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지구는 차원 전쟁에 휘말린 게 아니다.”
게스피트의 말에 현성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차원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그 결과 지구의 인류는 실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한데 휘말린 게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저 예정되어 있던 일이 벌어졌을 뿐이지. 최초의 차원 전쟁이 벌어진 이유는…….”
게스피트가 차분한 어조로 차원 전쟁의 시작에 대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에서 창조신이 나타났다.
창조신이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는 게스피트도 알지 못했다.
창조신은 수많은 차원을 만들어 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게스피트와 현성의 고향 차원이었다.
현성은 자신이 만났던 흑뢰신과 천뢰신이 창조신과는 그 격이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다.
창조신이 만들어 낸 차원은 수많은 시간을 거치며 성장을 거듭했다.
수많은 생명체가 탄생했고 그중 일부가 인류와 같은 지성체로 성장했다.
그때 타 차원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침공을 해 온 타 차원의 생명체들은 창조신이 만들어 낸 이들이 아니었다.
“바로 또 다른 창조신이 만들어 낸 생명체들이었지.”
“창조신이 두 명이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현성의 물음에 게스피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창조신은 자신의 피조물들을 지키기 위해 그에 합당한 권능을 내렸다.
그러나 타 차원의 생명체들을 만들어 낸 창조신 역시 자신의 피조물들을 지키기 위해 권능을 내렸다.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고 두 창조신은 더 많은 권능을 피조물들에게 내려 주었다.
“그러나 계속된 권능 부여는 피조물들에게 독이 되었다. 창조신의 권속들이 스스로의 능력을 키우기보다는 창조신이 주는 권능에만 의존하게 된 것이지.”
‘전에 상대했던 흑뢰신의 권속처럼 되어 버린 거구나.’
게스피트의 말에 현성은 카루인을 떠올렸다.
카루인은 강한 힘과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태해졌고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거나 노력하지 않았다.
그 결과 카루인은 강한 힘과 권능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이에 창조신들은 시스템과 플레이어를 만들었다.”
시스템과 플레이어가 만들어진 후 창조신들은 직접적으로 전쟁에 관여하지 않았다.
시스템은 아직 전쟁에 참여할 준비가 되지 않은 신생 차원들을 보호했다.
하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보호 기간이 끝난 신생 차원들도 하나둘 차원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지구는 어차피 차원 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군요.”
현성의 말에 게스피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는 그간 시스템의 보호를 받으며 차원 전쟁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태생부터가 아군 진영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언젠가는 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적군 차원은 도대체 왜 아군 차원을 침공한 겁니까?”
현성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최초의 침략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전쟁이 이어져 올 필요도 없었다.
그저 자신들의 차원에서 평온한 삶을 유지하면 될 뿐이다.
“나도 모른다.”
“예?”
게스피트의 대답에 현성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해 놓고 모르겠다니?
“내가 너에게 해 준 이야기들은 일종의 신화 같은 것이다.”
“신화요?”
현성의 중얼거림에 게스피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원 전쟁이 얼마나 길게 지속되었을 것 같으냐?”
“모르겠습니다.”
“내가 아는 것만 만 년이 넘는다. 하나 아마 더 오래전부터 지속되었겠지. 수십만 년일 수도 있고 수백만 년일 수도 있다. 어쩌면 수억만 년일 수도 있겠지.”
“결국 왜 최초의 침공이 일어났는지는 모른다는 거군요?”
“아군 플레이어들은 적군 플레이어들이 최초의 침공을 했다고 알고 있다. 하나 그건 적군 플레이어들도 비슷하다.”
“그 말씀은?”
“저들은 우리가 최초의 침공을 했고 그에 반격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현성의 맥이 탁 하고 풀려 버렸다.
결국 아군 차원과 적군 차원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저 창조주가 다르다는 이유로 억겁의 시간 동안 서로 전쟁을 해 온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차원 전쟁이 벌어지며 서로의 은원이 쌓였고, 나중에는 그게 차원 전쟁의 원동력이 되었지. 하나 우리도 바보는 아니다.”
