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권. 이차원의 원주민들 (184/225)

┃이차원의 원주민들

‘영 신통치가 않네.’

현성은 거인족들이 대비책을 마련하기 전에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점점 효율이 떨어졌다.

도시를 정찰했지만 사람들의 모습을 아예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현성과 루시아에게만 나타난 현상이 아니었다.

이번 작전에 참여한 구조대 모두가 점점 사람들을 보기가 힘들어진 상황이었다.

‘이럴 때는 잡아서 직접 물어보는 게 최고지.’

현성이 거인족들을 납치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행방을 물었다.

“노예들은 비그로푸 님이 모두 데리고 갔다.”

“비그로푸?”

“이 지역을 다스리시는 군주님이시다.”

‘대책이라는 게 사람들을 한곳으로 모으는 거였나 보네.’

현성의 눈이 번뜩였다.

간단하지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그리고…….

‘수상한 냄새가 솔솔 풍기네.’

한 지역으로 사람들을 모두 모으면 관리가 편해진다.

하지만 곳곳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모으는 과정에서는 오히려 관리가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함정일 확률이 높아.’

하지만 함정이라고 해서 피해 갈 생각은 없었다.

-전원 구조 작전을 중지한다.

현성은 일단 지구와 파르티샤 차원에서 온 구조대에게 작전 중지를 명령했다.

적들이 함정을 파고 있는 상태에서 어설프게 움직였다가는 아까운 휘하 신하들만 잃게 될 확률이 높았다.

‘번거롭더라도 내가 직접 움직이는 게 나아.’

솔직히 말해 본차원을 총괄하는 대군주가 직접 오는 게 아닌 이상…….

정면 승부를 벌이더라도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다.

* * *

현성은 정보 수집에 열중했다.

구조 작전에 동원된 지구와 파르티샤 차원의 플레이어들을 이용하기도 했고, 직접 나서서 거인족 포로를 잡아 정보를 캐내기도 했다.

그 결과 꽤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한 번에 일망타진할 수 있는 곳은 이곳밖에 없어.’

비그로푸라는 군주가 머무는 대도시로 향하는 대로.

총 세 개의 대로만 잘 지키고 있으면 손쉽게 사람들을 구출할 수 있었다.

‘너무 대놓고 함정을 팠단 말이지.’

비그로푸로서는 손해 볼 일이 없었다.

무사히 수송이 완료되면?

그걸로 끝이다.

앞으로 입을 손해를 줄였으니까 말이다.

현성이 중간에 사람들을 수송하는 행렬을 습격하면?

바로 비그로푸가 튀어나올 것이다.

‘오냐, 어디 한번 붙어 보자.’

현성이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 * *

‘왜 아직까지 소식이 없지?’

비그로푸가 불만 어린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노예들을 수송시키면 곧바로 반응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주일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너무 대놓고 함정을 팠나?’

물론 이대로 노예들이 본성으로 들어와도 비그로푸가 손해 볼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쉽네.’

오래간만에 직접 나서 살육의 축제를 벌일 작정이었던 비그로푸로서는 이런 상황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그 정도 깡도 없나?’

이 차원의 원주민 플레이어들에 대한 실망감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실망하기는 일렀다.

노예들을 수송하는 병력이 아직 세 개의 대로를 통과하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크게 한탕 할 계획이라면, 오늘이 딱인데.’

여러 곳에서 모여든 수송 행렬 중 하나가 오늘 대로를 통과할 예정이었다.

이 차원의 원주민 플레이어들이 진정으로 노예 수송 병력을 노리고 있다면?

바로 오늘이 절호의 기회였다.

‘제발 와라.’

은신 스킬을 사용한 채 몸을 감추고 있는 비그로푸가 간절하게 적들인 이 차원의 원주민 플레이어들이 쳐들어오기를 소망했다.

“공격!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하자!”

“와아아아아!”

그 소망이 하늘에 닿았을까?

정말 이 차원의 원주민 플레이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열 명도 채 안 되는 숫자의 소규모 떠돌이 무리가 아니었다.

족히 수천은 되어 보이는 대규모 플레이어 병력이 노예 수송 행렬을 습격했다.

‘왔다.’

비그로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타악!

은신 스킬을 해제한 비그로푸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지를 박차고 나갔다.

“하하하, 다 쓸어버리자!”

“와아아아!”

비그로푸의 외침과 동시에 함께 몸을 감추고 있던 수하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 * *

‘저놈들은 뭐지?’

