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령술사 시즈라
‘성공했다.’
현성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파르티샤가 제안한 계획.
그건 바로 언데드 거인을 다른 적군 차원으로 넘겨 버리는 것이었다.
‘다행이다.’
솔직히 말해 현성이 차원 게이트를 열 수 있는 차원은 얼마 되지 않는다.
특히 그중에서도 포인트가 그리 많이 들지 않는 차원은 더 드물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아군 차원이 아닌 적군 차원은 이곳이 유일했다.
‘포인트가 많이 들지 않아서 다행이야.’
현성이 차원 게이트를 열 수 있는 차원은 직접 가 본 차원이나 좌표를 알고 있는 차원으로 제한된다.
현성이 좌표를 알고 있는 차원은?
사실상 없다.
그나마 알고 있는 차원은 과거 근거리 통신망을 판매할 때 갔던 아군 차원밖에 없었다.
이에 현성은 파르티샤의 차원으로 넘어갔다.
그 후 파르티샤의 차원에 있는 차원 게이트를 넘어 파르티샤의 차원을 침공하고 있는 적군 차원으로 넘어가 그곳의 좌표를 확인했다.
다행히 차원 게이트를 여는 데 그리 많은 포인트를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아, 물론 차원 게이트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는 포인트는 없었다.
그저 잠깐 오픈할 수 있을 정도의 포인트만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언데드 거인이 제대로 반응을 해 줘서 다행이야.’
언데드 거인이 차원 게이트 앞에서 몸을 돌렸을 때는 그대로 실패하는 줄 알았다.
한데 갑자기 언데드 거인이 마음을 바꿔 먹고 적극적으로 현성을 쫓아왔다.
그 덕분에 차원 게이트를 유지할 포인트가 완전히 바닥나기 전에 언데드 거인과 함께 적군 차원으로 넘어올 수 있었다.
‘문제는 돌아가는 건데.’
처음에는 파르티샤의 차원과 연결된 차원 게이트를 타고 복귀하려고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안전 결계가 현성을 아군 차원의 강력한 존재로 인지하고 접근을 거부한 것이다.
아군이기에 그런 건지, 적군 차원의 플레이어처럼 차원의 미아가 되는 위기는 없었다.
그냥 튕겨져 나왔다.
하지만 기존에 열려 있는 차원 게이트를 통해 파르티샤 차원으로 이동하는 계획은 완전히 무산되어 버렸다.
‘골치가 아프네. 뭐가 이렇게 까다로워.’
파르티샤 차원의 안전 결계는 아군인 현성이 파르티샤 차원에서 적군 차원으로 넘어가는 건 허용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오는 건 허용하지 않았다.
‘남은 방법은 포인트를 모아 내가 직접 차원 게이트를 오픈하는 것뿐인데.’
문제는 포인트가 없다는 점이었다.
지금 현성은 차원 게이트를 오픈할 포인트는커녕 당장 젊음을 유지할 포인트도 간당간당했다.
‘차원 게이트를 새롭게 열 수 있을 정도의 포인트가 쌓이기 전까지는 꼼짝없이 이곳에 갇혀 버린 셈이네. 그래도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현성이 올린 물품들은 빠르게 팔려 나갔고, 교류의 보석을 통해 수급되는 포인트도 상당했다.
그러니 영원히 적군 차원에 갇힐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거리도 적당히 벌려 놨고.’
현재 현성에게 가장 위험한 적은 바로 함께 차원 게이트를 넘은 언데드 거인이었다.
‘저놈이 다시 차원 게이트를 넘으면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럴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아.’
지구의 안전 결계가 많이 약해진 것과 달리 파르티샤 차원의 안전 결계는 아직 쌩쌩했다.
아군인 현성의 접근조차 불허할 정도로 말이다.
안전 결계는 본차원의 원주민만을 전력으로 인정한다.
거기다 현성은 파르티샤의 신하가 아니라 주군이다.
그렇기에 현성이 가진 힘과 세력이 파르티샤의 차원이 가진 힘으로 인지되지 않았다.
그 결과 파르티샤 차원의 안전 결계는 상당히 굳건했다.
적군 차원의 침략자들이 고작해야 한 자릿수 규모로밖에 침공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안전 결계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 한 언데드 거인이 차원 게이트를 넘어 파르티샤의 차원을 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조금만 버티자. 포인트를 모아 무사히 돌아가기만 하면 끝이야.’
