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권. 설날 (96/225)
  • ┃설날

    겨울의 끝 무렵.

    대한민국의 명절 중 하나인 설날이 찾아왔다.

    각성하기 전 현성에게는 명절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가족들끼리 모이기는커녕 명절에도 바쁘게 일을 해야 했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이 있다면 명절의 경우 일하는 사람을 구하기가 힘들어 보수가 꽤 높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건 이미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아버지가 완치되신 후 현성의 가족들은 다시 명절을 챙길 수 있게 되었다.

    “어서 가자.”

    아버지가 잔뜩 신이 나서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 박미숙 여사와 누나 최현지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현성의 아버지가 마력 역류증에 걸려 쓰러졌을 때 큰아버지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처음에 몇 번 문병을 왔을 뿐이다.

    당연히 어머니와 누나의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그건 현성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말해 현성은 큰아버지를 거의 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아니었다.

    미우나 고우나 내 피붙이였고, 친형이었다.

    “가요.”

    현성이 운전대를 잡으며 가장 먼저 차에 탔다.

    그 후 아버지가 보조석에 앉았고, 어머니와 누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뒷좌석에 앉았다.

    현성이 차를 몰아 큰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차를 바꿀까?’

    운전을 하면서 현성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현성이 타고 다니는 차는 예전에 플레이어 협회에 가입했을 때 받은 국산 대형 세단이었다.

    공짜로 얻은 차인 만큼 나름대로 잘 타고 다니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해 현성의 나이대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 나이대에 더 잘 어울렸다.

    “아버지, 이 차 가지실래요?”

    현성의 물음에 아버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타고 다니는 차를 왜?”

    “그냥 새로 하나 살까 해서요. 아버지가 필요 없으시면 중고로 팔고요.”

    아버지의 레벨은 고레벨 플레이어 수준이다.

    실력은 랭커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당연히 벌어들이는 수입도 어마어마했다.

    마음만 먹으면 국산 대형 세단이 아니라 수입 대형 세단도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다.

    “아니다, 내가 타마. 가끔 네 엄마랑 데이트할 때 쓰면 좋겠다.”

    “흥, 데이트는 무슨.”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명절 끝나면 바로 서류 처리해 드릴게요.”

    현성의 말에 아버지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차에 욕심이 별로 없었다.

    부전자전이라고, 그건 현성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공간 이동 스킬로 갈 걸 그랬나?’

    꽉 막히는 도로에서 운전하다 보니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이랑 같이 가야 하니 스킬보다는 장거리 공간 이동용 스크롤이 낫겠네.’

    예전에야 장거리 공간 이동용 스크롤의 가격이 너무 비싸서 평소에 일상 이동용으로 사용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장거리 공간 이동용 스크롤의 가격은 현성에게 아무런 부담도 되지 않았다.

    ‘다음부터는 그렇게 해야겠다.’

    생각해 보니 꽉 막히는 도로를 뚫으며 굳이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현성은 얼마 가지 않아 큰아버지 댁에 도착했다.

    거리가 가까워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현성과 가족들이 차에서 내렸다.

    큰아버지 댁은 경기도 외곽에 있는 전원주택이었다.

    어머니의 표정이 또 안 좋아졌다.

    ‘옛날 일이 떠오르셨나 보네.’

    큰아버지는 서민이 아니었다.

    오히려 서민의 기준에서 보자면 부자에 가까웠다.

    이 집과 주변 땅만 해도 그 가치가 20억이 넘었으니까 말이다.

    집과 주변 땅을 제외하고 재산은 많았다.

    지방 곳곳에 땅도 가지고 있었고 대학가 근처에 원룸도 세 채나 가지고 있었다.

    과거 어머니는 아버지의 병원비 문제로 큰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매정하게 거절당했다.

    당연히 어머니의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그건 현성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현성은 큰아버지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과거에는 원망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자식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고 형제를 위해 큰돈을 선뜻 내어 줄 이가 누가 있겠어?’

    하지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건 조금 문제가 있었다.

    현성은 그것도 충분히 이해했다.

    ‘나도 똑같이 하면 되지, 뭐.’

    받은 만큼 돌려준다고, 현성도 철저하게 남처럼 대하면 되는 일이었다.

    아버지의 형.

    집안의 어른.

    아버지의 입장을 생각해 적당히 존댓말만 해 주면 된다.

