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8화 (8/257)
  • 8화 제2장 나는 유치원생이다 (3)

    “와, 진짜 죽다 살았어요.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한 거 있죠?”

    유치원 행정실에 앉아 있던 최진희는 부르르 몸을 떨며 입을 열었다.

    제 가슴을 세차게 두드리며 고통스러워하던 승우.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가던 승우.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을 떠올리면 아직도 정신이 아찔했다.

    아직 싹도 제대로 틔우지 못한 어린 생명이 유치원에서 죽었다면, 아마 그녀는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을지 몰랐다.

    “최 선생님 덕분에 승우가 살았어요. 제가 등을 두드렸을 땐 그렇게 젤리가 안 나왔는데…….”

    “…….”

    “최 선생님이 승우 배를 밀어 올리니까 젤리가 확 튀어나왔잖아요?”

    “제가 뭐 대단한 게 있다고. 믿음이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최진희는 민망해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녀가 이미향이었다고 해도 승우의 등을 두드리는 것밖에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승우를 구한 진짜 영웅은 믿음이였다.

    믿음이가 적재적소에 나서서 하임 뭐시기를 알려 주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니, 애초에 믿음이가 유치원에 등원하지 않았다면?

    그런 상상만으로도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닭살이 파르르 돋았다.

    “생긴 것부터 똘똘하긴 했는데, 설마 어머니가 간호원이고 응급 처치법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러고 보니 승우 목에 젤리가 걸렸다는 걸 알려 준 것도 믿음이였죠?”

    “네, 맞아요. 승우를 살리라고 신께서 믿음이를 우리 유치원에 보내셨나 봐요.”

    신을 믿지는 않았지만, 최진희는 이미향의 신앙론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돌이켜 봐도 승우가 살아난 데는 뭔가 운명적인 구석이 존재했다.

    “이 선생님, 승우 부모님께는 연락드렸어요?”

    “아 참, 그걸 깜빡 잊었네요. 승우 부모님도 승우가 아팠던 걸 아셔야 하는데. 지금 바로 연락드릴게요.”

    최진희는 급하게 전화기를 드는 이미향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의자 등받이를 젖힌 채 하얀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믿음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선생님도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서 혼자만 침착했던 아이.

    또래와 달리 제 할 말을 또박또박하던 아이.

    어머니가 간호원이라고는 해도 응급 처치법을 한 번 보고 정확하게 어른에게 알려 줄 수 있는 아이.

    믿음이는 말 그대로 믿음이 가는 아이였다.

    벌써부터 믿음이의 장래가 기대되는 최진희였다.

    * * *

    승우의 기도 질식으로 어수선했던 유치원은 다시 조용해졌다.

    승우는 선생님 한 명과 수면방에 들어가 나오질 않았다. 집중적으로 멘탈 케어를 받는 것으로 보였다.

    ‘휴. 천만다행이었지.’

    승우가 질식했던 당시를 떠올리며, 나는 또다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말로 위기일발이었다.

    하임리히법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승우는 이승이 아니라 저승에서 눈을 뜰 뻔했다.

    승우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내 뒷맛은 조금 썼다.

    유치원생의 몸으로, 의사 면허증이 없는 몸으로 사람을 구하는 것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성인이고 의사였다면 승우를 처치하는 데 그 어떤 방해도 없었을 텐데.

    처치가 훨씬 신속했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순간적인 기지로 유치원 교사를 설득하고 하임리히법을 하게 만든 것은 높은 점수를 줄 수 있겠다만…….

    승우가 있는 수면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이내 창가에 섰다.

    비록 내가 직접 처치를 하지는 않았지만 하임리히법은 성공했다.

    내 지시를 유치원 선생님이 잘 따라 줬기 때문이었다.

    ‘진짜 바보 같았지.’

    전생을 떠올리는 내 입가에 착잡한 미소가 걸렸다.

    전생에 나는 속 좁은 서전이었다.

    제1 보조의, 제2 보조의, 제3 보조의.

    나아가서 인공심폐기사와 스크럽 간호사까지 잘 믿지 못했다. 그들의 실력을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수술실의 주인공은 오로지 나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서전에 비해 수술 시간이 적게는 30분에서 많게는 1시간 가까이 늦어지곤 했다.

    그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이었나.

    수술실의 주인공은 수술을 하는 스태프 전원인데 말이다.

    동료 스태프를 믿는 만큼 내 수술도 빨라질 수 있다는 걸 예전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내가 유치원 선생님에게 하임리히법을 맡긴 것처럼.