저런 규격 외의 존재를 풀어놨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하지만 파르티샤의 차원을 침공한 이곳 역시 현성의 적이었다.
또 언데드 거인 또한 현성의 적이었다.
‘이이제이라고 생각하자.’
현성은 은신 스킬을 사용한 상태로 멀리서 언데드 거인의 행보를 지켜보았다.
-그오오오오!
언데드 거인은 본능에 따라 주변의 생명체들을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가장 먼저 숲의 동식물들이 생기를 잃었고 몬스터들이 언데드 거인의 희생양이 되었다.
‘플레이어다.’
그때 이 차원의 플레이어가 등장했다.
‘반인반룡이다.’
현성은 파르티샤의 차원을 침공해 온 반인반룡들을 쓰러트린 적이 있었다.
저들은 역시 그때 현성이 쓰러트린 반인반룡과 같은 종으로 보였다.
‘이 차원은 반인반룡들이 지배하고 있는 건가?’
생김새는 약간 달랐다.
하지만 반인반룡이라는 건 동일했다.
-크어어어어어!
반인반룡들을 발견한 언데드 거인이 곧바로 공격을 가했다.
반인반룡들은 언데드 거인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관찰하더니 그대로 꽁무니를 뺐다.
‘도망친 건가?’
현성은 솔직히 놀랐다.
언데드 거인의 속도는 왕과 대군주 들이 아니면 쉽게 회피하기 힘들 정도로 뛰어나다.
한데 반인반룡들은 비록 거리가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해도 언데드 거인의 추격을 너무 손쉽게 따돌렸다.
‘평균 레벨이 꽤 높다.’
어쩌면 현성이 차원 게이트를 열고 도착한 곳이 이 차원의 고레벨 플레이어들이 몰려 사는 곳일 수도 있다.
‘거리가 멀어서 레벨 파악이 안 되는 게 아쉽네.’
창조 등급 액티브 탐지 스킬을 사용했다면?
반인반룡들의 대략적인 수준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가는 은신 스킬이 해제되어 버린다.
현성은 홀로 적진으로 떨어진 상태.
괜한 짓으로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계속해서 시간이 흘렀다.
현성은 멀리서 언데드 거인의 행동을 감시했다.
‘꽤 유기적으로 움직이네.’
반인반룡들은 언데드 거인의 시선을 잘 끌었다.
중간중간 몬스터까지 먹잇감으로 던져 주며 언데드 거인을 한곳에 잘 묶어 놨다.
자신들의 도시로 언데드 거인이 향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저런다고 해결책이 생기는 건 아닌데.’
언데드 거인이 던져 주는 몬스터로 만족하지 못하는 순간.
반인반룡들의 도시는 엄청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차원 게이트를 열 수 있을 만한 포인트가 슬슬 모여 갔다.
‘지구로 가거나 침략자 차원으로 가는 건 무리지만 가장 가까운 파르티샤 차원으로 이동하는 건 가능해.’
파르티샤 차원으로 이동하면?
지금처럼 은신 스킬을 사용한 채로 숨어 다닐 필요가 없었다.
‘어?’
그때 멀리서 막대한 마력의 유동이 느껴졌다.
‘뭐야?’
이건 격이 달랐다.
현성의 능력으로는 마력의 한계를 제대로 측량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언데드 거인조차도 이 정도로 강력한 마력을 뿜어내지는 못했다.
-콰콰콰콰콰콰!
멀리서 한 줄기의 화염이 날아왔다.
퍼어어어엉!
그리고 정확하게 언데드 거인의 몸에 적중했다.
‘이럴 수가?’
현성은 자신의 두 눈으로 본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한 방에?’
초월적인 힘을 가진 언데드 거인이…….
현성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규격 외의 존재가…….
멀리서 날아온 화염 줄기 한 방에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화르르르륵!
화염이 언데드 거인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언데드들을 불태웠다.
아니, 그 존재 자체를 말끔하게 소멸시켜 버렸다.
푸스스스!
언데드 거인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언데드들이 무너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하나로 뭉쳐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언데드 거인이 다시금 본래의 언데드 무리로 되돌아갔다.
“죽여라!”
“박멸해!”
언데드 거인이 언데드 군단으로 격하된 순간.