대로의 길목에 도착한 현성이 황당한 표정으로 몸을 숨기고 있는 플레이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나름대로 위장 스킬을 사용해 철저하게 은폐, 엄폐해 있었지만, 현성의 눈에는 그 모습이 훤하게 보였다.

“혹 정말 이 차원의 원주민 플레이어들이 아닐까요?”

함께 이번 대규모 구조 작전에 참여한 이들 중 하나인 파르티샤의 말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로의 길목에 미리 몸을 숨기고 있는 수천의 플레이어 부대.

그들은 정말 이 차원의 원주민 플레이어들일 확률이 높았다.

‘진짜 이 차원의 원주민 플레이어들이 사람들을 구하러 온 건가?’

현성이 고개를 돌려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하던 루시아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고향의 플레이어들이 일반인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쁜 것 같았다.

“공격!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하자!”

“와아아아아!”

그 말을 시작으로 몸을 숨기고 있던 이 차원의 원주민 플레이어들이 총공격을 시작했다.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전체적인 전력은 이 차원의 원주민 플레이어들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만반의 준비를 했는지 플레이어들의 실력도 뛰어났고 레벨이 전체적으로 높았다.

뭐, 그래 봤자 어디까지나 거인족 플레이어들을 기준으로 놓고 봤을 때 이야기다.

현성이 봤을 때는 중저레벨 수준에 불과했다.

‘그나저나 저게 전력의 전부라면 힘들겠어.’

이 차원의 원주민 플레이어들이 압도적인 우세를 점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람들을 수송하는 적 플레이어들의 실력이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함정이다.

진짜배기들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하하하, 다 쓸어버리자!”

“와아아아!”

그때 숨어 있던 진짜배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군.”

루시아가 약간 다급한 어조로 현성을 불렀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사람들을 구출하러 왔던 이 차원의 원주민 플레이어들은 모조리 몰살당할 수밖에 없었다.

“가죠.”

현성이 공격 명령을 내린 순간.

“함정이다!”

뒤늦게 함정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이 차원 원주민 플레이어들이 자신들이 구조한 사람들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화악!

그와 동시에 모두가 환한 빛에 휩싸여 그대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대규모 공간 이동?’

이런 종류의 대규모 공간 이동 스킬은 단 한 번도 목격해 본 적이 없었다.

지구의 장거리 공간 이동 고유 스킬 보유자 사라도 고작해야 한두 명 정도를 이동시킬 뿐이었다.

‘이동 거리가 그리 멀지는 않네.’

현성이 창조 등급 탐색 스킬을 통해 곧바로 그들의 위치를 탐지했다.

‘하지만 대규모 공간 이동 스킬 자체는 마력의 흔적을 따라 추격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깔끔해.’

웬만한 실력자가 아니고서는 마력의 흔적을 따라 공간 이동 스킬을 사용하기가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직접 만나 봐야겠어.’

좋은 일을 하다가 월척을 건지게 생겼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

그때 노성과 함께 거인족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현성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갑자기 사라진 습격자들을 보고 당황스러워하던 찰나 그들을 돕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현성 일행이 마침 거인족 플레이어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외형과 인종이 동일했으니 한통속으로 오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일단 이놈들부터 정리하고 찾아보자.’

스르르릉!

현성이 용혈검을 뽑아 들었다.

루시아와 파르티샤를 비롯해 이번 작전에 동원된 플레이어들 역시 자신의 무기를 뽑아 들고 전투준비를 갖췄다.

* * *

“이 쥐새끼 같은 놈들!”

비그로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상태였다.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확보한 포로들을 데리고 내뺐기 때문이다.

‘마력 역장을 펼쳐 놓는 건데.’

차마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설마 원주민 플레이어 중에 수천 명 단위의 대규모 인원을 한꺼번에 공간 이동 시킬 수 있는 특별한 스킬을 보유한 이가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 모두 도망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저놈들로 피에 대한 갈증을 달래야겠다.’

모두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일부는 살려서 도주한 놈들의 행방을 물어봐야 하니까 말이다.

‘겁에 질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군.’

비그로푸의 눈에는 차분히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고 전투준비를 하는 현성 일행의 모습이 마치 겁에 질려 굳어 있는 애송이들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착각이 산산조각 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아아아악!

비그로푸로서는 감히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의 강력한 마력이 피어올랐다.

파지지직! 화르르륵!

그리고 그 강력한 마력이 칠흑빛 뇌전과 화염으로 변해 지상과 하늘을 뒤덮었다.

