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권. 에필로그 (216/225)
  • ┃에필로그

    억겁의 세월 동안 지속되던 차원 전쟁이 영원히 그 막을 내렸다.

    현성은 종전 직후 투항한 굴레를 벗은 자들의 대다수를 휘하로 받아들였다.

    사실 투항한 굴레를 벗은 자들에게 있어서 현성은 철천지원수나 마찬가지였다.

    현성만 없었다면 전쟁의 향방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또한 애초에 전쟁이 발발한 원인부터가 현성이었다.

    그러나 투항한 굴레를 벗은 자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과거에 벌어졌던 전쟁으로 인해 현성을 제외한 다른 굴레를 벗은 자들과 크고 작은 악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현성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많은 인원을 휘하에 거둘 만한 통솔력을 가진 굴레를 벗은 자가 없었다.

    투항한 굴레를 벗은 자들은 살기 위해 현성의 휘하에 들어가는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 현성에게 경험치와 포인트가 미친 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현존하는 차원의 1/3가량이 현성의 휘하에 있었다.

    그들이 벌어들이는 경험치와 포인트의 일부가 현성에게 쏟아진다.

    일부라고는 하지만 그 숫자가 하도 많은 덕에 현성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강해졌다.

    ‘굳이 더 강해질 필요는 없는데.’

    현성은 이미 전 차원에서 가장 강한 플레이어였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말이다.

    사실 지금 가지고 있는 힘도 제대로 쓸데가 없었다.

    적군 굴레를 벗은 자들의 세력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신들은 이번 전쟁에 너무 많은 포인트를 쏟아부어 대부분이 이름뿐인 신으로 전락했다.

    그런데도 현성은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었다.

    ‘뭐, 굳이 마다할 생각은 없지만.’

    전쟁이 끝났다.

    더 이상 현성 자신이나 가족 또는 지구를 위협할 적은 없었다.

    ‘이제부터 편하게 쉬자.’

    각성을 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현성은 쉼 없이 달려오기만 했다.

    그런 만큼 이제부터는 푹 쉴 생각이었다.

    아주 푸우욱 말이다.

    * * *

    현성은 즐거운 은퇴 라이프를 즐겼다.

    부모님을 모시고 지구와 타 차원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다녔다.

    “정말 신기하게 생겼구나.”

    어머니가 초월 등급 몬스터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으셨다.

    “아, 저 녀석은 아크로라는 녀석인데요. 어떤 습성을…….”

    현성이 어머니에게 몬스터의 습성에 대해 이리저리 설명을 해 드렸다.

    초월 등급 몬스터는 과거 지구에 재앙 같았던 존재였다.

    그러나 현성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관상용 몬스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굳이 잡을 필요도 없었다.

    현성의 레벨이 너무 올랐기 때문이다.

    이제는 몬스터를 잡아서는 포인트를 수급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오히려 현성에게 더 많은 여유 시간을 주었다.

    레벨이 오르기 전이었다면 포인트를 날리는 느낌이 들어 눈앞에 있는 몬스터를 잡았을 것이다.

    하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현성아.”

    “예, 어머니.”

    “너 장가는 안 갈 거냐?”

    어머니의 말에 현성의 얼굴이 살짝 경직되었다.

    설마 어머니가 이런 말을 하실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현성의 나이는 결혼 적령기를 아득히 지났다.

    그러나 여전히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외모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현성의 부모님은 자식의 의사를 그 누구보다도 존중해 주시는 분이었다.

    누나 최현지와 현성이 서른을 넘고 마흔을 넘겨도 결혼하라는 말을 하신 적이 없으셨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런 말씀을 하신다는 말인가?

    ‘나이를 드셔서 그런가?’

    현성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어머니가 다시금 입을 여셨다.

    “혼자 남을 네가 걱정돼서.”

    “예?”

    “지금은 나도 있고 네 아버지도 있고 현지도 있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 봐라. 결국 나도 떠나고 네 아버지도 떠나고 현지도 네 곁을 떠날 거야.”

    부모님도 현성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으셨다.

    불로불사.

    영원불멸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

    “가족들이, 주변 지인들이 하나둘 사라지면 네가 지금처럼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니?”

    어머니의 말에 현성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식은 안 낳아도 좋다. 그래도 네 짝은 꼭 만나거라. 언제나 네 편인,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그런 짝을 말이다.”

    어머니의 말씀은 현성과 같이 영원불멸의 삶을 사는 1레벨 플레이어들 중 하나를 영혼의 동반자로 맞이하라는 말이었다.

    “네, 그렇게 할게요.”

    현성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머니는 단순히 나이가 드셔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니었다.

    손주를 보고 싶은 욕심에 한 말씀도 아니었다.

    그저 많은 시간이 지난 후 세상에 홀로 남을 자식이 걱정되어 한 말씀이었다.

    * * *

    현성은 차원 관광을 마치고 다시 지구로 복귀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말씀을 곰곰이 되씹었다.

    사실 현성은 독신주의자가 아니었다.

    그건 누나 최현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지금 이 나이까지 솔로였다.

    ‘연애를 해 본 적이 언제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아마 20대 초반쯤.

    대학교를 다닐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았다.

    “주군,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루시아가 현성에게 다가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 그게…….”

    현성이 어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루시아에게 전해 주었다.

    “확실히 필요하기는 하죠.”

    평생을 함께할 반려의 유무.

    굴레를 벗은 자들 중에서는 반려가 있는 이들도 있고 없는 이들도 있었다.

    언제나 항상 의지할 수 있는 내 편이 있다는 것.

    그건 굴레를 벗은 자들에게도 큰 의지가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시간이라는 절대 거스를 수 없는 힘에 반려를 잃었다.

