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제3장 나는 국민학생이다 (4)
‘뭐야, 진짜 짜증 나!’
또각!
몽당연필을 꾹꾹 눌러 그림을 그리던 중, 연필심이 부러졌다.
순간 창문을 못 열게 한 이믿음에 대한 화보다 걱정이 앞서는 김요한이었다.
이번 주는 지금 손에 쥔 몽당연필로 버텨야 했다.
물론 연필을 사지 못할 만큼 김요한의 가정 형편이 가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김요한은 어머니가 시장에서 고생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꽃샘추위에 칼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야채 값을 깎아 달라고 드잡이하는 손님들을 상대해야 하는 어머니의 고충을 알았다.
그래서 연필을 함부로 쓰지 않았다.
김요한이 먹고 자고 쓰는 것에는 모두 어머니의 눈물이 배어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마를 날이 없었던 어머니의 눈물을 김요한은 조금이나마 덜어 주고 싶었다.
‘쟤는 대체 왜 이러지?’
김요한은 뒷자리에 앉은 이믿음이 보고 싶었지만 보지는 않았다.
눈을 마주치면 왜인지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아서.
2주 전부터 이믿음은 자신에게 이상할 정도로 살갑게 굴었다.
쉬는 시간에 괜히 그의 주변을 어슬렁거린다거나.
그림을 그려 달라고 끈질기게 조른다거나.
같이 놀자고 반강제로 손을 잡아끈다거나 등등.
이믿음의 그런 행동이 김요한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잘생긴 얼굴과 환한 미소.
시험만 쳤다 하면 전교 1등에 운동도 잘하고 교우 관계까지 만점인 아이가 왜 자신과 친해지고 싶어 하겠는가.
이믿음에겐 그가 알지 못하는 어떤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것 말고는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다음 주까지 아껴 쓰자.’
김요한은 가방에서 새 연필을 꺼내 칼로 깎았다.
사각사각 하는 소리에 마음이 절로 편안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왼쪽 가슴이 찌릿하게 울렸다. 가슴에 마치 천둥 번개가 떨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으으으윽!”
입술이 저절로 벌어지고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태어나서 이렇게 아픈 적은 처음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 가고, 사지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느닷없이 닥쳐온 통증에 김요한은 속수무책이었다.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다.
“요한아, 괜찮아?”
이믿음이 허겁지겁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를 내려다보는 이믿음의 눈빛에는 잔뜩 걱정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아파도 김요한은 이믿음에게만큼은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
“됐… 됐어. 나 혼자 양호 선생님한테 갈래.”
“무슨 소리야?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부축해 줄게.”
“시… 싫다니까!”
쿵!
이믿음과 실랑이를 하며 엉기적엉기적 걷던 김요한은 끝내 교실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 * *
‘뭐야? 이건?’
나는 쓰러지는 김요한을 간신히 낚아채서 바닥에 반듯이 눕혔다.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모든 것이 내 예상과 어그러졌다.
김요한이 쓰러질 이유 중 가장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 바로 아나필락시스 쇼크 아니었던가.
그런데 교실의 창이란 창은 다 닫혀 있었고, 벌이나 벌레 따위가 교실에 날아다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김요한은 갑자기 고통스러워하다가 쓰러지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곤혹스러웠지만, 나는 평정심을 유지했다.
외과의에게 필요한 가장 첫 번째 덕목.
그것은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의사가 초조해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면 환자나 보호자는 대체 누구를 믿고 기댄단 말인가.
“김요한, 괜찮아?”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김요한의 어깨를 세차게 흔들었다.
TV 전원이 꺼지듯 김요한의 의식은 어느새 맥없이 꺼져 있었다. 흉곽을 관찰하고 코에 얼굴을 갖다 대어 보니 숨을 쉬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촉지한 목 동맥에서는 맥박이 느껴지지 않았다.
전형적인 심장마비 증상이었다.
초등학생에게 심장마비라?
특이한 케이스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으나 이성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해야 할 일은 명확하고 단순했으며 내가 지난 생에서 수백 번이나 경험한 것이었다.
드르르륵!
나는 바로 옆 교실로 달려가 거칠게 문을 밀었다.
