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한 차원
“감사합니다, 주군.”
루시아가 공손히 현성에게 고개를 숙였다.
단순히 과거에 했던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고…….
당연한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루시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현성은 이미 안정된 기반을 이뤘다.
그런 상황에서는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에 현성은 그간 다른 침략자 차원을 침공해 점령하기보다는 지구를 지키기 위한 방도를 마련하는 데 몰두했다.
한데 그런 현성이 루시아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직접 나서겠다고 말했다.
루시아로서는 고맙고 또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일단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출발하죠. 마음이 급하겠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현성의 말에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현성은 그동안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수소 마력 폭탄을 비롯한 현대 병기들을 준비했고, 최고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왕과 대영주급 신하들에게도 미리 전투준비를 갖추도록 지시했다.
‘어떤 상황일지는 모르지만, 전처럼 쉽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가장 우선되는 일은 바로 정찰이었다.
‘일단 어떤 상황인지 파악부터 하자.’
최악의 경우 루시아 차원의 인류가 완전히 멸망했을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는 안타깝지만 현성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파르티샤 차원처럼 세력을 모아 버티고 있는 곳이 있다면?
그곳을 기반으로 루시아 차원의 인류를 부흥시켜 줄 수 있었다.
지금의 파르티샤 차원처럼 말이다.
“그럼 차원 게이트를 열겠습니다.”
루시아의 말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아아아악!
차원 게이트가 열렸다.
슈욱!
현성과 루시아가 차원 게이트 안으로 뛰어들었다.
휘이이잉!
현성과 루시아가 도착한 공간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였다.
“일단 수색부터 해 보자고요.”
현성의 말에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성은 창조 등급 탐지 스킬을 발동시켰고, 루시아는 호루스의 눈을 착용하고 수색에 나섰다.
“플레이어입니다.”
루시아가 바로 입을 열었다.
수색을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성과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게요.”
현성 역시 반색했다.
생존자를 찾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데 도착하자마자 바로 생존자를 발견했다.
“거기다 규모도 꽤 큰 것 같습니다.”
대도시급은 아니었다. 하지만 플레이어의 기척만 수천 명 정도가 느껴지는 소도시였다.
현성이 점령한 침략자 차원을 기준으로 하자면, 하급 영지 정도의 규모를 가진 도시를 발견한 것이다.
“일단 가 보죠.”
“네, 주군.”
두 사람은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는 도시를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현성과 루시아는 금방 플레이어들의 도시에 도착했다.
그런 두 사람의 눈에 들어온 것은…….
평균 신장이 5미터에 달하는 거인족들이었다.
“루시아?”
현성의 물음에 루시아가 이를 악물었다.
꽉 쥔 두 손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역시 완전히 점령당해 버린 건가?’
차원 게이트를 넘는 순간 짐작하기는 했다.
안전 결계는 적군 플레이어와 아군 플레이어 모두를 배척한다.
그 때문에 현성 역시 반인반룡들의 차원에서 파르티샤 차원으로 통하는 차원 게이트를 넘지 못했다.
‘루시아 차원에 안전 결계가 유지되고 있었다면, 내가 차원 게이트를 넘을 수 없었겠지.’
루시아 차원의 안전 결계가 소멸했다.
그 말은 차원 전체가 침략자들의 손에 넘어갔다는 뜻이다.
“일단 정보부터 획득해 보죠.”
현성의 말에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성이 은신 스킬을 사용한 상태로 도시 속으로 잠입했다.
‘전체적으로 수준이 그렇게 높지는 않은 것 같은데.’
평균 레벨이 그리 높지 않았다.
대략 700~800레벨 수준.
‘여기에 있는 이들의 실력이 떨어지는 걸 수도 있는 거니까.’
현성이 루시아와 함께 도시를 살피던 도중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저게 뭐야?’
거인족들이 잔뜩 모여 있는 장소에서 인간 두 명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이잖아?’
