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권. 배상 (203/225)
  • ┃배상

    “피해!”

    제나의 외침이 현성의 귓가를 울렸다.

    ‘뭐야?’

    현성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미친년이 왜 나한테 와?’

    작은 점으로 보일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던 주백설이 엄청난 속도로 현성과의 거리를 좁혀 왔다.

    현성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게스피트는 아직도 묵묵부답이었다.

    ‘어쩔 수 없다.’

    포인트가 아깝기는 하지만 살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현성이 용병 고용을 통해 게스피트를 소환했다.

    포인트까지 써 가며 용병 고용을 하자, 게스피트가 곧바로 반응했다.

    현성이 엄청난 위기 상황임을 드디어 인지한 것이다.

    슈욱!

    게스피트가 지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등급전을 하다가 소환된 게스피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도착과 동시에 짜증이 가득한 표정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퍼어어엉!

    게스피트가 현성을 향해 날아가던 주백설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그 후 주백설을 향해 맹공을 퍼부으며 현성에게 방어 스킬을 시전해 주었다.

    ‘살았다.’

    게스피트의 보호를 받게 되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그때였다.

    퍼어어엉! 퍼어어엉!

    주백설이 게스피트와 뒤따라온 제나의 공격을 무시하고 현성에게 맹공을 가했다.

    꽈아아앙!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게스피트가 만들어 준 방어 스킬이 박살 났다.

    그와 동시에 냉기를 가득 머금은 주백설의 왼손이 현성을 향해 날아왔다.

    ‘미친.’

    현성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주백설은 게스피트와 제나의 맹공에 오른팔과 두 다리를 잃었다.

    몸 역시 곳곳에 큰 구멍이 뚫려 마치 넝마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모든 마력을 집중시켜 심장과 머리를 보호했기 때문이다.

    하나 그것도 이제 한계에 달했다.

    잠시 후면 주백설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주백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씨익!

    그러나 죽음을 눈앞에 둔 주백설은 절망 어린 표정 대신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주백설이 활짝 웃는 얼굴로 모든 마력을 왼팔에 모아 현성의 심장을 향해 찔러 넣었다.

    ‘화신.’

    현성이 화신 스킬을 사용하며 모든 마력을 담아 용혈검을 던졌다.

    퍼억!

    푸욱!

    주백설의 왼팔이 푸른 화염으로 변한 현성의 몸을 관통했다.

    그와 동시에 현성이 던진 용혈검 역시 주백설의 심장을 관통했다.

    쩌저저저적!

    파지지직! 화르르륵!

    주백설이 왼팔에 담아 놓았던 냉기가 푸른 화염으로 변한 현성의 몸을 순식간에 얼음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현성이 찔러 넣은 용혈검 역시 일제히 마력을 폭발시켜 주백설의 몸을 뇌전과 화염으로 뒤덮었다.

    파삭!

    푸른 화염이 아닌 푸른 얼음덩어리로 변해 버린 현성의 몸이 그대로 산산조각 났다.

    푸스스슥!

    뇌전과 화염에 휩싸인 주백설의 몸 역시 한 줌의 재로 변해 그대로 흩어져 버렸다.

    재로 변해 가는 주백설의 얼굴에는 마침내 해냈다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담겨 있었다.

    현성과 주백설이 동시에 죽음을 맞이했다.

    사아아아악!

    그 순간 허공에서 마력이 하나로 뭉쳐졌다.

    하나로 뭉쳐진 마력이 플레이어 하나를 만들어 냈다.

    “하아! 하아!”

    불사의 서가 가진 권능 덕에 부활한 현성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시스템 상점이 정상화된 뒤 불사의 서를 다시 무 등급 스킬로 만들지 않았다면?

    정말 죽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현성은 설마 화신 스킬을 사용한 자신이 공격 한 방에 죽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하나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주백설은 자신의 남은 생명력과 마력을 모두 쏟아부어 권능을 최대치로 강화했다.

    현성이 보유하고 있는 화신 스킬이 아무리 뛰어나 봤자 굴레를 벗은 자가 목숨을 포기하면서까지 날린 공격을 감당해 낼 수는 없었다.

    ‘동귀어진에 성공했다고 알고 죽은 것 같은데.’

    재가 되어 흩어지기 직전까지 주백설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현성이 자신과 함께 죽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부활의 권능이 남아 있어 다행이구나.”

    “너 다시 살았구나.”

    그때 게스피트와 제나가 현성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네, 겨우 살았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해 다오.”

    게스피트의 말에 현성이 주백설과 처음 조우하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아주 상세하게 설명했다.

    “알겠다. 그럼 난 일단 이 일을 다른 이들에게 알려야겠구나.”

    게스피트가 잔뜩 굳은 얼굴로 말하더니 용병 계약을 해지하려고 했다.

    “저 게스피트 님.”

    그때 현성이 게스피트를 불렀다.

    “왜 그러느냐?”