꽈아아아아앙!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비그로푸의 생각은 거기서 끊어졌다.

비그로푸의 육신이 그대로 잿더미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 * *

‘이것도 주네.’

현성이 조금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믿을 수 없는 업적 – 초월 등급]

-두 번째로 적 차원의 군주 플레이어를 제거하셨습니다.

-업적 보상 : 칭호 [두 번째 침략 군주 – 초월 등급]

첫 공격으로 적의 선봉을 날려 버리자마자 뜬 메시지였다.

그 외에도 여러 연계형 업적들이 떠오르긴 했지만 초월 등급 업적은 이게 유일했다.

-휘하 신하 사이루가 등용을 철회했습니다.

-휘하 신하 데즈두슈가 등용을 철회했습니다.

-휘하 신하 케두로어가 등용을 철회했습니다.

……후략……

그 뒤를 이어 줄줄이 등용 철회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리 많지는 않네.’

거인족 플레이어들의 전체적인 레벨이 낮았기에 등용을 철회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뭐, 그건 그만큼 별다른 도움이 안 되는 쭉정이들만 남았다는 증거지.’

그렇지만 설사 쓸 만한 이가 남았다고 해도 중용할 생각은 없었다.

인간을 자신과 같은 지적 생명체가 아니라 가축으로 보는 이들이었다.

현성은 그런 거인족들을 그들이 인간을 대했던 것과 똑같이 취급해 줄 생각이었다.

‘너희들이 인간을 가축 취급했으니, 나는 인육을 먹는 네놈들을 몬스터로 대해 주마.’

현성 지배하에는 언데드 몬스터와 일반 몬스터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까망이처럼 휘하에 들어온 특별한 개체가 아닌 스킬에 의해 강제로 지배하게 된 몬스터들이었기에 현성 역시 그들을 단순한 소모품으로 취급했다.

그리고 현성은 거인족 플레이어들을 스킬에 의해 강제로 지배하고 있는 몬스터들와 동등하게 취급해 줄 생각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성인군자처럼 거인족 플레이어들을 개도하기 위해 노력할 생각은 없었다.

인육을 먹는 5미터의 거인족 플레이어들은 평범한 인간의 눈에 몬스터나 다를 바가 없는 존재였다.

아니, 어쩌면 몬스터보다 더 무서운 존재일 수도 있었다.

* * *

‘저 사람들은 뭐지?’

케인이 놀란 표정으로 순식간에 거인족 플레이어들을 쓸어버린 이들을 주시했다.

‘우리를 구해 주려는 건가?’

고마웠다.

하지만 반대로 원망하는 마음도 들었다.

‘왜 하필 이제야.’

저렇게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진작 자신들을 구해 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

아니, 대륙이 거인족 플레이어들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막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거인족 플레이어들의 배 속으로 들어간 아내와 어린 딸의 모습이 악몽처럼 떠올랐다.

부모는 거인족 플레이어가 아니라 같은 인간족 플레이어의 손에 죽었다.

‘다 똑같은 놈들이야.’

거인족 플레이어와 인간족 플레이어.

인육을 먹지만 않을 뿐 자신들을 가축처럼 부리는 것은 똑같았다.

케인이 증오가 가득 담긴 눈빛으로 자신을 구하러 온 인간족 플레이어들을 노려봤다.

* * *

비그로푸를 쓰러트린 이후 현성 일행은 손쉽게 노예로 잡혀 있던 사람들의 구조에 성공했다.

더 이상 저항하는 이는 없었다.

수송 병력이 모두 비그로푸의 휘하에 있던 신하들이었기 때문이다.

‘놓친 놈들이 꽤 많아.’

현성은 충성 맹세를 철회하고 휘하에서 벗어난 이들을 제거했다.

하지만 모두 제거하지는 못했다.

이번 작전에 동원된 신하들보다 동원되지 않은 신하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현성이라도 위치 파악조차 되지 않는 먼 곳에서 충성 맹세를 철회하고 도주한 이들을 잡을 수는 없었다.

‘내 존재가 거인족들의 수뇌부에 전달되었을 거야.’

충성 맹세를 철회한 비그로푸의 수하들 중 누군가가 분명 모시던 군주의 죽음을 상부에 알릴 것이다.

‘어떻게 나오려나?’

잠시 궁금증이 일었다.

죽은 비그로푸를 비웃으며 무시할 수도 있고, 현성을 잡기 위해 본토에서 더 높은 레벨의 군주 플레이어를 파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거인족들의 수뇌부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현성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더 빠르게 움직인다.’

