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동창회
‘세호 그놈은 지금 잘 살고 있으려나?’
과거 회상을 끝마친 현성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후 김세호는 몇 번이고 현성에게 연락을 해 왔다.
직접 찾아와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고 싹싹 빈 적도 있었고 오히려 역정을 내며 욕을 하며 지랄발광을 한 적도 있었다.
당연히 현성이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끈하게 어루만져 줬다.
그와 함께 경고도 확실히 해 줬다.
한 번만 더 자신을 찾아와 이런 헛짓거리를 하면, 지금 있는 바닥이 그 끝이 아님을 보여 주겠다고 말이다.
한 번의 어루만짐과 경고 이후 김세호는 현성에게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아직도 빚을 갚고 있는 건 아니겠지?’
20년도 넘은 옛날 일인데 설마 그럴까 싶었다.
그러나 설마가 사람을 잡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또 빚이라는 게 원래 빚이 빚을 낳는 법이다.
현성은 모르겠지만 불행하게도 김세호는 아직도 빚에 깔려 신음하고 있었다.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뭐.’
현성이 활짝 미소를 지으며 대학교 동창생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대학교 동창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처음 대학교 동창회에 참석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 * *
고등학교 동창회는 나쁘지 않았다.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 한 마리가 있기는 했지만 그건 치워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 후 현성은 다른 동창회에 참석했다.
어차피 1년에 한 번 정도밖에 열리지 않아서 바쁜 현성이라도 충분히 참석할 수 있었다.
문제가 있었던 고등학교 동창회와 달리 초등학교 동창회와 중학교 동창회는 아무런 트러블 없이 말끔하게 끝났다.
김세호 같은 미꾸라지가 없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성호가 사람 관리를 참 잘한단 말이야.’
윤성호는 확실히 리더 기질이 있었다.
특히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났다.
문제가 되는 사람은 바로바로 쳐 내고 동창회 분위기가 자기 자랑 대회가 되지 않게 잘 조율했다.
거기다 대기업 영업 사원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친화력도 좋았다.
‘보통은 귀찮아서라도 이렇게 안 할 텐데.’
윤성호는 사람들을 모으고 재미있게 노는 걸 무척이나 즐겼다.
현성이 들어 보니 동창회 말고도 여러 모임들을 주최하고 있다고 했다.
‘뭐, 영업에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고 하니까.’
사람 사는 세상이 다 그렇듯 한 다리, 두 다리 건너면 플레이어들에게도 어떻게 연결이 되는 모양이었다.
효율은 상당히 안 좋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애초에 윤성호가 여러 모임을 운영하는 목적 자체가 영업이 아니라 본인이 즐겁게 노는 거다 보니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누나한테 말해서 스카웃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현재 아라는 무서운 속도로 성장 중이었다.
그만큼 사람이 많이 필요했다.
윤성호 같은 인재라면?
굳이 플레이어들을 상대하는 영업직이 아니라 다른 영업직을 맡겨도 훌륭히 소화할 게 분명했다.
‘오늘 이야기해 봐야겠다.’
대학교 동창회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그때 술 한잔 하며 슬쩍 이야기를 꺼내 보면 좋을 거 같았다.
‘아니면 이모탈 길드로 데리고 와도 되는 일이고.’
현재 현성은 플레이어 협회를 나와 이모탈 길드를 차렸다.
플레이어 협회에 속해 있던 플레이어들은 물론 타 길드의 랭커들도 대대적인 영입 전쟁을 벌여 빼앗아 온 참이었다.
당연히 인재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뭐, 와이번 던전 웨이브 이후 오성 그룹 분위기가 개판이기도 하고 천천히 이야기해 보자.’
윤성호가 오케이를 하면 데리고 오면 될 일이고 거절하면 계속 오성물산에서 근무하면 될 일이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던 현성이 드디어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끼이이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어, 현성아!”
“반갑다.”
현성이 미소를 지으며 친구들과 인사를 나눴다.
“아버지가 각성하셔서 병 다 나으셨다며? 축하한다.”
“고맙다.”
“거기다 너도 플레이어로 각성해서 요즘 잘나간다며? 좋겠다, 짜식.”
“뭐, 그렇지.”
친구의 말에 현성이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요즘은 잘나가는 수준이 아니라 대한민국 플레이어 업계를 씹어 먹고 있는 수준이었다.
현성이 만든 이모탈 길드는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였으니까 말이다.
‘트러블 메이커도 없고 좋네.’
현성이 대학교 동창생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딸랑!
그때 식당 문이 열리며 여자 동창생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련된 스타일에 약간 도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 도도한 표정마저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의 미녀였다.
“얘들아, 안녕. 오랜만이야.”
“어머! 혜영아! 이게 얼마 만이야!”
“그러게.”
오혜영의 등장에 여자 동창생들이 방방 뛰며 난리가 났다.
“왔냐?”
“넌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드냐?”
남자 동창생들 역시 은근히 오혜영의 등장을 반겼다.
현성도 오혜영을 바라보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혜영아, 오랜만이다. 그동안 잘 지냈어?”
현성의 인사에 오혜영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하지만 금방 활짝 펴졌다.
“응, 현성아. 나도 네 소식 들었어. 축하해.”
“고마워.”
현성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오혜영이 여자 동창생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야, 너 괜찮냐?”
현성의 옆에 앉아 있던 남자 동창생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아무것도 아니다.”
남자 동창생이 말을 얼버무렸다.
현성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친구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마력 역류증으로 쓰러지시기 전 현성은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그리고 그때 현성과 오혜영은 꽤 유명한 캠퍼스 커플이었다.
뭐, 현성이 대학교를 휴학한 뒤 얼마 가지 않아 헤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정말 아무 감정도 없는데.’
현성과 오혜영이 헤어진 이유는 아버지의 마력 역류증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쓰러진 후 현성은 대학교를 휴학하고 무슨 일이든 해서 병원비를 벌어야 했다.
