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의 갑
‘이지용 대통령은 넘어온 것 같고.’
어차피 이지용 대통령이나 현 여당이나 그 나물에 그 밥이다.
그들은 절대 눈앞에 들어온 금덩어리를 마다하지는 못할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싹 다 휘하에 넣어 버리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한국 정치인들을 일본에 있는 녀석들처럼 성실한 일꾼들로 싹 갈아엎어야 하는데.’
나중은 몰라도 지금 당장은 무리였다.
‘일단 그 일은 천천히 진행하자. 그럼 이제 대기업들만 단속하면 되는 건가?’
정치인과 기업인은 다르다.
돈을 빌려준다고 해도 색안경을 끼고 볼 것이다.
설사 현성이 빌려주는 돈을 받더라도 그게 족쇄로 작용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기업인들은 정치인들과 다르게 그 돈을 제대로 불릴 능력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럼 힘으로 찍어 눌러야지.’
돈이 많이 들어왔다.
실탄이 빵빵하게 생겼다는 말이다.
‘주식회사는 결국 주식 많이 가진 놈들이 이기는 거야.’
국내 대기업들은 순환 출자라는 꼼수를 사용해 얼마 되지도 않는 지분을 가지고 회사를 지배하고 있다.
오성 그룹, 한호 그룹 등등의 대기업 오너 일가가 가지고 있는 지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적대적 인수 합병으로 간다.’
일단 현성에게 당장 도움이 되는 정유, 식량, 건설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전자제품이나 플레이어 전투용품 같은 경우는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었다.
현성의 누나인 최현지가 운영하는 아라에 의해 거의 고사 직전이었으니까 말이다.
‘첫 타깃은 한호 그룹으로.’
현성이 괜히 개성 땅을 원한 게 아니다.
한호 그룹이 개성 땅의 내정자라는 것 정도는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국민 여론을 최대한 이용해야지.’
한호 그룹은 연달아 터진 오너 일가의 부도덕한 행실과 갑질로 국민 여론이 좋지 않았다.
운전기사 폭언 및 폭행 논란, 가사 도우미 폭언 및 폭행 논란, 경비원 폭언 및 폭행 논란, 회사 공금횡령 논란, 직원 물 따귀 논란, 직원 기쁨조 동원 논란 등등.
한호 그룹은 말 그대로 ‘갑질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었다.
* * *
“갑자기 최현성 플레이어가 왜 끼어들어!”
한호 그룹의 회장 마동국이 노성을 토해 냈다.
개성의 알짜배기 땅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기업들에게 많은 것을 양보했다.
한데 그렇게 배정받은 개성 땅을 눈 뜨고 빼앗기게 생겼다.
“그게, 이번에 창립하는 국제 연합 기구 본사를 개성에 세운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고 많은 북한 땅 중에 왜 하필 개성이냐고!”
그야 당연히 남한과 가까워 입지 조건이 좋고 개성 자체가 몬스터들과의 전투로 인해 초토화된 만큼 현지 주민들을 상대로 일일이 보상이나 협의를 할 필요가 없어서였다.
또 개성은 남한에서 북한 전역으로 퍼져 나갈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한다.
가지고 있으면 이득을 볼 수밖에 없는 땅인 것이다.
“신문사에 연락할까요?”
최현성 플레이어가 한호 그룹이 침 발라 놓은 개성 땅을 노린다.
한호 그룹은 금력으로도 무력으로도 최현성 플레이어를 이길 수 없다.
유일하게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언론을 동원한 여론전이었다.
“최현성 플레이어가 정부 측에 개성 땅의 무상 불하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이걸로 충분히 꼬투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최현성 플레이어라고 해도 국가의 토지를 무상으로 불하받을 수는 없습니다.”
전략실 직원들의 말에 마동국 회장이 두 눈을 감았다.
길고 긴 장고가 이어졌다.
선택지는 두 개다.
언론을 동원해 한판 붙어 보거나 아니면 이대로 꼬리를 내리거나.
마동국 회장이 눈을 떴다.
“선우일보하고 동앙일보에 전화 넣어.”
마동국 회장이 지시를 내렸다.
“네, 회장님!”
회장의 지시를 받은 전략실 직원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찍소리도 못 하고 죽을 수는 없지.’