부지런히 움직여 거인족들의 지배하에 가축만도 못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을 구한다.

거인족들이 더 높은 레벨의 플레이어를 파견한다면?

‘본때를 보여 주마.’

그저 거인족들의 손해만 더 커질 뿐이었다.

‘일단 이들을 파르티샤 차원으로 보낸 후 그 사람들을 만나러 가야겠어.’

이 차원의 원주민으로 구성된 구조대.

그중에서도 대규모 공간 이동 스킬을 가진 플레이어를 꼭 만나고 싶었다.

그런 스킬은 전술적 활용도가 무척이나 높았으니까 말이다.

“도대체 왜 이제야!”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던 현성의 귀에 한 사내의 한 맺힌 절규가 들려왔다.

‘뭐지?’

현성이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구조해 준 지구와 파르티샤 차원의 플레이어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그랬으면!”

남자의 절규가 현성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남자는 플레이어가 아닌 평범한 일반인이었다.

‘삶을 포기했구나.’

대부분 현성 일행에 의해 구조된 이들은 구조대에게 고마운 마음을 보내면서도 두려워했다.

아마 그중에는 사내처럼 구조대를 원망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차마 그 사실을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구조된 사람들 입장에서는 거인족 플레이어와 인간족 플레이어 모두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강자였으니까 말이다.

“이봐, 진정하라고.”

“우리는 이 차원의 플레이어들이 아니야.”

지구와 파르티샤 차원의 플레이어들이 사내를 진정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하지만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

사내는 플레이어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도 그 사실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사내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루시아가 나섰다.

“이들은 우리 대륙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타 차원에서 온 플레이어들입니다. 순수한 선의로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들을 구한 거죠. 그러니 이들을 원망하셔서는 안 됩니다.”

루시아의 말에 사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당신도 저들과 같이 타 차원에서 온 플레이어입니까?”

“아닙니다. 저는 당신과 같이 이 차원에서 나고 자란 사람입니다.”

루시아의 말에 사내가 눈을 번뜩였다.

그리고 루시아를 향해 그간 쌓였던 울분을 토해 냈다.

루시아는 묵묵히 사내의 말을 들어 주었다.

단 한마디의 변명이나 자기변호도 하지 않았다.

‘루시아…….’

현성은 안타까웠다.

루시아는 저런 원망을 들을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고향을 사랑했다.

고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사실 사내에게는 루시아를 원망할 자격이 없었다.

루시아가 아니었다면 사내는 계속해서 거인족들의 노예로 살았을 테니까 말이다.

은인을 향해 울분을 토해 내다니…….

이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줬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는 꼴이었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지위와 힘으로 비교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사내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일반인이었다.

그에 반해 루시아는 현성을 제외하면 이 자리에 있는 플레이어들 중 가장 강한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아무런 저항 없이 사내의 한 맺힌 원망을 묵묵히 들어 주며 고개를 숙였다.

사내의 말이 다 끝날 때까지 말이다.

사내를 비롯한 구조된 사람들이 파르티샤의 차원으로 넘어갔다.

현성이 슬쩍 루시아의 표정을 살폈다.

겉으로 보이는 변화는 없었다.

평소와 똑같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속마음까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곧바로 움직이죠. 일단 아까 봤던 이 차원의 원주민 구조대를 만나야겠습니다. 그들을 통해 좀 더 정확한 정보를 획득하고,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다음 구조 지역을 정하죠.”

현성은 어설픈 위로 대신 몸을 움직이는 걸 선택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현성이 어떤 말을 해도 루시아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해 줄 수 없었다.

차라리 몸을 움직여 더 많은 이들을 구조하는 게 나은 선택이었다.

* * *

“추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적발의 사내가 반백발의 중년인에게 보고를 올렸다.

“다행이군.”

다행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반백발의 중년인은 그리 표정이 좋지 못했다.

구조한 이들의 수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렸다면?

사람들을 더 구조하기는커녕 자신들까지 노예 신세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다음 기회를 노리자.’

반백발의 중년인이 이를 악물었다.

거인족들에게 빼앗긴 대륙을 되찾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하지만 반백발의 중년인과 그 수하들은 아직도 도망자 신세였다.

‘정말 가능하기는 할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반백발의 중년인은 고개를 휘휘 저어 부정적인 생각을 씻어 냈다.

‘우리는 점점 강해지고 있다.’

인구가 줄어들었기 때문일까?

일반인들 중 플레이어로 각성하는 이들의 숫자가 비상식적으로 많아졌다.

