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 승부
“그게 무슨 헛소리냐?”
트베레오는 순간 자신의 수하가 정신이 나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반란이라니?
그건 현실적으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아군 플레이어들은 모두 군주의 통제를 받고 있다.
물론 각각 섬기는 군주는 다르다.
하지만 그 군주들은 모두 세키라 대영주의 신하였다.
군주이자 신하인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 리가 없지 않은가?
아, 물론 가능한 경우는 있다.
바로 신하의 힘이 군주와 대등해지거나 넘어설 때였다.
사실 현재 그라도 왕국 내부에서 대영주들의 충돌이 자주 일어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왕은 고작해야 대영주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자에 불과했다.
왕이 명령을 내려도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게 아니라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복종하는 시늉만 했다.
만약 왕과 대영주가 가진 힘의 차이가 절대적이었다면?
대영주들은 섣불리 세력을 키우겠다고 전쟁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에 대영주들 간의 분쟁이 자주 일어났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왕과 대영주들의 사정이 그렇다는 것이다.
대영주와 하급 영주가 가진 힘의 차이는 절대적이었다.
대영주가 지시를 내리면 하급 영주는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다.
“저, 정말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수하의 말에 트베레오가 막사 밖으로 나갔다.
“이게 무슨?”
막사 밖은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그와 함께 도망치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또 서로 싸우던 놈들이 갑자기 싸움을 멈추고 함께 도망치기도 했다.
트베레오는 정신이 멍해졌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때 하급 영지에서 징발해 온 플레이어 하나가 트베레오 앞에 무릎을 꿇었다.
“크, 큰일입니다! 제가 모시던 주군께서 적에게 살해당하셨습니다!”
“뭐?”
“새로운 군주가 군주의 외침을 통해 아군 진영을 탈출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저는 그 명령을 거부하고 등용을 철회했지만…….”
그건 그의 스텟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다.
스텟이 평범하거나 낮은 플레이어들은?
등용을 철회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새롭게 모시게 된 군주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이 개자식이!”
트베레오는 드디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차렸다.
이 미친 부랑자 놈이 감히 세키라 대영주님의 영토를 침략해 분탕질을 친 것이다.
하급 영주들이 죽은 이상 그들은 아군이 아니라 적이었다.
“아군 진영을 이탈하려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라! 그들은 더 이상 우리의 아군이 아니라 적이다!”
“예! 주군!”
트베레오의 명령을 받은 세키라 대영주의 직속 병력이 투입되었다.
그와 함께 아군 진형을 이탈하려는 플레이어들을 무차별하게 학살했다.
하지만 이게 실수였다.
사실 현성의 지시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플레이어들의 수는 많아 봐야 절반을 넘기 힘들었다.
강단 있게 등용을 철회한 이들은 극소수였다.
즉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만약 현성이 그들에게 칼을 거꾸로 쥐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등용을 철회하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한데 현성은 칼을 거꾸로 쥐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저 진영을 벗어나 고향으로 복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큰 부담이 없는 명령인 것이다.
플레이어들 중에는 출세욕 강한 이들도 있지만 큰 욕심 없이 현재 주어진 삶에 만족하고 사는 이들도 있다.
이번 징집과 전쟁은 그들이 원해서 벌어진 게 아니었다.
거기다 고향이 다른 군주의 손에 들어갔다.
플레이어들 입장에서는 일단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을 챙기는 게 최우선이었다.
그 후 전황을 보고 이대로 잔류할지 등용을 철회하고 새로운 군주를 모실지 결정하면 된다.
한데 트베레오의 명령으로 인해서 상황이 달라졌다.
“반역자 놈들을 단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라!”
세키라 대영주의 본대 병력이 하급 영지에서 징집한 병력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저, 전 등용을 철회했습니다! 아군입니다!”
한 탈영병이 손을 번쩍 들며 투항했다.
서걱!
하지만 세키라 대영주의 본대 병력은 그대로 무기를 휘둘러 탈영병의 목을 날려 버렸다.