    하나 반려가 같은 1레벨 플레이어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자신의 곁을 떠날 때도 영원히 자신의 곁에 남아 줄 테니까.

    서로가 서로의 의지가 되어 주고 버팀목이 되어 줄 테니까 말이다.

    굴레를 벗은 자들이 초월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해도 그 근본은 인간이다.

    결코 본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외로움이라는 본질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주군께서도 어머님의 말씀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시는군요.”

    “네, 지금 당장은 괜찮지만 가족과 친구들이 모두 떠나고 난 뒤라면…….”

    현성이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솔직히 지금처럼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을지는 자신이 없군요.”

    “그럼 제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루시아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예? 그게 무슨?”

    현성이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1레벨 플레이어들은 많습니다. 그중 여성분들도 많으시고요. 또 그분들 중에서도 반려를 원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제가 그분들 중에서 적당한 분을 찾아보겠습니다.”

    “하하하!”

    루시아의 말에 현성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러십니까? 제가 못 미더워서 그러시는 거라면 다른 1레벨 플레이어에게 의뢰를 해서라도.”

    “루시아.”

    “예, 주군.”

    “굳이 찾을 필요가 있을까요?”

    “예? 그렇지만 방금 주군께서도 필요성을 인정하셨지 않습니까?”

    루시아는 이미 가족과 지인들을 잃는 고통을 겪어 봤다.

    그렇기에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정신을 갉아먹는다.

    이 세상에 홀로 남았다는 두려움이 전신을 옥죄어 온다.

    루시아는 현성이 그런 고통을 겪는 걸 원하지 않았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루시아에게 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야 제가 여쭤봤으니까 그런 게…….”

    현성의 물음에 대답하던 루시아가 말꼬리를 흐렸다.

    루시아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현성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루시아는 저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이에요. 그간 수많은 생사고락을 함께했죠. 또 제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제가 왜 상속인으로 루시아를 지정했을 것 같아요?”

    “그, 그게…….”

    루시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저의 반려가 되어 주세요. 지금까지처럼 앞으로 쭉 저와 함께하는, 제 삶의 동반자가 되어 주세요.”

    “…….”

    루시아가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현성을 바라보았다.

    “대답해 주세요.”

    “어, 그게 그러니까…….”

    루시아가 얼굴을 붉히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뭐, 거절해도 상관은 없어요.”

    “예?”

    현성의 말에 루시아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그럼 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제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보여 준 후에 다시 고백할 테니까요.”

    담담한 현성의 고백에 루시아가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실 필요는 없으실 것 같습니다, 주군.”

    루시아 역시 현성에게 마음이 있었다.

    현성이 차원의 틈새로 사라졌을 때 루시아는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다만 기사이기에 신하이기에 본인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해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을 뿐이다.

    “그 말은?”

    “주군과 영원히 함께하겠습니다. 주군의 신하가 아니라 반려로서 말입니다.”

    “하하하하!”

    루시아의 말에 현성이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이제부터는 주군이라는 호칭 대신 다른 호칭을 써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현성 씨.”

    루시아의 딱딱한 대답에 현성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호칭과 말투 같은 건 서서히 바꿔 가도 상관없다.

    아니, 바꾸지 않아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루시아가 자신의 고백을 받아 줬다는 거다.

    현성은 그것이면 족했다.

    * * *

    차원 전쟁이 끝난 후.

    전 차원은 그간 전쟁으로 입었던 피해를 복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승리한 쪽도 패배한 쪽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이들이 구슬땀을 흘렸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밝았다.

    더 이상 전쟁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신들은 모든 힘을 잃었다.

    두 진영으로 갈라져 전쟁을 치렀던 플레이어들은 현성의 그늘 아래 하나로 통합되었다.

    앞으로는 눈부신 발전만 있을 뿐 처참한 파멸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오늘인가?”

    게임에 열중하던 게스피트가 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오늘이 맞아.”

    함께 게임을 하고 있던 제나가 답했다.

    파지지직!

    그때 차원 게이트가 열리며 동양풍의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백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백화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결혼식에 참석할 준비는 하고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왜 다들 아직까지 게임을 하고 있어.”

    “준비는 무슨.”

    “그냥 가면 되는 거지.”

    게스피트와 제나가 구시렁거렸다.

    “그럼 그러든지. 어서 게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늦겠어.”

    “알았다. 알았어.”

    “자기가 시집가는 것도 아니면서 엄청 난리네.”

    백화의 성화에 게스피트와 제나가 말끔한 옷을 차려입었다.

    파지지직!

    다시금 차원 게이트가 열렸다.

    차원 게이트를 통과하자 화려하게 치장된 야외 결혼식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결혼식 한번 요란하게 하네.”

    “그러게 말이야. 꼭 이렇게 요란하게 해야 하나? 한국에는 예전에 정화수 한 사발 떠 놓고 결혼하기도 했다는데 말이야.”

    게스피트와 제나가 못마땅하다는 듯 계속해서 구시렁거렸다.

    파지지직! 파지지직!

    두 사람이 구시렁거리는 와중에도 사방에서 차원 게이트가 열렸고 하객들이 쏟아져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아마 전 차원에서 가장 화려하고 가장 많은 하객이 참석한 것으로 기록될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현성과 루시아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정말 행복해 보이네.”

    게스피트가 중얼거렸다.

    “그러게…….”

    제나가 그 중얼거림에 답했다.

    “그럼 니들도 가든지.”

    백화의 말에 게스피트와 제나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무려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솔로로 지내 온 여인들의 한 서린 시선이 백화에게 향했다.

    그러나 백화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 둘의 시선을 받아넘겼다.

    그리고 결혼식을 올리고 있는 현성과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그 두 사람은 정말 눈부시게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말 정말 정말 행복하다는 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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