“선생님! 요한이가 쓰러졌어요. 119에 신고해 주세요.”
“뭐라고?”
“요한이가 쓰러졌다니까요? 119에 신고해 주세요. 빨리요!”
내 말에 국어 선생님은 놀란 부엉이 눈을 했다.
옆 반 학생들도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거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주변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반으로 돌아온 나는 김요한에게 CPR(심폐소생술)을 실시했다.
퍽! 퍽! 퍽!
깍지를 낀 손바닥이 김요한의 가슴 정중앙을 찍어 눌렀다.
그럴 때마다 김요한의 가녀린 육신이 뭍에 올라온 생선처럼 펄떡거렸다.
하지만 나는 손바닥으로 주는 압력을 조금도 낮추지 않았다.
심장이 멈춰 있다.
그리고 멈춘 심장에는 혈액이 고여 있다.
흉부 압박은 손바닥으로 심장을 압박해서 심장에 고인 혈액을 전신으로 퍼뜨려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 심장을 애매한 힘으로 압박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너무 어려서 그런가?’
흉부 압박을 고작 한 사이클 끝냈음에도 피로가 밀려왔다.
숨이 거칠어지고 팔이 부르르 떨려 왔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는 법.
나는 내친김에 김요한의 가슴께를 주먹으로 3회에서 4회 정도 강하게 내리쳤다.
퍼어억!
퍼어억!
퍼어억!
precordial thump(흉부타격법).
실전과 해부학에 능통한 흉부외과의만이 할 수 있는 심폐소생술의 비기.
흉부타격법이란 전기 자극을 주는 제세동기의 역할을 주먹으로 직접 펼치는 처치법이다.
흉부타격법으로 발생시킬 수 있는 전극은 2~5줄.
이를 반복하면 심장이 정상 리듬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이어서 나는 김요한의 고개를 젖혀 기도를 개방한 뒤 손으로 코를 막고 인공호흡을 실시했다.
흉부 압박과 흉부 타격, 그리고 인공호흡까지.
세 가지 사이클을 반복하면서 펼치고 있는데, 어느새 옆 반 국어 선생님이 내게 다가왔다.
“미… 믿음아, 대체 어떻게 된 거니?”
선생님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겁이 많은 선생님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모… 모르겠어요…….”
나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보기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CPR은 체력 소모가 극심했다.
몇 사이클만 반복해도 속옷까지 땀에 푹 젖고 숨은 턱끝까지 차오른다.
“선생님이 119에 신고는 했거든? 곧 구급 대원이 도착할 거야.”
“…네.”
나는 혼자서 CPR을 도맡았다.
그게 옳았고, 그게 가장 효과적이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성인보다는 전직 흉부외과의였던 국민학생인 내가 이 상황에 더 도움이 될 테니까.
다만 보는 눈이 있는지라 흉부타격법은 이때부터 처치에서 제외시켰다.
‘빌어먹을!’
문제는 내 CPR이 전문적이고 체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요한의 의식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김요한의 감긴 눈꺼풀은 올라갈 줄 몰랐고, 심장은 다시 뛸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도 내가 체육 시간에 남았길래 이 정도가 아닌가.
전생에도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김요한의 죽음은 거의 필연적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내가 있는 이상 순순히 죽게 내버려 두진 않을 거야.’
육신이 비명을 질렀으나 나는 김요한을 살리겠다는 집념으로 버텼다.
의사는 병을 고치는 사람인 동시에 저승사자를 물리치는 사람이니까.
위이이잉!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두 명의 구급 대원이 스트레처카를 끌고 교실 앞까지 달려왔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하아… 하아…….”
“하아… 하아…….”
4인의 가쁜 숨이 한데 어우러져 묘한 리듬감을 만들어 냈다.
혼신을 다한 내 CPR로 간신히 의식을 되찾은 김요한의 호흡.
CPR로 거칠어진 내 호흡.
부리나케 달려온 구급 대원의 호흡이 비로소 한자리에서 조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구급 대원이 도착할 때쯤 김요한은 의식을 회복했다.
그럴 만한 체력만 남아 있었다면, 나는 두 팔을 천장까지 들어 올리고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을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끈질긴 관찰과 관심 덕분에 김요한을 살리는 데 성공했으니까.
