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권. 신혼여행 (220/225)
  • ┃신혼여행

    결혼 전 가족 문제를 해결하고 동창생들을 만나 식사 대접을 끝마친 후에도 현성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 결과.

    현성의 결혼식은 아무런 사고 없이 풍성하고 평화롭게 치러졌다.

    결혼식이 끝난 후.

    현성과 루시아는 꿀같이 달콤한 신혼 생활에 빠져들었다.

    두 사람은 그간 목숨이 위태로운 전장을 수없이 헤치고 다녔다.

    그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 현성과 루시아는 신혼여행이라는 명목으로 온갖 차원을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각 차원의 명소들을 둘러보기도 하고 맛집을 탐방하기도 했다.

    “정말 아름답네요.”

    루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그러게요.”

    현성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루시아의 말을 받았다.

    두 사람의 눈앞에는 난생처음 보는 절경이 펼쳐져 있었다.

    찬란한 빛을 뿌리는 은하수가 밤하늘을 뒤덮고 있다.

    사실 그건 그리 특별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다양한 모양의 크고 작은 섬들이 떠 있는 모습은 충분히 절경이라 부를 만했다.

    ‘아X타를 실사로 보는 것 같네.’

    현성과 루시아가 머무르고 있는 숙소도 밤하늘에 떠 있는 섬 중 하나였다.

    ‘경치 좋다.’

    숙소 한쪽 면이 매직미러로 되어 있어 이 좋은 절경을 침대에 누워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거기다 매직미러 앞에는 수영장처럼 커다란 욕조가 자리하고 있었다.

    ‘골치 아픈 일이 없으니까 속이 다 후련하네.’

    현성이 미소를 지으며 오른팔을 뻗어 자신의 옆에 누워 있는 루시아를 끌어안았다.

    루시아가 현성의 품에 폭 안겨 왔다.

    ‘좋다.’

    너무너무 행복했다.

    루시아와 함께라면 영원히 이어질 삶도 고독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쪽!

    현성이 루시아에 입술에 가벼운 버드 키스를 했다.

    두근두근.

    현성과 루시아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다시금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졌다.

    두 사람은 결혼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신혼부부였다.

    뜨겁게 불타오르는 게 당연했다.

    현성과 루시아가 한창 키스에 열중하고 있을 때.

    꽈아아아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현성과 루시아가 머물고 있던 섬이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끼이이익! 촤아아악!

    침대가 기울어졌고 수영장 크기의 욕조에 채워 놓았던 물이 바닥을 적셨다.

    “뭐야?”

    현성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며 자리에 일어났다.

    현성과 루시아가 머무는 섬은 하늘에 떠 있었다.

    당연히 지진 따위는 일어나고 싶어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마력?”

    강대한 마력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와 하늘에 떠 있는 섬들을 뒤흔들고 있었다.

    “1레벨 플레이어요.”

    “그런 것 같네요.”

    루시아의 말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굴레를 벗은 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거의 굴레를 벗기 직전의 수준으로 보였다.

    ‘내 휘하의 플레이어가 아니야. 전쟁인가?’

    현성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오랜 시간 이어져 왔던 차원 전쟁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전처럼 아군과 적군으로 편을 갈라 대대적으로 벌어지는 전면전은 사라졌다.

    하나 1레벨 플레이어들이 사적인 원한을 갚고자 치르는 사사로운 전쟁은 계속해서 이어져 왔다.

    원래 아군이었던 자들끼리 전쟁을 벌이는 경우도 있었고, 서로가 적이었기에 차원 전쟁 종결 후에도 그 원한을 잊지 못하고 전쟁을 이어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전쟁을 금한 건 어디까지나 휘하에 있는 플레이어들뿐이니까.’

    현성의 휘하에 속하지 않은 1레벨 플레이어들은 감히 현성과 그 휘하 세력에게 시비를 걸지는 못했다.

    마지막 차원 전쟁에 현성이 보인 신위에 겁을 잔뜩 집어먹었기 때문이다.

    현성은 자신의 휘하에 속해 있지 않은 1레벨 플레이어들의 사적인 분쟁을 막지 않았다.

    ‘내가 정의의 수호자도 아니고.’

    힘으로 억압해 봐야 반발만 커질 뿐이다.

    결정적으로 1레벨 플레이어들이 벌이는 전쟁은 현성에게 이득이 된다.

    종종 전쟁에서 패배한 1레벨 플레이어들이 살아남기 위해 현성의 휘하로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살짝 후회되네.’

    루시아와 함께 뜨거운 밤을 보낼 계획이었다.

    한데 그 계획이 저 잡놈 때문에 완전히 어그러졌다.

    -아들아그만찔러, 네놈 말대로 직접 찾아왔다! 그러니까 당장 나와!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1레벨 플레이어가 뱉은 한마디에 현성의 표정이 멍해졌다.

    ‘지금 저 미친놈이 뭐라고 하는 거야?’

    왜 갑자기 여기서 헛소리를 한다는 말인가?

    -당장 나오지 않으면 네놈의 차원을 박살 내 버리겠다!

    분노한 상대의 외침에 현성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진짜 미친놈이었나?’

    아무래도 직접 나서서 저 제정신이 아닌 놈을 징지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거대한 마력의 파동이 감지되며 또 다른 1레벨 플레이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겁쟁이라서 안 올 줄 알았는데 정말 왔군, 엄마야그만때려.

    현성은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도저히 저 두 미친놈의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두 미친놈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네놈이 감히 내 아이템을 스틸하고도 무사할 성싶었느냐!

    -스틸은 무슨, 난 정정당당하게 입찰해서 낙찰받은 거다!

    -드루이드 전용 아이템을 주술사인 네놈이 입찰해서 낙찰받은 게 뭐가 정정당당한 거냐!

    -그건 드루이드에게만 좋은 게 아니라 우리 주술사한테도 좋은 거야!

    -헛소리! 직업 옵션 달린 아이템은 해당 직업만 가질 수 있는 거다! 그게 룰이야!

    -그 룰을 누가 만들었데? 직업 옵션 없어도 아이템 성능이 좋으면 다른 캐릭터도 쓸 수 있는 거지.