당연히 한가하게 연애질이나 하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일을 하면서 서서히 오혜영과의 사이가 멀어졌다.
현성은 돈을 위해 숙식 노가다를 선택했다.
당연히 오혜영과 만나는 것 자체가 힘들어졌다.
현성이 애써 시간을 내서 만나려고 하면 오혜영이 거부했다.
통화도 점점 뜸해졌다.
현성이 전화를 걸어도 오혜영이 받지 않는 경우가 늘어났다.
그러던 도중 오혜영이 현성에게 헤어지자는 통보를 했다.
현성이 아닌 다른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오혜영의 말에 현성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현성도 알고 있었다.
오혜영은 겉으로 보이는 것을 중시하는 스타일이었다.
현성과 사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대학교 1학 때 현성은 여자 동기들 사이에서 제법 인기가 있었다.
키도 컸고 생긴 것도 남자답게 생긴 데다 사교성도 있고 성격도 좋았기 때문이다.
그건 오혜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 커플이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현성이 대학교를 휴학하고 노가다 일을 다니게 되었다.
대학생 현성이 아닌 노가다꾼 현성은 더 이상 오혜영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아니었다.
현성과 오혜영은 그렇게 헤어졌다.
당시에는 좀 힘들었지만…….
솔직히 말해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오히려 현성은 그때 오혜영과 헤어진 게 잘한 일이라고 확신했다.
만약 억지로 계속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면?
‘오히려 더 안 좋게 헤어졌겠지.’
어차피 무조건 파탄이 날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현성은 오혜영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오혜영 또한 현성의 사정을 모두 이해하고 감수하며 연애를 이어 나갈 정도로 사랑이 깊지 않았다.
어차피 끊어질 인연을 억지로 이어붙였다면?
상당히 좋지 않은 형태로 헤어졌을 것이다.
아, 현성이 휴학하고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오혜영에게 새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윤성호의 말을 들었을 때는 조금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때는 오혜영이 현성에게 헤어지자는 통보를 하기 전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현성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누나는 파혼까지 했는데, 뭐.’
현성은 그저 집안 문제로 여자 친구와 자연스럽게 헤어진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다.
‘어차피 풋사랑이었던 거 같고.’
각성하기 전에는 사느라 바빠서, 각성한 후에는 플레이어로서 활약하느라 오혜영의 얼굴을 떠올린 적도 없었다.
방금 전 헤어진 후 처음으로 오혜영의 얼굴을 봤다.
그런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사실 오혜영을 신경 썼다면 대학교 동창회에 참석하기 전에 윤성호에게 물어봤을 것이다.
오늘 오혜영이 참석하냐고 말이다.
‘아예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으니, 뭐.’
오혜영이 등장하기 전.
현성은 오혜영이라는 존재 자체를 아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완전히 잊고 있던 존재를 다시 만났다.
그렇지만 역시나 아무렇지도 않았다.
‘재미있게 놀기나 하자.’
초, 중, 고등학교 동창회는 이미 참석했지만, 대학교 동창회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때문일까?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많아서 상당히 즐거웠다.
* * *
‘잘 지내는 모양이네.’
오혜영이 힐끔 현성을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충 소식은 들었다.
아버지가 플레이어로 각성해 불치병을 극복한 것.
그리고 현성이 플레이어로 각성한 것.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러면서도 살짝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플레이어.
일반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인 직업이다.
인간을 초월한 초인의 육체.
스킬이라는 신비한 이능.
인간이라면 누구나 갈망할 수밖에 없는 능력이다.
거기다 돈까지 잘 번다.
다른 직군보다 위험한 직업이기에 사망률이 높다고는 하지만…….
당사자가 아닌 아내의 입장에서는 그리 나쁜 것도 아니었다.
두둑한 유산을 가지고 깔끔하게 새 출발을 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굳이 가질 필요가 없는 욕심이야.’
오혜영이 미약하게 남아 있는 아쉬운 마음을 지워 냈다.
현재 오혜영에게는 경제적인 여유가 풍족한 남자 친구가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 친구와 결혼 날짜까지 잡았다.
사실 그간 동창회에 참석하지 않던 오혜영이 모습을 드러낸 것도 청첩장을 돌리기 위해서였다.
전 남자 친구인 현성이 참석한다는 게 살짝 걸리기는 했다.
그렇지만 전 남자 친구 때문에 동창회같이 청첩장 돌리기 좋은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뭐, 현성이도 옛날 일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고.’
오혜영으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전 남자 친구가 자신을 평범한 대학교 동창 대하듯 한다는 건 결혼을 앞둔 오혜영으로서도 바라던 바였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에 왠지 모르게 살짝 기분이 나빴다.
‘괜히 신경 쓰지 말자.’
오혜영은 좋지 않은 기분을 금세 털어 냈다.
그리고 곧바로 동창회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움직였다.
“얘들아, 내가 줄 게 있는데.”
오혜영이 핸드백에서 청첩장을 꺼냈다.
“어머! 혜영이 너 결혼하니?”
“응.”
“앙큼한 계집애, 그래 네가 어쩐 일로 동창회에 나왔다 했다. 청첩장 돌리려고 나왔구나.”
“에이, 아니야. 그냥 너희들 얼굴도 보려고 왔는데, 겸사겸사 주는 거지.”
순간적으로 기분이 확 상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 않고 표정 관리를 했다.
오혜영은 예전부터 이런 표정 관리에 능숙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딱 보니까 목적이 있어서 나왔구만. 아, 난 저러지 말아야지.”
뒷말은 작게 중얼거리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바로 앞에 있는 오혜영의 귀에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재수 없는 년.’
오혜영이 속으로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지효정을 욕했다.
지효정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저랬던 년이다.
자신에게 라이벌 의식이라도 느끼는지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오혜영은 지효정을 무시하고 다른 동창생들에게 웃으면서 청첩장을 돌렸다.