    앞으로 집도하게 되면, 나는 내 스태프들을 전적으로 믿을 것이다.

    이젠 믿음의 힘과 믿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으니까.

    “믿음아, 아빠 오셨다.”

    유치원 선생의 말에 가방을 챙겨 현관으로 달려갔다. 두 팔을 벌린 아버지의 품에 나는 꼭 안겼다.

    “아빠!”

    “우리 믿음이 별일 없었지?”

    “네!”

    “믿음이 아버님, 혹시 믿음이 어머님이 간호원 맞으신가요?”

    내 뒤에 따라붙은 유치원 선생님이 대뜸 아버지에게 물었다.

    “네, 맞는데요.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시죠?”

    “오늘 아주 엄청난 일이 있었거든요.”

    유치원 선생은 호들갑을 떨며, 승우의 질식 사건을 이야기했다.

    내 조언 덕분에 승우가 살았다며 엄지를 치켜세우기도 했다. 내 활약을 들은 아버지의 입은 귀에까지 걸렸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다 뿌듯했다.

    “우리 믿음이 유치원 첫날부터 한 건 했네?”

    “헤헤. 잘했어요?”

    “그럼, 그렇고말고. 믿음이는 커서 진짜 멋진 의사가 될 거야.”

    아버지의 손을 잡은 채 나는 유치원을 떠났다.

    전생에 가 보지 않았던 유치원.

    전생에서는 아마도 기도 질식으로 죽었을지 모르는 승우.

    내 인생과 내 주변, 그리고 이 세상이 조금씩, 그렇지만 분명하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 * *

    타닥. 타닥. 타닥.

    타자기 소리가 리드미컬하고 경쾌했다. 이 시대에만 들을 수 있는 ASMR이었다.

    화장실에 갔다가 책방으로 돌아오니 아버지가 계산대에 앉아서 타자기로 소설을 쓰고 있었다.

    아버지는 헌책방을 운영하며 짬짬이 소설을 썼다.

    지금 쓰고 있는 작품은 전생에서 아버지의 미완성 유작이 되었다.

    얼마 전 신춘문예에 보냈다가 고배를 마신 소설은 아버지의 첫 작품을 수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과거로 환생한 이번 삶에서 이 소설은 결코 미완성 유작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강태섭에게 더 이상 이용당하지 않을 것처럼, 아버지의 글도 반드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아빠.”

    “왜?”

    “나 저 책 보고 싶어요.”

    나는 계산대로 다가가 책장 한편을 가리켰다. 내가 한 살 때 떼를 써서 구입한 의학 전공 서적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그립고도 반가운 책들.

    “저 어려운 책을 또 보려고?”

    아버지는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나는 며칠 전부터 틈틈이 의학 서적을 보고 있었다.

    말도 곧잘 하고 행동반경이 넓어졌지만, 여전히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잊어버렸던 지식을 하나둘 깨워 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어서.

    돌이켜 보면, 그동안 책을 미리 읽어 둔 건 신의 한 수이기도 했다.

    오늘 있었던 승우 질식 사건에서 나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간호원인 어머니에게 하임리히법을 배웠다고.

    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기에 어머니가 돌아오는 즉시, 탄로 날 게 뻔했다.

    그래서 귀가한 어머니가 나를 추궁하면, 나는 의학 서적에서 하임리히법을 익혔다고 말할 작정이었다.

    간호원인 엄마가 하임리히법을 가르쳐 줬다고 해야.

    선생님이 내 말을 믿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고.

    내가 한 거짓말은 사람을 살리는 하얀 거짓말이었다.

    그러니 어머니도 나를 뭐라고 꾸짖지 못하실 것이다.

    한 살로 환생해 살아온 덕분에 나는 어느새 요물 미꾸라지가 된 셈이었다.

    “가나다라도 겨우 뗐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는 있고? 저 책은 어른이 됐을 때나 보는 거야.”

    아버지의 말에 상념이 깨졌다.

    “그래도 보고 싶어요. 심심해요.”

    내가 계속 칭얼거리자, 아버지는 끝내 책을 내게 건네주었다.

    아버지가 옮겨 준 책 한 뭉텅이를 의자에 쌓아 놓고 나는 탐독을 시작했다.

    ‘역시 가독성 한번 끝내주는군.’

    책을 펼쳐 본 나는 부르르 몸을 떨며 진저리를 쳤다. 이 시대의 책이 그렇듯 서적은 우종서였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글을 읽어야 하는 형태였다.