무한히 계속되는 전쟁은 아군 차원과 적군 차원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에 휴전을 선택하고 시스템을 통해 협약을 맺었다.
“그런데 왜 그 협약에 지구와 같은 신생 차원이 포함되지 않은 겁니까?”
협약의 조건에 신생 차원까지 넣어 버렸다면?
굳이 차원 전쟁에 휘말릴 필요가 없었다.
“서로 생각이 달랐으니까. 그리고 꼭 그래야 할 필요도 없으니까.”
“예? 그게 무슨?”
“나의 고향 차원과 너의 고향 차원은 엄밀히 말해 남이나 마찬가지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그저 같은 창조주 아래 탄생한 피조물이라는 공통점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간 신생 차원들을 대신해 적들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그건 우리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건 창조주의 뜻이었다.
먼저 탄생한 차원들은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나중에 탄생한 차원들의 방패 역할을 해 준 것이다.
“그럴 수가.”
“물론 너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또 우리에게는 적이 있다.”
아군 차원이 신생 차원까지 협약에 포함시키자고 주장해도 적군 차원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또한 신생 차원들의 참전은 아군의 전력을 상승시킨다.
아군과 적군 중 한쪽이 보호라는 명목으로 신생 차원들의 참전을 막는다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신생 차원들을 차원 전쟁에 참전시킨 쪽의 세력이 우세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의견을 통일하지 못한 거야.’
거기다 신생 차원을 참전시키자는 쪽의 주장이 신생 차원을 보호하자는 쪽의 주장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다.
‘절대적인 강자나 리더가 없는 상황이니.’
현성은 두 번이나 굴레를 벗은 자들의 회합에 참가했다.
그렇기에 중구난방에 자존심 강한 이들의 의견을 하나로 묶어 버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었다.
“하면 굴레를 벗은 자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현성이 물었다.
“굴레를 벗은 자는 피조물의 한계를 초월해 신이 될 자격을 가진 이들이다.”
“신이 될 자격 말입니까?”
“네가 접촉했던 흑뢰신과 천뢰신 그들 모두 한때는 우리와 같은 플레이어였다. 또한 굴레를 벗은 자이기도 하지.”
“그럼 게스피트 님이나 저도 신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현성의 물음에 게스피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라면 무리겠지만 나라면 당장이라도 가능하다. 하지만 육체를 벗고 정신체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신이라는 존재가 정확히 뭔지 알려 주십시오.”
“육체를 버림으로써 창조신이 만든 시스템의 종속에서 벗어난 존재다.”
“시스템의 종속에서 벗어난 존재?”
“종속이라고 표현했지만 보호이기도 하다.”
“게스피트 님은 왜 신이 되지 않으신 겁니까?”
현성은 신이라는 존재가 가진 장점을 좀 더 정확히 알고 싶었다.
“굳이 될 필요가 없었다. 난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
“하면 제나 님의 경우는 왜?”
제나는 삶에 대한 미련이 전혀 없었다.
한데 왜 신이 되지 않았다는 말인가?
“신은 영원불멸한 존재다. 제나가 신이 된다면, 현재 느끼는 고독과 절망을 더 깊게 느끼는 존재가 될 뿐. 차라리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게 나을 것이다.”
“스스로 삶을 포기한다니? 자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현성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에 게스피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성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1레벨 플레이어는 누군가에서 살해당하지 않는다면, 꾸준히 사냥을 통해 포인트를 공급받는다면 거의 영원불멸할 수 있는 존재다.
한데 왜 자살을 선택한다는 말인가?
“굴레를 벗은 자들 중에서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이들도 꽤 많다.”
그중 가장 흔한 방법이 사냥이나 장사를 통해 포인트를 늘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시간이 계속해서 흐르면?
어느 순간 포인트가 바닥나 자연스럽게 늙어 죽게 된다.
제나 역시 그런 삶을 살았다.