    -이 뻔뻔한 자식!

    -뻔뻔하긴, 입찰에서 지고 다른 드루이드들을 선동해서 파업에 들어간 네놈이 더 치사하다! 네놈 때문에 공격대가 산산조각 났다고!

    -그게 왜 내 탓이냐! 네놈 탓이지!

    두 미친놈이 목소리를 높이며 말싸움을 시작했다.

    “저 미친놈들이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걸까요?”

    현성이 루시아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사냥을 하는 와중에 나온 아이템 분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그런데 직업 전용 아이템이라는 게 있었나요?”

    아이템의 종류는 다양했지만 직업 전용 아이템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저 두 명은 굴레를 벗지는 못했지만 그 직전의 경지에 오른 꽤 강한 축에 드는 1레벨 플레이어였다.

    아이템 하나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는 재력과 무력을 갖춘 이들인 것이다.

    또 현실적으로 저 둘이 힘을 합쳐서 잡아야 할 몬스터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황당하네.”

    저 둘이 싸우는 것은 상관이 없었다.

    하나 그 싸움의 여파로 현성과 루시아가 머무르는 숙소가 파괴되게 둘 수는 없었다.

    ‘다른 곳에 가서 싸우라고 해야겠다.’

    현성과 루시아가 다른 차원으로 떠나 버리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현성은 그 방법을 선택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곳의 환상적인 풍경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현성에게는 저 둘을 쫓아낼 힘이 있었다.

    저 둘을 피해 도망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얼른 쫓아내 버리자.’

    문제의 원흉인 저놈들만 내쫓으면 그만이었다.

    슈욱!

    현성이 공간 이동 스킬을 사용해 말싸움을 하고 있는 둘에게로 다가갔다.

    두 사람의 마력이 폭발하듯 팽창하고 있었다.

    더 지체했다가는 현성과 루시아가 머무는 숙소를 비롯해 근처에 있는 섬들이 모두 박살 날지도 몰랐다.

    “그만들 하지.”

    현성의 말에 금방이라도 충돌할 듯 마력을 팽창시키던 둘의 시선이 쏠렸다.

    “넌 뭐야?”

    먼저 모습을 드러냈던 1레벨 플레이어가 현성을 노려보며 물었다.

    “난,”

    “비겁한 자식, 혼자서는 겁났다 이거지!”

    현성이 채 대답을 하기도 전에 상대가 분노한 표정으로 외쳤다.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았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슈슈슈슉!

    그 말과 동시에 1레벨 플레이어 일곱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준은 제각각이었다.

    ‘그래도 굴레를 벗은 자가 하나 포함되어 있네.’

    여섯 명은 굴레를 벗지 못한 자였고 한 명은 굴레를 벗은 자였다.

    사실 굴레를 벗은 자 하나가 추가된 순간부터 이 싸움의 추는 기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 치사한 자식!”

    수적으로 열세에 몰리자 이 차원의 주인으로 보이는 1레벨 플레이어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그러더니 다급하게 스마트폰을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형님, 지금 드루이드 놈들이 단체로 제 차원으로 쳐들어왔습니다. 좀 도와주십시오.”

    ‘원군을 부르려는 모양이네.’

    그런데 상대의 표정을 보니 상황이 영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네? 저보고 알아서 하라뇨? 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형님! 형님!”

    ‘아무도 안 오는 모양이네.’

    적은 여덟 명.

    그런데 이쪽은 혼자였다.

    더군다나 저쪽에는 굴레를 벗은 자가 하나 포함되어 있었다.

    “큭큭큭, 너 도와줄 놈은 없는 모양이다.”

    “저 자식이 ‘아들아그만찔러’라는 말이지.”

    “너 오늘 죽었다.”

    여덟 명의 1레벨 플레이어들이 막대한 마력을 뿜어냈다.

    “그만.”

    그때 현성이 짧은 한마디와 함께 마력을 뿜어내 총 아홉 명의 1레벨 플레이어들의 몸을 속박했다.

    “뭐, 뭐야?”

    기세등등하던 여덟 명의 1레벨 플레이어들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위기에 처했던 ‘아들아그만찔러’라는 요상한 이름으로 불리던 1레벨 플레이어 역시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익!”

    “이 개자식아, 이거 당장 풀지 못해!”

    여덟 명의 1레벨 플레이어들이 전력을 다해 마력을 내뿜고 스킬을 시전하며 현성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난리를 쳤다.

    하지만 아무리 난리를 쳐 봐도 그들이 현성의 마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현성은 모든 업적을 클리어했다.

    사실상 1레벨 플레이어로서 오를 수 있는 정점에 오른 것이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탐식의 서와 인장 스킬을 통해 스텟을 증가시켰고 그것도 모자라 휘하 플레이어들의 경험치 일부를 받아 끊임없이 레벨업을 하고 그렇게 얻은 보너스 포인트로 스텟을 상승시켰다.

    그 결과 한계의 한계를 돌파한 현성은 게스피트나 백화같이 굴레를 벗은 자의 최고봉에 위치한 이들을 가볍게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게스피트나 백화 같은 강자도 어찌하지 못하는 현성을 고작 굴레를 벗은 자 하나가 포함된 1레벨 플레이어 여덟 명이 어찌할 수는 없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던 ‘아들아그만찔러’라는 요상한 이름으로 불리던 1레벨 플레이어가 현성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너 도와준 거 아닌데.”

    현성의 말에 감사 인사를 건넸던 ‘아들아그만찔러’라는 1레벨 플레이어가 어리바리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왜 싸웠는지부터 설명해 봐.”

    현성의 물음에 ‘아들아그만찔러’라는 1레벨 플레이어가 상황을 설명했다.

    “그게 와X 레이드에서 이상의 종말이라는 아이템이 나왔는데, 제가 정당하게 입찰을 해서 낙찰받았습니다. 그런데 저 녀석들이 억지를 쓰는 겁니다. 그래서 말싸움을 하다 보니…….”

    “하!”

    현성은 어이가 없었다.

    ‘이거 현피잖아.’