마동국 회장은 일단 한번 붙어 보기로 결정 내렸다.
최현성 플레이어가 나섰다고 해서 무조건 고개를 숙일 수는 없다.
원래 한번 만만하게 보이면 계속 까이는 법이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 수 있다는 걸 보여 줘야 한다.
그래야만 상대도 자신을 함부로 얕보지 않는다.
덜컹!
그때 회장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회장님, 큰일입니다!”
“또 무슨 일이야?”
“최현성 플레이어가 그룹 주식을 마구잡이로 사들이고 있습니다!”
“뭐?”
마동국 회장이 화들짝 놀랐다.
최현성 플레이어는 이미 국내 대기업들의 지분을 상당수 보유하고 있다.
한데 거기서 추가로 주식을 사들인다니?
이게 의미하는 바는 적대적 인수 합병밖에 없었다.
“막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
마동국 회장이 발악하듯 외쳤다.
* * *
최현성 플레이어가 한호 그룹을 상대로 적대적 인수 합병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최현성 플레이어가 드디어 대기업 사냥을 시작하는 건가?
-전에도 최현성 플레이어가 대기업 주식 많이 사지 않았음? 그때도 호들갑 잔뜩 떨었지만 별일 없었는데 왜 갑자기 난리인 거임?
-그때랑 지금은 동원된 금액이 다릅니다.
-단순히 주식 확보해서 대주주 행세하는 거랑 그룹 경영권 먹는 거랑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임.
-윗분 말씀이 맞음. 전이랑은 다름. 막말로 적대적 인수 합병이 성공하면, 한호 그룹이 현성 그룹으로 이름 바꿔 달아야 할 수도 있음.
적대적 인수 합병이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 1위에 떠올랐다.
한호 그룹은 최선을 다해 방어에 나섰다.
한호 그룹 주식이 끝도 모르고 올라갔다.
주식시장에서 한호 그룹 주식이 씨가 말랐다.
한호 건설, 한호 정유, 한호 푸드는 이미 현성의 손에 넘어간 상황이었다.
한호 그룹은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자동차, 화학, 전자, 조선을 지키기 위해 총력을 다했다.
다행히 백기사들의 도움으로 간당간당하게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니,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주주총회에서 백기사들이 한호 그룹의 등에 칼을 꽂기 전까지는 말이다.
한호 그룹 주주총회 당일.
“주주총회 결과에 따라 한호 그룹의 기존 경영진은 전원 사퇴 처리되었습니다.”
한호 그룹의 오너 일가는 경영권을 잃었다.
믿고 있던 백기사들의 배신 때문이었다.
“어, 어떻게.”
마동국 회장은 지금의 현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백기사들이 도대체 왜 배신을 했다는 말인가?
마동국 회장이 백기사들을 노려봤다.
백기사들이 일제히 마동국 회장의 눈을 피했다.
‘미안하네.’
‘우리도 어쩔 수 없었네.’
‘우리까지 같이 죽을 수는 없지 않나.’
백기사들은 마음속으로 마동국 회장에게 사과했다.
백기사들이 배신한 이유는 간단했다.
-한호 그룹 주식을 넘기지 않으면 부도덕한 국내 기업에 대한 적대적 인수 합병의 범위를 더 늘릴 생각입니다.
현성의 그 한마디에 백기사들이 일제히 백기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한호 그룹의 주식을 현성에게 넘겼다.
현성이 한호 그룹 주식을 추가로 구매하지 못한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주식시장에 남아 있는 주식이 없어서였다.
그 말인즉 백기사들이 보유하고 있는 회사를 적대적 인수 합병 할 여력이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여론전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대기업 오너 일가치고 위법이나 갑질 한 번 안 해 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저 언론을 잘 틀어막아 외부로 터져 나가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현성이 끼어들면 사정이 달라진다.
백기사들은 의리를 지키다가 괜히 자기 회사까지 빼앗길 수 있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한호 그룹을 주식을 현성에게 넘겼다.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한호 그룹을 버린 것이다.
현성은 자신의 손에 들어온 한호 그룹을 전문 경영인에게 맡겼다.
현성이 기업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누나가 알아서 잘 조율해 주겠지.’
누나 최현지는 아라의 사장 겸 한호 그룹의 이사직을 맡았다.