    “가시기 전에 이거 충전 좀.”

    현성이 게스피트의 권능이 빠져나간 반지를 내밀었다.

    “알겠다.”

    게스피트가 짧은 대답과 함께 반지를 어루만졌다.

    화악!

    반지 안에 다시금 게스피트의 권능이 담겼다.

    “그럼 난 이만 가 보마.”

    슈욱!

    그 말과 함께 게스피트가 용병 계약을 해지하고는 그대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회합이 열릴 모양이네. 나도 가 봐야겠어.”

    사실 평소의 제나였다면 회합 따위 무시해 버렸을 것이다.

    하나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제나는 이번 사건의 당사자이자 중요한 증인이었으니까 말이다.

    “네 증언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얌전히 대기하고 있어라.”

    파지지직!

    제나가 그 말과 함께 차원 게이트를 열더니 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하아아아아!”

    현성이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지금까지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이번처럼 큰 위기를 겪은 적은 없었다.

    ‘하루에 두 번이나 죽을 줄이야.’

    시스템 상점이 계속 막혀 있었거나 창조 등급과 초월 등급 회복 계열 스킬북을 살 포인트가 없었다면?

    ‘진짜 죽었겠지.’

    현성이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스템 메시지나 확인하자.’

    현성이 죽음에서 부활한 덕에 제대로 읽지 못한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했다.

    하지만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그저 불사의 서 등급이 떨어졌다는 메시지가 떠 있겠거니 했다.

    그런데…….

    “어?”

    현성의 눈앞에 세 개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중 하나는 예상했던 불사의 서 등급이 하락했다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나머지 둘은 달랐다.

    [믿을 수 없는 업적]

    -최초로 굴레를 벗지 않은 자가 굴레를 벗은 자를 쓰러트리는 데 일조하였습니다.

    -업적 보상 : 칭호 [최초로 굴레를 벗은 자를 쓰러트리는 데 일조한 자]

    -액티브 스킬 빙결을 습득하셨습니다.

    “헐…….”

    현성의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내가 마지막 일격을 가한 건 사실이지만…….’

    실질적으로 주백설을 쓰러트린 것은 게스피트와 제나였다.

    ‘설마 그걸 인정해 줄 줄은 몰랐네.’

    현성이 칭호를 확인했다.

    [최초로 굴레를 벗은 자를 쓰러트리는 데 일조한 자]

    -모든 스텟 1,280 증가.

    ‘엄청나네.’

    고작 일조한 자에 불과한데도 옵션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사실 이는 현성이 굴레를 벗지 못한 자이기에 가능한 업적이었다.

    아무리 만신창이라고 해도 굴레를 벗지 못한 자가 굴레를 벗은 자를 쓰러트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기에 이런 큰 보상을 준 것이다.

    ‘스킬도 얻었어.’

    그것도 무 등급 스킬이었다.

    특이한 점은 전과 다르게 스킬북 형태로 얻은 스킬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현성이 단독으로 주백설을 쓰러트린 게 아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주백설이 가지고 있던 권능의 대부분은 게스피트와 제나에게로 갔다.

    하나 일정 부분 주백설을 쓰러트리는 데 기여를 한 현성에게도 약간의 권능이 스킬의 형태로 전해진 것이다.

    현성이 빙결 스킬을 사용해 봤다.

    콰지지지직!

    바닷물이 빠른 속도로 얼어붙었다.

    ‘약해.’

    주백설이 제나와의 전투에서 보여 줬던 위력과는 비교하기도 힘들 만큼 약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현성은 주백설이 가진 권능의 아주 작은 조각 하나를 얻게 된 것뿐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사용할 수 있는 무 등급 스킬이 하나 더 늘었어.’

    무 등급 스킬은 다른 스킬들과 다르다.

    단순히 습득한다고 끝이 아니다.

    제대로 된 권능을 각성시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성장시켜야 했다.

    ‘언젠가는 나도 그런 위력을 보여 줄 수 있겠지.’

    현성은 주백설이 보여 줬던 신위를 떠올리며 뒷수습에 들어갔다.

    * * *

    게스피트가 회합을 열었다.

    이에 수많은 아군 굴레를 벗은 자들이 호응했다.

    순식간에 천여 명에 달하는 굴레를 벗은 자들이 모여들었다.

    단순히 주전론을 주장하기 위한 회합이었다면 이렇게 많이 모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이번에는 달랐다.

    아군 굴레를 벗은 자들과 적군 굴레를 벗은 자들이 맺은 협약이 깨졌다.

    이는 전면전까지 갈 수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당장 저놈들을 응징해야 해!”

    “내 저놈들이 이렇게 뒤통수칠 줄 알았다니까.”

    “평화가 너무 길어져서 저놈들이 겁을 상실한 모양입니다. 이번 기회에 본때를 보여 줍시다.”