    띵동!

    벨을 누르자 30대 후반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아버지 오셨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사촌 형 최현중이었다.

    “어, 그래, 잘 지냈냐?”

    “저야 잘 지냈죠.”

    아버지가 최현중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형님, 저 왔습니다!”

    “그래, 어서 와라!”

    아버지의 인사에 큰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반겼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동안 잘 지냈냐?”

    최현중의 말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플레이어 일은 할 만하고?”

    “할 만해. 형 일은 잘되고?”

    “나도 괜찮게 풀리고 있다.”

    “다행이네.”

    최현중의 말에 현성이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촌 형 최현중은 마석과 몬스터 사체를 가공해 플레이어 전용 장비로 만드는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초기 자본이 꽤 많이 드는 사업인데,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손쉽게 자리를 잡은 것 같았다.

    친구인 성호의 경우처럼 현성이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현성은 사촌 형인 최현중에게 따로 도움을 줄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그 점은 확실하게 말씀드린 상태였다.

    형제들끼리 명절에 만나는 걸 막을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도움을 줄 필요는 없다.

    받은 게 없으니 주지도 않는다.

    그게 현성의 결정이었다.

    어머니의 적극적인 지지에 아버지도 결국 수긍했다.

    “플레이어 일이 힘들지는 않냐?”

    큰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할 만해요.”

    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 누워서 떡 먹기였다.

    “플레이어도 처음에는 돈 벌기가 쉽지 않다는데, 네가 고생이 많다.”

    그건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의 이야기다.

    비약과 온갖 스킬북을 습득해 처음부터 넘사벽의 스펙을 쌓고 사냥을 시작한 아버지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내가 현중에게 들으니까 플레이어가 무조건 좋은 직업은 아닌 것 같더라. 특히 많이 위험한 일이라고 들었다. 너랑 현성이도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게 어떠냐?”

    큰아버지의 말에 아버지가 쓴웃음을 지으셨다.

    현성은 세계 최고의 실력을 지닌 플레이어다.

    현성의 아버지인 최형규 역시 뛰어난 실력을 가진 랭커다.

    아직 레벨이 부족해서 그렇지 400레벨을 넘어서는 순간, 최형규는 랭커들조차 올려다봐야 하는 천외천의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런 두 사람에게 다른 일을 알아보라니?

    조카인 현성과 인류의 수호신이라고 불리는 플레이어 최현성을 다른 인물이라고 생각하기에 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인식 방해 스킬이 효과가 좋다는 말이지.’

    큰아버지가 방송을 못 봤을 수도 있지만, 봤다고 해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스킬의 힘을 꿰뚫어 보려면, 최소 랭커 수준은 되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현지야, 넌 결혼은 언제 할 생각이냐?”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던 큰아버지의 화살이 누나 최현지에게 꽂혔다.

    “아직은 생각이 없어서요.”

    “생각이 없다니? 네 나이가 이제 30대 중반이야. 어서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을 해야지.”

    큰아버지의 설교에 잠자코 있던 큰어머니가 끼어들었다.

    “그때 현지가 파혼당했잖아요. 파혼당한 여자를 어느 남자가 데리고 가겠어요?”

    큰어머니가 최현지의 아픈 상처를 후벼 팠다.

    진짜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이든 아니든 이건 진짜 파혼당한 사람에게 할 말이 아니었다.

    “쯧쯧쯧, 그러게 말이야. 그때 현지가 파혼만 안 당했어도…….”

    큰아버지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현성은 기가 막혔다.

    진짜 안타까웠다면 그런 말을 꺼낸 큰어머니에게 호통을 쳤어야 맞는 게 아닌가?

    그때였다.

    “그때 파혼한 게 다행이죠. 그런 남자를 믿고 결혼했으면 어쩔 뻔했어요? 그리고 진짜 절 걱정하시는 거면 애초에 그런 말씀을 꺼내지 않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최현지의 당찬 대답에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살짝 당황했다.

    “커험, 그게 다 널 걱정하다 보니 나온 말 아니냐?”

    “진짜 제 걱정 해 주시는 거라면 앞으로 파혼 이야기는 안 꺼내셨으면 좋겠어요. 결혼 언제 하냐고 묻지도 마시고요. 앞으로 또 파혼 이야기나 결혼 이야기를 꺼내신다면, 그건 절 걱정하는 게 아니라 조롱하려는 거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최현지의 딱 부러지는 말에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화가 나서였다.