각성하지 못한 인간 두 명이 거인족 플레이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로에게 무기를 휘두르며 목숨을 건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죽여 버려!”
“파랑, 지면 안 된다! 난 너한테 돈을 걸었단 말이야!”
“빨강, 지지 마! 지면 산 채로 씹어 먹어 버릴 테다!”
잔뜩 흥분한 거인족 플레이어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인간들을 다그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인간들을 마치 투견이나 투계 취급하고 있었다.
‘이게 끝이 아니잖아.’
현성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곳곳에 인간들의 모습이 보였다.
플레이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현성의 눈에 들어온 이들은 아무런 힘도 없는 일반인들이었다.
‘노예로 부리는 거냐?’
거인족들은 인간들을 노예로 부렸다.
단순히 노예로 부리는 게 끝이 아니었다.
식당처럼 보이는 곳에는 인간의 시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마치 정육점에 돼지고기나 소고기가 걸려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식당에서 일하는 거인족 요리사들은 인간의 시체를 이용해 온갖 요리를 했다.
‘미친.’
이건 단순한 노예가 아니었다.
가축이었다.
살아 있을 때 유희와 노동력을 제공하고 죽어서는 자신의 몸까지 식량으로 내어 주는 가축 말이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강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 거인족들을 때려죽이고 그들의 지배하에 가축처럼 길러지는 인간들을 구원해 주고 싶었다.
‘굳이 망설일 필요는 없지.’
도시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거인족 플레이어들의 레벨도 높지 않다.
이 정도 규모의 도시라면?
현성 혼자서도 충분히 점령할 수 있었다.
‘문제는 사람들의 안전인데.’
적들을 쓰러트리는 것과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현성의 무력이라면 이 도시 안에 있는 거인족 플레이어들을 모두 쓸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거인족 플레이어들에게 노예로 부려지고 있는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일단 사람들부터 구출하자.’
거인족들을 쓸어버리는 건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정보가 필요해.’
정보를 뽑아내려면 거인족 플레이어를 납치하는 게 가장 빨랐다.
현성이 조심스럽게 거인족 플레이어에게 접근했다.
“죽여! 죽이라고!”
현성의 목표물이 된 거인족 플레이어는 두 명의 인간이 벌이는 싸움에 심취되어 있었다.
파직!
현성이 흑뢰신마공을 아주 약하게 방출했다.
흑뢰신마공에 적중당한 거인족 플레이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돌처럼 굳어 버렸다.
현성은 그대로 거인족 플레이어를 아공간에 쑤셔 넣었다.
‘저 사람들을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현성이 아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그간 수집해 놓았던 언데드 몬스터 하나를 아공간 밖으로 끄집어냈다.
레드 웜.
화 속성을 가진 벌레 몬스터로 땅속에서 산다.
우드드득!
언데드 레드 웜이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도시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뒤틀리기 시작했다.
땡땡땡!
“몬스터다!”
“전원 전투준비!”
거인족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전투태세를 갖췄다.
당연히 두 명의 인간들이 벌이던 싸움도 중단되었다.
‘몇 놈만 더 잡자.’
현성은 땅속에서 언데드 레드 웜이 날뛰고 있는 틈을 노려 거인족 플레이어들을 몇 명 더 납치했다.
‘이쯤이면 된 거 같은데.’
현성이 언데드 레드 웜을 도시 밖으로 이끌었다.
거인족 플레이어들은 땅속에 있는 언데드 레드 웜을 추격하기는커녕 제대로 된 공격조차 하지 못했다.
‘확실히 수준이 낮아.’
아무리 지형적인 이점이 있다지만, 언데드 레드 웜 따위에게 이렇게 쩔쩔맬 줄은 몰랐다.
‘이런 자들에게 차원을 빼앗긴 건가?’
현성의 입장에서는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같은 차원에 속해 있는 국가들끼리의 전쟁과 모략.
몬스터와의 싸움이 아니라 같은 인간들끼리의 전쟁에서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죽어 나갔다.
