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나와 주백설
현성이 흑뢰신의 권속을 처리한 이후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하나 현성은 조금도 게을러지지 않았다.
묵묵히 차원 전쟁과 사냥을 통해 업적을 늘려 가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지배 중인 차원 전역에 포상금을 건 덕분에 성장형 스킬북을 소수이나마 얻을 수 있었다.
현성은 그렇게 얻은 성장형 스킬북들을 무 등급 스킬로 만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포인트는 계속해서 축적되고 있었다.
소모하는 포인트보다 벌어들이는 포인트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전자 제품과 문화 상품은 현성에게 고정적인 캐시 카우 역할을 해 주었다.
그러는 와중에 현성은 몬스터를 사냥해 따로 포인트를 모았다.
용병을 고용한다거나 동맹들의 도움을 받는 일같이 포인트를 소모할 만한 사건은 단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다.
반대로 현성이 용병 일을 하거나 동맹들을 도와주고 보수를 받는 일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포인트가 쌓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사실 현성 정도의 위치에 있으면 나태해질 만도 했다.
굴레를 벗은 자나 신의 권속을 제외하면 자신을 위협할 존재가 없었다.
하나 굴레를 벗은 자는 규율과 협약 때문에 현성을 공격할 수 없었고 신의 권속은 게스피트가 준 반지를 통해 해결이 가능했다.
굳이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아도, 꾸준히 노력하지 않아도 현성은 강했다.
사냥을 하지 않아도 전자 제품과 문화 상품 판매를 통해 포인트가 꾸준히 들어왔다.
그럼에도 현성은 게을러지지 않았다.
마음이 느슨해질 것 같으면 과거 현성에게 패배해 수하가 된 반인반룡들의 황제 불마루스나 거인족들의 황제 카르사오를 떠올리며 반면교사로 삼았다.
‘오늘도 보람차게 시작해 보자.’
현재 현성은 차원 전쟁을 잠시 멈추고 휘하에 들어온 차원들을 순회공연하고 있었다.
바로 업적을 얻기 위해서였다.
몬스터를 사냥해 얻을 수 있는 연계형 업적으로 주는 스텟은 그리 높지 않다.
한 종의 몬스터 1만 마리를 잡아야 겨우 단일 스텟 8을 얻는다.
탐식의 서로 조금 더 많은 스텟을 확보한다고 해도 고작 10이 조금 넘는 스텟에 불과했다.
하나 현성은 지배 중인 차원의 몬스터를 사냥해 업적을 획득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티끌 모아 태산이지.’
10이 모여 100이 되고 1,000이 되는 법이다.
현성이 두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탐색 스킬을 통해 근방에 있는 몬스터들의 종류를 확인했다.
이미 1만 마리를 사냥해 업적을 획득한 종의 몬스터를 제외한다.
업적을 획득하지 못한 몬스터들을 파악한 현성이 손을 들어 올렸다.
우르르릉!
하늘을 칠흑빛 천둥이 뒤덮었다.
휘익!
현성이 손을 내렸다.
파지지지직!
그 순간 수십만 개에 달하는 칠흑빛 벼락이 지상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꽈아아아앙!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수십만 마리의 몬스터들이 순식간에 숯덩이로 변했다.
현성이 업적을 획득했다는 메시지를 확인하며 탐식의 서를 사용해 죽은 몬스터들의 사체를 먹어 치웠다.
아이템은 뚱이와 덕구를 시켜 회수한 후 아공간에 넣어 두었다.
‘가자.’
현성이 공간 이동 스킬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지상과 바다를 누비며 업적을 획득하던 현성이 차원 게이트를 열었다.
이 차원에서 얻을 수 있는 업적을 싹쓸이하고 다른 차원으로 떠난 것이다.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현성은 또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현성은 업적 작업을 완료할 때까지 계속해서 이 일을 반복할 것이다.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말이다.
* * *
파지지직!
지구에 차원 게이트가 열렸다.
휘익!
그리고 그 차원 게이트를 통해 한 명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주백설이었다.
‘여기에 있다는 말이지?’
드디어 제나가 머무는 차원에 도착했다.
그간 수소문을 계속했다.
하지만 아무리 수소문을 해도 제나가 있는 곳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제나는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수시로 이동하며 수많은 차원을 돌아다녔다.
그렇기에 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제나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주백설 역시 여러 차원을 여행했다.
무료함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여러 차원을 돌아다니다 보면 제나의 흔적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켜보고 있구나.’
주백설은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을 인지했다.
적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제나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 준 그놈의 시선이었다.
‘네놈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난 네놈의 꼭두각시가 아니다.’
아군 차원과 적군 차원의 전쟁.