    게임 속의 원한을 현실로 가져와 해결하는 현피.

    그게 1레벨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벌어진 것이다.

    “미친놈들.”

    어쩐지 ‘아들아그만찔러’와 ‘엄마야그만때려’라는 말을 듣고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설마 한 차원의 지배자라는 놈들이 현피를 뜰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저 자식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때 엄마야그만때려라는 닉네임으로 불리던 1레벨 플레이어가 목이 터져라 외치며 상황을 설명했다.

    “닥쳐! 공대장이 허락한 건데 네가 왜 지랄이야!”

    이에 질세라 아들아그만찔러라는 닉네임으로 불리던 1레벨 플레이어도 목청을 높였다.

    두 1레벨 플레이어들이 목이 터져라 고성을 지르며 싸우기 시작했다.

    “하아!”

    현성의 입에서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와X의 레이드 룰이 어떻고 공대 규칙이 어떻고 하는데, 솔직히 현성은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모두 조용.”

    현성의 한마디에 시끄럽게 싸우던 두 명의 1레벨 플레이어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내 이름은 최현성이다.”

    현성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속박되어 있던 1레벨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히익!”

    특히 아까 현성에게 개자식 어쩌고 하며 욕을 했던 1레벨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현성에게 욕을 했던 1레벨 플레이어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외쳤다.

    “시끄러우니까 닥쳐.”

    “넵!”

    현성의 한마디에 질질 짜며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던 1레벨 플레이어가 입을 다물었다.

    “난 네놈들이 왜 현피를 뜨려고 하는 건지, 누가 잘했고 잘못했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어.”

    현성의 말에 1레벨 플레이어들이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아무런 관심도 없다면 도대체 왜 자신들의 일에 개입했다는 말인가?

    “내가 지금 이 차원에서 신혼여행 중이거든. 그런데 네놈들이 시끄럽게 구는 바람에 분위기가 다 깨졌어.”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1레벨 플레이어들이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시끄럽게 하지 말고 싸울 거면 다른 차원 가서 싸워. 참고로 경고는 한 번뿐이야.”

    “넵!”

    현성의 말에 1레벨 플레이어들이 맹렬한 기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고를 끝낸 현성이 다시금 루시아에게 되돌아갔다.

    “잘 해결하고 오셨나요?”

    루시아의 물음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그런데 싸운 이유가 참 황당하더라고요.”

    “싸운 이유가 황당하다고요?”

    “아, 글쎄 1레벨 플레이어끼리 현피를 떴다니까요.”

    “현피요?”

    루시아는 현피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현피라는 건 말이죠…….”

    현성이 현피가 어떨 때 발생하는 일인지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줬다.

    “게임 속에서 벌어진 싸움이 현실 싸움이 되는 경우도 있군요.”

    “저도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는 처음 봐요. 거기다 설마 1레벨 플레이어들이 그럴 줄은 몰랐어요.”

    현피는 한때 사회문제가 되어 뉴스에 등장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심지어 현피라는 이름의 독립 영화도 있다.

    ‘1레벨 플레이어들이 현피를 뜨면 가볍게 끝나지는 않을 텐데.’

    아마 차원의 명운이 걸린 싸움이 될 게 확실했다.

    ‘뭐, 상관없나?’

    어차피 현성이 현피 뜨는 걸 일일이 찾아다니며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또 굳이 현피가 아니더라도 1레벨 플레이어들은 수시로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운다.

    현성은 머릿속에서 방금 전 일을 말끔하게 지워 버렸다.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 * *

    다음 날 아침.

    현성과 루시아는 아침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서비스가 엄청나게 좋아졌다.

    원래 숙소에서 제공하는 아침 식사는 빵과 수프로 가볍게 요기나 할 수준이다.

    한데 오늘은 달랐다.

    온갖 고급 요리들이 줄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하늘에 둥둥 떠 있는 섬들을 왕복할 수 있는 하늘 마차가 숙소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여덟 마리의 페가수스들이 끄는 하늘 마차는 고가의 아티팩트로 뒤덮여 있는 고급품이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그랬다.

    어느 곳에 가도 필요 이상의 서비스가 나왔다.

    ‘그놈 짓이군.’

    현성은 이 일을 벌인 장본인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아마 어제 죽을 고비를 넘긴 아들아그만찔러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는 1레벨 플레이어의 소행일 것이다.

    “나와.”

    현성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들아그만찔러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던 1레벨 플레이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원하는 게 뭐야?”

    “최현성 플레이어님을 제 주군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제 모든 걸 들어 바치겠습니다. 제발 받아 주십시오.”

    아들아그만찔러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던 1레벨 플레이어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받아 주지.”

    현성의 대답에 아들아그만찔러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던 1레벨 플레이어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들아그만찔러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던 1레벨 플레이어의 본명은 맥웰크.

    맥웰크는 어제 현성 덕분에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그렇게 연명한 삶은 시한부에 불과했다.

    상대 쪽 여덟 명의 1레벨 플레이어들은 현성이 떠나기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만약 현성이 맥웰크의 차원을 떠나면?

    그날이 바로 맥웰크의 제삿날이었다.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현성의 휘하에 들어야 했다.

    그렇기에 온갖 아부를 다 했는데, 다행히 통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맥웰크가 환한 얼굴로 현성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지켜보고 있던 놈들도 나와.”

    현성의 말에 맥웰크를 감시하고 있던 여덟 명의 1레벨 플레이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눈빛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차마 현성에게 불만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너희들, 이놈한테 복수하고 싶지?”

    현성이 맥웰크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닙니다!”

    “저희가 어찌 감히 최현성 플레이어의 세력에 도전하겠습니까.”

    여덟 명의 1레벨 플레이어들은 맹렬히 부정했다.

    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저들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놈한테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어.”

    현성의 말에 맥웰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 휘하 세력 간의 전쟁은 금지되어 있어. 그렇지만 결투는 가능하거든. 결투 규칙은 단 하나, 상대의 목숨 줄만 붙여놓으면 된다는 거야.”

    “목숨 줄 말입니까?”