침략자들의 차원에서 투항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시던 군주가 전사하지 않는 이상 전쟁이 끝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 등용을 철회했다는 말을 믿고 투항을 받아들였는데 사실이 아니면 어쩔 것인가?
모시던 군주가 ‘등용을 철회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적진에 투항하라.’ 같은 명령을 내렸다면?
뒤통수 맞기 십상이었다.
전시 상황이 아니라면 받아 주고 확인 절차를 거친 뒤 아군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투항병을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죽이는 게 훨씬 더 손쉬운 해결책이었다.
“도, 도망쳐!”
“잡히면 죽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뒤늦게 등용을 철회하고 세키라 대영주의 직속 병력에게 항복하려 했던 이들도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혼란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현성과 타무그가 지금 이 시간에도 하급 영주들을 암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여라!”
“살려 줘!”
트베레오가 이끄는 본진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대살육이 벌어졌다.
혼란은 해가 뜨고 나서야 진정되었다.
“이런 망할.”
트베레오의 표정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졌다.
8천에 이르던 대군의 숫자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수많은 탈영병들을 처단했다.
하지만 사방으로 흩어져 탈출한 탈영병의 숫자가 무려 2천이 넘었다.
제대로 된 전투 한번 벌이지 못했다.
아니, 전투는커녕 적을 발견하지도 못했다.
한데 무려 전 병력의 절반을 잃는 엄청난 피해를 보고 말았다.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점이었다.
“당장 회군하셔야 합니다.”
“아군 하급 영지를 구원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신하들이 회군을 청했다.
사실 이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절반의 병력을 잃었다.
며칠이 지나면 하급 영지에서 징발한 병력을 모두 잃을지도 몰랐다.
부랑자가 점령한 영지를 차지하려고 욕심을 부리다가 아군 영지만 잃게 된 꼴이었다.
으드득!
트베레오가 어금니가 부서져라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정해져 있었다.
“징집병들을 해산시키고 회군한다.”
징집병들이 언제 적으로 돌변할지 모른다.
괜히 뒤통수를 맞느니 해산시키는 게 나았다.
트베레오는 적을 칠 여력을 잃어버렸다.
적의 영지를 빼앗는 게 문제가 아니다.
지금 해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는 최대한 빨리 회군해 남은 하급 영지를 지켜 내는 것이었다.
* * *
“휴!”
현성이 지친 표정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냈다.
정말 정신없이 움직였다.
호루스의 눈을 이용해 적진을 파악하고 그 후 공간 이동 스킬을 연달아 사용해 이동했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신하들에게 체력과 마력을 공급받았음에도 피로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제 끝장을 봐야지.’
현성은 세키라 대영주가 보낸 1천 명의 직속 병력을 곱게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잘만 하면 제대로 꿀 빨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세키라 대영주의 직속 병력은 최하 1만이 이상이다.
한데 고작 10분의 1인 1천 명만 보내고 나머지는 하급 영지에서 징집했다.
또 1천 명의 병력을 빼는 것도 최대한 감추기 위해 노력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분쟁 중인 대영주에게 틈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 1천 명의 병력이 전멸하면 틈이 생기겠지.’
세키라 대영주는 직속 병력 1천 명을 보내면서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다.
즉, 직속 병력 1천 명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분쟁 중인 대영주가 쳐들어올 수도 있는 것이다.
‘나름 정보를 잘 감춘 것 같기는 하지만, 그건 내가 없었을 때 이야기고.’
마석으로 작동하는 스마트폰을 든 현성의 신하들은 지금도 꾸준히 활동 영역을 넓혀 가고 있었다.
현성의 근거지와 가까운 세키라 대영주의 영지와 분쟁 중인 대영주의 영토에도 당연히 스마트폰을 든 신하들이 포진해 있었다.
‘일단 전멸부터 시키자.’
세키라 대영주 휘하 1천 명의 직속 병력을 전멸시킨다.
