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9화 (9/257)

9화 제2장 나는 유치원생이다 (4)

익숙한 얼굴의 정체는 바로 승우였다.

덕분에 승우네 가족이 왜 헌책방을 찾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마 낮에 있었던 일에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서겠지.

“안녕하세요.”

나는 넙죽 허리를 숙여 승우의 부모에게 인사했다.

그런 나를 보며 아버지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는 승우를 검지로 가리켰다.

“저 애가 오늘 아팠던 승우예요. 옆에 계신 분은 승우 부모님 같아요.”

“아… 반갑습니다. 믿음이 아버지입니다.”

“반갑습니다. 승우, 아비입니다.”

“승우, 어머니예요.”

부모들끼리 통성명을 하는 동안, 나는 손승우와 눈을 마주쳤다.

“아… 안녕.”

승우는 수줍게 말하고 한 손을 흔들었다. 얼떨결에 남의 가게에 와서 하는 소심한 인사였다.

나도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받았다.

부모님과 함께 있으니 진정이 좀 된 걸까, 유치원에서보다 한결 편안해 보이는 승우였다.

그래서 나도 마음이 놓였다.

“약소하지만, 이거라도 받으시죠.”

승우 아버지가 선물용 주스를 건넸다. 아버지는 뭐 이런 것까지, 하고 말하면서 주스를 받았다.

“손님을 계속 바깥에 세워 두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죠? 믿음아.”

“네, 아빠.”

“아빠는 간단하게 마실 걸 준비할 테니까 손님들 방으로 모시렴.”

“네!”

나는 승우 가족을 책방에 딸린 쪽방으로 인도했다.

궁색하고 비좁은 방에 네 사람이 앉으니 방이 당장이라도 터져 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승우의 부모는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방을 둘러볼 뿐이었다.

딱히 가난하다거나 옹색한 살림이라고 얕잡아 보는 기색은 아니었다.

“유치원 선생님들께 이야기 많이 들었다. 모두 하나같이 네 덕에 승우가 무사할 수 있었다고 말씀하시더구나.”

승우 아버지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승우 아버지는 멋쟁이 신사로 고급 정장을 갖춰 입고 있었다. 얼굴은 하얗고 기름져 부유한 티가 철철 넘쳐흘렀다.

그의 손목에 찬 시계가 몇백만 원을 호가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승우 어머니도 멋쟁이인 건 마찬가지였다.

‘우리 부모님도 저렇게 될 날이 머지않겠지.’

승우의 부모님을 보고도 나는 손톱만큼도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부모님을 호강시켜 드릴 각오로 뜨겁게 불타올랐다.

“아니에요. 저는 그냥 알고 있는 것만 선생님께 말했어요. 선생님이 다하셨어요.”

“기특한 녀석. 어린 나이에 말도 참 예쁘게 하는구나. 하지만 말이야.”

“…….”

“네가 하임리히법이라는 것을 알아서 선생님이 승우를 살릴 수 있었다고 하던데?”

“그건… 맞아요.”

“그럼 너도 승우를 살리는 데 큰 역할을 한 거야. 자랑스러워해도 된단다.”

“감짜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일부러 혀 짧은 소리를 냈다.

“하하하. 귀엽네. 귀여워.”

“믿음이 부모님은 믿음이 키우는 재미에 날 새겠어요.”

깔깔깔, 웃는 승우의 부모를 보고 나도 속으로 웃었다.

본의 아니게 한 살부터 자아를 가지다 보니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는 법까지 터득하게 되었다.

이 수법은 나중에 의대에 가서나 병원 생활을 할 때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병원 생활의 7할은 눈치와 처세술로 이루어지니까.

“그나저나 믿음이는 엄청 똑똑하구나. 발음하기도 힘든 하임리히법 같은 것도 기억하고 말이야.”

“맞아. 맞아. 어머님이 간호원이라고 했지?”

“네, 우리 엄마 간호원이에요.”

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가 간호원이라는 사실도 승우를 살리는 데 크게 한몫했다.

어머니가 간호원이 아니었다면 누가 내 말을 들었을까.

“그리고 저는 커서 멋있는 의사 선생님이 될 거예요.”

“암, 되고말고. 벌써부터 우리 승우도 살려 줬는데 말이야. 아저씨도 응원할 테니까 믿음이는 꼭 좋은 의사 선생님이 되거라.”

“아줌마도 응원할게.”