그 끝이 어떻게 되든 주백설이 알 바 아니었다.
‘어차피 다 똑같은 놈들이야.’
동료? 전우?
말이 좋아 동료고 전우지 그저 같은 편에 속해 함께 싸웠을 뿐이다.
적군 차원이 사라진다면 당장 적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가 동료고 전우라니?
그 동료이자 전우라는 존재는 주백설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려고 했다.
주백설이 그의 목적대로 움직인다면?
죽거나 봉인당할 게 뻔했다.
‘내 목적은 단 하나뿐이야.’
최현성, 아군 차원과 적군 차원의 균형, 아군 차원의 패배.
주백설은 그런 데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고향 차원이 멸망했고 삶의 목적을 잃었다.
고독과 절망을 곱씹으며 영겁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왔다.
단 하나를 제외하면 삶에 남은 미련이랄 것도 없었다.
‘제나.’
그놈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제나가 있는 차원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제나를 찾아내 제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와 맺은 계약을 이행해야 하니까 말이다.
‘정체를 숨기고 작은 소동을 일으키라고 했었지?’
그 방법을 이용해 최현성 플레이어를 유인한 후 제거하면 된다고 했다.
제나에게 최현성 플레이어의 죽음은 큰 슬픔이 될 것이라면서 말이다.
‘과연 그럴까?’
자신이나 제나나 같은 처지였다.
감정이 마모될 대로 마모된 살아 있는 인형.
그런 존재가 과연 누군가에게 정을 줄 수 있을까?
‘뭐,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제나에게 티끌만 한 고통이라도 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뭐, 어차피 그와 맺은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서라도 최현성 플레이어를 제거해야 했고 말이다.
주백설이 살며시 자신의 마력을 개방했다.
그 순간 방대한 마력이 지구의 플레이어들을 짓눌렀다.
“침략자다!”
“어서 최현성 플레이어님께 알려라!”
가지고 있는 마력의 일부만 개방했을 뿐인데도 지구의 플레이어들은 난리 법석을 떨었다.
주백설은 굳이 지구의 플레이어들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이들을 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다.
‘장소를 옮기는 게 좋다고 했지.’
주백설은 망망대해를 향해 공간 이동을 한 후 차분히 기다렸다.
잠시 후.
파지지직!
차원 게이트가 열리며 최현성 플레이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백설은 그 순간 자신의 권능을 이용해 이 근방과 외부의 연결을 단절시켰다.
‘당분간은 시스템의 눈을 속일 수 있어.’
하나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주백설이 협약을 깼다는 사실이 발각될 수밖에 없었다.
‘제나를 제거할 때까지 숨기기만 하면 그만이야.’
애초에 주백설은 이번 일을 실행한 순간부터 자신의 목숨을 포기했다.
* * *
‘이게 뭐야?’
지구에 침략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현성은 서둘러 지구로 향하는 차원 게이트를 열었다.
하지만 크게 긴장하지는 않았다.
서두른 이유는 지구에 괜한 피해가 갈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침략자의 무력에 대해서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한데 차원 게이트를 통과해 침략자를 목격한 순간, 현성은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있는 존재가 현성이 예상했던 수준의 침략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강해.’
게스피트나 제나에 필적하는 존재감이 느껴졌다.
‘설마 굴레를 벗은 자인가?’
하지만 굴레를 벗은 자는 아군이든 적군이든 협약에 의해 굴레를 벗지 못한 자인 현성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었다.
“무슨 일로 이곳에 오신 겁니까?”
현성이 일단 말을 걸었다.
강력한 침략자라는 보고를 받기는 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피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상대가 뿜어낸 마력에 놀란 이만 있을 뿐 죽기는커녕 다친 사람조차 없었다.
상대는 존재감을 뿜어내고 사람도 없고 건물도 없는 망망대해로 이동했다.
그런 행보로 볼 때 적이라고 확신하기는 좀 애매했다.
제나와 같은 경우일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네가 최현성이냐?”
상대의 말에 현성이 바짝 긴장했다.
‘게스피트 님을 불러야 하나?’
상대는 신의 권속이 아니었다.
하나 굴레를 벗은 자인 건 확실했다.
그런 만큼 게스피트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현성이 만반의 준비를 했다.
상대가 굴레를 벗은 자라고 해도 화신 스킬을 사용하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다.
그사이 게스피트를 부르면?
굳이 현성이 나서지 않아도 이번 사건의 해결이 가능했다.
“미안하지만 죽어 줘야겠다.”
상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현성이 화신 스킬을 사용했다.
화르르륵!
현성의 몸이 한 줄기 화염으로 변했다.