물론 거인족 플레이어들의 눈을 피해 레벨을 올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많은 어려움을 뚫고 반백발의 중년인과 그 수하들은 점점 힘을 키웠다.

아직은 거인족 플레이어들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이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지만 더 많은 시간이 지난다면…….

언젠가는 거인족들을 몰아내고 다시금 대륙을 탈환할 수 있을 것이다.

반백발의 중년인은 그렇게 믿었다.

그렇게 믿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

또 각성한 플레이어들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들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저항하지 않으면 거인족들의 손에 잡혀 죽거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레노엘은?”

“탈진 상태입니다.”

“잘 보살펴 주게.”

“예.”

레노엘.

레벨은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그가 가진 고유 스킬이 반백발의 중년인과 그 수하들에게 상당히 큰 도움이 되어 주었다.

아니, 레노엘의 고유 스킬이 아니었다면, 이번 구조 작전은 실행하기도 전에 취소되었을 것이다.

대규모 공간 이동이라는 안전책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조 작전을 벌였다가는 득보다 실이 많았을 테니까 말이다.

‘오늘 하루는 이곳에서 쉬면서 소모된 체력과 마력을 보충해야겠군.’

거인족 플레이어들의 추격이 없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거인족 플레이어들이 대대적인 추격을 시작했다면?

이곳에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기는커녕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도망쳤어야 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때였다.

전방에서 인기척과 함께 마력이 느껴졌다.

챙!

반백발의 중년인이 재빨리 검을 뽑아 들었다.

그 순간 수하들 역시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어 전방을 향해 겨눴다.

‘이렇게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우린 당신들의 적이 아닙니다. 그러니 무기는 거두시죠.”

그때 전방에서 흑발의 사내와 백금발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휴우!”

“다행이다.”

사방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상대가 거인족이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에 일단 안심한 것이다.

하지만 경계를 풀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순식간에 포위망을 갖춰 흑발의 사내와 백금발 여인을 포위했다.

“당장 무기를 버리고 바닥에 엎드려라! 그리고 상태창을 공개해라!”

반백발을 가진 중년인의 외침에 흑발의 사내가 이거 보라는 듯 입을 열었다.

“이거 봐요. 이런 집단은 외부인에게 상당히 폐쇄적이라니까요.”

“당신, 어느 나라 출신이지?”

반백발의 중년인이 흑발의 사내에게 물었다.

플레이어이기에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흑발의 사내가 말한 언어 자체가 생소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나라의 언어였다.

“로제트 왕국 출신입니다.”

그때 백금발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물은 것이 아니라 저자에게 물은 것이다.”

반백발의 중년인이 흑발의 사내를 주시하며 외쳤다.

백금발의 여인은 처음부터 대륙 공용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흑발의 사내는 아니었다.

“저는 이 차원의 플레이어가 아닙니다.”

흑발 사내의 말에 끝나기가 무섭게 포위망을 갖추고 있던 이들의 살기가 폭발했다.

이 차원의 플레이어가 아니다.

그건 이계의 플레이어라는 뜻이었다.

이계의 플레이어는 자신들의 적이었다.

“하지만 거인족들처럼 당신들의 적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들의 아군 차원이죠.”

흑발 사내의 말에도 반백발의 중년인을 포함한 그 수하들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이럴 것 같아서 제가 혼자 가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백금발의 여인이 흑발의 사내에게 타박하듯 말했다.

“어차피 루시아 혼자 왔어도 비슷했을 거예요. 대뜸 무기 버리고 상태창 공개하라고 하잖아요. 오히려 루시아 혼자만 왔으면, 더 큰 충돌이 있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하세요. 우리가 저들에게 숙여 줘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요. 우리가 저들을 돕기 위해 온 건 맞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저들의 장단에 맞춰 줘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흑발의 남자와 백금발의 여자가 태연하게 대화를 나눴다.

‘이것들이.’

반백발의 중년인 이마에 빠직하고 힘줄이 돋아났다.

그건 흑발의 남자와 백금발의 여자를 포위하고 있던 반백발 중년인의 수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거인족들에게 점령당한 세상에서 지금까지 꿋꿋하게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레벨이면 레벨, 아이템이면 아이템, 경험이면 경험.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사실상 이 세상 원주민들 중 최강자인 것이다.

그런 자신들에게 포위당한 상태다.

한데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하게 대화를 나눴다.

마치 자신들을 없는 사람 취급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총공격.