그 결과 루시아의 차원은 침략자 차원의 플레이어들이 채 넘어오기도 전에 내전과 몬스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
‘안타깝네.’
인간들끼리 전쟁만 하지 않았다면…….
루시아의 차원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두 구한다.’
전쟁에서 패배한 루시아 차원의 인류는 적군 플레이어들의 노예가 된 듯 보였다.
몰랐다면 몰라도 알면서도 저들을 방치할 생각은 없었다.
* * *
헤어졌던 현성과 루시아가 도시 밖에서 다시 만났다.
“끄으으읍!”
현성과 루시아의 스킬에 제압당한 거인족 플레이어들이 소리를 질러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려고 했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일단 정보부터 캐내죠.”
“제가 하겠습니다.”
루시아의 말에 현성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루시아의 심문이 시작되었다.
진실의 계약 스킬에 걸린 거인족 플레이어들은 루시아 앞에서 절대 거짓을 말할 수 없었다.
거인족 플레이어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진실은 참혹했다.
예상대로 루시아 차원의 국가들은 내전과 몬스터의 침공을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멸망했다.
그 후 안전 결계가 소멸했고, 거인족 플레이어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차원 게이트를 통과해 루시아의 차원에 진입했다.
그 결과 살아남은 루시아 차원의 인류는 거인족 플레이어들의 가축으로 전락했다.
‘처참하구나.’
서로 힘을 합치지 않고 전쟁을 벌인 것은 권력을 쥐고 있던 지배 계층이었다.
하나 그런 지배 계층의 실책으로 인해 피지배 계층까지 모두 피해를 보게 되었다.
‘쉬운 일은 아니야.’
루시아 차원을 점령하고 있는 거인족 플레이어들을 모두 쓸어버린다고 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거인족 플레이어들의 본차원까지 정리해야 온전히 루시아의 차원을 구원할 수 있었다.
‘최대한 빨리 싸움을 끝내려면, 군주 플레이어들을 제압하는 게 최선인데.’
문제는 그런 기회가 쉽게 올 것 같지가 않다는 점이다.
거인족 플레이어들의 본차원은 여러 개의 왕국으로 쪼개져 있는 게 아니었다.
강력한 하나의 초강대국이 두 개의 차원을 통치하고 있었다.
‘지배하고 있는 차원이 루시아 차원 하나뿐이라는 걸 보면 신생 차원인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최소한 현성이 얼마 전 점령했던 침략자 차원 정도의 무력은 지니고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마음 같아서는 인간을 가축처럼 부리고 인육을 먹는 거인족들을 모조리 멸절시켜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진정한 의미의 차원 전쟁을 벌여야 했다.
지구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현성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주군.”
그때 루시아가 현성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 때문이라면 너무 마음을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순히 루시아의 입장만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사실이었다.
오늘 거인족 플레이어들의 도시에서 봤던 장면들은 현성에게도 충격적이었다.
거인족 플레이어들의 작은 유흥을 위해 죽어 나가는 사람들의 모습…….
요리의 재료로 사용되는 사람들의 모습…….
현성은 가축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을 방치할 생각이 없었다.
“루시아의 차원을 다시 되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축만도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죠.”
현성의 말에 루시아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다면?”
“일단 사람들부터 구해 보죠.”
차원 전쟁을 일으켜 거인족들을 멸족시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거인족들의 휘하에서 가축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구하는 일은?
지금 현성과 루시아가 가진 힘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현성의 말을 들은 루시아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주군. 정말 감사합니다.”
“이건 루시아에게 감사받을 일이 아니에요.”
그저 같은 인간으로서 해 줄 수 있는 작은 배려에 불과했다.
차라리 보지 못했으면 모르겠는데, 직접 가축만도 못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의 실상을 목격하고도 외면할 수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차원 전쟁에서 패배했다면 지구가 저런 꼴이 되었을 수도 있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일단 본대가 움직인 건 아닌 것 같으니까, 바로 움직여도 될 것 같아요.”