그때 지효정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 아쉬워서 어쩌냐?”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현성이 말이야. 플레이어가 됐다잖아. 그때 안 깨졌으면 플레이어를 남편으로 뒀을 수도 있는 거 아냐?”
“너 속물이구나? 난 그런 거 안 따져. 사랑이 중요하지 조건이 중요하니?”
오혜영이 웃는 낯으로 지효정에게 한 방 먹였다.
만약 오혜영의 남자 친구가 정말 평범한 일반인 직장인 남성이었다면?
자존심이 꽤 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필요는 없었다.
오혜영의 남자 친구는 비록 외가 핏줄에 방계이기는 하지만, 무려 대기업 오너 일가에 속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플레이어가 아무리 돈을 잘 번다고 해도 대기업 오너 일가만 하겠는가?
‘플레이어도 어차피 대기업에 돈 벌어다 주는 노예일 뿐이지.’
나이가 자신보다 열 살이나 많고 이혼 경력도 한 번 있기는 했지만, 그런 건 크게 상관없었다.
결혼은 이상이 아닌 현실이었다.
‘결혼하고 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니고.’
오혜영은 현성과 헤어진 후 꽤 많은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 사귀고 헤어지고를 반복했다.
20대 초반에는 남자의 외형에 집중했다.
키가 크고 얼굴이 잘생기거나 몸이 좋은 남자들과 만났다.
하지만 점점 나이를 먹어 가며 생각이 바뀌어 갔다.
그리고 한 가지 절대적인 진리를 깨달았다.
‘돈이 최고야.’
사랑?
언젠가는 식기 마련이다.
외모?
늙으면 다 똑같았다.
그러나 돈은 변하지 않는다.
아, 물론 졸부 수준의 재력이라면 상황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기업 오너 일가 수준의 재력이라면?
나라가 망하는 수준이 아닌 이상 절대 망하려야 망할 수가 없었다.
오혜영은 웃는 얼굴의 가면을 쓰고 차례대로 청첩장을 돌렸다.
그러다 전 남자 친구인 현성의 차례가 왔다.
‘주기도 그렇고 안 주기도 그렇고…….’
좀 애매했다.
현성 바로 옆에 있는 친구에게는 청첩장을 줬다.
그런데 현성만 빼고 다른 친구에게 청첩장을 주는 건 좀 이상했다.
괜히 자신이 현성과의 옛일에 얽매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전 남자 친구에게 청첩장을 주며 결혼식에 오라고 하는 것도 좀 이상했다.
막말로 깽판이라도 치면 어쩌란 말인가?
‘그냥 주자.’
잠시 머뭇거렸던 오혜영이 결국 현성에게 청첩장을 건넸다.
현성이 자신에게 딱히 악감정을 가진 것 같지는 않았다.
설령 악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다른 친구들에게도 청첩장을 줬으니 현성에게 주나 안 주나 어차피 그게 그거였다.
“결혼 축하해.”
현성이 웃는 얼굴로 청첩장을 받아들였다.
자신에 대한 미련이 단 1그램도 없어 보였다.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전 남자 친구인 현성이 자신에게 악감정을 품고 깽판을 치지 않을 것 같다는 안도감이 듦과 동시에 뭔가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살짝 기분이 나빴다.
자신을 말끔히 잊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래, 플레이어로 각성했다 이거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감정이 아니라 그 외의 물질적인 것으로 정의하는 오혜영이라 현성이 자신에게 아무런 미련이 없는 이유는 플레이어로 각성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사실 현성은 플레이어로 각성하기도 전에 오혜영이라는 존재를 잊고 살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오혜영이 알 방법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며 동창회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이제 슬슬 빠져야겠다.’
동창생들에게 청첩장도 다 돌렸고 적당히 얼굴도 비쳤으니 이제 자리를 비워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으리라.
애초에 목적이 있어서 동창회에 참석한 오혜영이다.
목적을 이뤘으니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위이이잉!
그때 남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어디야?
“나? 동창회.”
-언제 끝나는데?
“이제 나가려고.”
-그래? 그럼 내가 데리러 갈까?
남자 친구의 물음에 오혜영은 잠시 고민했다.
나이도 많고 그리 잘생기지도 않은 남자 친구의 얼굴을 동창생들에게 보여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차피 결혼식장에 오면 얼굴이 공개될 게 뻔했다.
조금 먼저 보여 준다고 문제 될 건 없었다.
“응, 그렇게 해 줘. 문자로 식당 주소 찍어 줄게.”
-알았어.
오혜영이 전화를 끊자 동창생들이 눈을 반짝였다.
“남자 친구?”
“응, 내가 걱정되는지 직접 데리러 온다고 하네.”
오혜영의 말에 여자 동창생들이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
“좋겠다.”
“그러게.”
오혜영은 동창생들에게 적당히 남자 친구에 대한 자랑을 해 놓은 상태였다.
나이는 조금 많지만 자신에게 친절하고 헌신적인 남자라고 말이다.
물론 은근슬쩍 남자 친구가 대기업인 오성 그룹의 오너 일가라는 사실도 흘렸다.
외가 핏줄에 방계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 당연히 이혼한 적이 있다는 사실은 동창생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오면 여기 밥값이나 내고 가라고 해야겠다.’
그래야 동창생들에게 제대로 기를 펼 수가 있었다.
또 단체로 밥까지 얻어먹으면 웬만한 철면피가 아니고서는 자신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밖에 없으리라.
꽤 큰돈이 나간다는 단점은 있지만 어차피 자기 지갑에서 나가는 것도 아니고 남자 친구 지갑에서 나가는 것이니 문제 될 건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남자 친구가 동창회가 열리고 있던 식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왔어?”
오혜영이 환하게 웃으며 남자 친구를 반겼다.
솔직히 객관적으로 봤을 때 외모적인 부분은 미녀인 오혜영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키가 훤칠하지도 않았고 잘생기지도 않았다.
