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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12화 (12/257)

12화 제2장 나는 유치원생이다 (7)

고래를 잡은 승우는 유치원 수업 내내 불쌍해 보였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아빠 다리를 못 하고 다리를 쭉 펴고 앉았다.

서 있을 때는 바보처럼 자세가 엉거주춤했다.

본인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인상을 찌푸리는 건 기본이었다.

‘이건 불쌍해도 어쩔 수 없구나.’

제아무리 잘나갔던 흉부외과 서전이었던 나라도 지금의 승우에겐 별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참고로 승우의 고통은 비단 승우만의 것이 아니었다.

이 시대의 남자아이들이 모두 겪어야 하는 숙명 같은 것이었다.

남자들이 군대에 가야 하는 것만큼이나 포경수술은 필수적인 코스였으니까.

아마 2010년대 후반쯤은 되어야 포경수술이 의무인 늪에서 간신히 벗어났던가.

가만, 그러고 보니…….

나도 국민학교에 올라가면 포경수술을 받겠군.

환생을 해도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나는 바르르 몸을 떨었다.

동화책 읽기가 끝나고 찾아온 자유 시간.

“믿음아, 나 아까 머리 다쳤어.”

김지원이 울상을 하곤 나를 찾아왔다.

대뜸 머리부터 들이밀었다.

승우 사건 이후로 몇몇 아이들은 조금만 다치면 선생님이 아니라 나부터 찾곤 했다.

졸지에 유치원 꼬마 의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조금 찢어졌네.’

김지원의 정수리 근처에 작은 열상이 있었는데, 유치원 선생에게 이미 소독을 받은 상태였다.

그대로 둬도 상관은 없다만 봉합하지 않으면 살이 아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의원에 가기도 애매한 게.

의원에 가서 부분 마취를 하고 봉합사로 봉합을 하는 과정이 어린 김지원에겐 그리 유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봉합사를 제거하기 위해 병원을 한 번 더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었고.

이럴 때 좋은 방법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봐줄까?”

“할 수 있어?”

“응.”

김지원을 창가에 앉히고, 나는 화장실에 가서 손을 깨끗하게 씻었다.

돌아와서 김지원의 등 뒤에 자리를 잡은 뒤 머리카락 꼼을 시작했다.

머리카락 꼼이란 머리카락을 봉합사로 삼아 머리의 상처를 꿰매는 방법이었다.

마취가 필요 없다는 점.

봉합사를 제거하는 것과 달리 매듭을 삼은 머리카락만 잘라 내면 된다는 점.

이 두 가지가 가장 큰 매력이었다.

단, 머리카락이 적거나 없는 사람에겐 사용할 수 없다는 단점도 존재하긴 했다(나는 흉부외과 봉합술뿐만 아니라 다른 과의 봉합술도 많이 알고 있었다. 신수술법을 개발할 때 여기저기서 조언을 구한 덕분에).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나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김지원의 상처를 야무지게 꿰매 나갔다.

인형 눈을 꿰맬 때도 느꼈는데, 전성기의 손놀림과 지금의 내 손놀림은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다.

단지 손이 작아서 불편할 뿐.

‘지금 생각하면 억울하네. 진짜.’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렇게 솜씨 좋은 내가 인턴 때부터 레지던트 때까지 폐급 소리를 들었다니…….

과거 내가 손재주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건 타고난 새가슴 때문이었다.

의대에서 모형으로 실습할 때만 해도 나는 교수님의 칭찬과 동기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런데 막상 인턴이 돼서 환자에게 주사나 메스를 대려고 할 때 문제가 생겼다.

손가락은 빳빳하게 굳었고,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내 실수로 환자가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심리적인 요인이 내 재능의 날개를 꺾어 버린 셈이다.

다행히 수전증 문제는 레지던트 4년 차가 끝날 때쯤 완벽하게 극복하긴 했다.

역설적으로 내 수전증을 고쳐 준 사람은 악마 강태섭이었다.

새로 부임한 강태섭이 나를 믿어 준 덕분에 나는 나를 믿게 되었다.

결과를 놓고 보면, 그로 인해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지긴 했지만 말이다.

‘이제 폐급은 청산이지.’

수전증의 원인을 깨달은 나는 더 이상 손을 떨 이유가 없었다.

이번 생에 인턴 생활은 아마 비단을 깔아 놓은 듯 편안할 것이다.