현성의 말에 루시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루시아의 차원에 진출해 도시를 만들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꾸리고 있는 거인족들은 대부분 그 레벨이 낮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전과 몬스터로 무너진 차원을 점령하는 데 굳이 레벨이 높은 이들을 동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조심해야지.’
루시아의 차원은 식민지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만큼 총책임자와 수뇌부의 경우는 상당히 높은 레벨의 플레이어들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뭐, 두렵거나 무섭지는 않지만…….’
그들이 본대에서 정예 병력을 불러오는 건 현성으로서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일단 사람들 구조에만 신경 쓰자.’
그게 최우선이었다.
“가죠.”
“예, 주군.”
현성과 루시아가 은신 스킬을 사용한 상태로 다시금 거인족들의 도시에 스며들었다.
은신 스킬, 탐지 스킬, 아공간 스킬.
이 세 가지 스킬만으로도 루시아 차원의 사람들을 손쉽게 구해 줄 수 있었다.
‘정말 처참하구나.’
현성은 사람들을 구조하며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열악한 수준을 넘어 처참했다.
마치 돼지우리 같은 숙소.
제대로 된 의복도 지급받지 못한 참담한 모습.
현성은 탐지 스킬로 사람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이동해 구출하기를 반복했다.
그 결과 고작 하루 만에 도시에서 가축처럼 사육되던 사람들을 모두 구출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현성과 루시아에 의해 구출된 이들은 연신 감사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현성은 봤다.
구출된 사람들의 눈빛에 있는 절망을 말이다.
‘차원 전쟁에서 패배한 이상 영원히 도망자 신세가 될 수밖에 없겠지.’
입맛이 씁쓸했다.
“일단 파르티샤의 차원으로 보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현성의 말에 루시아도 동의했다.
이곳에서는 이들을 보호해 줄 수도 없고 의식주를 해결해 줄 수도 없었다.
현성이 차원 게이트를 열어 파르티샤의 차원으로 구조한 사람들을 보냈다.
“더 빨리 움직이죠.”
현성의 말에 루시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더 빠르게 움직일수록 거인족의 지배하에 고통받는 플레이어들을 더 일찍 구원해 줄 수 있었다.
“읍읍!”
자리를 떠나려는 현성과 루시아의 눈에 어젯밤 납치한 거인족 플레이어들이 들어왔다.
죽이지는 않았다.
이들 역시 거인족 군주의 휘하에 있는 이들일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군주도 아니고 평범한 저레벨 플레이어입니다. 아마 죽여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루시아의 말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을 가축처럼 부리고 인육을 먹는 이들이다.
현성의 눈에 거인족 플레이어들은 몬스터와 다를 바가 없는 존재였다.
‘거기다 루시아의 화를 풀어 주는 것도 중요하고.’
겉으로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침착해 보이는 루시아지만…….
두 눈에는 강한 증오와 분노가 잠들어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
이 차원의 인간이 아닌 현성조차도 욕설이 튀어나오고 절로 살의가 일어날 정도로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다.
이 차원이 고향인 루시아의 입장에서는 피가 거꾸로 솟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루시아의 소중한 이들도 이와 같은 삶을 살고 있거나 죽었을 수도 있으니…….’
루시아의 입장에서 거인족들은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나 마찬가지였다.
스르르릉!
루시아가 검을 뽑아 들었다.
“읍읍읍!”
거인족들이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아무런 동요 없이 거인족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었다.
“어?”
하지만 검을 꽂아 넣는 순간, 루시아의 표정이 변했다.
“왜 그래요?”
현성의 물음에 루시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자를 죽이고 업적을 얻었습니다.”
“업적요?”
현성의 표정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업적을 얻다니?
‘최초 업적은 처음 침공한 적군 차원을 갔을 때만 얻을 수 있는 거 아니었나?’
현성은 지금은 시즈라가 다스리고 있는 적군 차원을 점령하며 여러 업적을 얻었다.