그냥 딱 봐도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열 살 이상 나 보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나름 피부 관리를 받아 말끔한 피부를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
그러나 오혜영에게 중요한 건 외모가 아니었다.
대기업 오성 그룹의 오너 일가라는 남자 친구의 신분과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고가의 명품으로 도배할 수 있는 재력이 있다는 게 중요했다.
“안녕하세요. 혜영이 친구 지효정이라고 해요.”
지효정이 가장 먼저 오혜영의 남자 친구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순식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을 끝마쳤다.
“반갑습니다. 혜영이 남자 친구 김도욱이라고 합니다.”
인사를 끝마친 지효정이 오혜영에게 한심하다는 눈빛과 함께 짜게 식은 실소를 날렸다.
그 눈빛을 받은 오혜영은 속으로 발끈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뭐야, 혜영이 남자 친구분?”
“그런가 봐!”
“좀 앉아 있다가 가세요.”
“혜영이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무슨 일하세요?”
오혜영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 동창생들이 김도욱에게 달라붙어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김도욱은 20대 젊은 처녀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질문을 던지자 헤벌쭉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은근슬쩍 자리에 앉았다.
그런 김도욱의 행동에 오혜영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자신은 자리에 앉지도 않았다.
아니, 아예 앉을 자리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그런 자신은 신경도 쓰지 않고 여자 동창생들 품에 파묻혀 헤벌쭉하고 있는 김도욱의 꼴을 보니 기분이 확 상했다.
원래 김도욱이 여자를 밝히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자신의 동창생들한테까지 저럴 줄은 몰랐다.
김도욱 주변에 몰려 있던 여자 동창생들이 호들갑을 떨자 부어라 마셔라 술을 들이켜고 있던 다른 동창생들이 관심을 보였다.
“나이 차이가 좀 많이 나는 것 같은데. 완전 아저씨잖아.”
“저 사람이 혜영이 남편 될 사람이래.”
“그래? 혜영이가 왜 저런 아저씨를 만나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이잖아. 돈 많은가 보지.”
“혜영는 그런 거 안 따지지 않았나?”
“남자들이 몰라서 그렇지 혜영이 저 계집애가 얼마나 계산이 빠른데. 저런 속물도 드물걸.”
“그래?”
“난 돈 많아도 저런 아저씨는 싫어.”
남녀 동창생들 뒷담화에 오혜영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저쪽 테이블까지는 김도욱의 신상(?)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았다.
“어, 김도욱 상무님?”
그때 화장실에 다녀왔던 오늘 동창회의 주최자 윤성호가 오혜영의 남자 친구인 김도욱을 바라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절 아시나요?”
“안녕하십니까! 영업 1팀 윤성호 대리입니다!”
“아, 우리 회사분이셨구나. 이거 우리 혜영이 친구분들 중에 회사 직원분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김도욱이 인자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윤성호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성호 오성물산 다니는 거 아니었어?”
“맞아, 그럼 혜영이 남자 친구가 오성물산 상무야?”
“젊은 나이에 대단하다.”
“그냥 돈 많은 아저씨가 아니었잖아.”
다른 테이블에서 뒷담화를 까던 남녀 동창생들이 놀라는 모습에 오혜영의 어깨가 절로 올라갔다.
‘단순히 돈이 많은 거랑 오성물산 상무인 거랑은 다르지.’
오혜영이 자신의 뒷담화를 까던 테이블로 가서 슬며시 자리를 잡았다.
“혜영아 네 남자 친구 대단하다. 어떻게 저렇게 젊은 나이에 대기업 상무를 달아?”
방금 전 돈이 많아도 저런 아저씨는 싫다고 지껄이던 여자 동창생이었다.
“오성 그룹 회장님이 남자 친구 외당숙이셔.”
“뭐? 그럼 네 남자 친구가 오성 그룹 회장님의 조카란 말이야?”
여자 동창생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맞아.”
오촌 조카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조카는 조카였다.
테이블에 모여 있던 동창생들이 크게 놀라서 다들 입을 쩍 하고 벌렸다.
“혜영아, 그럼 네 결혼식에 오성 그룹분들 많이 오시겠다.”
“그렇겠지.”
다른 여자 동창생의 말에 오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혜영아, 나도 남자 좀 소개시켜 줘.”
“나도, 나도.”
그게 시작이었다.
동창생들은 방금 전까지 뒷담화를 깠던 게 무색해질 정도로 친한 척을 해 왔다.
‘이게 바로 권력이지.’
오혜영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나이도 많고 외모가 출중한 것도 아니고 성격이 다정한 것도 아니다.
거기다 심지어 이혼 경력에 바람기까지 있다.
오혜영이 그 모든 단점을 감수하고 결혼하기로 결심한 것이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마르지 않는 부와 강력한 권력.
물론 그 모든 건 상대적이다.
방계인 남자 친구와 오성 그룹의 직계가 가지고 있는 재력과 권력은 비교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오혜영은 자신의 주제를 파악할 줄 알았다.
젊은 나이와 아름다운 외모를 제외하면 오혜영은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했다.
그런 그녀가 대기업 오너 일가의 직계와 결혼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룻밤 놀잇감이라거나 가끔 만나는 애인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그래서 김도욱을 선택했다.
방계에다 나이도 많고 이혼 경력까지 있었으니까 말이다.
거기다 바람기도 많았다.
아마 그런 단점이 없었다면?
자신이 김도욱과 결혼하는 건 불가능했으리라.
실제로 김도욱의 첫 번째 결혼 상대는 비슷한 수준의 재력과 권력을 가진 집안의 사람이었다.
결국 김도욱의 바람기를 감당하지 못해 이혼하긴 했지만.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거야.’
오혜영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꺄악!”
그때 갑자기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비명 소리가 들린 곳으로 쏠렸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내가 뭘 어쨌다고 소리를 질러, 이년아!”
그곳에는 오혜영의 남자 친구인 김도욱과 지효정이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목격한 오혜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 화상.’