“끝났어.”

나는 김지원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뗐다. 내가 보기에도 흡족한 땀이 만들어졌다.

의료용 본드로 땀을 고정시키면 더 좋았겠지만, 상처가 작으니 이 정도만 해도 괜찮을 것이다.

“벌써? 하나도 안 아팠는데?”

“안 아프게 했으니까.”

“고마워. 믿음이 너는 진짜 다른 애들이랑 다른 것 같아.”

“아냐. 근데 앞으로 하루 이틀 정도는 머리 감으면 안 돼.”

“왜? 선생님도 감지 말라고 하던데.”

“물에 닿으면 세균이 번식해서 염증이 생길 확률이 높아.”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그냥 안 좋대.”

나는 더 자세한 설명은 그만두기로 했다. 말을 해도 김지원이 알아들을 것 같지 않았다.

“믿음아.”

“왜?”

“머리 못 감으면 나 머리 땋아 주면 안 돼? 저런 머리해 보고 싶은데.”

김지원이 검지로 가리킨 것은 선반에 전시된 공주 인형이었다.

공주 인형의 머리는 디즈니의 공주처럼 화려하게 땋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전직 흉부외과 의사가 치료도 아니고 유치원생 머리나 땋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너무 심각한 재능 낭비가 아닌가?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형을 손에 쥐고 헤어스타일을 꼼꼼하게 살폈다.

갑자기 도전 정신이 생기는 건 왜일까.

* * *

“나도 해 줘! 나도 해 줘!”

“안 돼. 내가 먼저야.”

유치원에서는 다시 한번 난리가 났다.

내가 김지원의 머리를 공주처럼 땋아 주자, 유치원 여자아이들이 난리를 피웠다.

자기들도 예쁘게 머리를 땋아 달라는 것이다. 나는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으로 승우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너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내가 다 혼내 줄게. 나, 우리 유치원에서 힘 제일 세.

나를 지켜 주겠다고 했던 승우는 애써 나의 눈빛을 피하고 있었다.

고래를 잡힌 승우는 머리카락을 잃은 삼손과 같았다.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마침 하원 시간이 다가왔다는 점이었다.

집이 가까워서 혼자 하원하는 김지원과 함께 유치원을 얼른 빠져나왔다.

명목상으로는 김지원을 집에 데려다주고 유치원에 돌아오겠다는 것이었다.

‘의외의 교훈을 얻었어.’

방금 겪은 난리 통을 회상하며 나는 새로운 깨우침을 얻었다.

사람이 너무 잘나도 안 된다는 것이다.

잘난 사람은 필연적으로 주목을 받고, 그 주목은 주목을 받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유치원에서 겪은 소란은 병원 생활에서도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었다.

서 교수님이 아주 좋은 본보기였다.

당시 서 교수님은 부교수였는데, 직급으로 따지면 강태섭 과장 바로 아래였다.

서 교수님은 응급 상황을 걱정해서 병원 근처에 숙소를 얻을 정도로 열혈 서전이었다.

물론 열정만큼 실력도 뛰어난 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잘난 서전을 강태섭이 가만히 눈 뜨고 볼 리 없었다.

강태섭은 서 교수님의 수술 성공률이 낮다는 이유로 서 교수님을 단칼에 쳐냈다.

서 교수님이 다른 의사들이 기피하는 위독하고 어려운 환자만 맡아서 수술을 한다는 사실은 쏙 빼놓은 채.

‘너무 뛰어나도 안 돼. 적당히 뛰어나야지. 뒤에서 은근히 사람도 조종할 줄 알아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이번 머리카락 땋기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었다.

내게 교훈을 준 중요한 이벤트였다.

“너와 나의 밍키. 밍키. 밍키. 요술공주 밍키~.”

내 속도 모르고 곁에서 걷는 김지원은 만화 주제가를 흥얼거렸다.

“지원아.”

“왜?”

“너 혼자 집에 갈 때도 있어?”

“엄마가 올 때가 훨씬 많은데, 아주 가끔 혼자도 가. 집이 엄청 가까워.”

김지원이 쾌활하게 대답했으나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이 시기에는 유독 유아를 유괴, 납치하는 사건이 많이 벌어졌다.

집이 가까우면 김지원처럼 혼자 등·하원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 짧은 시간도 어찌 보면 위험에 노출되는 시간이었다.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됐다.

