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21화 (21/257)

21화 제4장 마지막 숙제 (1)

꽃샘추위가 들이닥친 어느 봄날 아침.

아침 조회를 준비하는 전교생들이 운동장에 줄 맞춰 있었다.

아이들은 추위에 떨면서도 옆자리 또는 앞뒤 자리의 친구들과 낄낄거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아이들의 입술이 들썩거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건강해 보이네.’

나는 앞에 서 있는 김요한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김요한의 페이스메이커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경과 또한 좋았다.

애초에 수술 난이도가 높지 않았던 데다 심지어 집도의가 강동욱 교수였다.

먼 훗날, 대한민국 최고의 심장내과의가 되는.

김요한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그게 더 이상하고 황당한 일이라고 해야 할까.

전생에는 세상을 떠났던 아이가 내 손으로 그 삶을 이어 줬다는 사실에 나는 자부심을 느꼈다.

미래에 벌어질 일을 알고 있기에.

그리고 그 일을 막을 힘까지 내가 가지고 있음을 나는 김요한을 통해 다시금 깨우쳤다.

하지만 김요한은 시작에 불과했다.

내가 김요한을 살리기 위해서 했던 처치는 CPR뿐이었다.

그리고 강동욱 교수와 김요한을 연결시킨 것뿐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내 능력에 비해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 싸워야 할 병마, 물리쳐야 할 가증스러운 인물들, 의료계 자체의 적폐 등등.

이것들은 김요한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벽이었다.

나 혼자서 과연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이겨 낼 수 있을까.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세상은 결코 만만치 않으며, 내 뜻대로 돌아가는 일도 없으니까.

하지만 의사라면 응당 병을 무찌르고.

환자를 살리고 의료 환경을 바꿔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전생에 수술 도중 돌아가신 아버지처럼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없게 하겠어.]

그것이 내 초심이었다.

그 초심을 찾고 죽는 날까지 지켜 가라고 의료의 신은 나를 한 살 시절로 되돌려 보냈을 것이다.

다만 앞으로 내가 바꿔 나갈 이야기는 오직 나만 아는 이야기였다.

전생을 경험하고 그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회귀한 나만의 이야기였다.

다른 사람들은 무엇이 어떻게 바뀐 건지 전혀 모르겠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오로지 나의 길을 갈 뿐이다.

예전에는 미처 가지 못했던 나의 길을.

“지금부터 아침 조회를 시작한다. 다들 조용.”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의 입단속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아침 조회.

국민의례, 애국가 부르기, 교장 선생의 훈화 말씀 등이 차례대로 이어졌다.

지루한 의식이 진행되는 가운데, 교장 선생님은 나와 김요한을 호명했다.

이름이 불린 것만으로 느슨했던 의식이 팽팽해졌다.

-믿음아, 이따가 교장 선생님이 상장 수여하실 거니까 이름 불리면 조회대로 올라가.

담임이 미리 언질을 주었기에

나는 당황하지 않고 김요한과 조회대로 올라갔다.

“많은 학생들이 알고 있겠지만, 개교기념일 며칠 전에 6학년 2반에서 큰 사건이 있었어요.”

교장 선생은 우리 반에서 있었던 일을 요약하고 내 활약을 칭찬했다.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과 세상을 배우는 용기에 대해 추가로 설파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이 소개된 신문 1면을 자랑하듯이 흔들기도 했다.

‘사실 자랑을 하고 싶었던 거군.’

나는 교장의 속내를 읽고 피식 웃고 말았다.

물론 그의 속내를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국민학생이 흉부 압박으로 친구를 살린 사례는 전국을 뒤져 봐도, 과거 사례를 뒤져 봐도 없었기 때문이다(적어도 현 시대를 기준으로 하면 말이다).

그래서 이번 사건은 신문은 물론이요, 9시 뉴스에도 보도되었다.

매스컴의 도움을 받은 덕분에 김요한의 수술비 모금액은 무려 천만 원을 넘었고.

‘이번에는 나도 언론을 잘 이용해 먹어야지.’