반백발의 중년인이 군주의 외침을 통해 휘하 신하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타악!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활시위가 튀어 나가듯 반백발의 중년인과 휘하 신하들이 흑발의 남자와 백금발의 여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쿠우웅!

그 순간 상상도 하기 힘든 거력이 그들의 몸을 억눌렀다.

“커억!”

“크윽!”

흑발의 남자와 백금발의 여자를 향해 달려 나가던 이들이 힘없이 꼬꾸라졌다.

“이, 이게 무슨?”

반백발의 중년인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하지만…….

털썩!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덜덜덜.

반백발의 중년인과 그 수하들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진동했다.

“이거 봐요.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다니까요. 차라리 제가 와서 이렇게 제압하는 게 피해도 없고 깔끔해요.”

흑발 남자의 말에 백금발의 여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아직 쓸 만하네.’

현성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반백발의 중년인과 그 수하들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초월 등급 스킬 마력 필드와 위압 스킬을 조합했는데, 생각보다 좋은 결과가 나왔다.

마력 필드가 마력을 구속하고 위압 스킬이 육체를 구속해 저들을 옴짝달싹 못 하게 묶어 버린 것이다.

창조 등급 스킬은 대부분 살상용이라 초월 등급 제압용 스킬을 써 봤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뭐, 창조 등급 바로 아래가 초월 등급이니까.’

사실 이 정도 효과는 보여 줘야 정상이었다.

“다, 당신의 정체가 뭡니까?”

반백발의 중년인이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힘겹게 추스르며 현성에게 물었다.

“아까 말했잖아요. 당신들을 돕기 위해 온 아군 차원의 플레이어라고.”

“우리가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믿고 싶지 않으면 안 믿어도 괜찮아요. 그래 봤자 당신들만 손해일 뿐이니까.”

현성의 태연한 답변에 반백발 중년인의 표정이 처참하게 변했다.

믿지 않아도 괜찮다.

당신들만 손해다.

상대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자신들 전원을 제압할 수 있는 강자였다.

방금 전의 발언은 스스로 가진 힘을 믿기에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진실인가, 거짓인가?’

하나 상대의 말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반백발의 중년인과 그 수하들은 선택권 자체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상대의 말이 진실이기를 간절히 소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상대의 말이 진실이 아니라면, 자신들 모두는 이 자리에서 죽을 목숨이었으니까 말이다.

“일단 몸을 움직일 수 있게 해 드릴게요.”

현성이 그 말과 함께 마력 필드 스킬과 위압 스킬을 해제했다.

“커억!”

“헉헉헉!”

현성이 마력 필드 스킬과 위압 스킬을 해제한 순간, 반백발 중년인의 수하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다시금 몸의 자유를 되찾았지만 반백발의 중년인과 그 수하들은 현성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현성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힘의 차이를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현성이 악한 마음을 먹었다면?

자신들은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도대체 저자는 정체가 뭐란 말인가?’

반백발의 중년인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동안 만났던 강력한 거인족 플레이어들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신들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일단은 숙여야 한다.’

상대의 말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자신들은 무조건 상대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말 저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최대한 저자의 힘을 이용해 자신들의 차원을 점령한 거인족들을 몰아내야 했다.

‘어차피 저자가 굳이 우리를 속여서 얻어 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저런 강력한 힘을 가진 자가 무엇이 아쉬워 자신들을 속이겠는가?

현대로 치자면 글로벌 기업 총수가 금 같은 시간을 들여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거지 무리를 속이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잃을 게 없다.’

잃을 게 없기에 오히려 더 과감해질 수 있었다.

‘어떻게든 저자를 이용해야 한다.’

반백발의 중년인이 공손한 눈빛으로 현성을 주시했다.

현성이 가진 강력한 힘.

그 힘이 반백발의 중년인에게 오히려 믿음을 주었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원하는 건 단 하나, 거인족들에게 노예로 잡혀 있는 이들의 정확한 위치입니다. 굳이 당신들이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구조는 우리가 직접 할 거니까요.”

현성이 담담하게 자신이 이들을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했다.

“정보를 원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대규모 공간 이동 스킬을 가진 플레이어에게도 큰 관심이 있지만, 지금 그런 마음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 말이다.

‘어차피 이들도 구조 대상이야.’

현성의 눈에는 눈앞에 있는 원주민 플레이어들이나 원주민 일반인들이나 동일하게 구조해야 하는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좋습니다. 알려 드리지요.”

반백발의 중년인이 순순히 현성의 요청을 수락했다.

그 와중에 현성과 반백발의 중년인은 통성명도 나눴다.