    주전파에 속하는 이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협약을 깬 당사자인 주백설은 이미 사망했어. 거기다 아군 플레이어의 인명 피해도 전혀 없는 상태고. 굳이 전면전까지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네.”

    “맞아, 주백설 그년은 원래 미친년으로 악명이 높았잖아.”

    “이번 일은 주백설의 단독 행동이야. 적당히 보상받고 넘어가면 그만이라고.”

    주화파에 속하는 이들은 주백설을 탓하며 적당히 이번 일을 덮자고 주장했다.

    “보상은 무슨, 이번 기회에 본때를 보여 주자니까!”

    “그럼 서로 손해라는 거 모르나?”

    주전파와 주화파가 중구난방으로 떠들어 대자 회합 장소가 도떼기시장처럼 시끄러워졌다.

    “모두 조용!”

    그때 회합을 연 당사자인 게스피트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시끄럽게 떠들던 주전파와 주화파가 일제히 입을 닫고 게스피트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일단 이번 사건의 전말에 대해 설명하겠다.”

    게스피트가 현성에게 들은 이번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대로 나열했다.

    기본적인 사항은 시스템의 통보를 받았기에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스템이 차단된 동안의 정보는 알지 못했기에 모두 게스피트의 말에 집중했다.

    “……이렇게 된 것이다.”

    게스피트의 설명이 끝났다.

    “최현성 플레이어가 잘나가니까 이놈들이 싹을 자르려고 한 거네. 역시 가만히 두면 안 된다니까.”

    “맞아, 이건 놈들이 선전포고를 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이건 최현성 플레이어가 문제가 아니야. 주백설과 제나의 원한 관계 때문에 터진 일이라고.”

    “맞아, 피해도 없는데 굳이 사건을 키울 필요는 없지.”

    게스피트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회합 장소는 다시금 도떼기시장으로 변했다.

    게스피트가 다시금 목소리를 높이려는 순간.

    회합 장소에 모여 있던 굴레를 벗은 자들이 일제히 입을 닫았다.

    시스템을 통해 적군 굴레를 벗은 자들의 의견이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내용은 간단했다.

    우리는 협약을 깰 생각이 없다.

    이번 일은 주백설의 단독 행동이다.

    피해를 받은 지구와 최현성 플레이어에게 적당한 수준의 보상을 하겠다.

    사고를 친 당사자인 주백설이 죽었고 인명 피해도 없으니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자.

    “이거 봐, 단독 행동 맞다니까!”

    “저놈들 말을 어떻게 믿어? 자칫 잘못했으면 아군의 새싹인 최현성 플레이어가 죽을 뻔했다고.”

    주전파와 주화파가 다시금 중구난방으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모두 조용!”

    그때 게스피트가 목소리를 높였다.

    “투표로 결정하도록 하지.”

    게스피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잠깐!”

    누군가가 나서서 회합 장소에 모인 굴레를 벗은 자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뭐야? 제나잖아.”

    “저 미친년은 왜 나서는 거야?”

    “사건 당사자잖아. 아마 투표 전에 전쟁하자고 연설이라도 하려는 거겠지.”

    굴레를 벗은 자들이 수군거리는 가운데 제나가 입을 열었다.

    “투표하기 전에 할 말이 있는데 말이야. 이번 사건의 주동자는 주백설 혼자가 아니야.”

    제나의 한마디에 시끌벅적했던 회합 장소가 일순간 고요해졌다.

    “주동자가 주백설 혼자가 아니라고?”

    게스피트가 고요한 침묵을 깨고 제나에게 물었다.

    “어, 내가 최현성 플레이어를 돕기 위해 도착했을 때, 굴레를 벗은 자가 한 명 더 있었어.”

    제나의 확답에 게스피트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사실 게스피트도 의문점이 하나 있기는 했다.

    바로 현성에게 준 반지의 권능이 발현되었음에도 자신에게 소식이 닿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주백설의 권능이 강하기는 하지만 내 권능이 못 뚫을 정도는 아니야. 그렇다면 진짜 제나의 말대로 굴레를 벗은 자 하나가 더 개입했다는 건가?’

    사실이라면 반지에 담긴 자신의 권능이 중간이 소멸할 만했다.

    “그게 정말이야?”

    “그놈이 누군데?”

    “역시 단독 행동이 아니라 계획적인 도발이었어.”

    주전파들이 분노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누군지는 몰라. 처음 보는 놈이었거든. 그렇지만 다시 만나면 확실히 알 수 있어.”

    제나는 도주한 굴레를 벗은 자의 마력 특징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주동자를 다 처벌한 것도 아닌데 화해를 받아들일 수는 없지.”

    “그렇기는 하지.”

    “일단 배상을 받고 화해를 하더라도 처벌은 철저하게 해야지.”

    제나의 말에 주화파도 말을 바꿨다.

    주동자가 주백설 혼자가 아니라면?

    또 다른 주동자가 있다면?