    “어머, 얘 좀 보게! 어른들이 자기 걱정해서 한 말을 가지고 어디서 집안 어른한테 언성을 높여?”

    “전 언성 높인 적 없는데요? 언성은 지금 큰어머니께서 높이고 있으시죠.”

    최현지의 말에 큰어머니의 언성이 더 높아졌다.

    “너 집안 어른들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동서, 도대체 애들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큰어머니가 화살을 어머니에게 돌렸다.

    현성의 누나 최현지가 만만치 않으니 성격이 유순한 현성의 어머니를 물고 늘어진 것이다.

    자신의 손아랫사람이라고 평생 어머니를 만만하게 생각했던 큰어머니였기에 할 수 있는 발언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날 이후 큰집에 대한 정이 뚝 떨어진 상태였다.

    남편 때문에 오긴 왔다.

    하지만 전처럼 잠자코 당하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이 정도면 잘 시켰죠. 걱정해 주는 척하면서 자기 상처 후벼 파는 사람한테 말 한마디 못 하고 입 다물고 있는 게 교육 잘 시킨 건가요? 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어머니의 말에 큰어머니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말 자체를 반박하기 힘들어서라기보다는 항상 ‘네.’, ‘죄송해요, 형님.’, ‘제가 앞으로 조심할게요.’ 같은 말만 입에 담고 살았던 어머니의 변한 모습에 놀란 것이다.

    “형수님, 이 좋은 날 왜 언성을 높이세요?”

    아버지가 나서 큰어머니를 말리며 큰아버지께 눈짓을 보냈다.

    “크흠, 그래. 명절에 괜히 목소리 높일 필요 없지. 당신도 그쯤 해.”

    큰아버지가 큰어머니를 말렸다.

    ‘그래도 양심은 있네.’

    큰아버지는 과거 어머니의 부탁을 거절했던 게 마음에 걸렸는지 은근히 어머니의 눈치를 봤다.

    “아니,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요? 잘못은 현지랑 동서가 한 거 아니에요?”

    큰어머니가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짜 억울한가 보네.’

    현성으로서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동조해 주는 이가 없으니 아무리 억울하다고 하소연을 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참나.”

    큰어머니가 잔뜩 심통이 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자식 자랑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 현중이 운영하는 회사 매출이 작년에 얼마나 나왔는지 알아? 무려 31억이야.”

    큰어머니의 아들 자랑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현성 가족들의 표정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현성과 부모님은 말할 것도 없고 누나 최현지 역시 상당히 큰 부자였다.

    아버지는 그간 누나 최현지가 병원비로 쓴 돈에 엄청난 이자까지 붙여 갚아 주었다.

    그 덕에 최현지는 순식간에 현금 부자가 되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최현지가 운영하고 있는 전자 제품 매장의 매출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았다.

    현성이라는 고정 고객도 있었고, 알음알음 현성의 누나가 운영하는 매장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플레이어 고객들이 몰렸기 때문이다.

    이모탈 길드의 길드원은 물론, 플레이어에 연관된 업종에서 일을 하는 이들은 무조건 최현지가 운영하는 매장에서 전자 제품을 구입했다.

    현성의 누나 최현지는 수완이 좋았다.

    전자 제품 매장에 그치지 않고 플레이어들이 사용하는 물자와 장비 판매에까지 사업을 확장한 것이다.

    상품의 질이 좋지 않았다면 아무리 현성과 이모탈 길드의 도움이 있었어도 크게 성공하기가 힘들었다.

    플레이어들의 장비 상태와 수준은 목숨과 직결된다.

    그런 만큼 최대한 꼼꼼히 따져 보고 구입한다.

    최현지는 최상의 상품만을 제공했다.

    자체적으로 엄격한 기준을 만들어 불량품을 걸러냈고,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최상위 클래스의 생산직 플레이어들의 공방과 장기 계약을 맺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탄탄한 자본력과 든든한 뒷배, 여기에 뛰어난 상품까지 더해져 있으니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했다.

    최현지는 그 후 ‘아라’라는 브랜드를 론칭해 전국에 분점을 냈다.

    최현지의 사업체 아라는 무섭게 성장했다.

    그 성장 속도가 얼마나 대단했냐 하면 대기업을 등에 업은 플레이어 물품 판매 업체들이 존폐 위기를 걱정할 정도였다.