‘뭐, 말아먹을 일은 없으니까.’
전문 경영인들은 꽤 실력 있는 이들로 뽑았다.
배신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도 했다.
전문 경영인을 인류의 수호신교 광신도들 중에서 선정한 것이다.
현성의 휘하에 들어 있는 광신도들은 최선을 다해 한호 그룹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또 한호 그룹 자체가 알짜배기 자회사를 많이 가지고 있는 모회사였다.
‘수출 물량 늘어나면 되지, 뭐.’
한호 그룹은 미국, 중국, 인도 등지에서 관세 문제로 꽤 고통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현성이 간단하게 해결해 줄 수 있었다.
과거의 한호 그룹은 현성에게 있어서 자국의 대기업일 뿐이었다.
타국 입장에서도 현성과의 관계를 고려해 한호 그룹을 봐줘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한호 그룹은 이제 현성의 소유가 되었다.
현성의 소유물이 된 한호 그룹에게 전처럼 빳빳하게 나올 수 있을까?
이것저것 트집을 잡아 관세를 먹일 수 있을까?
타국 기업이라고 괄시할 수 있을까?
어림도 없는 말이었다.
오히려 현성의 눈치를 보느라 더 잘해 줄 수밖에 없었다.
국민들은 현성이 한호 그룹의 오너가 된 걸 기대 반 불안감 반으로 지켜봤다.
처음에는 당연히 내부적으로 큰 진통이 있었다.
칼바람이 불었고 기존 오너 일가의 수족들이 줄줄이 잘려 나갔다.
-이러다 한호 그룹 망하는 거 아님?
-그럴지도 모름. 플레이어가 기업 경영을 해 봤겠음?
-전문 경영인에게 맡겼잖아. 갑질 일삼았던 기존 한호 그룹 오너들보다는 전문가가 낫다.
-헛소리하고 있네. 한호 그룹 오너 일가가 아무리 갑질을 많이 했어도 경영 능력은 있었다.
-맞음. 인성이랑 경영 능력은 별개임. 또 사실 전문 경영인 시스템이라는 게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님. 강력한 리더십이 없어서 우왕좌왕하다 망할 확률이 높음.
-나도 동의함. 솔직히 내 회사도 아니고 남의 회사인데 먼 미래를 보고 운영할 리가 있겠음? 전문 경영인들은 주인 의식이 없어서 단기적인 실적 내려고 쥐어짜기 많이 한다고 들었음.
-한호 그룹 망하면 실업자 엄청 늘어나는데 걱정이네.
-갑질 사건 터졌을 때는 한호 그룹 그렇게 욕하던 놈들이 이제 와서 실드 쳐 주네.
-맞음, 갑질 사건 때 한호 그룹 오너 일가 전원 사퇴시키고 감옥에 처넣어야 한다고 게거품 물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 헛소리하고 있음.
-막상 진짜 전원 사퇴하니까 쫄리는 거지.
-인성이랑 경영 능력이 별개다. 그리고 한호 그룹 망하면 대한민국 경제 개판된다.
-그런 쓰레기들 때문에 유지될 대한민국 경제면 망하는 게 낫다.
-헛소리하네. 진짜 한호 그룹 망하면 피눈물 흘리면서 후회할 놈들이 입만 살아서.
인터넷에 불이 붙었다.
기존 한호 그룹 오너 일가가 인성은 별로지만 능력 있었다는 쪽과 전문 경영이 낫다는 쪽으로 의견이 갈린 것이다.
국민들은 불안한 시선으로 한호 그룹을 바라봤다.
회사에 다니는 직원들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대중의 우려와 달리 한호 그룹은 잘 돌아갔다.
사실 오너 일가와 그 추종자만 잘려 나갔을 뿐이다.
생산직, 영업직, 사무직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니 큰 문제가 생길 리가 없었다.
오히려 현성이 한호 그룹의 오너가 된 후 수출 물량이 늘어났다.
한호 그룹 물품에 한해서 미국, 중국, 러시아, 유럽, 인도 등등 주요 수출국의 관세가 내려갔다.
매출과 순이익이 오르기 시작하자 적대적 인수 합병 이후 쭉 내려갔던 한호 그룹 주식이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최현성 플레이어가 대기업 먹어서 난리 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매출이 더 올라갔네?
