만하게 말하자, 부모님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라서 할 수 있는, 아이라서 효과적인 화술이었다.

    조막만 한 아들내미가 부모를 지켜 준다고 하니 어찌 긴장이 풀리지 않을 수 있을까.

    외조부모님 집 앞에서 나와 어머니가 먼저 내렸다.

    어머니가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한 뒤 초인종을 눌렀다.

    어머니를 지켜보는 내가 더 초조할 지경이었다.

    “저, 희애예요.”

    잠시 후 가정부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집 앞으로 나왔다.

    “희애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아주머니, 잘 지내셨죠?”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다 나오려고 하네. 저도 그렇고 어르신들도 그렇고, 아가씨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그래요?”

    “말은 안 하셨지만 전 알 수 있어요. 두 분 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지내셨다니까요. 옆에 있는 아이는 아드님이시죠?”

    “안녕하세요. 이믿음입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호호호, 아가씨를 닮아서 똘똘하고 영민해 보이네요.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오랜만에 아가씨를 뵈었더니 너무 흥분해서 참. 어서 들어오세요.”

    “남편하고 같이 들어갈게요.”

    셔터가 열린 주차장에 차를 댄 아버지가 우리의 품으로 돌아왔다.

    우리 세 가족은 가정부의 뒤를 쫓아 정원을 가로질렀다.

    “저 느티나무는 아직도 있네요?”

    어머니의 시선이 정원 중앙에 있는 느티나무에 머물렀다.

    “아가씨가 좋아하던 나무잖아요.”

    “제가 떠나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 말씀 마세요. 아가씨가 떠난 뒤로 어르신이 더 정성껏 가꿨으니까.”

    현관문이 열리면서 우리 세 가족은 처음으로 외가에 발을 디뎠다.

    현관 앞에는 백발이 성성하고 고집스러운 인상을 풍기는 외할아버지와 자상한 외모의 외할머니가 마중 나와 있었다.

    “…….”

    “…….”

    우리 가족과 외조부모님 사이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폭풍 전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얀 것, 이제 와서 내 집구석엔 왜 들어왔어?”

    외할아버지의 말투는 처음부터 심상치 않았다.

    이거, 내가 빨리 나서지 않으면 뭔가 큰일이 터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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