    현성이 투자의 대가로 받은 아라의 지분은 60%.

    나머지 40%의 지분은 누나 최현지가 가지고 있었다.

    현성이 지분을 60% 가지고 있으니 대기업들도 감히 아라를 건드리지 못했다.

    오히려 반쯤 포기하고 플레이어 물품 유통에서 발을 빼려는 조짐을 보였다.

    현성과 이모탈 길드의 대대적인 투자와 지원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최현지는 스스로의 사업 수완으로 플레이어 전문 장비 유통업계의 1인자로 거듭났다.

    한마디로 최현지는 1년 매출이 수십조에 달하는 대기업의 CEO였다.

    1,000조 원의 플레이어라고 불리는 현성.

    최상위 랭커의 수입을 올리고 있는 아버지 최형규.

    매출 수십조를 올리는 대기업의 CEO인 누나 최현지.

    당연히 매출 31억을 올렸다는 자랑이 부러울 리가 없었다.

    현성 가족들의 표정이 시큰둥하자 큰어머니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너무 큰돈이라 감이 안 오는 모양이네. 현성아, 플레이어 생활이 많이 힘들지? 내가 현중이한테 이야기해서 회사에 자리라도 하나 만들어 주라고 할까?”

    “네?”

    현성은 기가 막혔다.

    이건 현성의 진짜 정체를 모르더라도 할 말이 아니었다.

    플레이어한테 회사 취직을 권하다니?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었다.

    “아니, 현성이가 왜 현중이네 매장에서 일을 해? 플레이어가 처음에 힘들어서 그렇지 나중에 얼마나 큰 빛을 보는 직업인지 몰라서 그래?”

    큰아버지의 말에도 큰어머니는 끄떡없었다.

    “그러다 죽을 수도 있으니까 하는 말이죠.”

    “엄마, 그건 아닌 것 같아요. 플레이어가 회사에 취직을 왜 하겠어요? 각성하면 다니던 직장도 때려치우는 판에.”

    현성의 사촌 형까지 나서서 말리자, 이번에는 큰어머니의 눈이 최현지에게 향했다.

    “현지, 넌 매장에서 영업 일을 한다고 했었지? 영업 그거 해서 얼마나 벌겠니? 너라도 현중이네 회사에 취직시켜 줄까?”

    전자 제품 및 플레이어 물품 판매 매장을 운영한다고 했는데, 그게 큰어머니 귀에는 영업직으로 일하고 있다고 들린 모양이었다.

    “하긴 현지한테는 괜찮겠네. 현중아, 네가 신경 좀 써 줘라.”

    이번에는 큰아버지까지 은근슬쩍 가세했다.

    ‘아버지가 쓰러지셨을 때는 신경도 안 쓰더니.’

    현성은 기가 찼다.

    아버지와 현성이 플레이어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태도가 바뀌었다.

    플레이어가 되었으니 적당히 신경을 써 줄 가치가 생겼다는 듯이 말이다.

    ‘결국은 똑같은 사람들이야.’

    부창부수라는 말이 있다.

    큰아버지가 조금 나은 듯 보여도 결국은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제가 뭐가 아쉬워서 멀쩡한 제 회사 사장 자리를 버리고 현중 오빠 회사에 들어가요?”

    누나 최현지가 기가 차다는 어조로 대답했다.

    큰어머니가 발끈해서 입을 열려는 찰나…….

    띵동!

    벨이 울렸다.

    “누구지?”

    누나 최현지를 쏘아붙이려던 큰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내 고모가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왔지?”

    그렇게 중얼거린 큰어머니가 문을 열었다.

    ‘막내 고모가 오셨나 보네.’

    큰어머니가 말한 고모는 현성과 최현지의 막내 고모였다.

    큰어머니는 막내 고모를 아가씨라는 호칭 대신 꼭 막내 고모라고 불렀다.

    달칵!

    문이 열리고 막내 고모와 고모부 그리고 사촌 동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오래간만에 오빠들이랑 부모님 산소라도 같이 갈까 해서 서둘렀어요.”

    막내 고모의 말에 큰어머니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셨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빠들 저 왔어요.”

    막내 고모가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어, 왔냐?”

    큰아버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여동생이 찾아왔는데, 그다지 반기는 기색이 없었다.