    “어, 일대일 결투든 일대다 결투든 다대다 결투든 상관없어.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만 않으면 말이야.”

    현성의 휘하에 있는 세력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사실 당연했다.

    현성의 휘하에는 적군 1레벨 플레이어였다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충성을 맹세한 이들이 다수 섞여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에 현성은 멸망한 차원을 대상으로 결투장을 만들었다.

    은원을 가진 이들이 그곳에서 지지고 볶고 알아서 해결하도록 말이다.

    규칙은 단 하나, 상대의 목숨 줄을 붙여 놓을 것.

    현성의 입장에서는 휘하 신하들이 치열한 대련을 통해 실력을 향상할 수 있으니 좋다.

    휘하 신하들 입장에서는 은원을 갚고 더 나아가서 현성의 세력 내에서 자신의 서열을 올릴 수 있으니 좋다.

    어차피 숨만 붙여 놓으면 엘릭서로 멀쩡히 회복할 수 있으니 현성으로서는 손해 볼 일이 없었다.

    “어떻게 할래? 너희도 들어올래?”

    현성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여덟 명의 1레벨 플레이어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맥웰크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이제 와서 충성 맹세를 하기 싫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무조건 목숨이 날아갈 테니까 말이다.

    총 아홉 명이나 되는 1레벨 플레이어들의 충성 맹세를 받은 현성은 일주일간 영화 아X타를 실사화한 것 같은 차원에서 푹 쉬었다.

    그리고 루시아와 함께 다른 차원으로 떠났다.

    그 후.

    맥웰크는 여덟 명의 1레벨 플레이어들에 의해 결투장으로 끌려가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았다.

    * * *

    현성은 루시아와 함께 다음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치 판타지 세계를 실사화해 놓은 것 같은 차원으로, 지구의 서양 중세 시대와 비슷한 문명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현성은 차원 전쟁을 치르며 여러 차원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항상 삶과 죽음을 눈앞에 둔 전투를 치르느라 주변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무슨 일을 해도 여유가 흘러넘쳤다.

    이곳 차원에 어울리는 의류를 구입한 현성과 루시아는 느긋하게 관광을 즐겼다.

    ‘생각보다 볼 건 별로 없네.’

    지구의 중세 시대와 비슷한 수준의 문명이다.

    그래서 그런지 별로 즐길 거리가 없었다.

    ‘유명한 관광지라고 해서 왔는데, 그냥 그러네.’

    이색적인 풍경이 신기하기는 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내일 떠나야겠다.’

    독특한 양식을 가진 숙소에서 눈앞의 절경을 보며 하룻밤을 머문 뒤 떠나면 될 것 같았다.

    “어이, 거기.”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성은 무시했다.

    이 차원은 난생처음 방문하는 곳이다.

    그것도 방금 전에 왔다.

    당연히 이 차원에서 자신을 부를 만한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일 다른 차원으로 갈까요? 생각보다 볼거리가 없는 것 같아서요.”

    “저도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을 부른 거겠거니 생각한 현성과 루시아가 대화를 나누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봐! 내 말이 들리지 않나!”

    그때 누군가가 현성과 루시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놈은 뭐야?’

    현성이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청년을 바라봤다.

    화려한 의복을 입은 것을 보니 신분이 꽤 높아 보였다.

    “무슨 일이지?”

    현성의 물음에 청년이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트렸다.

    “감히 내 말을 무시한 것도 모자라 나에게 반말까지 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놈이군.”

    순간 현성은 멍해졌다.

    ‘이 머저리가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왜 갑자기 시비를 거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외형 변경 아이템을 사용하고 다른 차원 어쩌구 하는 걸 보니 네놈들은 티르시 차원의 첩자가 확실하다.”

    현성이 얼굴을 찌푸렸다.

    ‘꽤 고레벨인가 보네.’

    현성은 루시아와의 신혼여행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이템을 사용해 외형을 현지인과 동일하게 바꿨다.

    그래야 편안하게 신혼여행을 즐길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동안은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별다른 기능이 없는 변신 아이템이라고 해도 무려 신화 등급이었다.

    당연히 쉽게 간파되지 않았다.

    하지만 절대적인 건 없다.

    상대의 레벨이 높거나 높은 등급의 간파 스킬을 가지고 있다면?

    이렇게 들킬 수밖에 없었다.

    “네놈들이 티르시 차원의 첩자라는 사실은 이미 발각되었다. 그러니 순순히 무릎을 꿇어라. 저항한다면 죽이겠다.”

    청년의 말에 현성이 얼굴을 찌푸렸다.

    외형 변경 아이템을 사용했다고 다짜고짜 첩자로 몰아가다니?

    “우리는 그냥 여행을 온 것뿐이야.”

    현성이 외형 변경 아이템을 해제하고 말했다.

    이에 청년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생각하고 있던 모습이 아닌가 보네?”

    수많은 차원 중 지구인과 동일한 외형을 가진 차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용인족, 수인족 같은 경우는 양반이다.

    아예 눈코입이나 팔다리의 숫자가 다른 경우도 수두룩했다.

    현성은 당황한 청년의 표정을 보고 자신들의 외형이 첩자를 파견했다는 티르시 차원의 인간들과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확인 끝났지? 그러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비켜라.”

    현성의 말에 청년의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화르르륵!

    그러더니 밑도 끝도 없이 곧바로 화염계 스킬을 사용해 현성과 루시아를 공격했다.

    웬만한 고레벨 플레이어라도 순식간에 통구이가 될 만한 위력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현성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퍼어엉!

    현성이 펼친 방어 스킬에 청년의 공격이 막혔다.

    챙!

    청년은 곧바로 검을 뽑아 들고 현성과 루시아를 공격했다.

    휘익! 덥석!

    청년이 휘두른 검이 현성의 맨손에 그대로 잡혔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청년이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현성의 손에 잡힌 검을 빼내기 위해 용을 썼다.

    마력도 쓰고 스킬도 쓰고 아주 지랄 발광을 했다.

    “너 일단 좀 맞자.”

    퍼억!

    현성이 그대로 주먹을 날렸다.

    “커억!”

