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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20화 (20/257)
  • 20화 제3장 나는 국민학생이다 (8)

    김남혜는 식판을 들고 아들이 있는 병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대학 병원이라는 곳이 이렇게 크고 세련된 곳인 줄 이전에는 미처 몰랐다.

    그녀의 눈에 닿는 모든 것이 번쩍번쩍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재래시장과 허름한 집만 오갔던 그녀는.

    이 큰 병원에 있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했다.

    “보호자분, 식사 맛있게 하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스쳐 가던 간호사가 던진 인사에 김남혜는 습관처럼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그녀의 채소를 사가는 손님에게 늘 하던 것처럼.

    그런데 평소보다 허리를 많이 숙였던 탓에 하마터면 국에 얼굴을 처박을 뻔했다.

    어둑어둑하게 물들어 가는 창가를 지나쳐 병실에 도착했다.

    아들은 벌써 침상에 딸린 테이블을 펼쳐 놓은 상태였다.

    “배고플 텐데 먼저 먹고 있으렴. 엄마 것도 가져올 게.”

    하지만 아들은 그녀가 돌아오고 나서야 수저를 들었다.

    맛없기로 정평이 나 있는 병원 밥을 아들은 맛있게 먹었다.

    놀랍게도 그녀가 차려 준 허름한 식단보다 병원 식단이 조금 더 나았기 때문이다.

    아들이 장조림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김남혜는 자신의 장조림을 반쯤 덜어 아들 식판에 올려놓았다.

    ‘저를 언제까지 시험하실 생각이십니까?’

    김남혜는 신께 하소연했다.

    안 그래도 못 해준 게 많은 아들이 졸지에 심장병을 얻어 수술까지 받게 되었다.

    아들에게 닥친 일이 너무 가혹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심장병을 앓더라도 차라리 자신이 앓는 게 더 옳았다. 이 어리고 가녀린 아이가 대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맛있게 잘 먹었니?”

    “네, 엄마.”

    “물도 한 잔 마시고.”

    아들에게 물을 챙겨 준 그녀는 식판을 수거함에 돌려놓고 병실로 돌아왔다.

    “요한아, 믿음이라는 친구하고는 친하니?”

    김남혜는 이믿음이라는, 아들의 친구가 궁금했다.

    아들의 목숨을 구하고 병원까지 동행했던 영특한 아이.

    그 아이는 오늘 오후 다시 병실을 찾았다.

    학교에서 아들의 수술비 모금이 있을 것이고, 신문을 통해 전국적인 지원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전국적인 지원은 무슨 뜻이니?

    -기자 아저씨가 요한이 아팠던 것까지 기사로 내보낸대요. 근데 제가 기자 아저씨한테 혹시 후원 같은 걸 받을 수 있느냐고 물어봤는데, 받을 수 있대요. 자원 봉사 단체랑 연결시켜 준댔어요.

    -…….

    -조만간 후원 단체 사람들이 아주머니를 찾아올 거예요. 계좌번호도 알려 달라고 할 거고요.

    이믿음의 똑 부러진 행동과 말투에 김남혜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이믿음이 말한 모든 것들이 이믿음의 주도로 이뤄졌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믿음은 알면 알수록 어른 같은 아이였다.

    “그게… 원래요.”

    “원래?”

    “그렇게 친하진 않았어요. 걔는 저한테 잘해 줬는데 저는 걔를 싫어했어요.”

    아들이 죄지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걔가 너무 잘나서 질투했나 봐요. 근데 어제부터 진짜 친구로 지내기로 했어요.”

    아들의 수줍은 고백은 그녀의 가슴에 상처를 주었다.

    아들의 자격지심이 가난한 집안 형편에서, 그녀의 무능력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기에.

    “그랬구나. 좋은 아이니까 친하게 지내렴.”

    그러나 김남혜는 상처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가 아파하면 아들도 아파할 테니까.

    “엄마, 나 그림 그려도 돼요?”

    “입원한 마당에 그림은 무슨 그림이니. 잘 먹고 잘 자고 푹 쉬어야 돼. 곧 수술도 받아야 하는데.”

    “싫어요. 나 그림 그릴래요.”

    엄마 말이라면 죽는시늉도 하는 아들이 오늘따라 막무가내였다.

    무조건 그림을 그리겠다는 거였다.

    “엄마 화내는 거 보고 싶어?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

    “엄마, 근데요. 엄마가 예전에 그랬잖아요. 사람은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돌려줘야 한다고.”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니? 그게 그림하고 무슨 상관인데.”

    “상관있어요. 그래서 저는 꼭 그림을 그려야 돼요.”

    아들이 단호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설명을 듣고 보니 이유가 그럴싸했다.

    자신이 아들에게 했던 말을 부정하는 것 또한 교육에 좋지 않아 보였고.

    “대신 너무 오래 그리면 안 된다. 요한이 넌 환자야. 그걸 잊으면 안 돼.”

    “네, 무리는 안 할게요.”