전생에서 언론의 힘을 실감했던 나였다.

나의 원수이자 숙적인 강태섭 역시 언론으로 만들어진 명의(名醫)였다.

강태섭은 건강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얼굴과 이름을 알렸고, 각종 인터뷰와 강의 요청을 마다하지 않았다.

-과장님, 명의란 무엇입니까?

-너무 간단한 질문이야. 이 교수. 명의란 사람들이 얼굴과 이름을 알아주는 의사지. 다른 사람이 나를 알지 못하면 말짱 꽝이니까.

그때의 나는 순진하게 이렇게 생각했다.

빨리 실력을 키워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야겠구나, 하고 말이다.

하지만 강태섭이 말한 명의는 실력 있는 의사가 아니라.

그저 쇼윈도 의사라는 걸 깨달은 건 먼 훗날의 일이었다.

‘하… 그 새끼 생각을 하니까 또 열 받네. 지금은 펠로우쯤 하고 있으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이 끝났다.

짝. 짝. 짝.

전교생의 우렁찬 박수를 받으며 나는 학교의 정식 상이 아닌 용기상을 받고 조회대를 내려왔다.

그런데 나보다 앞서 걷는 김요한의 보슬보슬한 털옷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후원금으로 구입한 옷이리라.

요한아, 이제 따뜻한 꽃길만 걷자.

* * *

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김요한은 금방 학급의 노른자가 되어 남다른 존재감을 뽐냈다.

아이들은 김요한의 수술 썰(?)에 대해 궁금해했고.

수술을 이겨 낸 김요한을 대단하게 여기겼다.

제일 주목을 받았던 건 당연히 김요한의 그림 솜씨였다.

김요한이 어렵지 않게 그려 내는 만화 캐릭터에 반 아이들은 한마디로 뻑이 갔다.

“요한아, 나도 그림 그려 주면 안 돼?”

“아냐. 내가 먼저야. 내 거 먼저 그려 주면 떡볶이 사 줄게.”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김요한은 행복해 보였다.

처음 받아 보는 친구들의 관심과 애정이 그에겐 너무나 황홀했을 것이다.

나는 그제야 내가 해 온 일에 마침표가 찍혔음을 확신했다.

그래서 후련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섭섭하기도 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집도의로서 수술한 환자가 퇴원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느낌이랄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김요한이 용기를 잃지 않고 제 삶을 용감하게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것뿐이었다.

‘휴우… 다시 시작인가?’

오후 수업이 시작됐을 때, 나는 평소처럼 내 세계에 빠져들었다.

나는 지구에서 가장 바쁜 국민학생이었다.

전생에 꼬인 매듭들이 아직까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김요한이라는 매듭을 풀었다고 해서 내 인생이 평탄해질 리 없었다.

오늘부터는 우리 가족을 옥죄고 있는 최후의 매듭을 풀 예정이었다.

바로 외가 문제였다.

어머니는 가족이 반대한 결혼을 강행하면서 외가와 등을 돌리게 되었다.

아버지가 테이블 데스로 세상을 떠난 뒤에는 더더욱 외가와의 접점을 찾지 못했고.

[거봐. 그 사람하고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젊은 나이에 애 딸린 미망인이나 되고. 부모 속을 까맣게 태우고 나서 네가 손에 얻은 게 고작 그거니?]

어머니는 아마 그런 질타를 두려워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외가 쪽과 쉽게 연락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어머니와 외가가 다시 화해한 것은 내가 흉부외과 레지던트를 마칠 때쯤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잘나가던 외가도 폭삭 주저앉은 뒤였다.

IMF 때부터 휘청휘청하던 외가의 회사가 결국 도산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니까 어머니와 외가는 모든 것을 다 잃은 뒤에야 비로소 화해의 손길을 서로에게 내밀게 된 것이다.

‘기왕 결합한다면 서로 웃을 때 하는 게 좋겠지.’

나는 외가와 우리 가족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든 오해를 불식시키고.

서로 윈윈 하도록 만들 계획이었다.