사실 김도욱의 단점은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술이었다.
‘그 잠깐 사이에 얼마나 처마신 거야?’
오혜영이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에요?”
오혜영이 김도욱에게 물었다.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저년이 혼자 발광하는 거지.”
김도욱의 대답에 지효정이 바로 발끈했다.
“아무 짓도 안 하기는 무슨! 내 허벅지를 주물럭거렸잖아요!”
지효정의 외침에 오혜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오혜영과 지효정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런 만큼 오혜영과 지효정은 서로를 잘 알았다.
지효정은 없던 일을 지어내서 헛소리를 할 친구는 아니었다.
그에 반해 자신의 남자 친구인 김도욱은 저런 짓을 하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물론 설마 예비 신부인 자신의 친구에게까지 저럴 줄은 몰랐다.
“내가 언제 네년 허벅지를 주물럭거려! 잠깐 스친 거겠지!”
“스치기는 무슨, 대놓고 주물렀으면서! 너, 내가 절대 가만히 안 둬! 성추행으로 고소할 거야!”
“하! 이년이 헛소리를 하네! 고소는 무슨 고소? 내가 그랬다는 증거 있어?”
“증인은 있다! 아영아, 너 봤지? 저놈이 내 허벅지 주무르는 거!”
“그, 그게.”
갑자기 지목을 받은 성아영이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아영 씨, 잘 생각하고 대답하세요. 위증은 상당히 큰 죄니까. 잘못하면 콩밥 먹을 수도 있어요. 나한테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건 알죠?”
김도욱이 눈을 부라리며 성아영을 윽박질렀다.
그건 누가 봐도 대놓고 협박하는 거였다.
“이런 치사한 새끼!”
지효정이 김도욱을 노려보며 욕설을 토해 냈다.
‘저 미친놈.’
오혜영은 미칠 것만 같았다.
동창생들 앞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 줘야 할 남자 친구가 대형 사고를 친 것이다.
‘술 처먹더니 룸에서 놀던 버릇이 나왔구만.’
여기는 룸살롱이 아니었다.
또 남자 친구인 김도욱이 허벅지를 주물럭거린 상대도 룸살롱 아가씨가 아니라 자신의 동창생인 지효정이었다.
“난 그런 적 없다고!”
술에 취한 김도욱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발뺌했다.
그러나 여기 모인 동창생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대놓고 소리를 지른 후 ‘위증’, ‘콩밥’, ‘힘’ 운운하며 성아영을 협박했다.
그 모습을 보고 누가 김도욱의 말을 믿어 주겠는가?
‘차라리 오지 말라고 할걸.’
김도욱을 부르는 바람에 동창생들 앞에서 완전히 개망신을 당했다.
김도욱이 오기 전에 오혜영은 동창생들에게 남자 친구에 대한 장점을 잔뜩 늘어놓으며 자랑을 했다.
제대로 포장을 한 것이다.
한데 김도욱의 트롤 짓으로 그간의 노력이 모두 헛수고가 되었다.
방금 전까지 활짝 웃으며 김도욱과 어울리던 여자 동창생들의 표정이 핵폐기물이라도 본 것처럼 일그러졌다.
남자 동창생들의 표정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김도욱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중에는 전 남자 친구인 현성도 있었다.
‘젠장.’
이제 모든 게 다 끝났다.
동창회에서 대놓고 개망신을 당한 상황.
청첩장을 돌린 의미가 없었다.
김도욱의 트롤 짓을 본 동창생들이 결혼식에 올 리가 만무했다.
아니, 이제는 온다고 해도 제발 오지 말라고 말리고 싶었다.
괜히 결혼식에 와서 김도욱의 실체를 모르는 다른 하객들에게 진실을 까발리면 오혜영만 난감해질 테니까 말이다.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는데 이년이 어디서 생사람을 잡아!”
망연자실한 오혜영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도욱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김도욱의 편을 들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자 친구이자 예비 신부인 오혜영조차 김도욱을 돕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저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을 뿐.
“가자, 자기 많이 취했어.”
오혜영이 김도욱의 팔을 붙잡았다.
일단 여기서 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이거 놔!”
그러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김도욱이 오혜영의 손을 뿌리쳤다.
“가긴 어딜 가? 내가 뭘 잘못했다고?”
“주변 상황 안 보여?”
오혜영이 억지로 화를 억누르며 김도욱에게 속삭였다.
그런 오혜영의 말에 김도욱이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자신을 쓰레기처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을 알아차렸다.
김도욱은 자신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사실에 화가 잔뜩 났다.
잘못을 저지른 범죄자가 저런 눈빛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김도욱은 자신의 행동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사소한 일을 큰 문제로 만든 지효정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항상 회사에서 왕처럼 대접받으며 살아온 김도욱이다.
그가 무서워하는 건 오성 그룹의 직계들밖에 없었다.
“야! 거기 너!”
김도욱이 동창회의 주최자이자 오성물산의 직원인 윤성호를 지목했다.
윤성호는 김도욱의 부하 직원이었다.
그런 윤성호가 자신을 혐오스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다.
김도욱은 그게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자신의 부하 직원마저 자신에게 저런 눈빛을 보내서는 안 된다.
“왜 그런 눈빛으로 날 봐? 너도 내 말 안 믿냐? 한번 네 입으로 이야기해 봐. 너, 내 말을 믿냐, 이년 말을 믿냐?”
김도욱의 말에 오혜영의 표정이 더욱더 구겨졌다.
윤성호가 오성물산의 대리고 김도욱이 오성물산의 상무라는 사실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건 답을 정해 놓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성호는 지금 건드리면 안 되는데.’
윤성호는 동창회의 주최자다.
거기다 동창생들 사이에서 평판도 상당히 좋다.
오혜영은 일단 이 자리를 빠져나간 뒤 돈을 쓰든 김도욱의 권력을 쓰든 해서 지효정을 잘 달랠 생각이었다.