한 줄기 화염으로 변한 현성이 게스피트의 권능이 담긴 반지에 마력을 밀어 넣었다.
‘이제 버티기만 하면 끝이야.’
현성이 그런 생각을 한순간.
콰드드득!
주변의 모든 것이 얼어붙어 버렸다.
휘리리릭!
그러더니 차가운 냉기와 얼음 조각들이 현성을 향해 일제히 날아왔다.
퍼퍼퍼퍼펑!
화신 스킬을 사용해 화염으로 변한 현성의 몸이 빠르게 마모되어 갔다.
‘이게 무슨?’
체력과 마력이 물밀듯이 소모되었다.
화신 스킬을 사용해 대부분의 스킬 공격력을 상쇄시키고 있음에 엄청난 타격이 연쇄적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도망칠 수도 없었다.
상대가 처음 서 있던 위치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반구 형태의 봉인이 현성을 가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미친.’
상대가 굴레를 벗은 자라도 어느 정도는 상대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아니었다.
반격은커녕 버티는 것조차 힘겨웠다.
‘도대체 언제 오시는 거야?’
반지에 마력을 불어 넣은 지 한참이 지났다.
그런데 게스피트는 감감무소식이었다.
“포기해라. 네가 보낸 구조 신호는 이미 차단당했다.”
상대의 덤덤한 말에 현성은 가슴이 뜨끔했다.
게스피트가 직접 자신의 권능을 담아 준 아이템이었다.
신의 권능조차 꿰뚫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먹통이 되었다니?
-도대체 어떻게?
현성의 말에 상대가 피식하고 미소를 지었다.
“나 혼자라면 힘들었겠지. 하지만 도움을 주는 음흉한 녀석이 하나 있거든.”
* * *
‘쓸데없는 소리를.’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나서고 싶지 않았는데.’
방관자로서 지켜만 볼 생각이었다.
한데 최현성 플레이어가 게스피트의 권능이 녹아들어 있는 아이템을 사용한 순간, 더 이상 방관자의 입장을 취할 수가 없었다.
게스피트의 권능이 발현되는 것을 막지 않았다면?
게스피트가 강제로 지구로의 진입을 시도할 게 뻔했다.
그러면 목적을 이룰 수가 없었다.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최현성 플레이어는 이 자리에서 죽을 테니까.’
주백설이 시스템의 감시를 일시적으로 무력화시켰다.
그런 만큼 자신이 부린 잔재주 역시 시스템이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현성 플레이어를 죽여라. 그 후 이곳에서 제나와 싸워라.’
두 명의 굴레를 벗은 자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 여파는 실로 엄청날 것이다.
과연 그 여파를 지구라는 이름의 차원이 견뎌 낼 수 있을까?
‘어렵겠지.’
지구라는 이름의 차원은 최현성 플레이어와 함께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지구가 사라지면?
전자 제품과 문화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적군 차원 역시 사라진다.
반면 최현성 플레이어에게 구속되어 있던 아군 차원의 1레벨 플레이어는 자유를 얻는다.
그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힘의 균형이 아군 차원에게로 기울 것이다.
* * *
‘이런 망할.’
게스피트에게 보낸 구조 신호가 차단당했다고 한다.
이건 게스피트의 도움만 기다리며 버티고 있던 현성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힘의 차이는 현격하다.
현성의 힘으로는 도저히 눈앞의 적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반구 형태의 봉인을 뚫으려고 흑뢰신마공과 화염의 서를 쉼 없이 사용했다.
하나 반구 형태의 봉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현성은 열심히 버텼다.
하지만 결국 체력과 마력이 바닥나며 화신 스킬이 해제되었다.
쩌저저적!
현성의 몸이 순식간에 얼음덩어리로 변했다.
사아아아악!
하나 현성은 죽지 않았다.
불사의 서가 가진 부활의 권능 덕분이었다.
콰드드득!
부활하자마자 차가운 냉기가 현성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이런 망할.’
현성은 곧바로 다시금 화신 스킬을 사용했다.
초조함이 밀려왔다.
불사의 서가 가진 부활의 권능 덕분에 한 번 살아나기는 했다.
하지만 그 결과 불사의 서 등급이 희귀 등급으로 하락해 버렸다.
시스템 상점과 연결된 상태였다면 회복 계열 스킬을 구입해 불사의 서 등급을 다시 무 등급으로 올릴 수 있다.
하나 시스템 상점과의 연결이 차단된 지금은 그게 불가능했다.
부활의 권능으로 인해 가득 차 있던 체력과 마력이 빠른 속도로 소진되기 시작했다.
현성이 보유하고 있는 체력과 마력이 모두 소모되면 화신 스킬이 해제된다.
그럼 모든 게 끝이다.
