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권. 경매 (81/225)
  • ┃경매

    첫 번째 전설 등급 아이템 경매가 열렸다.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던 이모탈 길드 지부 소속의 플레이어들이 경매에 참가하기 위해서 속속 한국으로 모여들었다.

    이모탈 길드는 전설 등급 아이템 경매를 준비하며 그 세력을 급격하게 키웠다.

    미국과 러시아 지부를 비롯해 나름 강국이라고 할 만한 나라들에는 모두 이모탈 길드 지부가 설립되었다.

    지부에 속한 플레이어들은 각국의 최상위 랭커들이었다.

    차원 게이트가 발생하고 수많은 길드들이 흥망성쇠를 겪었다.

    하지만 이모탈 길드처럼 짧은 시간이 급격하게 세력을 키운 경우는 없었다.

    이 모든 게 현성의 존재와 전설 등급 아이템의 힘이었다.

    “경매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나요?”

    현성이 물었다.

    “아무런 차질 없이 잘 준비되고 있습니다.”

    강선영 길드장이 자신만만한 어조로 대답했다.

    “제 휘하에 들어와야 한다는 점도 명시하셨죠?”

    전설 등급 아이템 경매에 참가하는 플레이어는 현성의 휘하에 들어와야 한다.

    또 스킬북을 낙찰받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익혀야 했다.

    “물론입니다. 오히려 좋아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더 강해질 수 있으니까요.”

    “다행이네요.”

    플레이어들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국가에서 딴지를 걸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아, 그리고 러시아 지부의 플레이어들이 미리 자문위원장님 휘하에 들어갈 수 없냐고 문의해 왔습니다.”

    “미리요?”

    “예, 군주의 깃발 버프를 최대한 빨리 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군주의 깃발이 주는 버프 효과는 레벨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욱 크게 실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휘하에 들어오면 경매에서 더 유리한 점이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눈치였습니다.”

    “딱히 특혜를 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휘하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숫자는 제한적입니다. 그런 만큼 신청한다고 해서 다 받아 줄 수는 없습니다.”

    현성의 스텟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랭커들을 다 휘하로 받아들이게 되면 정작 필요할 때 등용 스킬을 사용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그런 만큼 어느 정도 상한선이 필요했다.

    “당장 받아들일 수 있는 플레이어들의 숫자는 40명 정도입니다. 그걸 기준으로 강선영 길드장님이 적당히 후보를 추려 주세요. 아마 러시아가 그렇게 나오면 다른 국가의 플레이어들도 제 휘하로 들어오기를 원할 겁니다.”

    서로 경쟁을 붙이라는 말이었다.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각 지부당 1~2명 정도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웬만하면 실력도 실력이지만 인맥 위주로 뽑아 주세요.”

    인망 있는 파티장 1명을 끌어오면 랭커 8명이 따라온다.

    추종자가 많은 랭커 1명을 끌어오면?

    비슷한 수준의 랭커 수십 명을 안전하게 현성의 세력권 안에 편입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강선영 길드장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참 빠릿빠릿하고 눈치가 좋으시단 말이지.’

    현성이 아랫사람이었을 때는 그런 점이 짜증이 났는데 윗사람이 되어 보니 참 편했다.

    세계 최초로 시작되는 전설 등급 아이템 공개 경매가 시작되었다.

    세계 각국의 최상위 랭커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경매가 시작되었다.

    “1,000억 스톤 달러!”

    “1,100억 스톤 달러!”

    “1,300억 스톤 달러!”

    호가가 무섭게 올라갔다.

    아마 자국에서 빵빵하게 지원을 받았을 것이다.

    ‘한국은 왜 이 모양인 거야?’

    현성이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신윤아를 바라봤다.

    한국 정부와 플레이어 협회는 이번 경매에서 한국 이모탈 길드 소속 플레이어들에게 아무런 지원도 해 주지 않았다.

    현성과 신윤아가 있기에 배가 불러 그런 건지, 아니면 이모탈 길드에 무언가를 주고 싶지 않은 건지 정부는 이번 경매에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좋든 싫든 자국민인데 밀어줄 생각을 안 하네.’

    오히려 타국보다 더 강하게 이모탈 길드를 경계했다.