    그놈을 처벌하기 전까지는 절대 적군 굴레를 벗은 자들의 사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주전파와 주화파가 한목소리로 적군 굴레를 벗은 자들을 성토했다.

    그때였다.

    “이건 우리끼리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야. 난 사건의 당사자인 최현성 플레이어를 이 자리에 증인으로 불렀으면 해.”

    누군가가 최현성 플레이어를 언급했다.

    “백화잖아?”

    “웬일로 나서는 거야?”

    “최현성 플레이어를 부르자고?”

    다른 굴레를 벗은 자들의 물음에 백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전면전을 하든 적당한 배상을 받고 화해를 하든 일단 피해를 당한 당사자인 최현성 플레이어의 의견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렇기는 하지.”

    “그럼 불러 보자고.”

    주전파와 주화파 할 것 없이 굴레를 벗은 자들이 일제히 최현성 플레이어를 증인으로 부르는 것에 찬성했다.

    “이 기회에 그놈 얼굴이나 좀 보자.”

    “아주 맹랑한 놈이야. 내가 그놈한테 할 말이 아주 많아.”

    “나도 그래, 이번 패치 왜 그렇게 했는지 한번 물어봐야겠다.”

    “난 진실의 계약 스킬을 건 다음 가챠 상품 확률에 장난질 친 건지 아닌지 한번 물어봐야겠어.”

    그런데 어째 이번 사건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다른 쪽에 대한 궁금증이 더 많아 보였다.

    “그럼 내가 부르지.”

    게스피트가 용병 고용 스킬을 사용해 현성을 소환했다.

    * * *

    게스피트와 제나가 떠난 후.

    현성은 현장 뒷수습에 열중했다.

    ‘해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야.’

    둘의 전투는 끝났지만 그 여파는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위이이잉!

    뒷수습을 하는 와중에 현성의 스마트폰이 끊임없이 진동했다.

    전화를 건 이들은 각국의 수장들이었다.

    태평양에서 벌어진 두 절대자의 대결은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전투의 중심지와 멀리 떨어진 캐나다, 미국, 멕시코 같은 아메리카 국가들과 한국, 중국, 일본 같은 아시아 국가에까지 그 여파가 미쳤기 때문이다.

    해일이 일어나 해변가를 덮쳤고 지진이 일어나 대지가 뒤틀렸다.

    상황이 종결되었음에도 세계인들은 불안감에 몸을 떨고 있었다.

    ‘안전하다고, 더 이상의 위기는 없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는 거야.’

    마음 같아서는 직접 전 세계를 대상으로 생방송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파에 휩쓸려 피해를 본 사람들을 구조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때였다.

    -고용주 게스피트 님이 용병 최현성 님의 고용을 신청하셨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예] [아니오]

    ‘게스피트 님이 어쩐 일로?’

    그때 증언이 필요할지 모르니 얌전히 대기하고 있으라는 제나의 말이 떠올랐다.

    ‘증언을 해야 한다는 말이지.’

    이번에 진 빚을 갚기 위해서라면 증언 따위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현성이 예를 눌렀다.

    화악!

    그 순간 현성의 몸이 밝은 빛에 휩싸이며 회합이 열리고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슈욱!

    현성이 회합 장소에 도착했다.

    ‘엄청나네.’

    현성은 회합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느껴지는 강력한 존재감에 숨이 턱턱 막혔다.

    아예 멋모를 때였다면 이렇게까지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하나 현성은 굴레를 벗어난 자들의 힘을 측정할 수 있는 레벨에 도달했다.

    그렇기에 한자리에 모여 있는 굴레를 벗은 자들이 가진 힘을 생생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왔다.”

    “저놈이 최현성이야?”

    “그런가 봐.”

    “각성한 지 몇십 년밖에 되지 않은 애송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성장이 엄청 빠르잖아.”

    “게임으로 우리 포인트를 쪽쪽 빨아먹어서 그렇지.”

    “어디 게임뿐이야? 복권부터 시작해서 문화 상품으로 빨아먹은 포인트도 엄청나.”

    “날강도 같은 놈.”

    현성의 등장에 주전파, 주화파 할 것 없이 수군거렸다.

    “모두 조용!”

    게스피트가 목소리를 높이자 다시금 장내가 조용해졌다.

    “지금 이 자리는 협약을 깬 적군 굴레를 벗은 자들을 어떻게 응징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마련한 거다. 모두 그 점을 명심하도록.”

    게스피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군 굴레를 벗은 자들이 다시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게스피트 쟤는 자기가 우리 대장인 줄 아나, 아까부터 왜 저렇게 나대는 거야?”

    “회합을 연 당사자잖아. 그러니까 사회자 역할은 해야지.”

    “그래도 그렇지.”

    “일단 최현성 플레이어 말부터 들어 보자고. 게스피트가 틀린 말 한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계속해서 수군거리는 아군 굴레를 벗은 자들을 보며 게스피트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저기…….”