이번에는 진짜 죽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도와줄까?
그때 누군가가 현성에게 말을 걸었다.
‘천뢰신.’
흑뢰신의 권속에게 공격받았을 당시 도움을 받았던 천뢰신이었다.
천뢰신은 그동안은 단 한 번도 현성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한데 현성이 위기에 빠지자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네가 쌓은 포인트의 99%를 내놓아라. 그럼 도와주마.
천뢰신의 유혹이 시작되었다.
현성이 코웃음을 쳤다.
‘네 힘을 빌려서 눈앞의 적을 쓰러트릴 수 있다고 확실히 대답한다면 받아들이지.’
현성의 말에 천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눈앞의 적은 굴레를 벗은 자다.
천뢰신 본인이 직접 나서야만 상대가 가능한 강자인 것이다.
그런 강적을 상대로 천뢰신의 힘을 빌려 봤자 버티는 시간만 더 늘어날 뿐이다.
절대 이길 수가 없었다.
‘잠깐.’
그때 현성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혹시 게스피트 님에게 나 대신 연락을 취해 줄 수 있나?’
-불가능하다.
‘뭐?’
당연히 가능하다는 대답을 할 줄 알았다.
한데 불가능하다니?
‘왜지?’
-게스피트는 나와 연결된 고리가 없다.
‘이런 젠장.’
현성의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졌다.
신들은 스킬을 통해 플레이어와 대화한다.
게스피트에게 천뢰신과의 연결 고리가 되어 줄 만한 스킬이 없다면?
당연히 대화가 불가능했다.
‘다른 방법은 없나?’
-권속을 부리면 가능하기는 하다. 하나 내 권속들은 게스피트와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유일한 희망이 사라졌다.
‘어떻게 하지?’
현성이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을 무렵 천뢰신이 다시금 말을 걸어왔다.
-가까운 곳에 나와 연결 고리가 있는 굴레를 벗은 자가 있다.
‘그게 누구지?’
-제나.
천뢰신의 대답에 현성의 얼굴이 환해졌다.
제나가 현성을 돕기 위해 나설지는 미지수였다.
하나 한 가닥 희망을 걸어 볼 수는 있었다.
‘제나 님에게 내가 굴레를 벗은 자에게 공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줘.’
-네가 보유한 포인트의 절반을 준다면.
‘이봐, 그건 너무 양심 없는 거 아냐?’
말 한마디 전해 주는 걸로 포인트의 절반이라니?
그건 너무 과했다.
‘거래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마지노선이라는 게 필요하다고.’
-좋다. 30%를 내놓아라.
‘20%. 앞으로 나와 계속 거래할 생각이라면 이 정도에서 만족하는 편이 좋을 거야.’
-음, 좋다.
현성과 천뢰신의 계약이 성립되었다.
말 한마디 전하는 걸로 전체 포인트의 20%가 날아간 건 실로 뼈아픈 일이었다.
하나 어쩔 수가 없었다.
현성에게는 제나의 도움이 유일한 희망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안 오면 어떻게 하지?’
제나는 정상적인 사고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런 만큼 천뢰신의 말을 듣고도 게임하느라 바쁘다며 움직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제발 와야 하는데.’
현성은 제나가 제발 승급전 게임 중이 아니기를 소망했다.
* * *
‘꽤 끈질기구나.’
그가 못마땅한 눈빛으로 푸른 화염으로 변해 버티고 또 버티는 현성을 노려보았다.
일반적인 굴레를 벗지 못한 자였다면 진작 시체로 변했을 것이다.
아니, 현성 역시 그 예외를 벗어나지 못하고 한 번 목숨을 잃었다.
하나 되살아났다.
‘부활의 권능까지 가지고 있을 줄이야.’
참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다.
하나 그것도 이제 끝이었다.
그런 강력한 권능을 무한대로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한 번 사용한 것도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얼마 남지 않았어.’
체력과 마력이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푸른 화염으로 변한 신체가 다시 본래대로 돌아오는 순간.
‘넌 끝이다.’
변수는 없었다.
외부와의 차단은 완벽했다.
‘어?’
그때였다.
슈욱!
누군가가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화르르르륵!
그러더니 강대한 마력이 담긴 화염의 창으로 봉인을 내리찍었다.
꽈아아아앙!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봉인이 찢겼다.
‘이런 젠장. 제나가 어떻게?’
정보는 완벽하게 차단했다.
봉인을 만든 장소는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였다.
다른 플레이어는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자 장비같이 마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관측 장비의 감시도 차단했다.
즉, 외부에서 현성의 상황을 알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너 딱 걸렸어.
그때 제나의 음성이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들켰다.’