    조선시대 상소문 같은 스타일이라고 하면 이해가 빠를까.

    우종서인 것도 모자라 책에는 한자들이 빽빽했다. 책장을 펼치는 것만으로도 눈과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의학 용어 역시 21세기와는 조금 달랐다.

    21세기부터 조금씩 의학 용어의 한글화가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두정엽을 머리엽으로 바꿔 말하는 식이었다.

    정작 현장에서는 영어가 제일 많이 쓰이긴 했지만.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나는 당연히 흉부외과 파트부터 읽기 시작했다.

    흉부외과의 처치 역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었다.

    내가 조교수 때부터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던 내시경 수술은 이제 막 걸음마를 떼고 있었다.

    훗날 메르스 치료법으로 주목을 받으며 심부전증과 폐 이식에 활용되는 에크모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다비치 로봇 수술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흉부외과 수술들이 어떤 질곡을 거쳐 어떻게 만개했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지금 오직 나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앞으로 그 어떤 흉부외과 서전보다 앞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그야말로 천금 같은 기회!

    이 기회를 살려 나는 내 가족의 행복을 지키고, 내 능력을 꽃피우며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던 환자들의 목숨을 구할 것이다.

    내가 기적같이 환생한 이유도 아마 이 때문이 아닐까.

    “믿음아, 그냥 동화책이나 보렴. 벌써부터 머리 아프게 그런 책 보지 말고.”

    보다 못한 아버지가 한마디 훈수를 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책을 휙휙휙 넘기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모르고 있었다.

    내가 과감하게 책을 넘기는 건 책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이미 다 아는 내용이었기 때문인 것을.

    “괜찮아요. 그림만 봐도 재밌어요. 뼈다귀도 있고 장기도 있고.”

    “녀석도 참.”

    아버지는 내 대답에 피식 웃고는 다시 소설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동안 나는 흉부외과 파트를 게 눈 감추듯이 독파하고 미리 봐 둔 책을 꺼냈다.

    이번 책은 의학 서적이 아니었다.

    손자병법.

    손자병법을 고른 건 전생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나의 각오 때문이었다.

    의사란 병을 치료하는 사람.

    병원은 병을 치료하는 사람이 모인 곳.

    과거의 나는 그렇게 단순하고도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연륜과 경험이 쌓이면서 환상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암투.

    돈과 권력과 생명의 충돌.

    병원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살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병원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처세술과 병법이 필요했다.

    환자를 살리겠다는 1차원적인 마음만으로는 그저 좌절감만을 맛볼 따름이다.

    과거의 나처럼.

    -백 번 싸워서 백 번 이기는 것이 최고는 아니다.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고다.

    -그런 고로 싸우려는 적의 의도를 깨트리는 것이 최상이고, 다음은 적의 외교를 무너트리는 것이고, 그다음은 적의 병사를 해치우는 것이다.

    특히 ‘모공편’에 나오는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다.

    타인과 싸우면 결국 나도 손해를 보지 않는가.

    싸우지 않고 타인을 굴복시키는 묘안을 찾을 줄 안다면 내 의사 생활도 탄탄대로를 걷게 될 것이다.

    딸랑!

    불청객처럼 찾아온 도어벨 소리에 책방의 정적이 깨졌다.

    “저기요. 책 좀 사러 왔는데요.”

    한 사내가 책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책을 찾으시죠?”

    소설 쓰기에 여념이 없던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을 맞았다.

    “인간시장 있나요? 일단 1권만 보고 싶은데.”

    “인간시장 1권이요? 가만 보자. 일주일 전에 한 권 매입했던 것 같은데.”

    아버지가 바쁘게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책을 찾는 시간이 꽤 더뎠는데, 보통 헌책방은 책 분류를 잘 안 해 놓기 때문이다.

    “아빠, 저번에 그 책 계산대 밑에 넣어 놨어요.”

    “아 참, 그렇구나. 여기 있습니다.”

    아버지는 내 도움을 받아 책을 팔았다. 손님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책방을 떠났다.

    “우리 믿음이, 아빠가 여기에 책 넣어 둔 건 언제 봤니?”

    “헤헤, 전 항상 아빠를 보고 있어요.”

    “녀석도, 참.”

    아버지가 나를 기특하게 여기던 바로 그때.

    딸랑~.

    다시 한번 도어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한 명이 아닌 가족 세 명이 손님으로 책방을 찾았다.

    그런데 이들 중 한 명의 얼굴이 무척 낯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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