    그때 현성이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온갖 잡음이 흘러나왔던 장내가 고요해졌다.

    “절 왜 부르신 건지?”

    현성의 물음에 게스피트가 상황을 설명했다.

    “……라고 제나가 말하더구나. 그래서 혹시 네가 아는 것이 있는가 하고 불렀다.”

    “있습니다. 게스피트 님이 주셨던 반지의 권능이 무력화되었을 때 ‘나 혼자라면 힘들었겠지. 하지만 도움을 주는 음흉한 녀석이 하나 있거든.’이라고 주백설이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썩을 놈들!”

    “주백설의 단독 범행? 거짓말을 아주 입에 달고 사는 놈들이구만.”

    “당장 응징을 하자고.”

    “전면전 가자!”

    현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전파들이 당장 전면전을 벌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단 협약을 어긴 이번 일의 주동자를 찾아내는 게 우선이야.”

    “전면전은 그 후에 결정을 하자고.”

    주화파들은 일단 사망한 주백설의 공범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뭐, 전면전?’

    현성은 갑작스러운 주전파의 주장에 화들짝 놀랐다.

    지구는 아직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

    전면전이 벌어져 주백설 같은 강자들이 지구를 침공해 오기라도 한다면?

    ‘끝장이다.’

    전면전인 만큼 게스피트나 제나 같은 아군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주백설과 제나의 사례에서 봤다시피 굴레를 벗은 자들의 전투가 벌어지면 그 승패와 상관없이 지구 전체가 쑥대밭으로 변한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을 뿐이야. 전투가 장기화되면…….’

    지구의 인류는 처참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모두 조용! 최현성 플레이어의 이야기를 듣자고 불렀더니 왜 네놈들이 난리야!”

    그때 누군가가 나서서 목청을 높였다.

    ‘누구지?’

    현성으로서는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백화 저건 또 나서네.”

    “그러게 회합을 연 당사자도 아니면서 왜 저렇게 난리야?”

    “백화는 이번 일과 아무런 관련도 없지 않나?”

    현성은 굴레를 벗은 자들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백화 님이셨구나.’

    백화는 각성 초기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현성이 판매하는 물품들을 애용해 온 VVIP 중 한 명이었다.

    “백화 말이 맞아. 최현성 플레이어 넌 어떻게 하고 싶지?”

    게스피트가 현성에게 물었다.

    “전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현성의 말에 주전파들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고 주화파들의 얼굴은 환해졌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호구처럼 당하고만 있을 생각도 없습니다. 가장 먼저 이번 일의 주동자에 대한 확실한 처벌을 원합니다.”

    “그럼, 그래야지.”

    “협약을 깬 놈은 그 대가를 꼭 치러야 해.”

    아군 굴레를 벗은 자들이 현성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또한 다시금 이런 일을 벌이지 않겠다는 재발 방지 약속과 이번 일로 피해를 입은 저와 지구 그리고 제나 님과 게스피트 님에 대한 합당한 배상을 요구하고 싶습니다.”

    “적당하네.”

    “그 정도면 만족할 만하지.”

    “그런데 주동자 놈을 어떻게 찾지?”

    “이렇게 끝내기에는 아쉬운 게 많은데.”

    장내가 다시금 시끌시끌해졌다.

    현성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만약 이 중 단 하나라도 이행되지 않을 시 전면전을 벌여서라도 적군 굴레를 벗은 자들에게 그에 합당한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성의 말에 주전파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호구처럼 당하고 있을 수는 없지.”

    “적당한 배상을 안 주면 힘으로라도 뜯어내야 한다고.”

    “일단 우리 요구 사항부터 저쪽에 전달하자고.”

    “나도 그게 좋을 것 같아.”

    현성의 말에 주전파와 주화파가 동의했다.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무리한 배상을 요구해서 전면전을 일으켜야겠어.’

    ‘저놈들도 밸이 있으면 맞상대를 해 오겠지.’

    ‘지루한 대치를 깰 절호의 기회야.’

    이게 주전파의 생각이었고…….

    ‘적당히 마무리 지을 수 있겠어.’

    ‘주동자를 굳이 우리가 찾아낼 필요는 없지. 전면전을 언급하면 저놈들이 알아서 범인을 가져다 바칠 거야.’

    ‘진실의 계약을 사용하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무조건 주동자를 찾아낼 수 있어.’

    이게 주화파의 생각이었다.

    “최현성 플레이어의 의견에 다들 동의하는 건가?”

    게스피트가 다른 아군 굴레를 벗은 자들에게 물었다.

    “동의한다!”

    “그렇게 하자고!”

    굳이 투표를 할 필요도 없이 대다수의 아군 굴레를 벗은 자들이 현성의 의견에 따르는 것에 찬성했다.

    “그럼 배상액에 대해 논의를 해 보도록 하지.”

    게스피트의 말과 동시에 주전파와 주화파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5천 자 포인트 정도면 될 같은데.”