자신이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사실 이 정도는 괜찮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현성이 게스피트에게 날린 마력을 차단했다는 사실까지 알려진다면?
‘나까지 처벌받을 수 있어.’
죽지는 않겠지만 몇백 년간 봉인당할 확률이 농후했다.
‘빌어먹을.’
그가 재빨리 모습을 감췄다.
봉인이 깨졌다.
제나가 나타났다.
그럼 굴레를 벗은 자들의 전투가 시작될 게 뻔했다.
그런 상황이 되면 시스템을 속이던 주백설의 권능도 무력화될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죽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겠군.’
주백설과 제나 둘 다 죽는 게 속이 편했다.
전투에 휩쓸려 최현성이 죽거나 지구가 박살 나면 더 좋고 말이다.
* * *
현성의 체력과 마력이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길어야 1분 정도 후면 화신 스킬이 해제될 것이다.
화신 스킬이 해제되면?
현성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
‘끝인가?’
참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죽으려고 그렇게 쉼 없이 달려온 게 아닌데.’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후에는 누나와 루시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주마등처럼 그간의 일들이 떠오르자 후회되는 일이 참 많았다.
최선을 다해 달려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후회가 남았다.
현성이 무표정한 얼굴로 공격을 날리는 적을 바라보았다.
원망스러웠다.
분노도 치밀어 올랐다.
그렇지만 현성에게는 상대를 징지할 힘이 없었다.
‘이제 죽는 건가?’
10여 초 후면 화신 스킬이 해제될 것이다.
‘포기하지 말자.’
현성은 죽음이 눈앞에 닥친 상황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였다.
꽈아아아아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현성의 도주로를 막고 있던 봉인이 산산조각 났다.
누가 그랬는지 굳이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익숙한 마력이 느껴졌으니까 말이다.
‘왔다.’
제나가 도착했다.
현성이 재빨리 도망쳤다.
그러면서도 지구의 플레이어들에게서 소모한 체력과 마력을 보충받았다.
‘한숨 돌렸어.’
하지만 문제가 끝난 건 아니었다.
제나와 적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강대한 마력을 뿜어내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망할.’
이제 잠시 후면 굴레를 벗은 자 둘이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지구는 쑥대밭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현성이 재빨리 차원 게이트를 오픈했다.
그리고 제나에게 메시지 스킬을 사용해 자신의 뜻을 전했다.
-제나 님, 혹시 이 차원 게이트를 넘어가서 싸워 주실 수는 없을까요? 지구가 박살 나면 지금처럼 쾌적한 환경에서 게임을 하실 수가 없습니다.
현성의 메시지 스킬은 제나에게 제대로 전달되었다.
하지만 제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런 망할.’
제나와 적의 마력이 끝도 없이 팽창하고 있었다.
제나 근처에 있던 바닷물들이 수증기를 내뿜으며 증발했다.
반대로 적 근처에 있던 바닷물들은 빙하처럼 얼어붙었다.
‘내 말을 듣고 반응할 여유가 없어.’
현성이 시스템 상점을 열었다.
하지만 시스템 상점은 여전히 먹통이었다.
스마트폰과 대군주의 외침까지 사용했다.
그렇지만 제대로 작동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추가 피해라도 막자.’
다행히 둘이 충돌하는 곳은 드넓은 바다 한가운데였다.
‘여기는 태평양 중심부야. 잘만 하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어.’
사실 굴레를 벗은 자 둘이 이곳에서 충돌하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그 둘이 내륙에서 충돌했다면?
아마 그 피해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졌을 것이다.
* * *
제나와 주백설이 서로를 노려보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둘 다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았다.
서로가 서로의 실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전면전이 벌어졌을 당시 둘은 여러 번 충돌했다.
하지만 결국 승부를 내지 못했다.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제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널 찾아서 왔지.”
주백설이 대답했다.
“그럼 곧바로 날 찾아오지, 왜 최현성을 노린 거지?”
“네가 아끼는 녀석이라는 정보를 들었으니까.”
“엉뚱한 정보야.”
“네가 이렇게 헐레벌떡 달려온 걸 보면 아닌 거 같은데.”
“헐레벌떡 달려온 건 아닌데.”
두 사람이 유치한 신경전을 벌였다.
그러면서도 두 눈과 마력은 상대의 빈틈을 찾아 매섭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일로 날 원망하는 거라면 난 잘못 없다.”
제나가 선을 그었다.
“개소리.”
주백설이 살기를 줄줄 뿌리며 제나를 노려봤다.
“개소리가 아니라는 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네가 진짜 원망해야 하는 대상은 이미 이 세상에 없어. 그러니까 괜히 나한테 있지도 않은 죄 뒤집어씌우지 마.”