    “그동안 잘 지냈냐? 처남도 잘 지냈지?”

    반면 아버지는 화색을 띠며 반가워하셨다.

    “오셨어요, 아가씨?”

    어머니도 반기셨다.

    막내 고모는 현성의 아버지가 마력 역류증으로 쓰러졌을 때 유일하게 도움을 준 친가 친척이었다.

    큰 도움이 된 건 아니었다.

    막내 고모 역시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 사정이 여유롭지는 못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막내 고모는 본인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최선을 다해 현성의 가족을 도왔다.

    “막내 고모, 차 바꿨어요?”

    큰어머니가 물었다.

    그 짧은 시간에 막내 고모가 타고 온 차를 확인한 모양이었다.

    “예, 바꿨어요.”

    “아니, 돈이 어디서 나서 차를 바꿨어요? 그것도 저렇게 비싼 외제 차로? 저거 아무리 못해도 1억은 넘지 않나?”

    현성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막내 고모가 타고 온 차는 벤츠 S클래스였다.

    “다 현지랑 현성이 덕분이죠.”

    “그게 무슨 소리예요?”

    큰어머니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고모한테 제 회사 지점 하나 넘겨드렸어요.”

    최현지가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점?”

    큰어머니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큰아버지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최현지가 사업을 한다고 했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큰어머니는 매장에 영업직으로 취직했다고 생각했고, 큰아버지는 그냥 작은 가게를 하나 얻어 힘겨운 청년 창업자의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점이라니?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잘 풀려야 지점을 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제가 전자 제품이랑 플레이어 전용 물품 유통 및 판매하는 회사를 운영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최현지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꽤 잘되는 모양이네, 지점 운영하는 사람이 벤츠도 타고 다니고. 막내 고모, 아무리 그래도 너무 낭비하면 안 돼요. 그러다 현지가 지점 운영권 뺏어 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아니면 현지 회사가 망하거나, 건물주가 월세를 올릴 수도 있잖아? 지점 만든다고 돈도 많이 썼을 텐데.”

    큰어머니의 말에 막내 고모가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제 돈은 한 푼도 안 들었어요. 현지가 지점 건물을 사서 인테리어까지 다 한 다음에 소유권 넘겨줬으니까. 그리고 지점이 수익이 너무 많아서 차 한 대 산 거 정도는 낭비도 아니에요. 정말 현지랑 현성이한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니까요?”

    큰어머니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러고는 최현지를 노려보았다.

    왜 막내 고모만 챙겨 주냐, 우리 몫은 없냐, 그런 표정이었다.

    “절은 무슨. 예전에 아빠 아프셨을 때 막내 고모가 도움 주신 거 갚아 드렸을 뿐이에요.”

    최현지의 말에 큰어머니가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은 그때 도움 준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맞다, 넌 충분히 받을 자격 있어.”

    아버지까지 나서자 큰어머니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속이 쓰렸다.

    아들 최현중의 사업이 잘된다고 자랑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경쟁이 워낙 치열하다 보니 매출이 30억 넘게 나와도 실질적으로 남는 돈이 없었다.

    오히려 사업 자금과 상품 개발비 그리고 로비 비용이랍시고 집안 돈을 계속 퍼먹고 있었다.

    그 결과 지방에 있던 원룸 건물과 땅은 모두 다 팔고, 남은 재산이라곤 집과 주변 땅밖에 없다.

    다행히 지금 살고 있는 집과 근처 땅을 팔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들인 최현중이 운영하는 회사가 대출을 받는 데 연대 보증을 서 준 상태였다.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까지 해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대출을 못 받으면 회사가 망한다는 아들 최현중의 말에 결국 연대 보증을 서 줬다.

    그간 아들인 최현중의 회사에 투자한 돈이 아까워서였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뭐라도 뜯어먹어야 했다.

    “매장이 꽤 크면 거기에 우리 현중이네 회사가 만드는 물품도 받아 줄 수 있겠네?”

    큰어머니의 말에 현성의 사촌 형 최현중이 귀를 쫑긋 세웠다.

    현성의 사촌 형 최현중이 하는 사업의 가장 큰 문제가 판매처를 뚫는 것이었다.

    사실 신생 업체 입장에서는 안정적인 판매처를 뚫는 게 가장 힘들었다.

    아무리 생산을 잘하면 뭘 하겠는가, 팔리지가 않는데.