    청년이 고통 어린 비명과 함께 검을 포기하고 몸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볼 현성이 아니었다.

    곧바로 마력 역장을 펼치고 청년의 멱살을 잡았다.

    퍽! 퍽! 퍽!

    그와 동시에 현성이 청년을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상대는 미친놈이었으니 현성이 굳이 사정을 봐줄 필요가 없었다.

    외형 변경 아이템은 나름 귀하다면 귀한 아이템이다.

    하지만 엄청나게 구하기 어려운 수준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단순 미용 목적으로 외형 변경 아이템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결정적으로.

    ‘자기도 쓰고 있으면서 말이야.’

    현성을 공격한 청년도 외형 변경 아이템을 사용 중이었다.

    내로남불도 아니고 자기도 쓰고 있으면서 남이 사용했다고 다짜고짜 첩자로 몰아 죽이려고 하다니?

    청년이 뿜어낸 살기는 진짜였다.

    사용한 공격 스킬의 위력은 웬만한 고레벨 플레이어를 잿더미로 만들 정도로 강력했다.

    휘두른 검에 실린 힘도 현성과 루시아의 몸을 둘로 갈라 버릴 만큼 강맹했다.

    조사를 원했다면?

    순순히 응했을 것이다.

    한데 상대는 현성과 루시아가 티르시 차원의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다짜고짜 공격을 했다.

    현성과 루시아를 제압하려는 목적이었다면?

    절대 그런 공격을 날리지 않았을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이거지.’

    청년은 현성과 루시아가 첩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자 당황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살기를 뿜어내며 공격을 했다.

    그건 현성과 루시아가 첩자가 아니더라도 첩자로 몰아 죽이겠다는 심보였다.

    상대가 단순히 제압 목적의 공격을 했다면?

    현성도 이렇게 독하게 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현성과 루시아를 죽이려 했다.

    ‘남을 죽이려고 했으면 자기도 목숨도 걸어야지.’

    퍽! 퍽! 퍽!

    현성이 무자비한 구타를 이어 갔다.

    물론 진짜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반쯤은 죽여 놓을 생각이었다.

    “커억! 살려 줘!”

    현성에게 구타당하던 청년이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싫어.”

    현성이 짤막한 대꾸와 함께 구타를 지속했다.

    ‘죽을 것 같아.’

    현성에게 구타를 당하던 청년은 쉼 없이 전신을 두들기는 주먹세례에 쉽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강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감히 자신이 누군 줄 알고 폭력을 휘두른다는 말인가?

    퍽! 퍽! 퍽!

    하지만 구타가 계속되자 공포감이 밀려왔다.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청년의 머릿속이 불안감으로 물들었다.

    ‘괜한 욕심을 부려서.’

    청년에게는 아버지의 눈에 들 만한 전공이 필요했다.

    그래서 수상해 보이는 이가 있다면 일단 심문하고 봤다.

    대부분은 순순히 조사에 응했다.

    또 확실한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외형 변경 아이템을 사용하고 있는 현성과 루시아를 발견했다.

    청년은 두 사람이 티르시 차원의 첩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나 외형 변경 아이템 사용을 중단한 현성과 루시아의 외모는 티르시 차원인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때 현성과 루시아가 첩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죽일 생각이었다.

    차원 게이트를 사용했다는 건 상대가 초월 등급 군주 플레이어라는 뜻이었다.

    군주 플레이어가 군주 플레이어를 죽이면?

    휘하 세력의 주인이 바뀐다.

    그렇기에 욕심을 부려 공격했다.

    청년은 창조 등급 군주 플레이어였다.

    그렇기에 초월 등급 군주 플레이어 따위는 손쉽게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일방적으로 제압당해 버렸다.

    ‘혹시 아버지와 같은 1레벨 플레이어인 건가?’

    단순한 군주 플레이어가 아니라 1레벨 플레이어라면?

    충분히 자신을 일방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

    손발이 덜덜 떨려 왔다.

    이 자리에서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심이 피어올랐다.

    ‘어쩔 수 없어.’

    청년은 휘하 신하를 통해 아버지에게 뜻을 전했다.

    이곳으로 와서 자신을 살려 달라고 말이다.

    잠시 후.

    슈슈슉!

    족히 수백에 이르는 플레이어들이 공간 이동 스킬을 사용해 현성과 루시아의 주변에 모습을 드러냈다.

    “으하하하! 이제 네놈은 죽은 목숨이다!”

    현성에게 구타당하고 있던 청년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아버지가 자신의 부름에 응답해 주었다.

    아버지가 직속 수하들과 함께 공간 이동 스킬을 사용해 이곳에 도착했다.

    아버지의 직속 수하들은 최상위 레벨의 플레이어들로 이루어진 정예 중에 정예.

    웬만한 차원을 통째로 점령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

    자신을 구타한 상대는 강하다.

    그러나 아버지와 그 휘하 직속 수하들이 나타난 이상 끝이었다.

    ‘잘만 하면 꾸중이 아니라 상을 받을 수도 있어.’

    상대는 창조 등급 군주 플레이어이거나 1레벨 플레이어일 게 확실했다.

    그런 상대를 제압해 충성 맹세를 받아 내거나 죽인다면?

    아버지의 세력은 월등히 커질 수 있었다.

    “아버지!”

    청년이 재빨리 발걸음을 옮겨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상대가 자신을 인질로 잡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저놈은 다른 차원의 군주 플레이어입니다. 제압해서 충성 맹세를 받아 내시거나 죽이시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청년이 속사포처럼 자신의 생각을 토해 냈다.

    그런데 청년의 아버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오히려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내가 두들겨 맞은 것 때문에 화가 나신 건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아버지의 많고 많은 자식들 중 하나다.

    그러나 아무리 많다고 해도 어쨌든 자식은 자식이다.

    자신의 자식이 남에게 두들겨 맞았는데 화가 나지 않을 부모는 없다.

    “아버지?”

    청년이 다시금 아버지를 재촉했다.

    “닥치거라!”

    그때 청년의 아버지가 노성을 토해 냈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청년이었다.

    “예?”

    “저분이 뉘신 줄 알고 공격을 한 것이냐!”