반백발 중년인의 이름은 로카드.

카이온 가문의 가주이자, 저항군 무리의 수장이었다.

직업은 예상했던 대로 군주였다.

“카, 카이온 가문?”

반백발의 중년인 로카드의 자기소개를 들은 루시아가 화들짝 놀랐다.

‘루시아가 왜 저러지? 혹시 아는 가문인가?’

현성이 의아한 표정으로 루시아를 바라봤다.

루시아의 얼굴은 평소처럼 덤덤하지 않았다.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돌처럼 굳어 있었다.

“루시아, 왜 그래요?”

현성이 루시아에게 물었다.

“잠시 후에 말씀드릴게요.”

루시아의 말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급한 건 새롭게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구조하는 일이었다.

“저희 쪽에서 사람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로카드의 말에 현성도 선선히 동의했다.

현성은 로카드와 함께 임시 구조대를 편성했다.

아군 차원의 플레이어인 현성 일행과 이 차원의 원주민 플레이어인 로카드 일행의 연합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 * *

“식민지에 파견 나가 있던 관리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황제의 말에 제후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누가 이번 일을 마무리 지을 것이냐?”

“비그로푸는 신의 휘하에 있었던 자이옵니다. 하니 신이 직접 나서겠나이다.”

제후들 중 하나가 나섰다.

“오호, 경이 직접 말인가?”

“예, 폐하.”

“하면 믿고 맡기지.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아니 될 것이다.”

“신이 직접 식민지로 내려가 어리석은 반당들을 쓸어버리겠나이다.”

“그리하라.”

황제의 윤허가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본토의 제후이자 제후국의 왕인 제드로스가 직접 자신의 친위군을 이끌고 차원 게이트를 넘어 식민지로 향했다.

* * *

현성 일행과 로카드 일행의 시너지 효과는 상당히 뛰어났다.

현성 일행에게는 힘이 있었지만 정보가 없었다.

제대로 된 지도도 없었고 지형지물에도 어두웠다.

그래서 호루스의 눈이나 탐지 스킬로 거인족들의 거점을 찾아낸 후 노예로 잡힌 사람들이 있는지 일일 확인한 뒤에야 작전을 실행했었다.

반면 로카드 일행은 정보는 있었지만 힘이 없었다.

그 두 집단이 하나로 뭉치자, 노예로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구조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그 결과 현성이 일일이 차원 게이트를 열 필요가 없어졌다.

현성은 그동안 노예로 잡혔던 사람들을 구조하면 일정 규모 이상 될 때까지 모아 뒀다가 차원 게이트를 열어 파르티샤의 차원으로 보냈다.

그 과정에서 소모된 포인트가 한두 푼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구조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 따로 인력을 뺄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 로카드 일행이 그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현성은 부지런히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그런 현성 일행의 도움에 이 차원의 원주민이라고 할 수 있는 로카드 일행 역시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도움을 주기만 하고 원하는 것은 없으니 고마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지구와 파르티샤 차원의 플레이어들은 그들과 다른 차원에 온 플레이어들이었다.

아무런 힘도 없는 다른 차원의 일반인들을 구조하기 위해 자신들이 직접 피를 흘리고 싸운다.

그 모습을 수십 수백 번 목격했다.

실낱같은 희망에 의지하며 버티던 로카드 일행은 현성 일행에 대한 경계를 푸는 것을 넘어서 존경심을 품고 점점 의지하기 시작했다.

그건 로카드 일행의 수장인 로카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카드는 오랜 시간 지속된 절망적인 삶에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하나 자신이 무너지면 집단 전체가 무너진다는 것을 알기에 버티고 또 버틸 수밖에 없었다.

‘행복회로’를 돌려서라도 희망적인 생각을 하고 희망적인 말을 해야 했다.

집단의 리더인 자신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집단 전체가 무너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다.

타 차원에서 건너온 조력자들.

그들은 자신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했다.

특히 그들의 수장인 최현성.

그는 마치 신과 같은 위용을 뽐내며 오랜 시간 자신들을 핍박하고 지배하던 거인족 플레이어들을 너무도 손쉽게 쓸어버렸다.

그리고 강한 건 그들의 수장인 최현성만이 아니었다.

그 휘하 수하들 역시 엄청난 실력을 선보이며 거인족 플레이어들을 거칠게 몰아붙였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아아아악!”

“당장 도망쳐!”

거인족들이 번식장이라고 부르는 곳을 습격했다.