그 후 윤성호에게 부탁해 동창생들에게 사소한 오해였다고, 지효정과 잘 이야기해서 오해를 풀었다고 말해 이미지 관리를 할 생각이었다.
윤성호가 오성물산의 대리였으니 상무 사모님이 될 자신의 말은 거스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이번 일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일이 잘 마무리되지 않으면?
이 자리에 있는 동창생뿐 아니라 오늘 동창회에서 참석하지 않은 동창생들과 대학교 선후배들에게까지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대학교 인맥이 완전히 끝장나는 것이다.
한데 그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윤성호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압박했다.
‘성호 대답이야 뻔하지.’
당연히 회사 상사이자 상무인 김도욱의 편을 들 것이다.
동창생들도 윤성호의 상황을 알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알고 있을 거다.
그러나 아는 것과 이해하고 공감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윤성호는 동창생들에게 신뢰를 잃을 테고 당연히 오혜영이 맡길 역할을 제대로 소화해 낼 수가 없게 된다.
어쩌면 대학교 동창회가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망할 놈.’
오혜영이 김도욱을 욕했다.
단점이 많아서 결혼 직전까지 올 수 있었다.
결혼을 하면 그런 단점들이 오히려 남편을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장점이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 못 참겠으면 이혼하고 위자료나 두둑하게 뜯어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 그 단점들이 결혼하기도 전에 자신의 인맥을 처참하게 파탄 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일단 나가자.’
오혜영은 일단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다.
마음 약한 성아영을 압박해 지효정을 미친년으로 만드는 방법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김도욱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자기야, 가자. 제발 가자.”
힘을 써서 끌어내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고 말로 타일러도 방법이 없었다.
“야! 너 대답 안 해!”
오히려 더욱 성을 내며 윤성호를 압박할 뿐이었다.
그때 윤성호가 입을 열었다.
“전 효정이 말을 믿어요.”
“뭐?”
윤성호의 말에 김도욱의 표정이 굳어졌다.
오혜영도 화들짝 놀랐다.
놀란 건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윤성호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동창생들 모두 놀랐다.
“효정이는 절대 이런 거짓말을 할 애가 아니거든요.”
“이 자식이!”
“그리고 사원들 사이에서 상무님 소문 엄청 안 좋아요. 아니, 소문이 아닌가? 전에 회식 자리에서 여직원들한테 성추행하다 걸리셨죠?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하더니, 여전하신가 보네요.”
윤성호의 말에 김도욱의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너 이 자식! 네가 그딴 말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 너 당장 해고야! 해고!”
“방금 분명히 해고라고 하셨죠?”
“그래! 넌 해고야!”
“잘됐네요. 어차피 요즘 오성물산이 아라에 밀려서 회사도 위태위태하던데, 이 기회에 실업 급여 받으면서 재취업 준비나 하면 되겠네요.”
윤성호의 태연한 대답에 김도욱의 자존심이 갈가리 찢겨져 나갔다.
30대 중반에 대기업인 오성물산의 상무.
오성 그룹의 오너 일가.
남들은 부러워할 수도 있는 삶이다.
그러나 사실 김도욱은 애매한 처지였다.
현 회장의 직계가 아니다.
전대 회장의 직계도 아니다.
그나마 있는 끈은 전대 회장의 조카딸이 바로 김도욱의 어머니라는 점이었다.
전대 회장은 여동생을 무척이나 아꼈다.
그런데 그렇게 아끼던 여동생이 젊은 나이에 남편과 함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어린 조카딸을 남겨 두고 비명횡사한 것이다.
여동생을 잃은 전대 회장은 조카딸을 거둬 키웠고 친딸처럼 아꼈다.
그 조카딸이 바로 김도욱의 어머니였다.
김도욱의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지만 외삼촌인 전대 회장의 배려로 무사히 장성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전대 회장은 김도욱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그룹의 요직을 맡겼다.
그 덕분에 김도욱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넉넉히 재산을 불릴 수 있었다.
김도욱 역시 취직 걱정 따위는 하지 않고 빠르게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오성물산의 상무 자리까지 올랐다.
남들이 볼 때는 축복받은 삶이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오성 그룹의 직계인 육촌 형제들을 보며 자라 온 김도욱에게 있어서 자신에게 주어진 몫은 너무도 보잘것없어 보였다.
거기다 김도욱의 어머니를 아꼈던 전대 회장도 건강 문제로 병원에 입원해 오늘내일하는 상황.
유언장 작정은 이미 끝나 있었다.
당연히 김도욱의 어머니 이름은 유언장에 적힌 상속자 명단에 없었다.
아무리 아낀다고 해도 친딸이 아닌 조카딸.
유산을 물려줄 리가 없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바로 현 회장이었다.
조카딸인 어머니를 친딸처럼 아꼈던 전대 회장과 달리 현 회장은 사촌 동생인 김도욱의 어머니와 데면데면했다.
딱 일반적인 사촌 동생 대하듯 한다는 뜻이다.
전대 회장이 세상을 뜨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물론 자신도 언제 한직으로 밀려날지 몰랐다.
아니, 어쩌면 더는 오성 그룹에서 빌붙어 있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전처와 이혼한 결정적인 이유도 바로 위태로운 김도욱의 위치 때문이었다.
단순한 바람기 때문이었다면?
전처와 그렇게 쉽게 이혼하지 않았을 거다.
또 아무리 재취라도 김도욱에게 힘이 있었다면?
다른 대기업이나 중견 기업 쪽 여식들과 재혼을 하지 일반인에 불과한 오혜영과 재혼하지는 않았을 거다.
김도욱은 강한 열등감과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열등감과 불안감을 씻어 주는 존재가 바로 회사의 부하 직원들과 여자 친구인 오혜영이었다.
회사 부하 직원들과 여자 친구인 오혜영 모두 자신의 말 한마디에 죽는시늉이라도 할 것처럼 고개를 조아렸으니까 말이다.