그 후 그 사실을 세키라 대영주와 분쟁 중인 대영주에게 알린다.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연히 전쟁이지.’
호전적인 침략자 차원의 대영주들이 적의 약점을 알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잘만 하면 영지가 더 늘어날 수도 있겠어.’
현성은 아크사 대영주와 코디기 대영주의 분쟁을 통해 수많은 하급 영지를 점령해 힘을 키웠다.
대영주 간의 전쟁이 벌어지면?
비슷한 일을 얼마든지 벌일 수 있었다.
유일한 문제는 1천 명에 달하는 세키라 대영주 직속 병력의 무력이 절대 만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전원이 2000레벨이 넘는 고레벨 플레이어들이었다.
3000레벨을 넘어선 플레이어의 숫자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럼 나도 만반의 대비를 해야지.’
씨앗은 제대로 뿌려 놨다.
이제 낫을 날카롭게 갈아 수확하는 일만 남았다.
* * *
차원 게이트는 자격을 갖춘 이가 아닌 이상 통과할 수가 없었다.
아공간에 넣고 데리고 가는 방법이 있기는 했지만, 혹시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몰랐다.
용병 고용은 포인트가 소모된다.
그렇기에 현성은 엄청난 마력을 소모하지만 가장 안전한 방법을 선택했다.
바로 승전 대군주의 부름 스킬이었다.
슈욱!
“주군을 뵙습니다.”
“주군을 뵙습니다.”
루시아와 파르티샤가 공손히 현성에게 군례를 올렸다.
“어?”
“이게 무슨?”
그러다가 둘 모두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랐다.
“얻었죠?”
현성의 물음에 루시아와 파르티샤가 입을 쩍 벌리며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업적은 그 플레이어가 현재 활동하고 있는 곳이 아닌 출신지에 따라 갈린다.
각각 다른 차원 출신인 루시아와 파르티샤는 당연히 침략자 차원에 진입한 대가로 최초 초월 업적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주군!”
“감사합니다! 주군!”
두 사람이 재빨리 현성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현성이 두 사람에 줄 선물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럼 지금부터는 속도전으로 가죠.”
현성이 루시아와 파르티샤를 데리고 본격적인 업적 사냥에 나섰다.
물론 다른 업적은 침략자 차원의 플레이어를 쓰러트려야 하는 만큼 획득이 절대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현성에게는 뱀 인간을 제거하고 얻어 낸 초월 등급 은신 스킬이 내장된 망토가 있었다.
“같이 가요.”
현성이 차원의 이면 스킬을 사용해 모습을 감췄다.
루시아도 망토에 내장된 은신 스킬을 사용해 모습을 감췄다.
두 사람은 조용히 세키라 대영주 휘하의 하급 영지에 잠입했다.
그리고…….
서걱!
먼저 현성이 나서서 하급 영주의 목을 날려 버렸다.
“주, 주군?”
영주를 잃은 신하들이 혼란스러워했다.
“죽을래? 복종할래?”
강대한 마력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현성이 물었다.
“따, 따르겠습니다.”
현성의 서슬 퍼런 위협에 대부분의 신하들이 무릎을 꿇으며 복종의 뜻을 표했다.
하지만 어디에나 반항아는 있는 법이다.
“두고 봐라! 세키라 대영주님께서 네놈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신하 하나가 그 말과 함께 탈출을 시도했다.
현성은 굳이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저자는 현성의 몫이 아니라 루시아의 몫이었으니까 말이다.
푸욱!
퇴로를 차단하고 있던 루시아가 도망치는 신하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
“커억!”
신하가 피를 토하며 목숨을 잃었다.
“수고했어요.”
현성의 말에도 루시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눈앞에 떠오르는 여러 개의 업적 획득 메시지에 정신이 멍해졌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현성의 물음에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공손히 군례를 올렸다.
“주군께서 내려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루시아에게 있어서 현성은 주군이기 이전에 생명의 은인이었다.