“너만 아니었으면 그 일은 벌어지지 않았어.”
“헛소리 그만해라. 만약 내가 그 일에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끼쳤다면, 그 원인은 내가 아니라 너야.”
타악!
그 말과 함께 제나가 먼저 몸을 날렸다.
꽈아아아앙!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푸른 화염 기둥이 주백설을 포함해 그 주변에 있던 냉기들을 일거에 날려 버렸다.
치이이이익!
주백설의 마력에 의해 얼어붙은 바다가 빠르게 증발했다.
하나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콰드드득!
녹아내렸던 바다가 다시금 빠르게 얼어붙었다.
“너 때문이야, 너만 없었다면.”
주백설의 낮은 중얼거림이 끝나기 무섭게 수백 수천 개에 달하는 얼음 창들이 일제히 제나를 향해 날아갔다.
슈슈슈슉!
화르르륵!
제나의 몸에서 피어오른 푸른 화염이 얼음 창들을 녹여 버렸다.
“아니, 네 잘못이야. 설사 내가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그건 잘못된 게 아니야. 우린 적이었고 그때는 전쟁 중이었으니까. 너만 괴로운 척 깨끗한 척 하지 마. 너도 수많은 이들을 죽이고 그들의 피를 손에 묻혔잖아. 네가 나를 증오하고 원망하는 것 이상으로 너를 증오하고 원망하는 이들이 최소한 수억 명은 될걸.”
“그 입 닥쳐!”
제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백설이 노성을 터트렸다.
타악!
주백설이 살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제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꽈아아아앙! 꽈아아아앙! 꽈아아아앙!
제나와 주백설의 충돌.
두 사람이 맞부딪칠 때마다 하늘이 쪼개지고 바다가 갈라졌다.
현성은 멀리서 두 사람의 전투를 지켜보며 대군주의 부름 스킬을 사용해 지구의 랭커들을 총집합시켰다.
슈욱! 슈욱!
“최현성 님 부르셨습니까?”
“갑자기 무슨 일이신지?”
현성이 사용한 대군주의 부름 스킬을 통해 집합한 지구 랭커들이 현성에게 차례대로 질문을 던졌다.
꽈아아아앙!
하지만 현성이 대답하기도 전에 제나와 주백설이 충돌하며 생겨난 충격파가 그들을 덮쳤다.
“큭!”
“이게 뭐야?”
현성과 지구 랭커들은 제나와 주백설이 충돌하는 곳과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 둘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말이다.
하나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몸이 쩌릿쩌릿하게 저릴 정도의 마력이 느껴졌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저 둘이 충돌하며 터져 나오는 충격파를 막기 위해 방어 스킬을 사용해야 할 정도였다.
“저 괴물들은 도대체?”
“설마 저곳에 합류해야 하는 건가?”
“서, 설마, 그건 아니겠지.”
지구 랭커들이 겁을 잔뜩 집어먹은 표정으로 현성의 눈치를 살폈다.
천외천의 강자들이 충돌하는 현장에 지구 랭커들이 개입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아마 근처에만 가도 충돌의 여파로 날아오는 스킬의 파편에 맞아 전멸할 게 확실했다.
“저, 최현성 플레이어, 설마 저곳에 들어가 싸우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중국 랭킹 1위의 플레이어이자 국가 주석의 위치에 있는 마분석이 조심스럽게 현성에게 물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거부권이라도 있지만 현성의 똘마니 2호인 말똥이 마분석에게는 거부권도 없었다.
“저 두 사람의 전투에 끼어들지는 않을 겁니다.”
현성이 겁먹은 지구 랭커들을 안심시켰다.
“하하하하, 그렇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마분석이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며 외쳤고, 다른 플레이어들의 얼굴도 밝아졌다.
현성은 굳이 마분석을 탓하지는 않았다.
‘이게 당연한 거야.’
굴레를 벗어날 자격을 얻은 현성조차도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는 접전이다.
그런 접전에 지구 랭커들이 겁을 집어먹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저 두 사람의 전투가 이어지며 생기는 여파를 최소화하는 것입니다.”
육지와 멀리 떨어진 태평양 중심부에서 벌어지는 대결이라고는 하지만 그 여파가 어마어마했다.
이대로 가만히 두면 그 여파가 육지까지 미칠 게 뻔했다.
‘해일이 육지를 덮칠 수도 있고, 지진이나 화산 폭발이 일어날 수도 있어.’
단지 전투의 여파만으로도 대기의 흐름과 해류의 움직임이 변하고 지각이 뒤틀렸다.
“가, 가능할까요?”
두 사람의 대결은 마치 천재지변 같았다.