결혼을 결심한 이유 중에는 오혜영의 아름다운 외모도 있었지만 전처와 달리 자신의 말에 절대 순종하는 모습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한데 지금 여자 친구는 자신을 들들 볶고 있었고 부하 직원은 고개를 꼿꼿이 들고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김도욱은 바보가 아니다.
당연히 부하 직원들이 진심으로 자신을 존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혜영이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유 역시 자신이 권력과 재력을 가졌기 때문.
거슬리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도에서 만족했다.
존경해서 복종하나 두려워서 복종하나.
사랑해서 순종하나 권력과 재력 때문에 순종하나.
원인은 달라도 결과는 같았기 때문이다.
복종과 순종.
그 두 가지가 김도욱의 열등감을 감춰 주는 방패 역할을 했다.
한데 지금 그 두 가지가 모두 깨져 버렸다.
“자기야, 그만 가자.”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자신의 팔에 딱 달라붙어 용을 쓰는 오혜영.
목소리도 차가웠다.
절대 평소의 순종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놔.”
“뭐?”
“놓으라고, 이 썅년아!”
짝!
열등감이 폭발한 김도욱이 자신의 오른팔을 감싸고 있던 오혜영의 뺨을 때렸다.
“이년이 오냐오냐했더니! 어디까지 기어오르려고!”
뺨을 맞은 오혜영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해 웬만한 건 포기했다.
수많은 단점은 결혼 후 자신이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장점이 되어 줄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설마 김도욱에게 자신도 모르던 또 다른 단점이 있을 줄은 몰랐다.
‘미친놈.’
설마 자신을 때릴 줄이야?
그것도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밖에서 뺨을 때릴 정도다.
그것도 입안이 터져서 피가 나올 정도로.
그럼 집에서는 어떻겠는가?
수시로 폭력을 휘두를 게 뻔했다.
‘어쩌면 맞아 죽을지도 몰라.’
오혜영은 김도욱을 자신을 빛내 줄 훌륭한 액세서리라고 생각했다.
김도욱이라는 액세서리는 오혜영에게 막강한 재력과 권력을 선물해 준다.
흠이 좀 많았지만 상관없었다.
잘 닦아서 사용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혹 아무리 닦아도 점점 흠이 커져 더 이상 차고 다니기 곤란해지면?
팔아서 한밑천 잡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액세서리가 독을 품고 있다면?
말이 달라진다.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점점 죽어 갈 테니까 말이다.
오혜영이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오혜영이 그러거나 말거나 김도욱은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길길이 날뛸 뿐이었다.
“뭐? 실업 급여를 받으면서 재취업을 준비해? 너 이 자식, 해고가 끝일 거 같아!”
“해고가 끝일 거 같냐고? 너 그게 무슨 뜻이야?”
김도욱의 외침에 윤성호가 이제는 아예 반말로 되물었다.
윤성호의 반말에 김도욱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나를 무시하고 모욕한 네놈이 한국에서 제대로 밥벌이할 수 있을 줄아! 두고 봐라! 지옥을 보여 줄 테니까!”
김도욱의 말에 윤성호가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봐라.”
으드득!
비웃음이 가득 섞인 윤성호의 말에 김도욱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달려들어 죽도록 패 주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때리러 갔다가 반대로 자신이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윤성호는 자신의 권위와 재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당연히 김도욱이 주먹을 휘두른다고 가만히 맞고만 있어 줄 리가 없었다.
윤성호는 김도욱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체격도 건장했다.
‘두고 보자.’
술을 처먹고 자제력이 약해졌지만.
방금 전까지 분노 조절 장애를 가진 것처럼 깽판을 피웠지만.
상대가 얌전히 당해 줄 것 같지 않자 바로 ‘분노 조절 잘해’가 되었다.
김도욱은 자신의 몸보신 하나만큼은 완벽하게 해내는 인물이었다.
‘괜히 폭력을 휘두를 필요는 없어. 다른 방법으로 보복해 주면 그만이야.’
김도욱이 애써 자기 합리화를 했다.
“이만 가자.”
김도욱이 오혜영에게 말했다.
잠시 멍하니 있던 오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야, 이 새끼야! 어디 가!”
지효정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오혜영은 김도욱과 함께 동창회 장소를 벗어나던 도중 현성과 눈이 마주쳤다.
휘익!
오혜영이 현성의 시선을 피하고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 * *
좋은 분위기에서 진행되던 대학교 동창회는 술 먹고 성추행과 난동을 부린 김도욱으로 인해 난장판이 되었다.
그러나 윤성호가 잘 수습했다.
“성호야, 너 정말 대단하다.”
“그러게 나였으면 효정이 편 못 들어 줬을 것 같은데.”
“진짜 대단하다.”
동창생들은 윤성호를 칭송했다.
직장 상사.
그것도 대놓고 자르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공과 사도 구분 못 하는 놈에게 당당하게 대항하다니?
거기다 단순한 직장 상사도 아니고 무려 오성 그룹의 오너 일가였다.
추가적인 보복 발언이 있었음에도 윤성호는 반말로 당당히 맞섰다.
동창생들 입장에서는 윤성호가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용기 있는 행동을 했으니까 말이다.
‘아, 살 떨려.’
그러나 윤성호도 내심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솔직히 겁도 났다.
아마 사건 전에 들었던 현성의 제안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대놓고 김도욱과 맞서며 지효정의 편을 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김도욱이 성추행과 난동을 부리기 전.
윤성호는 현성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그것도 요즘 무서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아라 그룹으로 들어오라고 말이다.
윤성호는 던전에서 나오는 몬스터 부산물 영업을 오랜 시간 뛰었다.
현장에 있는 만큼 아라 그룹이 얼마나 비전 있는 기업인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한국 최대 길드로 발돋움한 이모탈 길드의 사업 파트너.