    사실 거래처를 뚫는 데 들어가는 로비 비용만 절감해도 당장 적자에 흑자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쌓인 재고를 모두 소진할 수 있다면?

    그간 들어간 투자금을 뽑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건 힘들어요.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제품들만 판매하고 있거든요. 플레이어들이 몬스터와 싸울 때 사용하는 제품인데, 성능이 떨어지거나 불량품을 팔 수는 없잖아요.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최현지의 말에 큰어머니의 얼굴이 굳어졌다.

    “너 지금 우리 현중이 회사에서 만든 제품이 불량품이라고 말한 거니? 사업 좀 잘된다고 아주 막나가는구나!”

    “제가 언제 현중 오빠 회사에서 만든 제품이 불량품이라고 했나요? 그냥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제품들만 판매하고 있다고 했지. 아버지도 플레이어고, 현성이도 플레이어잖아요. 아버지와 동생이 사용할 수도 있는 장비니까 좀 더 깐깐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에요.”

    최현지는 단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이이이!”

    큰어머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최현지는 그런 큰어머니의 모습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태연한 표정으로 최현중에게 시선을 돌렸다.

    “현중 오빠, 혹시 납품할 생각 있으면 우리 회사로 제품 샘플 몇 개 보내세요. 결과는 장담할 수 없지만, 심사 일정은 빠르게 잡아 줄게요.”

    “필요 없다!”

    최현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큰어머니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난 현지 네가 유통 사업을 한다니까 도움 주려고 했던 거야! 우리 현중이 회사에서 만든 제품이 얼마나 좋은데 그런 소리를 해? 뭐? 결과는 장담할 수 없지만 심사 일정은 빠르게 잡아 줄게요? 나중에 우리 현중이한테 회사 제품 제발 납품해 달라고 사정하지나 말아라.”

    “거절이시군요? 알겠어요. 그런데 제가 현중 오빠 회사에 제발 납품해 달라고 사정할 일은 없을 것 같네요.”

    ‘이년이 끝까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동서 집안 식구들이 자신에게 머리 꼿꼿이 들고 할 말 다 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가족 중에 플레이어가 둘이나 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다.

    “너, 나중에 방금 전에 한 말 꼭 후회하는 날이 올 거다. 그때는 울며불며 사정해도 소용없어.”

    “그럴 일 없을 거라니까요.”

    최현지의 태연한 표정에 심사가 뒤틀렸다.

    ‘우리 현중이네 회사를 개무시한다 이거지? 두고 보자. 현중이 사업이 성공하기만 하면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큰어머니는 마음속으로 복수를 다짐했다.

    “크흠, 그럼 제사드리고 산소에 갈 준비나 하자고.”

    큰아버지가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나서서 말했다.

    하지만 큰아버지의 표정도 그리 좋지 않았다.

    조카인 현지가 자신의 아내에게 단 한마디도 지지 않고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게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들인 현중이 사업을 무시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묘한 분위기 속에 제사가 시작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음식 준비 때문에 신경전을 이어 갈 일이 없다는 점이었다.

    제사 음식을 직접 하지 않고 모두 주문해서 처리했기 때문이다.

    비용은 당연히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분담했다.

    제사가 끝나고 모두 산소로 갈 준비를 했다.

    각 가족끼리 차에 탑승한 뒤 산소로 향했다.

    산소에 도착한 뒤 성묘를 지냈다.

    분위기는 냉랭했다.

    큰어머니는 물론 큰아버지와 사촌 형인 최현중의 표정 역시 그다지 좋지 않았다.

    ‘여기서 바로 헤어지는 게 좋겠네.’

    괜히 성묘 후 큰아버지 댁에 갔다가는 분위기만 더 나빠질 판이었다.

    성묘를 끝낸 후 산에서 내려가는 길에 한 무리의 성묘객들과 마주쳤다.

    “지부장님, 안녕하셨습니까!”

    성묘객들과 마주친 순간 사촌 형 최현중이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허리를 숙였다.

    “아, 반가워요.”

    성묘객들 중 하나가 최현중의 인사를 받았다.

    말로는 반갑다고 하는데 표정은 영 아니었다.

    “성묘 오셨나 봅니다.”

    “뭐, 그렇죠.”

    “짐이 많으시네요. 제가 들어 드리겠습니다.”