수만에 달하는 반인반룡들이 언데드 군단을 습격했다.
언데드 군단은 너무도 허무하게 박살 났다.
아무리 언데드 거인에서 언데드 군단으로 격하되었다고 해도 그 구성원 중에는 침략자 차원의 왕과 대영주 들이 있었다.
한데 그들이 반인반룡들의 합공에 너무도 허무하게 무너져 갔다.
‘엄청나게 강하다.’
현성은 차원의 격이라는 걸 느꼈다.
‘적군 차원이라고 다 비슷한 수준의 무력을 가진 게 아니었어.’
지구를 침략해 오던 적군 차원의 무력은?
지구보다는 강했다.
하지만 현성이 꾸준히 성장해서 반대로 집어삼킬 정도는 되었다.
그렇지만 이곳은 그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운이 좋았어.’
현성이 처음 역침공을 준비했던 차원이 이곳이었다면?
현성이 불귀의 객이 되어 버렸을 확률이 높았다.
특히 언데드 거인을 공격 한 방으로 박살 내 버린, 어마어마한 마력을 가진 이의 수준은?
현성의 수준으로는 감히 예측조차 하기 힘들었다.
‘멀리서 공격 한 방만 날려서 다행이네.’
가까이 와서 언데드 거인과 드잡이질을 했다면?
뒤처리를 수하들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나섰다면?
현성의 존재가 발각될 수도 있었다.
‘일단 몸을 피하자.’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 포인트를 모으고 파르티샤 차원으로 떠나야 했다.
재수 없게 언데드 거인을 한 방에 박살 내 버린 이를 마주하기라도 한다면?
현성은 100% 죽은 목숨이었다.
‘어?’
조심스럽게 몸을 피하던 현성의 눈에 한 언데드가 들어왔다.
‘저건?’
확실했다.
수만 언데드의 모체가 되었던 존재.
사령술사.
그녀가 휘하 언데드들을 반인반룡들의 먹잇감으로 던져 주며 필사적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저걸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지.’
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에서 드잡이질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현성까지 위험했다.
현성은 조용히 사령술사를 미행했다.
사령술사는 필사적이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사령술사는 반인반룡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겨우 몸을 피할 수 있었다.
하나 그 결과 몸은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투둑!
겉으로나마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던 사령술사의 몸이 움직일 때마다 부스러졌다.
마력은 바닥을 기고 있었다.
털썩!
사령술사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아아아악!
그러더니 주변에 있는 생명체들의 생기를 흡수해 마력을 보충했다.
“거기까지.”
그때 현성이 은신 스킬을 해제하고 사령술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넌?”
사령술사 소스라치게 놀라며 현성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로 약해졌다면 차원 게이트를 넘을 가능성도 있겠네. 확실히 살려 둘 수 없겠어.”
현성이 사령술사를 노려보며 용혈검을 뽑아 들었다.
사령술사는 약해졌다.
파르티샤 차원으로 넘어갈 수 있는 차원 게이트를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솔직히 말해 사령술사가 이 차원에서 진상을 피우겠다면 그걸 말릴 생각은 없었다.
‘뭐, 진상을 피워 봐야 금방 제압당하겠지만.’
그보다 현성이 걱정하는 건 사령술사가 차원 게이트를 통해 파르티샤의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파르티샤의 차원에서 힘을 키워 다시 날뛰기 시작한다면?
그건 엄청난 문제였다.
“잠깐! 내 이야기를 들어 줘! 난 해야 할 일이…….”
서걱!
사령술사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현성의 손에 들린 용혈검이 휘둘러졌다.
사령술사의 머리가 몸통과 분리되었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
이런 사정 저런 사정 다 봐주다 보면 적들을 상대로 현성의 소중한 이들을 지킬 수 없다.
화르르륵!
현성의 손에서 화염의 서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사령술사의 몸을 말끔하게 불태웠다.
“어?”
그때였다.
현성의 눈에 기이한 물건이 포착되었다.
‘이게 뭐지?’
사령술사의 육체는 한 줌의 재가 되었다.
한데 그 재 한가운데서 무언가가 화염의 서에 대항해 기이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현성은 화염을 제거했다.
그리고 기이한 빛을 발하는 물건을 집어 들었다.
‘아이템?’
언데드는 아이템을 남기지 않는다.
그건 사령술사라도 마찬가지여야 했다.