-그러게 말이야.
-이게 다 강대국들이 최현성 플레이어 눈치 봐서 그런 거다. 한호 그룹 매출 분석 한번 봐라 수출 물량 엄청 늘어났다.
-내수도 매출도 늘었음. 최현성 플레이어 이미지 좋은 게 도움이 된 듯함.
-사실 한호 그룹은 망할 수가 없음. 영업이익이 안 좋았더라도 오너가 세계 최고의 부자인데 망할 리가 있겠음?
-그건 그럼. 대규모 구조 조정 같은 것도 없을 듯.
-카더라이기는 한데 최현성 플레이어가 한호 그룹 매출이나 순이익 낮아져도 상관없으니까 품질 올리고 직원들 월급 제대로 주라고 했다고 함.
-그거 진짜임?
-난 꽤 신빙성 있다고 생각함. 명퇴 강요도 사라졌다고 하던데?
-와, 한호 그룹 완전 개꿀이네.
-나도 한호 그룹 입사하고 싶다.
-최현성 플레이어 최고다!
현성의 주가가 다시 상승했다.
사실 현성이 한호 그룹의 일에 개입한 건 하나도 없었다.
그냥 전문 경영인과 누나 최현지에게 모든 일을 맡겼을 뿐이다.
단순히 전문 경영인과 누나 최현지가 일을 잘했을 뿐인데 칭찬은 현성이 받았다.
“이럴 수가.”
이번 일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기존 한호 그룹의 오너 일가였다.
한호 그룹 오너 일가는 주식을 그대로 들고 있었다.
그래야 재기를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망했어야 하는데.”
현성이 경영권을 가지고 간 후 한호 그룹이 크게 흔들렸어야 했다.
한호 그룹이 부도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기존 경영진이 복귀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어야 했다.
그게 잃어버린 경영권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오히려 더 높은 매출을 올리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최현성 플레이어의 영향력이 이 정도였나.’
마동국 전 회장이 허탈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경영권을 빼앗기면서 온갖 수작을 다부렸다.
한호 그룹이 망했으면 하는 마음에 말 그대로 온갖 진상은 다 피워 놓고 회사를 떠났다.
회사가 정상화되려면 족히 몇 년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새로운 경영진은 순식간에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했다.
마치 진실을 읽을 수 있는 눈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남은 건 주식뿐인가?’
마동국 전 회장이 얼굴을 찡그렸다.
어이없게도 현성이 회사를 잘 운영해 준 덕분에 마동국 전 회장을 포함한 그 일가의 재산이 크게 늘었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
현성이 레이드 도중 죽을 수도 있다.
전문 경영인들이 실책을 저지를 수도 있다.
‘버틴다.’
주식을 움켜쥐고 버티고 버티다 보면 기회가 올 것이다.
그게 마동국 전 회장과 그 일가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띵동!
그때 마동국 전 회장의 자택에 벨이 눌렸다.
“이렇게 막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압수수색영장 가지고 온 겁니다. 공무집행방해죄로 처벌 받기 싫으시면 물러나세요.”
현관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그리고 경찰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마동국 전 회장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
“마동국 씨, 당신을 공금횡령 및 주가조작과 업무방해 행위로 체포합니다.”
달칵!
경찰들이 체포 영장을 들이밀며 마동국 전 회장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끝이다.’
다 끝났다.
마동국 전 회장과 그 일가가 한호 그룹의 경영권을 되찾을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듯싶었다.
오히려 마동국 전 회장과 그 일가는 평생을 차디찬 감옥에서 보내지 않기 위해 발악해야 할 처지에 놓여 버렸다.
갑과 을은 상대적인 것이다.
마동국 전 회장과 그 일가는 평생을 갑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더 강한 갑의 등장 앞에서는 그들도 을이 될 수밖에 없었다.
* * *
재계 인사 셋이 은밀한 회담을 가졌다.
“외삼촌,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겁니까?”
TS 그룹 회장이 불만 섞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럼 뭘 어떻게 하지는 말이냐?”
서우 그룹 회장이 짜증 섞인 어조로 물었다.
“우리도 언제 한호 그룹 꼴이 날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대책을 세워야죠?”
“대책은 무슨…….”
TS 그룹 회장의 말에 서우 그룹 회장이 힘없이 말끝을 흐렸다.