    청년은 순간 멍해졌다.

    아버지의 입에서 저분이라는 호칭이 나오다니?

    아버지는 1레벨 플레이어로 오랜 시간 이 차원을 다스리는 지배자였다.

    어디 그뿐인가?

    지난 차원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그 세력을 크게 키우신 분이다.

    한데 아버지의 입에서 저런 극존칭이 나오다니?

    “내 얼굴을 알고 있나 보네?”

    현성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 그렇사옵니다. 제 아들의 무례에 대해 제가 직접 사과드리겠습니다.”

    청년의 아버지가 현성에게 무릎을 꿇었다.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잘못한 건 저놈이지 네가 아니잖아.”

    “제 아들의 목이 필요하시다면 당장 잘라 바치겠습니다.”

    아버지의 말에 순간 청년이 멍해졌다.

    ‘뭐? 누구 목을 잘라서 바쳐?’

    항상 당당한 아버지의 모습만 봐 왔던 청년의 입장에서는 충격 그 자체였다.

    그와 동시에 아버지에게 있어서 자신의 가치가 그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한편 현성은 극도로 겁에 질린 상대의 모습에 약간 의아했다.

    현성은 1레벨 플레이어 중에서 최고 수준의 강자였다.

    또한 1레벨 플레이어의 한계를 극복해 레벨이 계속해서 상승한 전 차원 최강의 존재다.

    그렇지만 현성은 무뢰배가 아니었다.

    자신을 적대한 존재는 용서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연좌제를 물려 사돈에 팔촌까지 씨를 말리지는 않는다.

    또 무자비한 정복 전쟁을 벌여 전 차원을 정복하거나 모든 플레이어를 자신의 휘하에 넣을 생각도 없었다.

    쉽게 말해 청년의 아버지라는 존재가 저렇게 강한 공포심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뭐, 죽은 시체의 목은 필요 없고 저놈만 순순히 나한테 넘겨. 잡일을 할 심부름꾼으로 쓸 생각이니까.”

    현성은 저 자만심 가득한 애송이를 휘하에 넣고 적당히 굴려 버릇을 고쳐 줄 생각이었다.

    ‘응?’

    그런데 상대에게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방금 전 목을 잘라 바치겠다고까지 말했었는데 생각이 바뀐 걸까?

    아들을 아끼는 아버지의 마음이 되살아난 걸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미약한 살기를 지속적으로 뿜어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왜, 죽이는 건 되는데 주기는 싫어?”

    “그, 그게…….”

    상대가 말끝을 흐렸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현성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챠를 돌려 강화시킨 무 등급 스킬을 사용했다.

    스킬의 이름은 마력 탐지.

    평범한 탐지 스킬이지만 고유 권능 가챠로 인해 강화될 대로 강화되어 그 성능은 상상을 초월했다.

    무려 마력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행동을 탐지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강화된 마력 탐지 스킬은 메시지 스킬을 도청하거나 군주의 외침을 도청하는 것도 가능했다.

    ‘역시.’

    두 사람은 메시지 스킬을 사용해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순순히 따르거라.

    -아버지, 제발 살려 주세요.

    -널 살려 주려고 이러는 것이다. 목숨은 부지할 수 있지 않느냐.

    -전 최현성 플레이어의 노예가 되기 싫다고요.

    -그럼 이 자리에서 죽겠느냐? 네 실수로 벌어진 일이다. 그러니 네가 책임지도록 해라.

    아들은 살려 달라고 빌고 아버지는 거절하는 상황.

    ‘그냥 겁이 많은 사람인가?’

    현성이 그렇게 생각할 때 결정적인 단어가 들려왔다.

    -그리고 절대 최현성 플레이어에게 내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청년의 대답에 현성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름? 왜 이름을 말하면 안 된다는 거지?’

    의문이 생겼으면 응당 해결해야 하는 법이다.

    “그보다 당신 이름이 뭐야?”

    현성의 물음에 청년의 아버지가 몸을 부르르 떨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파이소라고 하옵니다.”

    청년의 아버지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신하들에게 군주의 외침을 날렸다.

    -이제부터 내 이름은 파이소다.

    ‘뭐지?’

    이름을 물어봤더니 갑자기 개명을 해 버렸다.

    ‘분명히 뭔가 있어.’

    청년의 아버지는 자신의 이름을 현성에 밝히고 싶지 않아 했다.

    ‘왜지?’

    현성은 청년의 아버지를 방금 전에 처음 만났다.

    기억을 열심히 되짚어 봐도 과거에 청년의 아버지를 만난 기억이 없었다.

    현성이 제물로 가챠를 돌렸는데 강화에 성공해 창조 등급 스킬이 된 사이코 메트리를 발동시켰다.

    그와 동시에 이 주변에서 있었던 일들이 빠르게 떠올랐다.

    현성은 원하는 정보가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사이코 메트리 스킬을 사용했다.

    “앞으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현성이 사이코 메트리 스킬을 사용하는 와중에 청년이 충성을 맹세했다.

    현성은 청년을 무시하고 광범위하게 사이코 메트리 스킬을 사용했다.

    그리고 드디어 답을 얻었다.

    -황제 폐하께서 차원 전쟁을 준비하신다지?

    -그러게 말이야. 이번에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을지.

    -죽음을 이끌고 다니시는 분이 확실해. 까마귀 황제라는 이름처럼 말이야.

    -어허! 어디 황제 폐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나. 그러다 경을 칠 거야.

    ‘까마귀 황제라.’

    현성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드디어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플레이어로 각성하면 자동으로 통역 능력을 얻는다.

    다른 차원의 독수리라는 단어가 플레이어의 귀에는 자국의 언어 독수리로 들린다.

    또는 익숙한 영어 단어인 이글로 들릴 수도 있다.

    만약 플레이어가 알지 못하는 물건이라면?

    플레이어 알고 있는 지식으로 적당히 해석을 해 준다.

    그게 불가능할 때는 본래의 뜻으로 들린다.

    ‘까마귀, 크로우라는 이름은 아주 익숙하지.’