한데 무언가가 남았다.
‘이게 뭐야?’
아이템이면 정보가 떠야 했다.
한데 아무런 정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망자의 혼이 느껴질 뿐.
마치 사령술사의 영혼이 이 안에 잠들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 * *
“아, 별것도 아닌 걸로 괜히 시간만 낭비했네.”
방금 전.
화염 브레스 한 방으로 휘하 신하들이 징징거리며 이야기했던 언데드 거인을 해치운 장본인.
붉은빛 비늘을 지닌 반인반룡이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잘 키우고 있었냐?”
붉은빛 비늘을 지닌 반인반룡이 황금빛 비늘을 지닌 반인반룡에게 물었다.
“예, 주군.”
놀라운 멀티태스킹으로 두 개의 마우스와 키보드를 이용해 두 개의 컴퓨터에서 동시에 캐릭터를 컨트롤하며 게임을 하던 황금빛 비늘을 가진 반인반룡이 붉은빛 비늘을 지닌 반인반룡의 물음에 재빨리 대답했다.
“음, 그래. 수고했다. 비켜 봐.”
붉은빛 비늘을 지닌 반인반룡의 말에 황금빛 비늘을 가진 반인반룡이 자신이 사용하던 두 대의 컴퓨터 중 한 대를 넘겼다.
“얼른 레벨을 올려서 검은 사자 놈들을 박살 내 줘야지.”
붉은빛 비늘을 지닌 반인반룡이 이를 뿌득뿌득 갈면서 마우스를 움켜쥐었다.
“다들 사냥에 최선을 다해라! 레벨을 올려서 다음 쟁에서는 꼭 검은 사자 놈들을 박살 내야 한다! 알겠냐!”
붉은빛 비늘을 지닌 반인반룡의 외침에…….
“예! 알겠습니다!”
마치 PC방 같은 구조의 방에서 게임에 열중하던 각양각색의 반인반룡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 * *
‘이게 뭐지?’
현성이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망자의 혼이 느껴지는 구슬을 바라보았다.
‘설마?’
언데드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전투력이 높은 개체도 있고 낮은 개체도 있으며 생전의 지성을 유지하고 있는 개체도 있고 유지하지 못하는 개체도 있다.
‘사령술사는 자신의 자아를 확실하게 가지고 있었어.’
거기다 지능도 높았다.
혹시 그럴 수 있었던 이유가 이 구슬 덕이었을까?
현성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구슬을 챙겨 들었다.
‘여기서 확인하기는 너무 위험해.’
현성은 일단 구슬을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일단 돌아가서 확인하자.’
구슬에 대한 테스트는 파르티샤의 차원으로 돌아갈 수 있는 포인트를 모은 후 해도 충분했다.
‘드디어 다 모았어.’
현성이 감격한 표정으로 남아 있는 포인트를 확인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냥도 하지 않고 인적이 없는 드문 곳에 콕 처박혀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푹 쉬기는 했네.’
아공간에 온갖 종류의 식량, 스마트폰, 노트북 등이 있어서 심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언데드 거인을 한 방에 날려 버린 규격 외의 존재에 대한 걱정 때문에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그 규격 외의 존재가 자신이 판매한 게임에 열중하느라 두문불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마음 편하게 쉬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현성은 언제 그 규격 외의 존재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마음을 졸이며 은둔 생활을 했다.
‘이제 그것도 다 끝이야.’
현성이 파르티샤의 차원으로 향하는 차원 게이트를 열었다.
슈욱!
그리고 차원 게이트를 통과했다.
* * *
‘좋다!’
현성은 오래간만에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그고 편안한 휴식을 취했다.
파르티샤의 차원은 지구보다는 모든 게 부족했다.
하지만 마음 편히 쉴 수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 모든 단점이 만회되는 기분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잠까지 푹 잔 현성이 아공간에서 구슬을 꺼냈다.
‘한번 정체를 밝혀 보자.’
구슬은 망자의 혼을 품고 있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력 역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 마력부터.’
현성이 구슬에 자신의 마력을 불어 넣었다.
꽤 많은 마력을 주입했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현성은 계속해서 마력을 불어 넣었다.
일반적인 물건에 이렇게 마력을 불어 넣으면 파괴되거나 마력을 주입받지 못하고 흘려보낸다.