“그럼 외삼촌은 이대로 가만히 당하고 있으실 생각이십니까?”
TS 그룹 회장이 서우 그룹 회장에게 물었다.
TS 그룹 회장은 서우 그룹 회장의 외조카였다.
서우 그룹 회장은 말이 없었다.
“장인어른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TS 그룹 회장이 오성 그룹 회장에게 물었다.
TS 그룹 회장은 오성 그룹 회장의 사위였다.
“지금은 그자의 눈에 최대한 띄지 않는 게 상책이네, 사위. 한호 그룹 일은 그냥 운이 좋지 않았다고 생각해.”
“한호 그룹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도 당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대책을 세워야죠?”
TS 그룹 회장이 억울해 죽겠다는 듯 외쳤다.
“설마 두 분이 서로 껄끄러운 사이라 손잡기 싫으셔서 그러시는 건 아니시죠?”
TS 그룹 회장이 혹시나 하는 어조로 물었다.
사실 서우 그룹과 오성 그룹은 오랜 앙숙이다.
그런 두 사람을 한자리에 모은 사람이 TS 그룹 회장이었다.
TS 그룹 회장이 서우 그룹 회장의 외조카이자 오성 그룹 회장의 사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옛일은 잊었네, 사위.”
“나도 그런 건 아니다. 그저 대책을 세워 봐야 의미가 없어서 그럴 뿐이야.”
오성 그룹 회장과 서우 그룹 회장이 차례로 대답했다.
“세상이 달라졌다. 미국, 중국, 러시아도 그자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세상이야.”
서우 그룹 회장의 말에 오성 그룹 회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위, 일개 기업인인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나? 지금 같은 때는 그저 숨죽이고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네. 알겠는가?”
‘이 늙다리들이.’
TS 그룹 회장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던 대기업 총수였던 두 사람이 완전히 노물이 되어 버렸다.
아니, 기업을 통째로 빼앗기게 생겼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는단 말인가?
“정말 가만히 있으실 겁니까? 최현성 그 어린놈이 피땀 흘려 일군 가업을 언제 도둑질해 갈지 모르는데?”
“방법이 없다. 그래도 그자 역시 우리 모두를 적대할 생각은 아닌 듯하니 그걸로 위안을 삼아야지.”
“그자에게 대항하는 건 포기하게, 사위.”
“아니, 최현성 그놈이 한 말을 그대로 믿으시는 겁니까?”
현성은 한호 그룹을 적대적 인수 합병 한 뒤 대기업 오너들에게 경고를 날렸다.
얌전히 있어라. 그럼 건드리지 않겠다.
대신 저항하면 한호 그룹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한호 그룹을 응징한 이유는 그간 저지른 죄가 크고 여론을 이용해 자신을 공격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아!”
TS 그룹 회장이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서우 그룹과 오성 그룹이 힘을 보태 주면 최현성 플레이어에게 대항할 방도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데 둘 다 싸우기도 전에 백기를 들어 버렸다.
“망할 늙은이들! 싸워 보기도 전에 겁을 집어먹어?”
TS 그룹 회장이 차량 안에서 연신 분노를 토해 냈다.
“두 분 회장님께서 거절하신 겁니까?”
수행 비서의 물음에 TS 그룹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이를 먹더니 둘 다 꼬리 만 개가 되어 버렸어.”
“그럼 기존에 계획했던 여론전은?”
“폐기해. 나 혼자 싸울 수는 없잖아.”
“예, 회장님.”
TS 그룹 회장의 말에 비서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망할 늙은이들! 최현성 그까짓 놈이 뭐가 무섭다고.”
“두 분 회장님들도 연세가 있으시다 보니 마음이 약해지시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TS 그룹 회장이 연신 서우 그룹 회장과 오성 그룹 회장을 씹었다.
수행 비서는 열심히 그런 TS 그룹 회장의 비위를 맞췄다.
그래서였을까?
그 두 사람은 차량 안에 자신들 외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사실 어찌 보면 그건 당연했다.
그 두 사람은 그를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는 그저 차량에 딸린 부속품 같은 존재였다.
‘주교님께 보고를 드려야겠군.’
TS 그룹 회장의 차량을 운행하는 운전기사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 * *
“역시 어디에나 상황 파악 못 하는 놈들이 꼭 하나씩은 껴 있단 말이야.”