하루하루 점차 죽어 가던 루시아를 살려 주었다.
어디 그뿐인가?
살아갈 터전을 마련해 주고, 루시아가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도와주었다.
아마 현성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루시아는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데 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독점할 수도 있는 업적까지 나눠 주었다.
물론 현성과 루시아 모두 업적 획득이 가능했기에 한 일이었다.
현성이 루시아가 업적을 획득할 수 있게 도와줬다고 해서, 현성의 업적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건 엄청나게 큰 은혜였다.
신하에게 이렇게까지 베푸는 주군은 과거에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끝까지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루시아가 마음속으로 진심을 다해 충성을 맹세했다.
‘이제 파르티샤 차례네.’
루시아에게 대량의 업적을 선물해 줬다.
이번에는 파르티샤에게 대량의 업적을 선물해 줄 때였다.
현성은 파르티샤와 함께 다른 영주의 영지로 잠입했다.
그 후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고, 파르티샤는 손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주군.”
파르티샤가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현성에게 고개를 숙였다.
루시아도 현성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건 파르티샤도 마찬지였다.
만약 현성의 도움이 없었다면, 파르티샤의 왕국은 진작 멸망했을 것이다.
하나 현성의 도움을 얻은 덕분에 파르티샤의 왕국은 안정적으로 번성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인구가 늘어났고 플레이어들의 실력이 꾸준히 향상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현성의 보호로 인해 이계의 침략자 플레이어로부터도 안전해질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파르티샤의 무력이 빠르게 강해졌다.
현성에게 선물받은 아이템을 통해 업적을 여러 개 획득했다.
한데 이번 일로 또다시 대량의 업적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 결과 파르티샤는 엄청나게 강해졌다.
저번에 등장한 반인반룡이 또 나타난다면?
굳이 현성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홀로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였다.
‘이제 어느 정도 전력은 갖춰 졌어.’
세키라 대영주의 직속 병력 1천 명을 쓸어버리기 위해서는 다수의 중, 저레벨 플레이어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고레벨 플레이어 몇몇이 더 효율적이다.
현성에게는 타무그와 그 수하들이 있었다.
또 하급 영지에서 가려 뽑은 고레벨 플레이어 2천 명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열세라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플레이어들끼리의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머리 숫자가 아니라 레벨이었으니까 말이다.
현성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루시아와 파르티샤를 불러들였다.
갑자기 스텟을 확 늘려 줄 수 있는 건 이 두 사람뿐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 한번 가 볼까.’
만반의 준비를 했다.
하지만 확실한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물론 예상과 다르게 밀릴 경우에 대한 대비도 되어 있었다.
바로 자력 결계였다.
하지만 현성은 처음부터 자력 결계를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타무그와 그 수하들이 지구에 등장했을 때, 자력 결계의 쿨타임이 돌아오지 않아 모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낄 수 있으면 최대한 아끼는 게 좋아.’
세키라 대영주가 미친 척하고 현성을 향해 공격을 가할 수도 있었다.
또 아크사 대영주와 코디기 대영주의 전쟁이 조기에 종결될 수도 있었다.
물론 아끼다가 똥이 될 수도 있다.
이에 현성은 후방에 자력 결계를 칠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정면 대결로 승리한다면 그걸로 끝이다.
하지만 패배의 위기에 몰린다면?
자력 결계를 펼치라는 지시를 내리고, 그곳으로 적들을 유인해 일망타진할 계획이었다.
* * *
트베레오는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회군하는 동안 수많은 하급 영지를 지났다.
하지만 결국 이번 일의 주범을 찾아내는 것에는 실패했다.
아니, 주범은커녕 영지민 한 명도 구경할 수가 없었다.
성을 텅 비워 놓고 모두 모습을 감췄기 때문이다.
‘망할 부랑자 놈.’
트베레오의 두 눈에서 진한 살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이번 일은 트베레오의 힘으로는 수습이 불가능했다.