아마 현성을 만나지 않았다면 제나는 포인트가 바닥날 때까지 차원 여행을 하다 자연스럽게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굴레를 벗은 자는 플레이어의 정점이다.
강력한 힘과 권능을 가지고 있으며 수많은 차원을 다스리는 군주로서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권력자다.
그런 이들이 왜 스스로 삶을 포기한다는 말인가?
“시스템에 종속되어 초월적인 힘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근본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런 이들의 정신이 수천에서 수만 년의 시간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게스피트의 말에 현성이 입을 다물었다.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인간은 목표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취감이 있어야 한다.
그게 없다면 모든 게 지루하고 허무하게 느껴질 뿐이다.
또한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홀로 살아가는 고독에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존재다.
현성이 먼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가족들이 모두 죽는다.
서로 교류하며 지내던 지인들을 모두 잃는다.
홀로 남아 영원불멸의 삶을 이어 간다면 과연 행복할까?
그런 생각을 하던 현성의 머릿속에 루시아가 떠올랐다.
루시아는 현성과 함께 영원불멸의 삶을 누릴 수 있는 1레벨 플레이어였다.
물론 루시아 말고도 현성의 휘하에는 파르티샤와 카이로를 비롯해 수많은 1레벨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하나 루시아는 특별했다.
각성 초기부터 생사고락을 함께한 현성의 첫 신하였다.
또한 지구에서 생활하며 현성과 많은 정이 쌓였다.
파르티샤와 카이로 같은 다른 1레벨 플레이어들이 현성의 충실한 신하라면, 루시아는 신하이기 이전에 가족과도 같이 소중한 사람이었다.
“아마 정신이 마모된 굴레를 벗은 자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다면, 그 수가 지금의 수십, 수백 배는 되었을 거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게스피트의 정신도 상당히 많이 마모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쇼핑을 좋아했다.
또 새로운 상품을 구입하는 데 포인트를 아끼지 않았다.
게스피트가 삶을 계속 이어 나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
그러나 다 비슷비슷했다.
그런 상황에서 현성이 등장했다.
그 후 놀랍고 신기한 제품들을 판매했다.
수많은 1레벨 플레이어들이 게임에 빠져든 것 역시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레벨 플레이어들은 게임이라는 것을 통해 오랜 시간 잊고 있던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캐릭터를 강하게 키우고 싶다는 욕구를 얻었다.
게스피트가 현성을 은근히 챙겨 준 것은 단순히 적군 차원과의 전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현성이 자신의 삶을 구원해 준 존재이기에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 주려 노력한 것이다.
‘아마 백화 역시 비슷하겠지.’
백화가 현성에게 호의를 표한 것 역시 새로운 자극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현성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굴레를 벗은 자들이 신이 되는 이유 역시 정신의 마모 때문이었다.
신이 되면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가진 한계를 벗어던질 수 있다.
신은 인간과 다르게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지고한 존재였다.
“궁금증이 풀렸느냐?”
“신들이 왜 권속을 만드는지 궁금합니다. 또 신의 권속이 굴레를 벗은 자들의 공적이 된 이유도요.”
“신들은 권속을 통해서만 자신의 힘과 권능을 늘릴 수 있다.”
신은 지고하고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다.
하나 더 강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을 믿는 권속들을 늘려야 했다.
신들의 최종 목표는 모든 지성체들을 자신의 권속으로 만드는 것이다.
전 차원을 다스리는 유일신이 되길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흑뢰신의 경우는 너무 큰 무리수를 뒀다.
그 결과 자신이 가지고 있던 대다수의 권속을 잃었다.
또 보유하고 있던 포인트까지 대량으로 낭비하고 말았다.
다시 권속을 만들고 소모한 포인트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흑뢰신의 무리수가 성공했다면?
현성을 권속으로 만들었다면?
게스피트나 제나 같은 굴레를 벗은 자들의 눈을 속였다면?
흑뢰신은 현성이라는 권속을 발판으로 진정한 의미의 신이 되었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