현성이 보고서를 받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한호 그룹을 통째로 먹어 치웠다.
그 꼴을 보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나대는 놈이 하나둘 정도는 더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상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주제 파악 못 하고 나대는 놈이 나타난 것이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 봐야 하나.”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주군?”
루시아의 물음에 현성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밟아 줘야죠. 괜히 내버려 뒀다가 얌전히 있는 노인네들까지 딴생각 품게 만들면 곤란하잖아요.”
“그럼 바로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아, 그 전에 대기업 오너들한테 한 번 더 경고 메시지 보내 주세요.”
“알겠습니다, 주군.”
루시아가 바로 전화기를 들어 현성의 지시를 차례대로 이행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TS 그룹에 대한 현성의 적대적 인수 합병이 시작되었다.
* * *
현성이 TS 그룹 주식 매수에 들어가자 다시 한번 난리가 났다.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최현성 플레이어, 한호 그룹에 이어 TS 그룹을 노리다.
-최현성 플레이어의 국내 기업 사냥의 끝은?
-오성 그룹과 서우 그룹은 안심할 수 있을까?
댓글도 엄청나게 달렸다.
-ㄷㄷㄷ…….
-최현성 플레이어가 국내 대기업들을 다 사 버리는 거 아님?
-그건 불가능할 거 같은데?
-진짜 불가능할까? 난 가능할 거 같은데?
-그런데 이런 독과점을 내버려 두는 건 문제 있지 않음? 정부에서 제재를 가해야 할 것 같은데.
-자본주의 세상에서 자기 돈으로 주식 사는 건데 그걸 어떻게 제재함?
-독과점 금지법 있지 않음?
-독과점 금지법은 애초에 개판이었음.
-그건 맞음. 대기업이 골목 상권까지 진출해서 싹쓸이한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근데 최현성 플레이어가 TS 그룹 먹는다고 해도 우리한테는 나쁠 거 없지 않음?
-그건 그런 거 같음. 한호 그룹 생각하면 오히려 더 좋을 거 같음.
국민 여론은 아직까지 현성에게 우호적이었다.
현성이 대기업들을 모두 손에 넣는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이 있기는 했지만 기대감이 더 컸다.
사실 이런 여론이 조성된 것에는 언론사들의 역할도 컸다.
뜨거운 이슈이기에 기사를 잔뜩 내기는 했다.
하지만 그저 상황을 나열해 놓았을 뿐 현성을 공격하는 기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언론사들도 현성의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사라고 한호 그룹이나 TS 그룹 꼴 나지 말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두 번째는 다른 대기업들이 TS 그룹을 버렸기 때문이다.
하루 전 현성의 경고를 들은 국내 대기업 오너들을 장고 끝에 TS 그룹을 버렸다.
며칠 후.
인터넷에 TS 그룹의 오너 일가가 그간 저지른 갑질 사례와 비리 내역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TS 그룹 오너 일가도 한호 그룹 오너 일가랑 똑같은 놈들이었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저런 짓을 하냐?
-최현성 플레이어가 TS 그룹을 인수 합병 한 이유가 있었음.
-저런 놈들은 감방에서 평생 썩어야 함.
그간의 비리와 갑질이 터져 나오자 그나마 TS 그룹에 우호적이었던 여론이 완전히 등을 돌려 버렸다.
“하하하!”
TS 그룹 회장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뭔가 수를 쓴 것도 아니다.
그저 쓰려고 하다 시작도 하기 전에 취소했다.
한데 그 대가로 오너 일가가 가지고 있던 회사 경영권이 날아가 버렸다.
가족들이 모두 자신을 원망했다.
‘내가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억울했다.
차라리 뭔 짓을 하기라도 했으면 덜 억울했을 것이다.
한데 하지도 않았는데 털려 버렸다.
-세상이 달라졌다.
-지금 같은 때는 그저 숨죽이고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가볍게 무시해 버렸던 서우 그룹 회장과 오성 그룹 회장의 경고가 너무 뼈아프게 느껴졌다.
TS 그룹 오너 일가는 결국 한호 그룹과 마찬가지로 경영권을 잃었다.
그 후 약속이라도 한 듯 검찰과 경찰이 들이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