단발형 업적으로는 ‘최로로 적 차원을 침공한 자 – 초월 등급’, ‘최초의 반격 – 초월 등급’, ‘최초의 침략 군주 – 초월 등급’, ‘최초로 이계의 침입자 군주 플레이어를 등용한 자 – 초월 등급’, ‘최로로 적 차원을 점령한 자 – 창조 등급’을 얻었다.
연계형 업적으로는 ‘최초의 침략자’, ‘최초로 XXX레벨 이상 차이 나는 이계의 침입자 군주 플레이어를 등용한 자’, ‘적 플레이어 사냥꾼’, ‘최초의 차원 전쟁에서 승리한 자’를 얻었다.
사실상 침략자 입장에서 차원 전쟁을 하며 얻을 수 있는 업적은 다 얻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반인반룡의 차원에 갔을 때 업적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한데 또 업적을 주다니?
“직접 확인하시지요.”
루시아의 말에 현성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파지지직!
흑뢰신마공이 작렬했고 거인족 플레이어 하나가 목숨을 잃었다.
그 순간 현성의 눈앞에서 새로운 업적 메시지가 줄줄이 떠올랐다.
[믿을 수 없는 업적 – 일반 등급]
-두 번째로 100레벨 이상 차이 나는 적 차원의 플레이어를 쓰러트리셨습니다.
-업적 보상 : 칭호 [두 번째 침략자 – 일반 등급]
……후략……
[믿을 수 없는 업적 – 전설 등급]
-두 번째로 400레벨 이상 차이 나는 적 차원의 플레이어를 쓰러트리셨습니다.
-업적 보상 : 칭호 [두 번째 침략자 - 전설 등급]
“어?”
정말로 업적이 나왔다.
“이건 연계형 업적이잖아.”
그것도 이미 받았던 최초 업적인 최초의 침략자와 동일했다.
그저 최초라는 단어가 두 번째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원래 업적은 최초가 끝 아닌가?’
아무리 연계형이라고 해도 최초가 아니라 두 번째라는 이름으로 업적을 준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더 치열하게 싸우기를 원하는 건가?’
현성은 첫 번째 차원 전쟁에서 승리했다.
아마 현성처럼 첫 번째 차원 전쟁이 끝나고 현실에 안주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미 얻을 것은 다 얻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두 번째가 있다면 세 번째, 네 번째도 있을 확률이 높아.’
시스템은 현성이 더 많은 적군 차원을 침략해 정복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최초의 침략자가 두 번째 침략자라는 이름으로 연계형 업적을 얻었어. 그렇다면?’
아마 최초로 XXX레벨 이상 차이 나는 이계의 침입자 군주 플레이어를 등용한 자, 적 플레이어 사냥꾼, 최초의 차원 전쟁에서 승리한 자 같은 다른 연계형 업적 역시 이곳에서 얻을 수 있을 확률이 높았다.
‘안주한다고 끝이 아니구나.’
안주하면 오히려 퇴보할 뿐이다.
다른 이들은 적극적인 침략 전쟁을 벌여 꾸준히 자신의 힘을 키워 나갈 게 분명했으니까 말이다.
‘더 독해져야 한다는 건가?’
강해지기 위해서, 더 안전해지기 위해서는 더 적극적으로 침략 전쟁에 참여해야 했다.
현성의 입장에서는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하자.’
아무리 업적이라는 보상을 준다고 해도 괜히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적군 차원을 침공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적군 차원의 플레이어들과 다를 바 없는 잔인한 짓이었다.
하지만…….
먼저 아군 차원을 침공하고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가축 취급하는 적군 차원의 플레이어들까지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현성은 복잡한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웠다.
지금은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다만 한 가지 변경된 점이 있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억지로 충돌을 피할 생각이 사라졌다.
아무런 부담 없이 거인족 플레이어들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망설이지 않고 제거할 것이다.
현성과 루시아가 다음 목적지를 향해 이동했다.