가족 문제를 모두 해결하고 나면 훌륭한 흉부외과의가 되겠다는 목표에 좀 더 매진할 수 있을 테니까.

상념을 마친 나는 김요한이 그려 준 그랑죠 책받침을 내려다보았다.

땅딸막하지만 동시에 다부져 보이는 로봇이 나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나는 김요한에게 그랑죠가 되었고.

김요한은 내게 그랑죠를 건네주었다.

인생이란 결국 누군가의 그랑죠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그런 유치한 생각을 해 봤다.

* * *

그날 저녁.

영어 공부를 마친 나는 거실로 나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먼저 식탁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은 어머니의 얼굴을 보기가 편해진 편이었다.

데이, 이브닝, 나이트.

간호사의 업무는 3교대로 숨 쉴 틈 없이 돌아가지만, 책임 간호사가 된 어머니는 데이와 이브닝 근무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믿음아, 이거 볼래?”

어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내게 오려 둔 신문을 내밀었다.

[국민학생, 심폐소생술로 학급 친구를 구하다!]

조회 시간, 교장 선생이 흔들었던 신문의 일부를 스크랩해서 챙겨 둔 모양이었다.

“어때? 너무 멋있지 않니? 병원 선생님들이 네 칭찬을 그렇게 하더라. 모전자전이라고.”

“저, 잘했어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그럼. 사람을 살렸는데 당연하지. 우리 믿음이 벌써 유명인이 다 됐어.”

“저는 그냥 드라마에서 본 대로 따라만 한 건데…….”

“어쨌거나 대단해. 우리 복덩이.”

잠자코 있던 아버지도 자랑스럽다는 말투로 나를 치켜세웠다.

다른 사람이 칭찬을 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부모님이 칭찬을 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 누구도 아닌, 부모님께 인정을 받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신문 기사까지 반찬으로 삼아 우리 가족은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 내내 웃음꽃이 그칠 줄 몰랐다.

단란한 우리 가족은 꽃길만 걷고 있었다.

전생과 다른 전개를 맞이하면서 앞으로 또 어떤 고난이 닥칠지는 모르겠지만, 잘 이겨 낼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믿었다.

“근데요. 저요.”

식사가 끝날 무렵, 나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이제부터 부모님의 역린을 건드려야 했다.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었다.

“왜 그러니? 믿음아?”

“저…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 보고 싶어요.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 있는 게 부러웠어요.”

내 한마디에 순식간에 주위가 고요해졌다.

부모님은 서로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바쁘게 움직이던 수저도 어느새 식탁에 내려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바람은 적어도 표면상으로 그리 특이한 것이 아니었다.

회귀하고 12년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외가에 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은 명절에 고향도 내려가고 그러던데…….”

나는 어렵지 않게 우울한 목소리를 연기해 냈다. 1살부터 다져 놓은 연기력에 부모님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믿음아, 정말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

침묵을 지키던 어머니가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네, 인사도 하고 앞으로 세뱃돈도 받고 싶어요.”

“알았다. 아빠랑 이야기해 볼게.”

식사가 끝난 뒤 아버지와 어머니가 안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부모님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부모님이 외가 사람들을 만날 각오만 한다면.

갈등은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을지 몰랐다.

내가 나중에 어머니의 입을 통해 들은 진실은 바로 이것이었다.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외가와 연락해서 잘못된 관계를 바로잡고 싶어 했고, 외가 쪽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놈의 자존심을 굽히기 싫어서 서로 손을 내밀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따라서 내가 가교 역할만 잘한다면.

집안 문제를 일찍 해결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끼이이익.

문 경첩 소리와 함께 상의를 끝낸 부모님이 거실로 나왔다.

방금 전까지 하하호호, 했던 두 분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휴우… 믿음아, 그동안 믿음이한테 말을 못 했는데 엄마, 아빠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랑 사이가 안 좋아. 너는 영특하니까 대충 눈치는 채고 있었을 거야.”

어머니가 차분하게 운을 뗐다.

“그래서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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