나의 노력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구급 대원이 교실을 훑어보곤 다급하게 물었다.
“제… 제가 알아요.”
나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친구가 가슴을 움켜쥐면서 쓰러졌어요. 어깨를 흔들어도 의식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TV에서 본 대로 심장을 꾹꾹 눌렀어요. 그랬더니 친구가 다시 살아났어요.”
나는 순진무구하게 대답했다.
아이가 어른을 조종하는 법은 간단했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다 어디에서 본 대로 따라 한 거예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른은 절대로 아이를 의심할 수 없었다. 전직 흉부외과의로 한 살부터 다시 살아온 나의 노하우라면 노하우였다.
“애야, 괜찮니?”
“가슴이… 너무 아파요.”
김요한이 모기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친구가 가슴을 눌러서 그런 거란다. 나쁜 일을 한 건 아니고 오히려 처치를 잘해서 그런 거지. 또 아픈 데는 없니?”
“가슴만 쑤셔요.”
간신히 죽음의 고비를 넘긴 김요한의 눈동자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초등학생이 심장마비로 쓰러졌다가 막 의식을 차렸으니 얼마나 무서울까.
나는 김요한의 곁에 앉아서 김요한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으아아앙.”
김요한이 그제야 울음보를 터뜨렸다. 나는 김요한이 더 울 수 있도록 일부러 김요한을 품에 안았다.
느낀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
이것은 건강한 눈물이었다.
“친구를 살린 게 너구나. 정말 대단해. 설마 초등학생이 CPR까지 할 줄이야.”
“그냥 친구를 살리고 싶어서 TV에서 본 대로 했어요.”
“잘했다. 네 용기가 친구를 살렸어. 잠깐, 그러고 보니 네 이름이 이믿음이니?”
“네, 맞는데요.”
“아저씨랑 인연이 있구나. 유치원에서 네 친구가 젤리 때문에 질식한 적이 있잖아. 그때 출동했던 아저씨가 바로 나란다.”
구급 대원이 활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기특한 녀석.”
김요한이 의식을 되찾으면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본래라면 김요한은 담임선생님과 구급차를 타고 가까운 병원으로 이송되는 게 맞았지만, 나는 김요한과 동행하겠다고 당차게 선언했다.
-제가 없으면 친구가 불안해할 거예요.
설득력 있는 한마디에 담임선생님은 물론이고, 구급 대원까지 단번에 납득하고 말았다.
실제로 의식을 찾은 뒤 김요한은 어미닭에게 매달리는 병아리처럼 내 곁에 딱 달라붙어 있었고.
위이이잉~.
구급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학교 운동장을 벗어났다.
조수석에는 소식을 듣고 합류한 담임선생님이 앉았고 뒷좌석에는 나와 혹시 모를 응급 상황에 대비해 구급 대원이 앉아 있었다.
“무서워.”
“괜찮아. 나도 있고, 119 아저씨도 있잖아.”
나는 김요한의 머리를 쓸어 주며 안심시켰다.
전생과 달리 김요한은 저승사자를 피해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순전히 나만 아는 이야기였지만, 상관없었다.
인생이란 원래 나만 아는 이야기의 집합체가 아니던가.
다만 김요한을 회생시킨 것은 내심 뿌듯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슴에 드리운 먹구름을 온전히 걷어 내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지.’
중장년도 아니고 청년도 아니고 초등학생에게 심장마비가 오는 것은 특별한 케이스였다.
심장마비란 일반적으로 심혈관이 좁아진 성인에게서 나타나는 것이기에.
혹시 김요한은 자신과 어머니조차 모르는 선천성 심질환을 가지고 있는 걸까.
현재로서는 그런 추측이 가장 타당해 보였다.
병원에 도착해서 자세한 검사를 받아 본다면 김요한이 쓰러졌던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으리라.
김요한을 다독이며 나는 창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가로수와 상가와 자동차들이 훅훅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꺼지지 않은 요란한 사이렌 소리는 고막을 찌르며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했다.
김요한에게 발생한 심장마비의 원인.
그것을 명확하게 밝힐 때까지는 그 어떤 것도 끝난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