* * *
“노예들이 자꾸 사라진다고?”
옥좌에 앉은 거인족 플레이어가 얼굴을 찌푸렸다.
“예, 주군, 벌써 당한 도시가 한둘이 아닙니다.”
“벌레들이 다시 발악을 시작한 건가?”
옥좌에 앉은 거인족 플레이어가 얼굴을 찌푸렸다.
손쉽게 손에 넣은 차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각성을 하지 못한 일반인들은 손쉽게 사냥이 가능했다.
도주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거인족의 보호 없이 도시 밖으로 나가면 무시무시한 몬스터들이 일반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각성을 한 플레이어들은 사정이 달랐다.
이 차원의 원주민.
그들 중 각성을 한 플레이어들의 수준은 꽤 높았다.
차원을 빼앗긴 후에도 질긴 삶을 보존하고 있을 정도로 말이다.
“노예들을 모아서 이곳으로 후송해라.”
“예? 그럼 노예를 지키기가 더 힘들어집니다.”
“걱정할 필요 없다. 후송 행렬에 내 휘하의 플레이어를 한 명씩 포함시킬 테니까.”
“알겠습니다.”
쉽게 말해서 함정이었다.
벌레들이 노예들을 구하기 위해 공격에 나서면?
자신이 직접 휘하 신하들을 이끌고 벌레들을 박멸할 작정이었다.
* * *
현성과 루시아는 수많은 거인족의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순회공연을 했다.
그 결과 거인족들의 지배하에 신음하던 수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현성은 몇몇 거인족들을 제거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아.’
구조 과정에서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참혹한 광경을 여러 번 목격했다.
가장 최악의 구조 장소는 일명 번식장이었다.
구조는 지구에서 소나 돼지를 번식시키는 번식장과 똑같았다.
번식장에서는 발정제를 이용해 강제로 인간들을 ‘생산’했다.
그것도 식용, 애완용, 연구용을 구별해서 말이다.
번식장을 때려 부수고 그곳을 관리하던 거인족 플레이어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하지만 쉽게 화가 풀리지 않았다.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겠어요.”
현성의 말에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조를 빠르게 하기 위해 현성은 지구와 파르티샤 차원에 있는 휘하 신하들까지 동원한 상태였다.
마음 같아서는 침략자 차원의 휘하 신하들까지 동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놈들은 언제 배신할지 몰라.’
그렇지 않아도 시즈라의 대대적인 개혁에 이를 박박 갈고 있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시즈라가 지배하는 차원에서 휘하에서 이탈한다면 충분히 자체적으로 처리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런 짓을 벌인다면?
거인족들에게 붙어 버리기라도 한다면?
현성의 정체가 탄로 날 위험이 있었다.
‘역시 애매해.’
절대적인 복종을 바치는 플레이어들은 실력이 떨어진다.
실력이 뛰어난 이들은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른다.
그런 이유로 결국 현성은 지구와 파르티샤 차원의 휘하 신하들만 뽑아서 동원했다.
루시아와 외형적으로 동일한, 같은 종의 인류이기에 굳이 변신 아이템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문제는 실력이었다.
거인족들의 평균 레벨이 600~700대라고는 하지만, 높은 경우는 종종 1000레벨을 넘어섰다.
지구나 파르티샤 차원의 플레이어들 중에서 그들을 압도할 만한 실력을 지닌 이들은 랭커밖에 없었다.
그래서 현성은 랭커들의 지원을 받아 별도의 구조대를 구성해 활용하고 있었다.
‘게릴라 조직의 짓이라고 생각해서 편하기는 한데.’
그동안 현성과 휘하 신하들은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곳에서 움직이며 더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
그 결과 거인족들의 상부가 자신들을 루시아 차원의 원주민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전원 다 구조 가능할 때까지 이 상황이 유지되면 좋을 텐데.’
경계가 강화되기는 했지만 지금까지는 나름 할 만했다.
하지만 거인족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추가적인 대책을 마련할 게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