“모르는 아저씨가 지원아 까까 먹으러 가자, 그러면 어떻게 할 거야?”

“좋아~.”

김지원이 생각만 해도 좋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이마에 손을 올렸다.

“안 돼요. 해야지.”

“안 돼요!”

“그럼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고 하면?”

“좋아. 히~.”

“안 돼요, 해야지!”

“안 돼요!”

“그럼 놀이터에서 같이 놀까 하면?”

“히, 좋아.”

“안 돼요, 해야지!”

“안 돼요!”

나는 김지원에게 ‘안 돼요’ 수업을 질리도록 반복했다.

모르는 사람을 쫓아가지 않는 것만 해도 유괴나 납치를 8할 가까이 막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이가 어른을 순순히 따라가면, 제삼자는 아이와 어른이 아는 사이인 줄 안다.

당연히 아이가 위험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가 없었다.

“지원아.”

“안 돼요!”

내가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안 돼요, 라고 외칠 수준이 됐을 때 김지원의 집에 도착했다.

유치원과 지원의 집과의 거리가 확실히 가깝긴 했다. 아이의 걸음으로도 3분이면 도착할 거리였다.

김지원의 집은 이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부촌에 위치했는데, 무려 단독주택이었다.

“내일 봐.”

“안 돼요!”

내 작별 인사에도 김지원은 ‘안 돼요’로 화답했다.

이거 교육이 너무 잘돼도 문제였다.

* * *

우리 세 가족의 안식처인 헌책방.

출판 계약을 따낸 아버지는 눈에 불을 켠 채 소설을 집필하고 있었다.

타자기 두드리는 소리는 요란했고, 타자기를 두드리는 아버지의 손놀림은 현란했다.

꿈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소설책이 인기를 얻어 어느 정도 수익이 생긴다면 아버지는 전생처럼 협심증을 앓지는 않을 것이다.

아버지가 협심증에 걸린 이유를 나는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유추하고 있었다.

하나는 소설가라는 꿈의 포기.

둘째는 막일과 함께 시작한 술과 담배.

셋째는 빚보증으로 인한 정신적인 스트레스.

환생해서 돌아온 내겐 그 세 가지 모두를 막을 힘이 있었다. 실제로 아버지의 삶의 궤적은 조금씩 바뀌고 있었고.

이번 생에서 아버지는 건강하고 오래오래 사실 것이다.

매년 건강검진까지 받으면서.

“아이고, 허리야.”

소설을 쓰던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두들겼다.

“아빠, 허리 아파요?”

“믿음이가 신경 쓸 정도는 아니야.”

“책에서 봤는데, 이렇게 하면 허리에 좋대요.”

나는 아버지에게 서서 하는 맥켄지 허리 운동법을 알려 드렸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맥켄지 운동은 상당히 쉬운 대증요법이었다.

쉬우면서도 효과가 탁월해 나중에 허리 디스크 환자들에게 크게 각광을 받게 된다.

“이렇게 다리를 벌리고 서서 허리에 손을 올려요.”

“이렇게?”

“네. 그다음에 숨을 참으면서 허리를 뒤로 젖혀요. 숨을 뱉으면서 다시 원래 자세로 돌아오고요.”

아버지는 나를 따라 하더니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정말이네? 좀 시원해지는 것 같구나.”

“많이 앉아 있는 사람은 삼십 분마다 하면 좋대요.”

“우리 믿음이 벌써 의사 선생님이 다 됐네?”

아버지는 그런 내가 귀여웠는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책에서 본 걸 귀신같이 외웠구나.”

“그림이 같이 있어서 기억이 나요.”

나는 태연하게 둘러댔다.

전생의 나와 달리 현생의 나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할 수 있었다.

감정을 숨기는 데도 도가 텄다.

산전수전 다 겪은 흉부외과 서전이 유아인 척하다 보니 생기는 부작용 아닌 부작용이었다.

아마도 이 능력은 병원에서 정치 싸움을 할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 살부터 갈고닦은 정치력으로 강태섭을 병원에서 쫓아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몸이 근질거렸다.

맥켄지 운동을 배운 후.

아버지는 때때로 자리에서 일어나 맥켄지 운동을 했다.

나도 아버지 곁에서 인형 눈을 꿰매다가 아버지를 따라 하곤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6년이 지났다.

나는 국민학교 6학년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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