    현성이 갓 각성해 건전지를 팔아 가며 근근이 연명하고 있을 무렵.

    크로우라는 이름의 되팔렘과 전쟁을 치른 적이 있었다.

    그 전쟁에서 현성은 승리했다.

    하지만 까딱 잘못했다면 패배할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현성은 크로우의 포인트 자판기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캠핑용 대용량 배터리로 빅엿을 먹여 주기는 했지만, 그걸 제대로 된 복수라고 할 수는 없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크로우에 대한 악감정이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만약 캠핑용 대용량 배터리라는 역전 찬스가 없었다면 현성은 끝장났을 터.

    아마 지금처럼 전 차원 최고의 플레이어가 되기는커녕 크로우의 노예로 부려지고 있을 게 확실했다.

    ‘그동안 깜빡 잊고 있었어.’

    사실 크로우에게 앙갚음을 하고자 했다면 진작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는 속담처럼.

    현성도 전 차원에서 가장 강하고 부유한 플레이어가 되자 건전지를 팔아 근근이 연명할 때의 기억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저놈 덕분에 떠올랐네.’

    그때의 절박했던 심정과 죽일 듯한 살의가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청년이 현성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면?

    현성은 이 차원이 되팔렘 크로우가 다스리는 곳인 줄도 모르고 떠나갔으리라.

    “네 이름이 파이소라고?”

    현성이 되팔렘 크로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예, 그렇사옵니다.”

    크로우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두근두근.

    하지만 현성의 귀에는 미친 듯이 뛰는 크로우의 심장 소리가 명확하게 들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왜? 그건 네가 방금 지은 이름이니까.”

    현성의 말에 크로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들한테 비밀로 하라고 당부하고 신하들에게 파이소라고 부르라고 명령하면 끝일 줄 알았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크로우는 끝까지 시치미를 뗐다.

    하지만 속마음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설마 메시지 스킬과 군주의 외침을 도청한 건가? 도대체 어떻게?’

    크로우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네 아들이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차원이 네가 다스리는 차원인지도 모르고 다른 곳으로 떠났을 거야, 크로우.”

    현성의 말에 크로우는 심장이 멈추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애초에 나는 너에 대해서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거든. 그런데 네 아들 녀석 덕분이 완전히 기억이 나 버렸어.”

    현성은 미소를 지었고 크로우는 창백한 얼굴로 어버버거렸다.

    “야, 넌 특별히 내가 용서해 줄게. 돌아가.”

    굳이 현성이 크로우의 아들을 처벌할 필요는 없을 듯 보였다.

    크로우가 알아서 자신의 아들을 처벌할 테니까 말이다.

    “되팔렘 크로우, 발뺌해 봐야 소용없어.”

    현성이 자신의 정체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크로우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털썩!

    크로우가 절망 어린 표정으로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네 아들이 하려고 했던 일을 네가 대신 해 줘야겠어.”

    현성의 말에 크로우가 원망 어린 눈빛으로 자신의 아들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철없는 크로우의 아들은 자신이 노예 신세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크게 혼이 나기는 할 것이다.

    그렇지만 평생 현성의 노예 신세가 되어 살아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설마 자식을 죽이기야 하겠어.’

    크로우의 아들이 이런 철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버지인 크로우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었다.

    “왜, 내 말대로 하기 싫어? 그럼 한번 재주껏 반항해 보든지. 어차피 덤빌 거면 빨리 덤벼.”

    현성의 말에 크로우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옵니다! 제가 어찌 감히!”

    현성에게 덤비다니?

    그럴 생각은 정말 눈곱만큼도 없었다.

    크로우는 그저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 고민했을 뿐이다.

    신하들을 방패막이 삼아 도주하는 것.

    그게 크로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다.

    그러나 그나마도 성공 확률이 그리 높지 않았다.

    설사 성공한다고 해도 평생을 도망자로 살아야 했다.

    ‘저 망할 놈 때문에.’

    크로우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아들을 노려보았다.

    ‘자식이 아니라 웬수야, 웬수.’

    자기 때문에 아버지가 노예 생활을 하게 생겼는데 저리 기뻐하다니?

    너무 화가 났다.

    “그럼 빨리 충성 맹세부터 해.”

    현성의 압박에 크로우는 결국 현성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리고 현성의 휘하 신하가 되었다.

    크로우는 현성이 일으킨 차원 전쟁을 기회로 잡아 빠르게 성장했다.

    그 후 차원 전쟁이 종료된 뒤에도 끊임없이 힘을 키우며 정복 전쟁을 벌여 세력을 키워 왔다.

    한데 아들이 사고를 쳐서 현성의 눈에 뜨이는 바람에 그간 키워 온 알토란 같은 세력을 고스란히 들어다 바치게 되었다.

    크로우의 입장에서는 피눈물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크로우가 치러야 할 죗값은 단순히 자신의 세력을 들어 바치는 것에서 끝이 아니었다.

    * * *

    되팔렘 크로우를 휘하 신하로 만든 현성은 대대적인 광고를 통해 자신과 같은 피해를 당한 피해자들을 모집(?)했다.

    -크로우에게 되팔렘 피해를 당한 적이 있으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 주세요. 게시판에 피해 정도를 기재해 주시면, 철저한 조사 후 모두 배상해 드리겠습니다.

    추신 – 거짓 신고를 할 경우 본인이 피해를 당했다고 거짓 주장한 금액의 열 배를 추징하겠습니다.

    현성은 컴퓨터 부팅 화면은 물론 모든 사이트에 해당 광고를 띄웠다.

    그것도 부족해서 휘하 신하들에게 입소문을 퍼트리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이에 광고에 대한 반응은 실로 폭발적이었다.

    -크로우 놈 밑에서 정확히 109년 동안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정확한 피해 정도는…….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에게 빼앗긴 포인트가 무려…….

    -포인트는 필요 없습니다. 제가 그놈 밑에게 노예 생활을 한 321년만큼 크로우도 제 아래에서 노예 생활을 하게 해 주세요.

    무려 천여 개가 넘는 글들이 올라왔다.

    현성의 예상대로였다.