빼앗긴 하급 영지를 되찾으면 무엇 하겠는가, 어차피 사람과 물자는 모두 빠져나간 것을.
사라진 영지민들을 찾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수색이 필요했다.
당연히 그건 1천 명의 병사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 이상은 감출 수가 없다.’
트베레오는 이번 원정에 장거리 통신 스킬을 시전할 수 있는 플레이어와 대규모 탐색 스킬을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를 포함시켰다.
장거리 통신 스킬을 가진 플레이어는 보고를 위해, 대규모 탐색 스킬을 가진 플레이어는 부랑자 출신 군주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트베레오는 그간 장거리 통신 스킬을 가진 플레이어를 압박해 자신의 실책이 상부에 보고되지 않게 틀어막았다.
최대한 뒷수습을 한 후에 보고를 해야 자신의 살길이 생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빼앗긴 하급 영지를 되찾았지만, 이 인원으로 사라진 플레이어들과 영지민들을 찾는 건 무리였다.
‘어이가 없군.’
적의 얼굴조차 구경하지 못했다.
그런데 전투에서 패배해 버리고 말았다.
아마 이대로 돌아가면 엄청난 질책을 받을 것이다.
어쩌면 최선봉에 서서 목숨으로 죄를 씻으라는 명령이 떨어질지도 몰랐다.
‘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지금은 이대로 물러나지만…….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자신을 이 꼴로 만든 부랑자 출신 군주의 숨통을 끊어 놓을 것이다.
하지만 트베레오 굳이 훗날을 기약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찾고 싶었던 이번 사건의 원흉이 자기 발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주, 주군!”
휘하 플레이어 하나가 트베레오를 불렀다.
트베레오가 정면을 주시했다.
대략 2,500명 정도 되어 보이는 병력이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씨익!
트베레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리석은 놈.’
부랑자 출신 군주는 최악의 선택을 했다.
하지만 그 최악의 선택이 벼랑 끝에 몰려 있던 트베레오에게 살길을 열어 주었다.
“전군 공격!”
트베레오가 힘차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적의 함정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딴 건 힘으로 깨부수면 그만이다.
* * *
‘결판을 볼 때가 왔어.’
현성이 멀리서 모습을 드러낸 세키라 대영주의 직속 병력을 주시했다.
준비는 끝났다.
그간 얻은 아이템을 통해 루시아와 파르티샤의 전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후방에 자력 결계를 칠 준비도 끝마쳤다.
하지만 현성은 이번 싸움을 자력 결계의 도움 없이 해결하고 싶었다.
두두두두!
1천 명의 플레이어들이 무서운 속도로 현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공격하라!”
현성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사아아아악!
강대한 마력이 피어오르며 아군이 먼저 원거리에서 강력한 포격을 쏟아부었다.
파지지직! 화르르륵!
현성 역시 흑뢰신의 숨결과 화염의 서를 사용해 있는 힘껏 공격을 날렸다.
꽈아아아앙!
커다란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역시 상대는 정예 중에 정예였다.
쏟아부은 화력에 비해 피해가 미미했다.
아군은 계속해서 원거리 공격 스킬을 날렸다.
하지만 양군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가자!”
현성이 신혈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와아아아아아!”
힘찬 함성과 함께 아군 플레이어들이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숫자는 아군이 두 배 이상 많았다.
현성은 오래전 익혔던 워크라이부터 최근에 익혔던 마력 필드와 직업 전용 스킬인 영역 선포까지 아군의 전력을 끌어올리고 적의 전력을 하락시키는 스킬들을 총동원했다.
두두두두두!
서로를 향해 달려들던 두 무리의 플레이어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꽈아아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마력의 파편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치열한 접전이 펼쳐졌다.
파지지직! 화르르륵!
현성은 흑뢰신의 숨결과 화염의 서를 아낌없이 사용했다.
뚱이와 덕구도 마구 날뛰며 적들을 쓸어버렸다.