하지만 이 구슬은 마력을 보내는 족족 흡수해 버렸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
현성은 직접 몬스터를 잡아 마력을 보충하고 그렇게 보충한 마력을 구슬에 주입했다.
그 결과.
사아아아악!
구슬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뿜어져 나온 검은 기운이 서서히 형체를 갖췄다.
‘사령술사.’
현성의 얼굴이 환해졌다.
검은 기운은 현성의 손에 죽었던 사령술사의 형상을 가진 언데드로 재탄생했다.
‘부활 수단까지 가지고 있었단 말이지.’
현성이 구슬을 회수하지 않았다면?
사령술사가 스스로 부활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물론 엄청난 운이 따라 줘야 했겠지만 말이다.
“이게 무슨?”
되살아난 사령술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구슬을 들고 있는 현성을 본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시 만났네.”
현성의 인사에 사령술사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더니 마력을 끌어모아 현성에게 공격을 날렸다.
퍼엉!
현성이 얼떨결에 들고 있던 구슬로 사령술사의 공격을 막아 냈다.
“크아아아악!”
사령술사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풀썩 쓰러졌다.
“어라?”
현성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언데드가 고통을 느끼지?’
언데드는 이미 죽은 시체.
그렇기에 고통을 느끼고 싶어도 느낄 수가 없다.
현성이 자신의 손에 있는 구슬에 정신을 집중했다.
사령술사와 구슬 사이에 마력의 끈이 이어져 있었다.
‘이쪽이 본체구나.’
언데드의 몸으로 부활한 사령술사의 몸은 껍데기일 뿐이다.
진짜 사령술사의 본체는 바로 망자의 혼을 품고 있는 이 구슬이었다.
‘그럼 자기 몸이 자기 영혼을 공격한 셈이네.’
영혼이 고통을 느끼는지에 대해서는 현성도 알고 있는 지식이 없었다.
한데 이렇게 보니 느끼는 모양이다.
“네, 네놈이…….”
사령술사가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현성을 노려봤다.
현성이 살며시 구슬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우드득!
구슬이 뒤틀리며 작은 금이 갔다.
“아아아악!”
그 순간 사령술사가 다시금 바닥에 쓰러져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해 냈다.
“오호.”
현성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맺혔다.
“좋은 걸 얻었네.”
일인군단이라고 불려도 이상할 게 없는 강력한 무력을 선보였던 사령술사.
그 사령술사의 목숨 줄이 현성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크윽! 왜 나를 부활시킨 것이냐! 조롱할 목적이었다면 당장 나를 소멸시켜라!”
“아니, 조롱할 목적은 아니었어. 그냥 잠깐 테스트를 해 본 것뿐이니까 화내지 말라고.”
현성의 말에 사령술사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사령술사의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자살?
현성은 사령술사의 라이프 포스 베슬을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해 사령술사가 현재 언데드의 육체를 파괴해도 현성이 얼마든지 임의로 부활시킬 수 있는 것이다.
‘평생 조롱당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소멸하는 게 더 나았다.
사아아아악!
사령술사가 마력을 전부 끌어 올렸다.
목적은 단 하나.
현성의 손에 들린 자신의 라이프 포스 베슬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음?”
하지만 현성이 손에 든 구슬에 힘을 주는 순간.
“크아아아악!”
참기 힘든 고통이 엄습했다.
육체의 고통이었다면 억지로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영혼의 고통이었다.
영혼이 부서지는 고통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정신이 무너지고 의지가 박살 나며 마력이 흩어진다.
털썩!
결국 사령술사가 다시금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괜한 반항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은데?”
현성의 말에 사령술사가 할 말을 잃었다.
죽음을 통해 군주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한데 언데드가 된 상태에서도 군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죽여라.”
그 말과 함께 사령술사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두 눈을 꾹 감았다.
사형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보이는 사령술사의 모습에 현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왜 그런 짓을 벌였는지 알고 싶은데?”
“전에는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목을 날려 버렸던 것 같은데?”
사령술사가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뭐, 그때랑은 상황이 다르니까.”
놓치면 큰 위협이 될 적과 완벽하게 제어가 가능한 적은 사정이 달랐다.
“이야기해 줄 생각이 있나?”
현성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던 사령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플레이어로 각성했고 군주의 휘하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군주가 쓰레기였다.
