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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5화 (5/257)

5화 제1장 응애(5)

“뭐야. 당신, 큰일 날 뻔했잖아?”

“갑자기 너무 무서워.”

“괜찮아. 내가 곁에 있잖아.”

남편이 등 뒤로 돌아가서 그녀의 허리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자, 놀란 가슴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귀빠진 날에 교통사고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해.”

“나도 지금 팔뚝에 소름 돋았어. 그런데 따지고 보니까 당신, 믿음이 때문에 살았네?”

남편이 화제를 돌렸다.

따지고 보면, 유희애의 퇴근이 늦어졌던 건 정말 믿음이 때문이었다.

믿음이가 아파서 갑작스레 유희애의 병원을 찾게 되었고, 그로 인해 퇴근이 본의 아니게 삼십 분가량 늦어졌던 것이다.

“정말이야. 당신하고 믿음이가 병원에 안 왔으면 난 정상적으로 퇴근했겠지. 그리고 꼼짝없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거야.”

유희애는 뉴스 속 사고의 주인공이 자신이라고 생각하곤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무래도 우리 믿음이가 신기가 있는 것 같아. 요즘 들어 한 번도 안 울던 녀석이 갑자기 자지러지듯이 울더라고.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당신을 지켜 주고 싶었나 봐.”

“정말 그럴지도?”

유희애는 품에 안긴 믿음이를 내려다보았다. 믿음이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믿음이가 기특하게 엄마 살려 줬어요?”

“어맘마마!”

믿음이는 그렇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자식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영특한 아이가 내 배 속에서 나왔을까.

유희애는 믿음이의 양 볼과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믿음이가 벌써부터 당신 생일 선물을 거하게 챙겨 줬네. 벌써부터 효자의 싹이 보여.”

“그러게. 당신도 배고플 텐데 슬슬 저녁 먹자. 상 다 차렸지?”

“잠깐만 기다리세요.”

남편이 떠난 뒤에도 그녀의 눈은 믿음이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예쁘고 기특한 내 새끼.

네 덕분에 엄마가 살았구나.

* * *

어둠이 무르익어 가는 밤.

아버지의 코골이 소리를 들으며 나는 앙증맞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걱정 반, 기대 반이었지만 결국 교통사고로부터 어머니를 지켜 내는 데 성공했다.

본래라면 우리 세 가족을 덮쳤을 환란을 무사히 피해 냈다.

내 손으로 우리 가족의 불운을 걷어 내고 보니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그것도 고작 한 살배기의 몸으로 이뤄 낸 일이 아닌가.

나이를 먹고 머리가 굵어지면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부모님과 내 앞에 펼쳐진 건 오로지 꽃길뿐인 것처럼 느껴졌다.

‘역시 흉부외과가 좋겠지?’

나는 내 미래를 새까만 천장에 그려 보았다.

미래를 아는 내가 있으니 아버지는 협심증으로 돌아가시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흉부외과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첫째로 나는 대한민국 흉부외과에서 벌어지는 일을 비교적 속속들이 알고 있다.

수술의 변천사와 발전.

명의에 반열에 오른 서전들.

반대로 강태섭을 비롯한 인간쓰레기 및 적폐 서전들까지.

환생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그리고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고 싶다면 흉부외과로 다시 가는 게 맞았다.

둘째로 나는 의외로 흉부외과에 재능이 있었다.

‘난 내과 체질이었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니긴 했어도 실제로 상황 판단력과 손재주는 탁월한 편에 속했다.

심리적 부담감으로 인한 수전증.

너무 물렁물렁해서 이리저리 이용만 당했던 인간관계.

이 두 가지가 걸림돌이 되어 내 발목을 잡았을 뿐이었다.

생각해 보라.

정말로 재능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강태섭 대신 수술을 하고 신수술법까지 개발해서 강태섭에게 최고의 흉부외과의라는 타이틀을 달아 줄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

이번 생의 나는 다시 흉부외과의를 선택할 것이다.

강태섭에게 복수하고 강태섭이 빼앗아 간 내 왕좌를 당당하게 되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야심 찬 각오로 충만했던 나는 곧 맥없이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한 살은 야망보다 잠이 더 강력한 시기였다.

* * *

다음 날 오후.

아버지는 대학 동기와 약속이 있다며 잠깐 책방을 비웠다.

덕분에 쉬는 날이었던 어머니가 대신 나를 돌보았다.

어머니는 나를 품에 안은 채 흥겨운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책방 안을 배회하는 발걸음이 경쾌했다.

“믿음아, 넌 모르겠지만 다들 난리도 아니었어. 어제저녁에 간호원 선생님들이 전화통이 불나게 전화를 해댔지 뭐니?”

“엄마마마?”