    아들은 스케치북을 펼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비록 조금 전까지 혼내기는 했지만 진지하게 열중하는 아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아들이 시원시원하게 그려 나가는 그림처럼.

    앞으로 그녀와 아들이 맞닥뜨릴 삶의 길도 시원시원하게 뚫렸으면 좋겠다고 김남혜는 희망했다.

    * * *

    나는 좀처럼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원래 집중을 안 하는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오늘은 유독 심했다.

    오늘은 요한이가 페이스메이커를 삽입하는 날이었다.

    사실 페이스메이커 삽입술은 그리 난이도가 높은 수술은 아니다.

    수술 시간은 대략 1~2시간.

    전신 마취가 아닌 부분 마취로 진행되며, 왼쪽 앞가슴을 절개한 뒤 인공제세동기를 삽입한다.

    혈관을 통해 기계의 전극선을 심장으로 유도하면 끝난다.

    가슴에 기계를 달아 놓은 채 살아야 한다고?

    얼핏 생각하면, 일상이 엄청나게 불편할 것 같지만 예후는 의외로 좋은 편이었다.

    목욕은 당연히 가능하고 운동 또한 등산 정도도 충분히 가능했다.

    인공제세동기 상태 확인을 위한 정기적인 검진.

    MRI 촬영 주의 및 자기장을 뿜어내는 공항검색대 통과 주의 같은 주의 사항만 지키면 될 뿐이었다.

    ‘별일이 없긴 할 텐데…….’

    머리로는 알고 있는 것들이 이상하게 가슴에는 별로 와 닿지 않았다.

    이게 바로 집도의와 보호자의 차이인지도 몰랐다.

    이를테면 충수돌기 절제술을 생각해 보자.

    소화기외과 서전에게 충수돌기 절제술은 30분 만에 끝낼 수 있는 비교적 간단하고 손쉬운 수술이다.

    하지만 환자를 수술대에 보낸 보호자는 도저히 외과의처럼 생각할 수가 없었다.

    혹시 수술이 잘못되는 건 아닐까.

    의료 사고가 벌어지진 않을까, 하고 노심초사하고 전전긍긍하게 된다.

    수술은 하나지만 수술을 대하는 입장이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도 달라지는 법이다.

    참고로 전생에서 내가 서전으로서 가장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었던 건 보호자와 환자 관리였다.

    테이블 데스.

    그러니까 수술 중에 아버지를 잃었던 내가 아닌가.

    그래서 집도를 맡은 환자와 보호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잘 마무리되는 그림이라 다행이네.’

    학교 차원의 수술비 모금이 진행되어 수익이 꽤 모였다고 담임선생님에게 들었다.

    이틀 전, 하교 후에 만난 기자와의 인터뷰도 무사히 끝냈는데, 기자를 통해 후원 단체와 김요한을 연결시켜 주기도 했다.

    학교 모금과 후원 단체 모금을 합치면 수술비를 넘어 생활비까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전생에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던 동창생을 결국 구해 내었다.

    그런 생각에 나는 뿌듯함을 느꼈다.

    이 뿌듯함은 내게 수술을 받은 환자가 완치 후 퇴원하는 것만큼 충만한 뿌듯함이었다.

    그리고 이 뿌듯함이야말로 내가 고된 흉부외과의 생활을 계속 이어 나갈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었고.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뻐하거나 들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돌이켜 보건대 내 손에서 빠져나간, 반대로 내가 바보처럼 손을 놓아 버린 목숨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이번 생에는 결코 그들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 일이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환생을 통해 얻은 지식과 타고난 끈기로 극복해 나갈 것이다.

    설혹 냉소적인 누군가는 나를 비웃을지 모르겠다.

    ‘사람은 어차피 죽어. 그렇게까지 발버둥치면서까지 살 필요가 있어?’라고 되물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한 치도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인간은 그래야만 한다고.

    연명 치료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긴 하지만.

    그런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인간은 천수를 누리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에게 삶을 반납하기 전까지 인간은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

    내 의지로 태어난 것이 아니니 억울해서라도 내 의지대로 마음껏 살아 봐야 하지 않겠는가.

    딩동댕동~.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수업 종료 종이 울렸다.

    “야, 비듬. 나랑 6반에 가자.”

    까불이가 내 자리로 다가와 6반행을 재촉했다.

    “왜?”

    “어제 지환이한테 딱지 다 털렸어. 네가 복수 좀 해 줘.”

    “으음… 그래. 가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6반으로 향하는 딱지 원정대의 길에 동참했다.

    생각으로 무거웠던 머리를 가볍게 하기에는.

    또래의 아이들처럼 노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나는 서랍에 넣어 둔 동그란 딱지를 호주머니에 쑤셔 놓고 6반으로 이동했다.

    과연 남자아이들 몇몇이 모여서 딱지 넘기기를 하고 있었다.

    딱지 넘기기는 딱지치기와 조금 달랐다.