    최현중이 재빨리 다가가 성묘용품을 받아 들었다.

    ‘참나.’

    현성은 어이가 없었다.

    성묘를 올 때 장손이라고 당연하다는 듯 성묘용품을 모두 현성을 비롯한 사촌 동생들에게 떠넘겼다.

    그 전에 제사 준비를 할 때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스스로 나서 다른 집 성묘용품을 들어 주고 있었다.

    “최 사장도 성묘를 왔나?”

    지부장이라고 불린 성묘객의 물음에 최현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제 부모님이십니다.”

    최현중의 소개에 큰아버지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큰어머니의 경우는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현중이를 잘 부탁드린다며 초등학생 학부모가 할 법한 발언들을 연발했다.

    그때 지부장이라는 이의 눈이 최현지와 마주쳤다.

    그 순간…….

    “어?”

    화들짝 놀란 지부장이 자신을 붙잡고 있던 큰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최현지의 앞으로 달려왔다.

    “혹시 최현지 사장님 아니십니까?”

    지부장의 물음에 최현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누구시죠?”

    “경기도 일산 지부의 지점장을 맞고 있는 박성웅이라고 합니다. 올해 사장님께서 신년사를 하실 때 먼발치에서 뵈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최현지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박성웅으로서는 절대적으로 대수로운 일이었다.

    오히려 일생일대의 기회에 가까웠다.

    평소에는 절대 만날 수 없는 회사의 최고 경영자와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출세욕에 불타는 박성웅으로서는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잘 보여서 제대로 눈도장을 찍어야 했다.

    “제가 들어 드리겠습니다.”

    박성웅이 재빨리 최현지가 들고 있던 성묘 물품을 받아 들었다.

    그러더니 가족들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눈치 빠른 박성웅의 가족들이 현성 가족이 들고 있던 성묘 물품을 대신 들었다.

    박성웅과 그 가족들의 행동에 놀라고 당황한 것은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그리고 사촌 형 최현중뿐이었다.

    “혀, 현지야?”

    놀란 최현중이 최현지를 불렀다.

    “최현중 사장님과는 무슨 사이이신지…….”

    그 모습을 목격한 박성웅이 조심스럽게 최현지에게 물었다.

    박성웅은 방금 전까지는 최현중을 최 사장이라고 부르며 존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순식간에 태도가 달라졌다.

    “제 사촌 오빠예요.”

    최현지의 대답에 박성웅이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등 뒤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큰일이다.’

    박성웅은 그간 최현중을 귀찮은 파리 정도로 생각했다.

    당연히 무시하거나 대충 대답하기 일쑤였다.

    한데 그런 최현중이 최현지 사장님의 사촌 오빠였다니?

    오너 일가에게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큰 실수를 한 것이다.

    “아, 최현중 사장님께서 최현지 사장님 사촌 오빠셨군요.”

    박성웅이 재빨리 최현중의 눈치를 살폈다.

    여기서 안 좋은 소리가 나온다면, 겨우 올라간 일산 지부장 자리가 날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네가 아라 사장이었어?”

    한편 최현중은 최현중대로 놀란 상황이었다.

    사촌 동생인 최현지가 플레이어 전문 물품 판매 및 유통 사업을 한다고 할 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한데 최현지가 운영하는 회사가 업계 1위의 공룡 기업인 아라였을 줄이야.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맞아.”

    최현지의 대답을 들은 최현중의 얼굴이 환해졌다.

    놀란 건 놀란 거고, 기분이 좋은 건 좋은 거였다.

    “너 부하 직원 관리 좀 잘해야겠다. 박성웅 지부장이 나한테 어떻게 대했는 줄 알아? 제품이 기준에 못 미친다고 면박 주고 툭하면 물품 성능 개선하면 납품받아 주겠다고 날 괴롭혔다니까? 아무리 애걸복걸해도 쳐다보지 않고 날 개무시했어!”

    최현중이 그간 박성웅에게 당한 설움을 일일이 털어놨다.

    그러면 그럴수록 박성웅의 표정이 까맣게 죽어 갔다.

    ‘망할.’

    성묫길에 우연이 회사 오너인 최현지를 만나 운이 트였다고 생각했다.

    한데 아니었다.

    오히려 제대로 먹구름이 끼어 버렸다.

    ‘차라리 안 만났으면 좋았을걸.’