“엄마가 탔던 버스가 전복됐는데 다친 데는 없었냐고 말이지. 엄마는 믿음이가 구해 줘서 이렇게 멀쩡한데 말이야. 으이구, 요 귀여운 것.”

어머니가 내 뺨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어제 사건의 여운이 깊이 남은 모양이었다.

구사일생으로 교통사고를 피했으니 그럴 만했다.

-하지만 어머니. 하나만 아시고 둘은 모르고 계십니다. 앞으로 닥칠 세상의 그 어떤 환란도 우리 가족을 덮칠 수 없다는 걸.

내가 배실배실 웃자, 어머니의 입가에 드리운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이 세상에 전염되어도 좋은 유일한 것은 미소뿐이었다.

“믿음이 엄마, 오늘은 쉬는 날인가 봐?”

딸랑~.

도어벨이 울리며 책방 문이 열렸다. 뽀글뽀글 파마머리를 한 중년 여성이 어머니에게 다가왔다.

고말숙.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나는 없는 이 대신 잇몸을 바득바득 갈았다.

내가 그녀를 기억하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폭탄을 맞은 것처럼 볼록한 머리 스타일과 인중 위에 박힌 거대한 점.

그리고 또 하나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고말숙이 우리 집에 끔찍한 불행을 가져왔기 때문.

강태섭이 내 흉부외과 의사의 생활을 망쳐 놓았다면, 고말숙은 우리 집안의 경제와 부모님 두 분의 관계를 망쳐 놓았다.

어떻게?

빚보증으로!

21세기야 가족끼리도 보증은 안 선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지만, 1980~90년대 초반만 해도 보증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어느 정도 친분만 있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증을 서 줬다.

오히려 보증을 안 서 주면 우리 사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냐며 되레 역정을 내던 시기이기도 했다.

참고로 고말숙은 우리 가족이 책방을 하면서 알게 된 이웃사촌이었다.

그녀는 오지랖이 넓어 다른 사람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했다.

물론 우리 가족도 처음엔 고말숙에게 제법 신세를 졌다.

마당발인 그녀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책방 소문을 많이 내 줘서 손님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빚보증으로 뒤통수를 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옥수수 쪄왔는데, 같이 먹자. 맛이 끝내주더라고.”

“어머, 감사해요. 언니.”

“옥수수 정도로 감사하기는. 고기 갖다주면 아주 절이라도 하겠네.”

고말숙의 농담에 어머니가 꺄르르 웃었다.

이윽고 어머니와 고말숙은 나란히 앉아서 옥수수를 먹기 시작했다.

각자의 가정사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떠들었다.

고말숙과 대화하는 어머니는 퍽 유쾌해 보였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머니는 간호원이었다.

여자들의 군대라고 불릴 만큼 위계서열이 심하고 태움이라 불리는 가혹 행위가 빈번한 직종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또한 불규칙적인 근무시간으로 근처에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 일상적인 수다를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사람은 고말숙이 유일했던 것이다.

어머니가 고말숙의 보증 요구를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했던 건 아마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빚보증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고말숙이 보증금을 떠넘긴 뒤 우리 가족은 꼼짝없이 헌책방을 팔아야 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보증을 선 탓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까지 멀어지고 말았다.

어머니의 교통사고가 불행의 전주곡이었다면, 빚보증은 후렴구였다.

협심증 수술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클라이맥스였고.

그 말인즉 내가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더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코앞에.

“간호원 일에 책방 일에 애 키우기까지 하니까 힘들지 않아? 나라면 믿음이 엄마처럼은 못 살 것 같아.”

고말숙이 어머니를 위하는 척했다.

미래의 일을 아는 나는 그녀가 그저 가증스럽게 보일 따름이었다.

“하다 보니까 되더라고요. 책방 일이야 남편 대신 가끔 하는 거고, 믿음이야 워낙 속을 안 썩여서요.”

“믿음이가 속을 안 썩인다고? 젖먹이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우리 믿음이는 얼마나 의젓한지 몰라요. 배고프다고 보채지도 않고요, 밤에 울지도 않아요.”

“세상에 진짜?”

“그렇다니까요. 그리고 또 신기도 있는 것 같아요. 믿음이 때문에 어제 교통사고도 안 당했다니까요.”

어머니가 어제 사건을 장황하게 늘어놓자 고말숙이 관심을 보였다.

“그럼 나도 믿음이 기운 한번 받아 볼까? 믿음이 한번 안아 봐도 돼?”

“그럼요. 얼마든지요.”

어머니의 손에서 고말숙의 손에 넘겨진 나는 미간부터 찡그렸다.

전생에는 어려서 잘 몰랐지만, 네가 우리 가족을 망친 원흉이렷다?

“내가 싫은가 봐? 벌써부터 얼굴을 찡그리는데?”

“이상하네요. 우리 믿음이는 하루 종일 웃고만 있는데.”

“믿음아, 너희 엄마랑 친한 언니야. 까꿍!”