    주화파의 말에…….

    “5천 자 포인트는 무슨. 5천 양 포인트는 받아야지.”

    주전파가 반기를 들었다.

    “5천 양 포인트는 무슨!”

    “왜? 그럼 5천 자 포인트가 정말 맞는 배상액이라고 생각해?”

    주화파와 주전파가 서로 목소리를 높였다.

    주화파는 배상액을 낮추려고 했고 주전파는 배상액을 높이려고 했다.

    ‘이게 뭐야.’

    현성은 자가 어떻고 양이 어떻고 하는 소리에 입을 쩍 하고 벌렸다.

    굴레를 벗지 못한 자인 현성의 입장에서는 별나라같이 느껴질 수밖에 없는 포인트 단위였다.

    주화파의 주장이 통과되더라도 현성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포인트를 받게 된다.

    그런데 그게 최하한선이다.

    주전파가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대박이네.’

    큰 위기를 겪기는 했지만 결국 현성은 살아남았다.

    지구의 피해도 그리 크지 않았다.

    놀란 사람은 많아도 사상자는 거의 없었다.

    현성과 지구 랭커들이 잘 대응한 덕분이었다.

    ‘주화파가 이겨야 하는데.’

    강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주전파가 이기면 큰일이다.

    주전파의 무리한 요구를 적군 굴레를 벗은 자들이 거절해 전면전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현성의 입장에선 배상은 물 건너가 버리고 곧바로 전쟁 준비를 해야 했다.

    그렇다고 주화가 너무 일방적으로 이겨서도 안 된다.

    그럼 배상액이 너무 적어지니까 말이다.

    ‘적당히 협의하는 게 딱 좋은데.’

    적군 굴레를 벗은 자들의 입장에서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어찌어찌 수긍할 수 있는 아슬아슬한 황금 비율의 포인트.

    현성의 입장에서는 그게 가장 좋았다.

    * * *

    ‘다행히 들키지는 않은 건가?’

    회합에 참가한 베루인이 조심스럽게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베루인은 주전파 중 하나이자 얼마 전 최현성 플레이어를 제거하고자 회합을 주도했던 장본인이다.

    베루인은 자신의 그런 과거 행적 때문에 다른 이들의 의심을 살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베루인이 주백설과 공범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주백설 그년이 언젠가 사고 칠 줄 알았다니까.”

    “애휴, 사고를 쳤으면 적군 굴레를 벗은 자 하나 정도는 잡았어야지.”

    “굴레를 벗지 못한 최현성인가 뭔가 하는 놈도 못 잡고 혼자 죽었다며?”

    “그러게 말이야. 주백설 때문에 우리가 아주 개망신을 당했어.”

    평소 주백설의 이미지가 언제 사고를 쳐도 이상하지 않았기에 이번 돌발 행동을 단독 범행이라고 지레짐작한 것이다.

    시스템이 알려 온 협약 불이행자 명단에도 주백설의 이름만 올라가 있었기에 다른 이들은 이번 일을 베루인과 주백설이 공모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멍청한 년.’

    베루인은 속으로 주백설을 욕했다.

    ‘제나는 몰라도 최현성 플레이어는 죽였어야지.’

    주백설이 최현성 플레이어와 제나를 죽이고 죽는 게 가장 베스트였다.

    하지만 제나의 강함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까지는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동급의 강자인 제나는 몰라도 아직 굴레를 벗지 못한 최현성 플레이어 정도는 제거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한데 주백설은 최현성 플레이어를 제거하지 못했다.

    ‘괜히 최현성 플레이어의 힘만 키워 주는 꼴이 되어 버렸어.’

    베루인의 입장에서는 아군에게 이득을 주려다가 손해만 입힌 꼴이 되고 말았다.

    ‘차라리 이번 일을 계기로 전면전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좋은데.’

    안타깝게도 아군 굴레를 벗은 자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베루인 같은 주전파는 소수에 불과했다.

    아군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주화파들은 이번 일을 사과하고 협약을 계속 유지해 나갈 생각이었다.

    설사 적군 굴레를 벗은 자들이 다소 무리한 요구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이놈들은 언제까지 우리를 기다리게 할 생각인 거야?”

    “그러게 말이야. 설마 협약을 폐기하고 다시 전면전을 벌일 생각은 아니겠지?”

    “그럼 서로 손해인데.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겠지.”

    아군과 적군 굴레를 벗은 자들의 대다수가 현재의 평화에 만족하고 있었다.

    피는 피를 부르고 복수는 복수를 낳는 법이다.

    적과의 원한 관계가 깊거나 호전적인 소수의 주전파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굴레를 벗은 자들은 주화파에 속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다음 기회를 노려 봐야겠어.’

    베루인은 이번 일이 적당히 넘어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곧바로 다음 계획을 짰다.

    ‘아군 굴레를 벗은 자를 이용하는 건 무리야.’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다.