    크로우는 현성에게만 되팔렘 짓을 한 게 아니었다.

    크로우는 현성에게 역관광을 당하기 전에도 되팔렘 짓을 했다.

    또 현성에게 역관광을 당한 후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되팔렘 짓을 했다.

    현성에게 역관광을 당해 큰 피해를 봤던 크로우가 빠르게 재기할 수 있었던 이유도 다 되팔렘 짓거리 덕분이었다.

    크로우는 그렇게 되팔렘 짓을 해서 번 포인트로 빠르게 강해졌고 지금의 강대한 세력을 이룰 수 있었다.

    현성은 휘하 신하들을 시켜 게시판의 진위 여부를 확인했다.

    진실의 계약 스킬을 익힌 신하들을 풀었기에 게시판에 올린 글에 대한 진위 여부 확인은 금방 끝났다.

    “네가 다 배상해 줘.”

    현성이 크로우에게 그간 피해를 당한 1레벨 플레이어들에게 정당한 배상을 하라고 지시했다.

    “크흑!”

    이에 크로우는 울며 겨자 먹기로 자신의 전 재산을 탈탈 털어 피해자들에게 합당한 배상을 해 줘야 했다.

    그러나 크로우가 집안 기둥뿌리를 뽑아도 현성이 지시한 합당한 배상은 불가능했다.

    현성이 피해자들의 피해 금액에 연 24%의 복리를 적용시켰기 때문이다.

    이건 현성이 나름 양심적으로 정한 거였다.

    다른 차원이 아니라 한국의 법정 최고 금리를 적용시킨 거니까 말이다.

    문제는 연 복리로 굴러가는 이자였다.

    거기다 피해자들이 고통받은 시간은 10~20년이 아니었다.

    적게는 백 년.

    길게는 무려 5백 년이 넘게 크로우에게 노예처럼 착취당했다.

    24%의 이자가 매년 복리로 불어나니, 크로우로서는 절대 갚을 수 없는 금액이었다.

    이에 현성은 간단한 해결책을 만들었다.

    “돈이 없으면 몸으로라도 때워야지.”

    현성은 크로우에게 적절한 수준의 인건비를 책정해 피해자들에게 대여해 주었다.

    그 후 크로우를 사냥개처럼 부려 먹어 포인트와 아이템을 얻든 그간의 분풀이로 죽도록 두들겨 패든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여러 차원을 다스리는 군주에서 엄청난 채무를 진 빚쟁이 신세가 된 크로우의 세력은 결국 와해되었다.

    신하들이 크로우와 함께 빚을 갚아 나가는 걸 거부하고 충성 맹세를 철회한 것이다.

    페널티가 어마어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죽을 때까지 크로우의 빚을 함께 갚을 판이었으니까 말이다.

    가족들도 떠나갔다.

    막대한 빚에 눌린 크로우의 가족들은 남편을 버렸고 아버지를 버렸다.

    휘하 세력까지 잃은 크로우로서는 더욱더 빚을 갚기가 힘들어졌다.

    “주군, 부탁이 있습니다.”

    열심히 빚을 갚으며 채무자의 임무를 수행해 나가던 크로우가 현성에게 찾아와 한 가지 부탁을 했다.

    그게 뭐냐 하면…….

    “제 아들놈과 함께 갚게 해 주십시오.”

    바로 크로우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계기를 만든 아들놈에 대한 연좌제였다.

    “난 연좌제 같은 거 엄청 싫어하는데.”

    현성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자진해서 크로우를 돕겠다고 나서는 건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이유로 크로우의 빚을 대신 갚게 하는 건 내키지 않았다.

    크로우는 1레벨 플레이어로 무한한 수명을 가지고 있다.

    피해자들도 1레벨 플레이어다.

    그런 만큼 계속해서 굴리면 천 년이 걸리든 만 년이 걸리든 언젠가는 빚을 모두 다 갚을 수 있다.

    “그건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제가 말한 아들놈은 바로 주군을 죽이려고 했던 녀석입니다.”

    “아, 그놈.”

    현성의 머릿속에 청년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무려 주군을 죽이려고 했던 놈 아닙니까? 그놈이 저지른 죄에 대한 처분을 저에게 일임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그렇게 해.”

    현성이 선선히 크로우의 부탁을 수락했다.

    “감사합니다!”

    크로우가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뭐, 상관없겠지.’

    그놈은 무려 현성과 루시아를 죽이려고 했다.

    그런 만큼 그 정도 처벌은 합당했다.

    또 그 당시 현성은 그 건방진 놈이 저지른 죄에 대한 처벌을 크로우에게 일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크로우가 빚 갚느라 바빠서 제대로 아들놈을 체벌하기도 힘들었다는 것 정도?

    “그런데 의외네,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아무리 미워도 자식 아니겠는가?

    한데 그놈을 죽을 때까지 빚을 갚아야 할 채무자의 운명으로 만들겠다니?

    생각보다 강한 처벌이었다.

    “다른 가족들이 저를 버린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놈이 저를 버린 건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크로우의 두 눈에서 독기가 뚝뚝 흘러나왔다.

    크로우가 빚쟁이가 된 것은 과거 그가 저지른 업보다.

    그러나 그 업보가 빚으로 전환되는 시발점을 제시한 건 바로 그 아들놈이었다.

    한데 그 아들놈은 가족들 중 가장 먼저 아버지인 자신을 버렸다.

    그리고 오히려 어차피 벌어질 일이었다며, 그건 자신의 잘못이 아닌 아버지의 잘못이라며 변명을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기적인 크로우의 입장에서는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다른 가족들은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하고 넘어가겠지만…….

    그놈만큼은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또 명분도 있었다.

    무려 최현성 플레이어와 그 아내인 루시아를 죽이려고 했던 놈이었으니까 말이다.

    ‘이제 네놈도 끝장이다.’

    크로우는 자신이 현성의 노예로 전락하는 순간 미소를 짓던 아들의 표정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현성의 허락을 받은 크로우는 자신의 아들을 붙잡아 바로 일을 시켰다.

    크로우의 아들은 결국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일당을 받아 가며 빚을 몸으로 때우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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