고말숙이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내민 순간, 나는 우연을 가장해서 손을 힘껏 휘저었다.

40년의 시간을 거슬러 펼치는 회심의 복수의 싸대기!

짜아아악!

내 고사리 같은 손바닥이 고말숙의 뺨을 정확하게 후려쳤다. 놀란 고말숙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흠칫 뒤로 물러났다.

어머니도 고말숙만큼 놀랐다.

“어… 언니, 괜찮으세요?”

“어? 응. 쪼그만 녀석이 손이 제법 맵네. 믿음이는 내가 어지간히 싫은가 봐.”

‘네가 나라면 너를 좋아하겠냐?’라고 나는 소리 내어 말하고 싶었다.

“죄송해요. 원래는 진짜 얌전한데 오늘은 왜 이러는지…….”

“옥수수 냄새가 나서 불쾌했을 수도 있지. 뭐, 어쩌면 이것도 액땜일 수도 있고. 호호호.”

고말숙은 내게 얻어맞은 것을 유쾌하게 받아넘겼다.

그래, 그 간사한 혀로 우리 어머니를 꼬드겼겠지.

하지만 내가 있는 한 빚보증은 어림도 없다!

* * *

“우리 믿음이 왜 그랬어? 엄마가 한창 믿음이 자랑하고 있는데, 엄마가 아는 언니를 때리면 안 되지.”

유희애는 평소답지 않게 행동한 믿음이에게 한 소리 했다.

물론 믿음이야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어마마마마.”

믿음이는 그녀의 훈계에도 아랑곳없이 해맑게 웃었다. 그 사르르 녹아내리는 미소에 유희애는 그만 무장해제를 당했다.

바라만 봐도 행복해지는 존재가 있다는 걸 유희애는 믿음이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왠지 찜찜하단 말이지. 다시 언니한테 가 봐야겠다.’

유희애는 믿음이가 고말숙의 뺨을 때린 것이 괜히 신경 쓰여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냈다.

그런데 과도로 껍질을 깎던 중 손이 헛돌면서 손가락에 상처가 났다. 빨간 핏방울이 이슬처럼 맺혔다.

그녀는 신혼 방에서 구급상자를 꺼내 책방으로 돌아왔다.

“엄마마마마.”

때마침 믿음이가 허공에 손을 휘젓길래 자신의 무릎 위에 믿음이를 올려놓았다.

“믿음아, 엄마가 손을 다쳤는데 뭘 쓰면 좋을까?”

유희애는 장난삼아 믿음이 앞에서 알코올과 과산화수소 그리고 포비돈 용액이 든 통을 흔들었다.

“어마마마마!”

믿음이의 검지가 가리킨 것은 놀랍게도 포비돈 용액.

어르신들이 말하는 아까징끼이자 빨간약이었다. 그녀의 상처에 딱 어울리는 소독액이었다.

“우리 믿음이 진짜 똑똑하네. 아빠 말대로 진짜 의사가 될지도 모르겠어.”

“으사. 으아.”

믿음이의 어설픈 의사 발음에 유희애는 또다시 꺄르르 웃고 말았다.

믿음이가 우연히 포비돈을 가리킨 게 아니라는 사실을.

실은 믿음이가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은 흉부외과 의사라는 사실을 그녀가 알 턱이 없었다.

* * *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나는 쑥쑥 자랐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모습에 스스로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흉부외과 부교수 짬밥이 있었기에 나는 당연하게도 또래의 아이들보다 발달이 빨랐다.

두 살 때부터 옷을 스스로 벗고 입었다.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이름을 또박또박 말하고 다녔다.

뒤뚱뒤뚱하면서도 혼자서 곧잘 계단을 오르내리곤 했다.

그러면서도 부모님이 걱정할 만한 행동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아무 물건이나 입에 가져간다거나 모서리가 날카로운 가구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거나.

형편상 느지막하게 한 돌잡이 때는 연필, 돈, 대추, 칼 등을 무시하고 부모님이 준비한 의학 전공 서적을 잡아서 의사가 될 것임을 미리 천명하기도 했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보며 기특해하고 대견해했다.

나를 보고 기뻐하는 부모님으로 인해 나도 기뻤다.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모면해 간호원 일을 계속하면서 집안의 경제 사정은 괜찮은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아버지의 헌책방 수입만으로 가정을 꾸려 가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으니까 말이다.

따분하고 영겁처럼 길 줄 알았던 유아 시절은 의외로 빨리 흘러갔다.

어느새 여섯 살이 된 나는 머리가 굵어지고 하고 싶은 말들을 조리 있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할 수 있는 일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니까 세상에 둘도 없는 괴물.

앞으로 벌어질 일을 손금 보듯 훤히 알 뿐만 아니라 흉부외과 지식에도 능통한 6세 아동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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