이모탈 길드는 오성물산과 한 몸이라고 할 수 있는 오성길드의 랭커와 고레벨 플레이어 들을 대규모로 스카우트해 갔다.
오성길드만이 아니라 국내 대기업들이 데리고 있던 랭커와 고레벨 플레이어 들을 무서운 기세로 쓸어 갔다.
그 결과 설립과 동시에 한국 최고의 길드로 거듭났고 반대로 기존의 대형 길드들은 개박살이 났다.
그런 이모탈 길드의 사업 파트너인 아라 그룹은 장차 한국의 몬스터 부산물 산업을 싹쓸이할 게 기정사실화된 기업이었다.
‘경력도 인정해 준다고 했고, 연봉도 올려 준다고 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오성길드가 흔들리며 오성물산도 매출이 급감해 구조 조정이다 뭐다 하며 회사 내부가 뒤숭숭하던 차였다.
그런 상황에서 오성물산의 상무인 김도욱이 제대로 트롤 짓을 했다.
윤성호로서는 굳이 참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효정아, 넌 어떻게 할 거야?”
“바로 고소할 거야.”
“그럼 내가 증인으로 나서 줄게.”
윤성호는 어차피 김도욱과 척을 진 거 제대로 지기로 했다.
“효정아, 아까 망설여서 미안해. 나도 증인 할게.”
성아영도 나섰다.
“나도 증인 할 게.”
“나도.”
분위기를 탄 동창생들이 증인을 자처했다.
술이 깬 후에 생각이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타도 김도욱으로 제대로 일치단결이 되었다.
“내가 녹음한 거 있어. 이거 줄게.”
“난 몰래 동영상 촬영했어. 그것도 줄게.”
사람이 많다 보니 증거가 막 나왔다.
성추행하는 현장을 찍은 건 아니지만, 그 후 김도욱이 난리를 피우는 모습은 제대로 찍혀 있었다.
“바로 경찰서로 가자.”
“그래, 그러자!”
술기운이 올라온 동창생들이 일치단결했고 그대로 경찰서로 향해 고소장을 접수했다.
* * *
다음 날 오후.
‘참자.’
밤새 한숨도 자지 않고 15시간 넘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오혜영은 결국 어제 일을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술에서 깬 김도욱이 날이 밝자마자 찾아와 선물을 들이밀며 미안하다고 사과하기도 했고…….
이미 결혼한다고 사방팔방 다 청첩장을 돌렸는데 차마 이제 와서 파혼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 얼굴을 볼 면목도 없고.
‘어쩌다 한번 실수한 걸 거야. 나한테 싹싹 빌기도 했고.’
술 먹고 폭행하고 술 깬 후 미안하다 잘못했다 싹싹 비는 건 술 먹고 상습적으로 여자를 때리는 남자들의 흔한 패턴.
그러나 오혜영은 처음 있는 일이니 실수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어제 있었던 일을 건수로 잡으면, 앞으로 제대로 주도권을 쥘 수 있어.’
아니, 오히려 기회로 삼을 계획을 세웠다.
‘그보다 어제 일을 수습해야 해.’
자칫 잘못하면 대학교 인맥을 모두 잃는 것은 물론 방계인 남편의 입지마저 흔들릴 수 있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아무리 대기업 오너 일가가 라고 해도 사고 한번 잘못 치면 기자들이 벌 떼처럼 달라붙고 인터넷에서 제대로 조리돌림을 당하는 세상이다.
또 불매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고 주가가 떨어지기도 한다.
뭐, 냄비 근성 때문에 그 후 시간이 지나면 불매 운동도 사그라들고 주가도 다시 회복되지만 말이다.
문제는 남자 친구인 김도욱이 직계가 아니라 방계라는 점.
김도욱은 자신이 외당숙인 현 회장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괜히 사고를 쳐서 밉보일 필요는 없었다.
결정적으로…….
‘결혼식 날 괜히 기자들 몰려들면 골치 아파져.’
기자들이 몰려들면 어제 벌어진 사건이 하객들에게까지 알려질 거고 상당히 소란스러운 결혼식이 될 거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부인 오혜영이다.
오혜영은 자신의 결혼식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일단 효정이 그 계집애부터 설득하자.’
사건의 당사자인 지효정을 설득하면 어떻게 든 수습이 가능했다.
오혜영이 스마트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왜 전화했어?
받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행히 전화를 받았다.
“어제는 미안했어.”
-뭐가?
“도욱 씨가 실수한 거 말이야. 아무래도 술이 문제였던 거 같아.”
-넌 어제 뺨까지 맞아 놓고 그 성추행범을 그렇게 감싸고 싶니?
“성추행범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서로 오해가 있었던 것뿐이잖아.”
-오해?
“그래.”
-방금 전에는 실수라며?
“난 어제 도욱 씨가 술 먹고 흥분해서 막말한 걸 실수라고 했을 뿐이야.”
-미친년.
지효정의 욕설에 오혜영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자.”
오혜영도 김도욱이 지효정을 성추행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절대 그 사실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런 뉘양스조차 풍겨서는 안 된다.
지효정이 지금 이 통화를 녹음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만나기만 하면 해결할 수 있어.’
돈으로 구슬리든 협박을 하든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김도욱이 자신을 성추행했다는 지효정의 말을 인정할 생각은 없었다.
-싫어.
“이렇게 막 나가면 너한테도 좋을 거 없지 않을까?”
-이제 협박까지 하냐? 끼리끼리 만난다더니 너도 그놈이랑 똑같은 년이구나. 어제 이미 성추행으로 고소장 접수했어, 이년아.
지효정의 말에 오혜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결혼을 앞둔 상태에서 남편이 성추행 의혹에 시달려 경찰 조사를 받기라도 하면?
그 사실이 소문이라도 난다면?
결혼식 자체를 미뤄야 할 수도 있었다.
“너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응! 난 꼭 해야겠어! 그리고 인생 똑바로 살아! 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