번식장은 거인족 플레이어들이 가장 신경 써서 관리하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로카드와 그 수하들로서는 공격이 불가능했다.

공격해 봐야 아군만 피해를 입을 게 뻔했으니까 말이다.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지켜봐야 한다는 사실에 피눈물을 흘린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현성 일행이 나선 뒤로는 사정이 달라졌다.

서걱! 화르르륵!

번식장을 지키던 거인족들이 무력하게 쓸려 나갔다.

‘그분만 강한 게 아니야.’

로카드는 어느 순간부터 현성을 그분이라고 호칭했다.

‘루시아 님도 엄청나게 강하시다.’

이번 습격의 주력은 루시아였다.

루시아는 검과 방패를 휘두르며 거인족 플레이어들을 순식간에 분쇄해 버렸다.

루시아가 검과 방패를 휘두를 때마다 거인족들의 몸이 종잇장처럼 찢겨져 나가거나 두부처럼 으깨졌다.

‘도대체 레벨이 얼마나 높으시기에…….’

로카드에게 있어서 현성과 루시아는 경외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 둘은 많아 봐야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다.

한데 각성 후 60년 넘게 사냥에 열중해 온 자신보다 월등히 강했다.

물론 로카드도 둘의 나이가 정말 그렇게 어릴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플레이어의 수명이 길고 노화가 느리다고 해도 저 정도 외형이라면 많아 봐야 마흔을 넘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곳은 제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사람들을 구조하세요.”

“알겠습니다.”

루시아의 말에 로카드가 공손히 대답하며 수하들과 함께 구조를 시작했다.

루시아가 아련한 눈빛으로 로카드를 응시했다.

‘카이온 가문의 직계라.’

카이온이라는 이름은 루시아에게 있어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바로 루시아 본인이 카이온 가문의 혈족이었으니까 말이다.

‘자세히 보니 루이와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루이는 루시아의 친동생이자 카이온 가문의 소가주였다.

만약 로카드가 정말 친동생 루이의 직계 자손이라면?

로카드가 루시아의 먼 후손이 된다.

루시아로서는 여러모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조가 끝났습니다.”

로카드의 보고에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철수한다.”

루시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행 전체가 밝은 빛무리에 휩싸였다.

대규모 공간 이동 스킬 보유자 레노엘 덕분이었다.

* * *

“그간 피해가 얼마나 늘어났지?”

제드로스의 물음에 하급 관리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대략 10만에 가까운 병력이 손실되었습니다.”

“노예들의 유출은?”

“80만 명 정도를 잃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급 관리의 보고를 들은 제드로스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고작 2주 사이에 피해가 그 정도로 커졌다는 말이냐?”

비그로푸가 살해당하고 제드로스가 차원 게이트를 넘어 식민지에 발을 들이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2주에 불과했다.

한데 그사이 10만이 넘는 병력을 잃고, 80만이 넘는 노예들을 잃었다니?

“놈들이 워낙 신출귀몰한지라.”

“신출귀몰?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는구나.”

이건 단순히 게릴라전을 펼치는 놈들이 빠르게 치고 빠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아니, 게릴라전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적들은 대놓고 아군 진영을 기습해 노예들을 빼앗아 갔으니까 말이다.

쉽게 말해 소규모 국지전에서 연전연패를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무능한 놈들…….”

제드로스가 싸늘한 시선으로 하급 관리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레벨이 낮은 이들을 우선적으로 보냈다고 해도 멸망한 차원의 원주민들에게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농락을 당하다니…….

“이놈들이 아주 대놓고 움직이는구나.”

제드로스는 그간의 피해 지역을 살펴보며 말했다.

놈들은 마치 진군이라도 하듯 아군이 집중적으로 통제하는 지역을 습격해 노예들을 빼돌리고 있었다.

원주민 플레이어들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아군이 작정하고 대비를 해도 그 대비를 힘으로 깨부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뿌리를 뽑아 주마.’

제드로스가 이를 악물었다.

제후국의 왕인 그의 휘하에는 기라성 같은 수하들이 널려있었다.

그들 중 일부만 보내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수하의 실수로 인한 과오를 완벽하게 뿌리 뽑기 위해 직접 식민지 차원으로 넘어왔다.

‘두 번 다시 이런 짓을 벌일 수 없게 만들어 주마.’

제드로스는 이번 기회에 식민지에서 설치고 다니는 원주민 플레이어들을 모조리 몰살시켜 버릴 작정이었다.

“가자.”

제드로스가 친위대와 함께 적들의 습격 예상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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