    주백설을 이용해 현성을 제거하려는 시도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이번에는 신들을 이용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도대체 뭐를 이용해서 흑뢰신을 꼬시지?’

    베루인이 한창 머리를 굴리고 있을 무렵.

    시스템을 통해 적군 굴레를 벗은 자들의 답장이 왔다.

    답장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주백설의 단독 범행이 아니다.

    공범이 있다.

    공범을 처벌하지 않으면 협약을 파기하겠다.

    공범을 잡아 처벌하고 사과와 배상을 한다면 협약을 유지하겠다.

    이 충격적인 소식에 회합에 참가했던 이들이 큰 충격에 빠졌다.

    “도대체 어떤 놈이야?”

    “주백설 혼자 한 짓이 아니었다고?”

    “저 자식들이 거짓말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어차피 진실의 계약 스킬을 사용하면 뻔히 드러날 일인데?”

    회합 장소에 모여 있던 이들이 술렁거렸다.

    ‘큰일 났다.’

    안심하고 다음 계획을 세우던 베루인은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 하지?’

    모르는 척하기에는 그간 자신의 행적이 너무 튀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아군 굴레를 벗은 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베루인에게로 쏠렸다.

    “그러고 보니까 베루인 저 자식이 수상한데?”

    “그래, 맞아. 얼마 전에 최현성 플레이어를 제거해야 한다고 회합까지 열었던 놈이잖아.”

    “어? 저 자식이 얼마 전에 나한테 주백설에 대한 정보를 캐 간 적이 있어.”

    “그래? 나한테도 주백설에 대한 정보를 얻어 갔는데?”

    사방에서 제보가 쏟아져 나왔다.

    ‘이런 망할.’

    베루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도주할 수도 없었다.

    이곳에는 베루인과 비슷한 수준의 강자가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천여 명 가까이 모여 있으니까 말이다.

    “베루인 네가 한 짓이냐?”

    “거짓말해도 소용없어. 너한테 무조건 진실의 계약 스킬을 시전할 생각이니까.”

    동료들의 추궁에 베루인이 고개를 푹 숙였다.

    * * *

    ‘제발 잘 마무리되어야 할 텐데.’

    현성은 초조한 표정으로 적군 굴레를 벗은 자들의 답장을 기다렸다.

    아군의 협상안이 무조건 받아들여져야 했다.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바로 전면전이 터질 테니까 말이다.

    거기다 현성과 지구가 당한 피해에 대한 배상금도 받을 수가 없었다.

    “저놈들이 어떻게 나올까?”

    “거절하지 않을까?”

    “그러게, 그랬으면 좋겠는데.”

    주전파는 전면전을 원했다.

    “이 정도면 받아들이겠지.”

    “그래, 배상액이 좀 과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한 건 아니잖아.”

    “받아들였으면 좋겠는데.”

    주화파는 평화를 원했다.

    그때였다.

    “왔다!”

    한 굴레를 벗은 자의 외침과 함께 모두가 시스템 메시지를 읽기에 여념이 없었다.

    ‘도대체 어떤 결과가 나온 거야?’

    굴레를 벗은 자가 아닌 현성으로서는 전면전만 아니기를 간절히 소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젠장!”

    “저 자식들은 자존심도 없나?”

    “쫄보 같은 놈들.”

    주전파들이 얼굴을 찌푸리며 적군 굴레를 벗은 자들을 욕했다.

    “하하하하! 내 이럴 줄 알았어.”

    “그래, 이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반대로 주화파들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웃고 있었다.

    ‘성공이다.’

    현성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가 번졌다.

    내심 불안했는데 확답이 나오니 이제야 안심이 되었다.

    “주백설의 공범이었던 녀석을 잡았다고 하네.”

    게스피트가 미소를 지으며 현성에게 말했다.

    “그럼 그자의 처벌은?”

    “5천 년 정도 봉인될 것 같아.”

    “5, 5천 년요?”

    “그래.”

    게스피트의 대답에 현성이 입을 쩍 하고 벌렸다.

    백 년도 천 년도 아닌 5천 년간 봉인이라니?

    고작 백 년도 살지 못한 현성으로서는 상상도 가지 않는 긴 시간이었다.

    “보복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 네 성장 속도를 보면, 그 안에 그 녀석은 충분히 따라잡고도 남으니까. 뭐, 운이 없으면 봉인이 풀리기 전에 죽을 수도 있고.”

    “봉인이 풀리기 전에 죽는다고요?”

    현성의 물음에 게스피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한테 주는 배상금의 대부분이 그놈 호주머니에서 나왔을 거야. 배상금을 치르고 남는 포인트로 5천 년을 버틸 수 없다면, 아마 봉인에 갇혀 늙어 죽겠지.”

    게스피트의 대답을 들은 현성은 소름이 돋았다.

    포인트는 수명.

    사실상 무한한 삶을 허락받은 1레벨 플레이어도 포인트가 떨어지면 죽을 수밖에 없다.