전체적인 전력에서 약세인 만큼 현성이 최대한 날뛰어 주어야 했다.
그런 만큼 이미 발동시킬 수 있는 버프 스킬들은 미리부터 발동을 시켜 둔 현성이었다.
“네 이놈!”
성난 외침과 함께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달린 거구의 플레이어가 현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꽈아아아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현성의 몸이 살짝 뒤로 밀려 났다.
‘아까 공격 명령을 내린 것도 그렇고 저놈이 대장인 것 같은데.’
그 말은 저 녀석만 잡으면 생각보다 손쉽게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현성은 몸을 피하는 대신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꽈아앙! 꽈아앙!
‘확실히 만만치 않아.’
스텟이 상당히 높았다.
또 실전 경험이 풍부한지 임기응변도 뛰어났다.
하지만…….
‘타무그급은 아니야.’
거기다 현성은 타무그의 충성 맹세를 받은 후 더욱더 강해졌다.
‘최대한 빨리 승부를 봐 주마.’
현성이 전력을 다해 마력을 뿜어내며 맹렬한 기세로 적장을 밀어붙였다.
자신만만하게 달려들었던 적장은 자신이 뒤로 밀리기 시작하자 적잖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정 지어 봐야 달라지는 거 없다.’
현성이 더욱 강하게 적장을 밀어붙였다.
트베레오는 자신의 실력에 대해서 상당히 큰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세키라 대영주의 신임을 받았던 것도 트베레오의 실력이 상당히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쉽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트베레오는 자신이 있었다.
야비한 부랑자 출신 군주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기만 한다면 단숨에 숨통을 끊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한데 부랑자 출신 군주의 숨통을 끊어 버리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숨통이 끊어지게 생겼다.
“큭!”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몸에 상처가 하나둘 늘어났다.
-나를 도와라.
트베레오가 결국 휘하 신하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휘하 신하들은 트베레오의 부름에 응해 줄 수가 없었다.
규격 외의 강자 넷이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며 맹렬히 날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들 잘하고 있네.’
현성도 현성이지만 루시아, 파르티샤, 타무그가 엄청난 활약을 보여 주고 있었다.
아, 현성이 임시로 뽑아 승전 대군주의 축복을 내려 준 사몬이라는 플레이어도 나름 맹활약을 하고 있었다.
아군의 전체적인 전력은 적보다 열세였다.
사실 타무그의 직속 수하들을 제외한 나머지 2천여 명의 실력은 세키라 대영주의 직속 병력보다 월등히 떨어졌다.
아마 현성, 루시아, 파르티샤, 타무그, 사몬이 엄청난 활약을 보여 주지 않았다면, 진작 전멸했을 것이다.
‘확실히 대영주의 직속 병력은 달라.’
아군의 숫자가 거의 두 배 가까이 많음에도 밀어붙이기는커녕 오히려 뒤로 밀리고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해.’
현성의 휘하에 있는 수만 명의 침략자 차원 플레이어들 중에서 가리고 가려서 뽑은 2천 명이었다.
그 덕분인지 밀리고 있기는 하지만, 일방적으로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이들은 자신의 역할을 다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승전 대군주의 자비.’
현성은 중간중간 직업 전용 스킬을 사용해 아군 플레이어들의 체력과 마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빨대들이 많으니까 이게 좋네.’
침략자 차원에 있는 수만에 달하는 휘하 신하들이 현성의 체력과 마력을 회복시켜 준다.
그렇게 회복된 체력과 마력을 현성이 승전 대군주의 자비 스킬을 사용해 다시금 전투 중인 아군 플레이어들에게 전달해 준다.
실로 완벽한 순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현성이기에 가능한 기예였다.
일반적으로 하급 영주가 거느리고 있는 휘하 플레이어의 숫자는 적게는 수백에서 많게는 몇천 남짓에 불과했으니까 말이다.
아마 대영주가 직접 이 자리에 강림하지 않는 한 현성과 같은 기예를 보여 줄 수는 없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