    일단 딱지의 형태부터 달랐다.

    딱지치기를 할 때 쓰는 딱지는 네모 형태지만 딱지 불어 넘기기에 쓰는 딱지는 원형이었다.

    딱지를 넘기는 방식 또한 달랐다.

    딱지치기는 말 그대로 딱지를 쳐서 뒤집는 것이고, 딱지 넘기기는 ‘후’ 하고 입바람으로 딱지를 뒤집는 것이었다.

    “정지환, 나랑 한판 하자.”

    “오! 이비듬, 네가 우리 반까지 원정 올 줄은 몰랐다?”

    탐욕으로 가득 찬 정지환의 눈빛이 딱지로 가득 찬 내 호주머니를 더듬었다.

    녀석의 넉넉한 볼살은 개구리 왕눈이의 투투처럼 심술궂어 보였다.

    “우리 반에선 비듬이가 딱지 넘기기 왕이거든? 넌 죽었어.”

    “넌 빠져. 딱지도 없는 주제에.”

    정지환이 까불이를 단번에 제압하고 자리를 만들었다.

    “후!”

    “파!”

    서로의 입바람이 교차하면서 쌓아 놓은 딱지가 조금씩 무너지고 쓰러지고 줄어들기 시작했다.

    2반 딱지 왕과 6반 딱지 왕의 대결이 펼쳐지자, 아이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분위기가 점점 달아올랐다. 나와 정지환의 대결은 피만 흐르지 않았을 뿐이지 격렬한 전쟁이었다.

    “와! 우리가 이겼다!”

    “난 우리가 이길 줄 알았다니까.”

    아이들의 환호성과 함께 최후의 한판에서 승부가 갈렸다.

    패자는 나였다.

    내 호주머니를 가득 채웠던 딱지는 어느새 텅 비어 버렸다.

    정지환은 우쭐한 표정으로 치켜들었던 엄지를 바닥으로 내렸다.

    승자의 여유로운 세리머니였다.

    반면 까불이와 나는 반으로 돌아가는 내내 축 처진 어깨를 한 채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패자의 전형적인, 쓸쓸하고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으음… 회귀했다고 해서 딱지 넘기기까지 무적은 아니었다.

    * * *

    어느 날 아침.

    등교한 나는 짝궁 김지원과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김지원은 최근에 자신이 촬영한 드라마가 방영하는데 그걸 꼭 봐야 한다고 내게 신신당부하는 중이었다.

    “야, 이믿음. 내 말 듣고 있지?”

    김지원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얹었다.

    여자의 동물적인 직감은 국민학생 때부터 발달하는 걸까.

    김지원은 내가 자기 말을 흘려듣고 있다는 것을 단박에 눈치챘다.

    “아니, 다 듣고 있었어.”

    “내가 나오는 드라마 이름이 뭔데?”

    “야망의 눈동자.”

    “내 이름은?”

    “예원이.”

    “칫, 다 기억하네.”

    “드라마에서 예쁘게 나오면 뭐하냐? 성격은 대장군인데.”

    “너, 씨. 조용히 안 해?”

    까불이가 어느새 나타나 까불거리자, 김지원이 주먹을 빙빙 돌렸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화로운(?)일상이었다.

    나는 비어 있는 김요한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며칠 전 담임선생님, 그리고 친구들 몇 명과 김요한의 문병을 갔다.

    수술은 당연하게도 별 탈 없이 끝났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학교에서 모금한 수술비도 전달했다.

    수술을 마친 김요한은 건강해 보였는데 이상하게 며칠째 등교를 하지 않고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내가 너무 마음을 놓고 있었던 걸까.

    김요한을 향한 걱정이 커가는 중에 때마침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김요한이 교실로 복귀한 것이다.

    “요한아!”

    나는 김요한에게 다가가 살갑게 아는 척을 했다.

    김요한은 수줍게 안녕이라고 화답했다.

    반 아이들도 김요한이 돌아온 것을 알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김요한의 안부를 걱정해 주었다.

    이런 관심이 처음이라 부담스러웠는지 김요한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학교 안 나와서 걱정했어.”

    내가 김요한에게 말했다.

    “아픈 건 아니고 정리할 게 좀 있어서… 대단한 건 아니었어.”

    “그럼 다행이고.”

    “이거 받아. 선물.”

    김요한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내게 건넸다.

    멀끔하게 코팅된 종이 아래 멋들어진 그랑죠가 그려져 있었다.

    책받침으로 쓰기 좋은 것이었다.

    “네가 예전에 그랑죠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래서 선물로 그려 봤어.”

    예전에 내가 했던 말을 김요한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아픈 와중에도 그림을 그려 준 정성.

    이 두 가지가 내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고마워. 잘 쓸게.”

    나는 감동으로 번지는 눈물을 감추며 건네받은 책받침을 내려다보았다.

    지구상에 단 하나뿐인 그랑죠 책받침을 받기 위해서 나는 그렇게 김요한을 살렸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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