그 군주 휘하에서 상상도 하기 힘든 고초를 겪었다.
군주의 명령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죄 없는 이들을 죽였다.
그 죄 없는 이들 중에는 사령술사의 소중한 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의 정신이 오염되는 것을 느끼고 언데드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그 후 군주에게 복수를 하고 시즈라 왕국을 건국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재수가 없었네.’
일정 부분 공감은 했다.
하지만 사령술사의 정신이 어딘가 비틀렸다는 느낌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냥 충성 명세를 철회하지 그랬어.”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정신이 오염된 상태였다. 군주의 명령에 따르는 인형이 된 것처럼 말이다.”
“자살할 정도의 의지면 충성 맹세 철회도 가능했을 것 같은데?”
“…….”
현성의 물음에 사령술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뭐, 알았어. 어쨌든 스스로 언데드가 되어 복수를 했고 너같이 군주에게 억압된 플레이어들의 자유를 위해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거지?”
“그렇다.”
“음.”
현성이 침음을 터트렸다.
군주와 신하의 관계는 절대적이다.
하지만 의외로 약한 고리가 꽤 있었다.
‘이 차원의 특이성과 엮여서 역효과가 일어난 게 커.’
극도의 신분제가 자리한 사회.
노예 취급을 받는 일반인들이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회.
‘뭐, 지구에서도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에 대격변이 일어났으면 상황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겠지.’
시즈라의 생각에 일정 부분 공감하는 부분은 있다.
하지만 완전히 공감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현성 역시도 군주 플레이어였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모든 힘이 그렇지.’
권력, 무력, 재력.
이 셋 모두 한 사람의 인생을 뒤바꾸고 생각을 비틀어 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자가 힘을 쥐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현성의 경우도 군주의 힘을 이용해 강제로 지배하는 이가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중국의 시황제 말똥이었다.
하지만 다른 현성 휘하의 플레이어들은 상당히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현성은 굳이 휘하 플레이어들에게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일을 강요하지 않았다.
‘좋은 세상에서 군주를 만났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을…….’
절대적인 신분제가 자리한 세상에서 쓰레기 같은 군주를 만나 정신이 뒤틀려 버렸다.
그러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해서 사령술사가 행한 죄악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일으킨 전쟁에 영문도 모르고 죽어 나간 플레이어와 일반인이 몇이던가?
‘뭐, 통일 전쟁을 일으킨 내가 할 생각은 아니지만.’
현성 역시 시즈라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현성과 시즈라가 다른 점이 있다면 패자가 아닌 승자라는 것이었다.
“기회를 주지.”
“뭐?”
“내가 정한 범위 안에서 네 의지와 생각대로 대륙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겠다.”
“그게 무슨?”
사령술사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라이프 포스 베슬을 이용해 강제로 자신을 부리거나 죽일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대륙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겠다니?
“사실 세상에 이상향 같은 건 없어.”
군주 직업을 가진 플레이어가 모두 사라진다고 평화로운 세상이 올까?
절대 아니었다.
이 차원의 지배자였던 군주 직업이 사라지면 새로운 지배자가 등장할 뿐이다.
세상의 이치가 원래 그렇다.
한국은 평등한 신분과 기회가 보장되는 세상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조선 시대에 존재했던 왕과 양반이라는 권력자는 사라졌다.
하지만 현대 한국 사회는 다른 이름의 권력자들이 자리하고 있다.
신분제가 사라졌다.
하지만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라는 보이지 않는 신분이 남아 있다.
‘어차피 인간이라는 종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탈피할 수 없는 문제야.’
그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다.
전에는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노비는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었다.
벼슬길은커녕 글을 배울 수조차 없었고 한번 노비는 영원한 노비로 살아야 했다.
왕은 왕족만 될 수 있었고, 벼슬길은 양반들만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일단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고 누구나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또는 사업가가 될 수 있다.
물론 어디까지니 이론상일 뿐이다.
완벽하지는 않았다.
보이지 않는 신분의 벽과 차별이 여전히 산재해 있다.
하지만…….
‘점점 나아질 거야.’
이상향 따위는 없다.
하지만 그 이상향에 가까워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간들이 있다.
‘뭐, 각각의 개인이 생각하는 이상향의 방향은 다르겠지만.’
그건 이상향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저 현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자신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이 차원의 인류에게 공평한 기회를 쥐여 주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