그 둘의 움직임에 따라 하늘과 땅, 바다가 요동쳤다.
“무조건 해내야 합니다.”
현성의 말에도 지구 랭커들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해 보죠! 직접 전투에 가담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여파만 막는 겁니다! 이 정도도 못 해서야 랭커라는 이름이 울죠!”
한국 랭커 신윤아의 외침에 일본 랭커이자 현성의 똘마니 1호인 개똥이 이누쿠소가 호응했다.
“신윤아 플레이어의 말이 맞습니다. 저걸 못 막으면 우리 조국이, 내 가족이 피해를 입는 겁니다.”
신윤아와 이누쿠소의 외침에 다른 상위 랭커들도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래요! 우리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해내야 합니다!”
“한번 해 봅시다!”
“최현성 님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무조건 막아 냅시다!”
랭커들의 사기가 올라갔다.
“그럼 바로 움직이도록 하죠. 신윤아 플레이어와 한국 랭커들은…….”
현성이 각국의 플레이어들을 넓게 분포시켜 담당할 지역을 지정해 주었다.
그 후에는 곧바로 영역 선포 스킬을 사용했다.
현성은 영역 선포를 통해 자신과 휘하 신하들의 스텟을 상승시켰다.
그간 직업 등급이 꾸준히 상승해 영역 선포의 효율도 상당히 증가한 상태였기에 꽤 넓은 영역을 커버할 수 있었다.
모든 준비를 끝낸 각국의 랭커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내 역할이 중요해.’
현성은 홀로 가장 넓은 범위를 커버해야 했다.
‘어서 차단이 풀려야 할 텐데.’
타 차원과의 단절이 아직 유지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게스피트나 타 차원에 있는 신하들을 부를 수가 없었다.
‘이놈의 반지는 왜 일회용인 거야.’
게스피트가 준 반지는 멀쩡했다.
하지만 마력을 불어 넣어도 더 이상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겉만 멀쩡할 뿐 속이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속에 담겨 있던 게스피트의 권능을 이미 소비해 버린 반지는 속 빈 강정이나 마찬가지였다.
게스피트가 다시 자신의 권능을 충전시켜 줄 때까지 말이다.
사실 이게 당연했다.
권능을 무한대로 담아낼 수 있는 아이템이 있다면, 그 자체로도 사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다.
‘조금만 버티면 끝나.’
상대가 먼저 협약을 어겼다.
시스템 상점을 비롯한 타 차원과의 연결이 복구되기만 한다면?
전투의 승패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아군의 승리였다.
‘전투가 시작된 이상 타 차원과의 교류를 차단하는 권능을 계속 유지하기는 힘들 거야.’
피해를 최소화하며 버티기만 하면 된다.
그럼 이길 수 있었다.
* * *
“죽어! 죽어! 죽어!”
광기에 휩싸인 주백설이 맹공을 퍼부었다.
차가운 냉기를 머금은 눈 폭풍이 연달아 제나를 강타했다.
일반적인 적이라면 진작 얼음덩어리로 변했을 것이다.
하나 제나 역시 동급의 강자.
치이이이익!
푸른 화염 폭풍이 눈 폭풍을 그대로 기화시켜 버렸다.
꽈아아앙! 꽈아아앙! 꽈아아앙!
막강한 권능이 담긴 스킬들이 연달아 충돌했다.
전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승리의 여신은 주백설의 손을 들어 주지 않았다.
원인은 바로 지구와 타 차원의 교류를 차단하고 있는 권능에 소비되는 마력이었다.
주백설은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렇기에 그 정도 페널티가 있더라도 제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나는 그간 게임에 빠져 포인트를 흥청망청 써 버렸다.
하나 주백설은 꾸준히 포인트를 모아 자신의 권능을 강화시켜 왔다.
그러니 당연히 주백설이 이겨야 했다.
한데 결과가 정반대로 나와 버렸다.
‘이런 망할.’
주백설의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졌다.
지구와 타 차원과의 교류 차단을 해제하면 곧바로 시스템이 개입할 것이다.
그럼 아군과 적군의 굴레를 벗은 자들이 모여들어 자신을 처벌할 것이다.
‘이년은 왜 이렇게 강한 거야.’
지구와 타 차원의 교류를 차단하고 있는 권능에 소비되는 마력을 회수해 제나를 압도할 수 있다면?
주백설은 분명 그렇게 해서라도 제나의 숨통을 끊었을 것이다.
제나를 죽이기만 한다면 자신이 죽거나 처벌을 받아도 상관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주백설은 그러지 못했다.
냉정하게 판단해 봤을 때, 지구와 타 차원의 교류를 차단하고 있는 마력을 회수하더라도 단기전으로 제나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확률이 제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어.’