    왜 아침 일찍 성묘를 오자고 했는지 자기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그때였다.

    “원칙대로 잘하셨네.”

    최현지의 입에서 전혀 의외의 말이 터져 나왔다.

    “뭐?”

    최현중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최현지는 최현중을 완전히 무시하고 박성웅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산의 박성웅 지부장이라고 하셨나요?”

    “예, 사장님!”

    “정말 잘하셨어요. 수준 미달인 상품을 가지고 와서 애걸복걸한다고 다 받아 주면 우리 회사 망해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원칙을 철저하게 지켜 가며 일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박성웅이 힘차게 대답했다.

    “아, 생각해 보니 현중 오빠 회사 제품은 굳이 심사 볼 필요도 없겠네요. 우리 회사에는 절대 납품하지 않겠다고 하셨거든요. 앞으로 납품 심사 보겠다고 신청서 제출하면, 그냥 반려하세요.”

    최현지의 말에 박성웅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최현지와 최현중이 말만 사촌 사이지, 실제로는 남보다 못한 사이라는 걸 말이다.

    “네, 사장님!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박성웅이 힘차게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최현중의 표정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졌다.

    최현중의 시선이 큰어머니에게 향했다.

    “왜 날 보니?”

    큰어머니가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는 표정으로 최현중을 바라봤다.

    “엄마, 빨리 아까 하셨던 말 취소하고 현지한테 사과하세요.”

    최현중이 원망 가득한 시선으로 큰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법이다.

    최현중은 자신보다 강자인 최현지를 원망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대신 만만한 상대인 자신의 엄마에게 화살을 돌렸다.

    “내가 왜?”

    큰어머니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 상황은 대충 알겠다.

    최현중 회사의 중요한 거래처가 알고 보니 최현지 회사였다는 거 말이다.

    하지만 상황을 파악한 것과 자존심을 꺾는 건 별개의 문제다.

    최현지에게 사과를 해서 자존심을 꺾느니, 아들인 최현중이 다른 거래처를 알아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승승장구하고 있다고는 해도 어차피 차린 지 얼마 안 된 신생 업체잖아. 저런 신생 업체에 잘 보일 시간에 큰 거래처를 알아보는 게 낫지.’

    큰어머니는 자신이 들고 있던 박성웅 가족의 성묘용품을 바닥에 내려놨다.

    그와 동시에 설교를 시작했다.

    “현중이, 넌 도대체 그동안 뭘 한 거니? 현지가 회사 차린 게 너보다 훨씬 늦었는데 왜 네가 현지한테 쩔쩔매? 난 현지한테 사과할 생각 없으니까 다른 거래처 알아봐라.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저런 코딱지만 한 회사에 무슨 덕을 보겠다고.”

    큰어머니의 한마디에 최현중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형님, 처가에 가야 해서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버지가 나서서 큰아버지에게 인사를 했다.

    “이만 가자.”

    아버지의 말에 현성의 가족이 우르르 몸을 움직였다.

    막내 고모 가족도 당연하다는 듯 현성 가족의 뒤를 따라 모습을 감췄다.

    “엄마는 도대체 왜 그런 소리를 해? 현지가 아라 사장이라잖아! 당장 현지한테 가서 사과해! 현지 앞에 무릎 꿇어서라도 화를 풀라고!”

    “싫다! 너야말로 정신 똑바로 차려! 그동안 사업한다고 네가 가지고 간 돈이 얼만데, 현지 저년이 만든 신생 회사 앞에서 설설 기고 있는 거야? 부끄럽지도 않니!”

    “네 엄마 말이 맞다! 네가 더 노력해서 잘할 생각이나 해라!”

    부모님의 일갈에 최현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무리 요즘 세상 물정을 몰라도 그렇지 아라를 모르다니.

    털썩!

    최현중이 힘없이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난 망했어! 엄마 때문에 망했다고!”

    최현중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부모님을 노려봤다.

    “아라가 어떤 회사인 줄 알아? 플레이어 전문용품 판매를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대기업이야! 아라가 안 받아 주면 난 망한다고!”

    “대, 대기업?”

    “그래, 대기업! 이 바닥에서는 오성도 아라한테 명함도 못 내밀어!”

    최현중의 말에 두 사람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현성 가족은 이미 차에 타고 떠난 뒤였다.

    두 사람은 현성의 아버지 최형규와 최현지에게 연신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