“감짜합니다.”

드르르륵.

때마침 장지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나타났다.

음료수와 빵이 담긴 쟁반을 바닥에 내려놓은 아버지는 비좁은 틈을 지나 간신히 내 옆에 앉았다.

“하하하. 살림이 궁색하지요?”

“제 눈에는 넉넉한 인심과 잘나고 똑똑한 아드님만 보이는 걸요?”

“별말씀을.”

“믿음이 아버님께서도 제가 왜 찾아왔는지 짐작은 하실 겁니다. 믿음이에게 이야기는 들으셨죠?”

승우 아버지가 운을 뗐다.

아들내미의 목숨을 구원받은 아버지의 입장에서 사건을 요약하고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아버지는 말은 안 했지만,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도 승우를 살리고 효도까지 할 수 있어서 세상 뿌듯했다.

“…….”

“…….”

낮에 있었던 사건으로 삼십여 분을 대화하고 나니 화제가 뚝 끊겼다.

낯선 두 가족을 잇고 있었던 연결 고리는 승우의 질식 사건뿐이었다.

그 고리가 끊어지니 자연스럽게 침묵이 찾아왔다.

“아 참, 들어오는 중에 타자기를 봤는데요. 혹시 글을 쓰십니까?”

승우 아버지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소설을 쓰는 중입니다. 이를테면 견습 작가인 셈이죠.”

“그렇군요. 혹시 쓰시는 글은 어떤 장르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림자의 문’이라고 순문학과 장르 문학의 경계에 있는 글입니다. 제천 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 다루고 있습니다만, 그건 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요.”

승우 아버지가 씨익 웃으며 명함을 건넸다.

나는 기린처럼 목을 쭉 빼고 아버지 손에 들린 명함을 훔쳐보았다.

손중호, 한셈 출판사 사장.

복장부터 심상치 않았는데, 설마 출판사 사장일 줄이야.

그것도 한셈이라면 현시점의 10대 출판사 중 하나가 아닌가.

나는 현 상황에 크게 놀라면서, 또 한편으로는 적당히 납득했다.

1980년대의 유치원 등원율은 평균 15퍼센트 정도.

그러니까 유치원에 다닌다는 사실만으로도 소득 상위 15퍼센트에 속한다고 추측해 볼 수 있었다.

물론 우리 집처럼 예외인 가정도 일부 있겠지만.

“허… 이렇게 대단한 분이셨습니까?”

명함을 받아 든 아버지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반면 나는 전직 외과의답게 놀란 감정을 금방 추슬렀다.

수술방 입장이 늦었던 대동맥 파열 환자의 가슴을 갈랐더니.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던 때에 비하면 이 정도는 양반 중의 양반이었다.

“대단할 것까지야 있습니까? 제 힘으로 출판사를 일군 것도 아니고, 아버님께 사업을 물려받은 것뿐인데요.”

“아무리 그래도 승우 아버님이 능력이 있으시니까 회사를 물려주셨겠죠.”

“하하하, 글 쓰시는 분답게 말씀을 잘해 주시는군요.”

승우 아버지는 음료수를 마시고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미완성 원고라도 저희 쪽에 한번 보내 주시죠. 최소한 첫 작품만이라도 저희 출판사에서 책임지고 출판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민폐를 끼쳐서야…….”

“믿음이 때문에 승우가 살았는데, 그 정도도 못 하겠습니까?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저야말로 더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안타까울 따름이니까.”

“나도 아빠 책 보고 싶어요. 친구들한테 자랑하게.”

나는 은근하게 아버지의 출판을 부추겼다.

이건 누가 뭐래도 황금 같은 기회였다.

미완성본 ‘그림자의 문’은 이미 아버지의 동기에게 작품성과 화제성을 인정받았다.

제대로 완성이 되어 출판만 할 수 있다면, 아버지는 꿈과 재력을 동시에 이룰 수 있다.

그런 기회를 아버지가 스스로 걷어차게 두어선 안 된다.

“아빠, 책 내 주세요~ 책 내 주세요~.”

“믿음이가 저렇게 원하는데 안 하실 겁니까?”

“허허. 그것 참… 그렇다면 염치 불고하고 신세 좀 지겠습니다.”

“얼마든지요.”

구두계약이 성립된 순간, 나는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눈앞에 있는 승우가 내 새끼처럼 예뻐 보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운명이 바뀌는 건가?’