좌절과 절망이 밀려왔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자신이 패배할 확률이 높았다.
지구와 타 차원의 교류를 차단하고 있는 마력을 회수해 싸운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제나를 죽일 수 없어.’
자신이 죽는 것보다 제나를 길동무로 데리고 갈 수 없다는 사실이 더 큰 고통이었다.
그때였다.
‘어?’
주백설의 눈에 자신과 제나의 전투 여파를 차단하기 위해 노력하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중에는 최현성 플레이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가 최현성 플레이어를 꽤 아끼는 모양이더군. 아니, 아끼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끼고도는 모양이야.
그때 그놈이 했던 말이 주백설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처음에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제나는 최현성 플레이어의 위기에 곧바로 반응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최현성 플레이어를 대신해 자신과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
‘거짓말이 아니었어.’
제나는 최현성 플레이어를 아낀다.
제나를 죽일 수 없다면…….
‘최현성 플레이어 저놈을 죽여 주마.’
자신이 느낀 고통과 절망을 제나에게도 선물해 주고 싶었다.
‘내가 느낀 고통의 백분의 일이라도 느껴 봐라.’
결심을 굳힌 주백설이 최현성 플레이어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 후 일부러 강한 충격파 하나를 튕겨 냈다.
그대로 방치한다면 바다를 가로지르고 육지까지 날아갈 위력이 담겨 있었다.
‘역시 움직이는구나.’
최현성 플레이어가 반응했다.
직접 충격파를 막기 위해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지금이다.’
휘익!
제나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던 주백설이 지구와 타 차원과의 교류 차단을 해제했다.
그리고 여유가 생긴 마력을 총동원해 제나에게 공격을 쏟아부었다.
주백설이 최후의 발악을 한다고 생각한 제나는 공격을 포기하고 방어에 모든 마력을 집중했다.
그 순간이었다.
타악!
주백설의 몸이 최현성 플레이어를 향해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뒤늦게 그 사실을 파악한 제나가 방어를 풀고 주백설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퍼엉! 퍼엉!
주백설의 몸이 순식간에 만신창이로 변했다.
그러나 주백설은 멈추지 않았다.
“피해!”
제나가 주백설의 뒤를 따라붙으며 커다란 목소리로 최현성 플레이어에게 경고했다.
만신창이가 된 주백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역시 내 선택이 옳았어.’
제나의 다급한 외침을 듣자 기분이 좋아졌다.
콰지지지직!
날카로운 냉기의 칼날이 최현성 플레이어를 향해 날아갔다.
그 순간이었다.
슈욱!
한 여인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퍼어어엉!
그러더니 주백설이 날린 냉기의 창을 그대로 분쇄해 버렸다.
‘안 돼!’
다 잡은 먹잇감을 놓치게 생겼다.
사아아아악!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여인이 강력한 마력을 내뿜으며 주백설을 공격했다.
그리고 최현성 플레이어를 향해 방어 스킬을 사용했다.
주백설은 가까스로 최현성 플레이어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력한 방어 스킬이 주백설과 최현성 플레이어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어.’
피투성이가 된 주백설이 맹목적으로 최현성 플레이어를 보호하고 있는 방어 스킬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 * *
현성은 지구 랭커들과 함께 제나와 주백설의 충돌로 생긴 충격파를 막아 내고 있었다.
강력한 충격파의 경우는 현성과 루시아가 전담했다.
그러면서도 현성은 지직거리는 시스템 상점을 바라봤다.
차단이 끝나면 바로 게스피트에게 연락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강력한 충격파 하나가 날아왔다.
현성이 아니면 막을 수 없는 위력이었다.
‘어, 풀렸다.’
현성은 충격파를 막아 내고 곧바로 게스피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게임 중인지 받지를 않았다.
[적군 굴레를 벗은 자가 지구에 쳐들어왔습니다. 도와주세요.]
현성은 일단 문자를 보냈다.
그 후 파르티샤를 포함해 휘하의 강력한 1레벨 플레이어들을 모조리 소환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현성은 시스템 상점을 열어 창조 등급과 초월 등급 회복 계열 스킬북을 닥치는 대로 구입했다.
등급이 하락한 불사의 서를 다시 무 등급 스킬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포인트를 아낌없이 쏟아부은 덕분일까?
-패시브 스킬 불사의 서가 생성되었습니다.
현성은 순식간에 불사의 서를 무 등급 스킬로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었다.
‘겨우 한숨 돌렸네.’
그때였다.
퍼어엉! 퍼어엉!
커다란 폭음과 함께 주백설이 제나의 맹공을 그대로 받아 내며 현성과의 거리를 빠르게 좁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