    ‘굴레를 벗는 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니야.’

    굴레를 벗은 자는 협약과 규율의 제약을 받는다.

    그리고 협약과 규율을 어길 때의 처벌은 무시무시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강력했다.

    “원래 처벌이 이렇게 강한가요?”

    현성의 물음에 게스피트가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놈이 워낙 큰 사고를 쳤으니까. 사실 협약을 깬다고 해도 보통은 시스템의 눈을 속이고 아군 플레이어에게 정보를 누설하거나 적당히 도움을 주는 정도야.”

    “그런 경우도 잡을 수가 있는 건가요?”

    현성이 생각하기에 시스템을 차단하는데 어떻게 알 수 있나 싶었다.

    “시스템 차단을 영원히 유지할 수는 없잖아. 차단이 풀리면 누가 시스템을 차단했는지 알 수 있어. 그리고 시스템이 개입하지 못하게 막은 것 자체가 협약 위반이야.”

    “그렇군요.”

    “그런 경우는 보통 몇십 년 정도면 처벌이 끝나. 그게 협약을 깰 정도의 중대한 범죄는 아니니까.”

    “그렇군요. 그럼 이번 경우는?”

    “이번에는 다르지. 전면전이 일어날 뻔했잖아.”

    쉽게 말해 사고를 쳐도 워낙 크게 쳐서 처벌이 컸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아군을 대상으로 하는 규율은 융통성이 꽤 있는 편이야. 하지만 협약은 달라. 아군들끼리 협의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니까.”

    “그런데 저한테 이런 정보를 알려 주셔도 괜찮은 건가요?”

    현성이 의아한 표정으로 게스피트에게 물었다.

    지금 게스피트는 그간 숨기던 정보를 대놓고 현성에게 알려 주고 있었다.

    “지금은 괜찮아. 이번 사고에 대한 정황과 이후의 처리 상황을 설명해 주는 건 넘어가기로 했으니까.”

    “그렇군요. 그럼 혹시?”

    현성이 기대 어린 눈빛으로 게스피트를 바라봤다.

    이번 기회에 좀 더 많은 정보를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이번에 배상으로 받은 포인트는 쓰지 말고 최대한 모아 놓는 게 좋을 거야.”

    갑작스러운 게스피트의 말에 현성의 눈이 반짝였다.

    “이런저런 잡다한 무 등급 스킬을 다수 보유하는 것보다는 포인트를 쌓아 놓는 게 훗날을 위해서는 더 좋으니까.”

    “알겠습니다.”

    현성이 짧게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잡다한 무 등급 스킬이라는 게 있나?’

    무 등급 스킬은 하나하나가 엄청난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잡다하다고 불릴 등급의 스킬이 아닌 것이다.

    ‘그래도 게스피트 님의 말씀을 듣자.’

    어차피 지금 보유하고 있는 무 등급 스킬의 권능을 갈고닦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빠듯했다.

    그와 더불어 현성이 하나 더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굴레를 벗은 자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포인트가 필요해.’

    게스피트는 포인트를 쌓아 놓는 게 훗날을 위해서 더 좋다 말했다.

    그럼 현성은 그 말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포인트가 도착했네. 받아.”

    게스피트가 현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현성이 게스피트의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상상하기 힘든 단위의 포인트가 현성에게로 넘어왔다.

    [믿을 수 없는 업적]

    -최초로 굴레를 벗어날 조건 중 하나를 만족시키셨습니다.

    -업적 보상 : 칭호 [최초로 굴레를 벗어날 조건 중 하나를 만족시킨 자]

    그리고 바로 업적이 떴다.

    ‘이건 스텟을 얼마나 올려 주려나?’

    현성이 환한 얼굴로 칭호의 정보를 확인했다.

    [최초로 굴레를 벗어날 조건 중 하나를 만족시킨 자]

    -모든 스텟 640 증가.

    ‘애걔…….’

    현성은 실망했다.

    지금까지 받은 무 등급 업적 중 가장 적은 포인트였기 때문이다.

    ‘아니야, 실망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현성은 금방 생각을 고쳐먹었다.

    사실상 거저먹은 업적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모든 스텟 640 증가 역시 엄청난 보상임은 확실했다.

    업적 하나로 총스텟을 무려 3,200이나 올려 줬으니까 말이다.

    “업적을 얻은 모양이네.”

    게스피트의 물음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금처럼만 해. 그럼 오래지 않아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 거야.”

    “네, 알겠습니다, 게스피트 님.”

    지금처럼만 해.

    현성은 그 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방금 전 게스피트의 말은 현성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지 않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다.

    “그럼 이만 돌아가야지?”

    게스피트의 말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군 굴레를 벗은 자들이 백기를 들었고 배상금도 받은 이상 더 이상 회합 장소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그럼 내가 돌려보내…….”

    “잠깐!”

    게스피트가 현성의 용병 고용을 취소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