본래 나는 유치원에 갈 운명이 아니었다.

전생에 버스 전복 사고를 당한 어머니는 몇 년간 일을 쉬고 그로 인해 집안 형편은 가파르게 기울게 된다.

그러니 나를 유치원에 보낼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다행히도 교통사고를 피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간호원으로 꾸준히 일을 하는 중이고.

나는 졸지에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으며, 유치원에서 질식사할 뻔한 승우를 구하게 된 것이다.

이에 고마움을 느낀 승우의 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책 출판을 약속했다.

환생한 내가 교통사고를 당할 어머니의 운명을 단 하나 바꿨을 뿐이거늘.

예상치 못한 눈덩이가 지금 이 순간까지 굴러왔다.

인생이란 이 얼마나 섬세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것인지…….

‘아마 이게 내가 가진 힘이겠지.’

나는 솜뭉치 같은 내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전생의 기억.

노련한 흉부외과의로서의 경험치.

이 두 가지는 나의 원투 펀치였고, 이 원투 펀치는 가히 세상을 뒤흔들 만했다.

‘의술의 신께서 강태섭에게 본때를 보여 주고 의료계에 더 봉사하라는 의미로 이런 기회를 주셨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어른들 이야기하는 거 재미없지?”

내가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을 승우 아버지는 지루해하는 것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승우 아버지는 내게 거금 천 원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승우와 가까운 가게에서 군것질이나 잠깐 하고 있으라고 일렀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손승우도 나랑 같은 마음인지 날다람쥐처럼 잽싸게 쪽방을 벗어났다.

* * *

“후, 살 것 같다. 방이 좁아서 더웠지?”

“응.”

승우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서 자세히 보니 승우는 덩치만 클 뿐 눈이 맑고 섬세한 아이였다.

“고마워. 믿음아. 너 때문에 살았어. 아까는 너무 무서워서 말을 못 했어.”

“괜찮아. 내가 너라도 그랬을 거야.”

“정말?”

“당연히 정말이지.”

내가 친근하게 승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승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내가 너라도 그랬을 거야.]

이 말은 의사가 된 내가 입버릇처럼 올린 말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제가 환자분이라도 그랬을 겁니다.’이지만.

이 말은 처음 보는 환자와도 요술처럼 라포(유대 관계)를 쌓을 수 있는 마법의 문장이었다.

내가 너라면.

네가 나라면.

외과의에게 필요한 것은 현란한 손재주와 끈질긴 인내력뿐만이 아니었다.

환자가 고된 수술을 이겨 낼 수 있도록 탄탄한 신뢰 관계를 쌓는 것 또한 앞선 두 가지 못지않게 중요했다.

“뭐 먹고 싶어? 내가 다 사 줄게.”

“으음… 깐돌이 아이스크림.”

“가자.”

나는 가까운 구멍가게를 찾았다.

추억 속에만 살아 있던 풍경과 먹거리들이 현실에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런 때가 있었지.’

구멍가게에 진열해 놓은 물건들의 물가는 환생 전 성인 때와는 영 딴판이었다.

지금 내가 손에 쥔 천 원이면 무려 짜장면 두 그릇 혹은 소주 5병 또는 라면 10개를 살 수 있었다.

“깐돌이만 먹을 거야? 다른 것도 사 줄게.”

“그럼 콜라도 먹을래.”

“그래.”

나는 깐돌이 아이스크림 두 개에 병 콜라 하나를 구입했다. 그리고 가게 앞 평상에 앉아 승우와 먹기 시작했다.

자극적인 음식들로 배를 채웠더니,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과연 나이를 먹으면 욕심도 함께 자라는 모양이다.

아이스크림과 콜라만 마셔도 이렇게 행복한 시절이 있었는데.

“믿음아, 앞으로 네가 지원이 가져. 나, 지원이 좋아하는데 너한테만 특별히 양보할게.”

손승우의 사뭇 진지한 발언에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하긴 나야 중년의 자아를 가진 흉부외과의지만 승우는 진짜배기 유치원생이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에 차이가 있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앞으로 너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내가 다 혼내 줄게. 나 우리 유치원에서 힘이 제일 세.”

“알았어. 든든하네.”

호언장담하는 승우의 말을 들으며 나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도화지 삼아 앞으로 예정된 인연들과 승우처럼 예상치 못하게 만날 인연들을 그려 보았다.

환생한 나라면 그 인연들을 족히 다 품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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