    ‘뭐, 나야 나쁠 게 없지만.’

    한국 정부에서 이번 경매에 신윤아를 포함한 한국 이모탈 길드의 랭커들을 밀어줬다면?

    현성으로서도 정부에 빚을 지는 꼴이 된다.

    빚을 지면 당연히 그 빚을 갚아야 한다.

    하지만 정부가 나서지 않음으로 인해서 현성이 정부에 빚을 지는 상황을 피하게 되었다.

    ‘이야, 엄청 치열하네.’

    미국이 작정하고 나섰다.

    유럽, 중국, 러시아, 인도, 아랍 국가들이 계속해서 레이스를 이어 나갔지만, 안타깝게도 미국의 독주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경매에 나온 물량도 싹 쓸어 가겠다는 심산이네.’

    현성과의 거래로 비공개 구매를 하기로 한 20%의 수량에 만족할 미국이 아니었다.

    공개 경매에 나온 물건도 싹쓸이할 생각인 듯했다.

    ‘하지만 그걸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지.’

    현성이 신윤아에게 신호를 보냈다.

    “4,000억 스톤 달러.”

    신윤아의 한마디에 갑자기 경매장이 조용해졌다.

    기존 경매가는 3,200억 스톤 달러.

    갑자기 800억 스톤 달러가 뛰었다.

    갑자기 경매에 참가한 신윤아가 기존 호가보다 높은 가격을 불렀다.

    하지만 각국의 랭커들이 놀란 이유는 신윤아가 경매에 참여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신윤아는 현성의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신윤아가 경매에 끼어들었다?

    이건 절대 이길 수가 없는 전쟁이다.

    경매 대금을 챙기는 사람이 바로 현성이었으니까 말이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이모탈 길드 본사 랭커도 경매에 참여하는 거였어?’

    각국 지부 랭커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일제히 현성을 바라봤다.

    현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지부 랭커들의 시선을 무시했다.

    “4,000억 스톤 달러 나왔습니다! 더 이상 부르실 분 없으십니까?”

    그때 경매자 진행자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방금 전까지 최고가를 외쳤던 미국이 침묵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사우디아라비아, 중국, 러시아 등등.

    계속해서 호가를 따라붙던 세계 각국의 랭커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10초 안에 더 이상 호가를 부르시는 분이 없으시면 경매 종료하도록 하겠습니다. 10, 9……. 경매가 종료되었습니다. 신윤아 플레이어님 낙찰을 축하드립니다.”

    피어 스킬북은 결국 신윤아의 차지가 되었다.

    이모탈 길드 지부 소속 각국 랭커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피어 스킬북 하나 차지해 보겠다고 비행기를 타고 먼 거리를 날아왔다.

    한데 구매자가 이모탈 길드 본사 소속인 신윤아다.

    완전히 들러리가 된 것이다.

    그때 경매 진행자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럼 두 번째 물품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두 번째 전설 등급 스킬북이 등장했다.

    피어와 같은 정신계 공격 스킬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설 등급은 전설 등급이었다.

    각국의 랭커들은 피어 스킬북을 신윤아가 낙찰받았다는 사실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리고…….

    “1,500억 스톤 달러!”

    “2,000억 스톤 달러!”

    “2,500억 스톤 달러!”

    맹렬하게 호가를 올리며 경매에 뛰어들었다.

    * * *

    ‘분위기 좋네.’

    현성은 경매에 열중하고 있는 각국 랭커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현성이 이번 경매에 내놓은 전설 등급 아이템은 총 3개였다.

    피어 스킬의 경우에는 신윤아로 주인이 정해져 있었지만 나머지 2개는 아니었다.

    경매의 규칙에 따라 돈을 많이 낸 랭커가 전설 등급 아이템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운이 좋았어.’

    위기에 처한 파르티샤가 얼마 전 현성을 고용했다.

    한 번도 아니고 무려 세 번이나 고용했다.

    용병 고용 가격을 대폭 깎아 줬더니 전설 등급 몬스터가 나타날 때마다 현성을 부른 것이다.

    현성의 입장에서는 완전 땡큐였다.

    대량의 영웅 등급 아이템과 전설 등급 아이템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세 번의 용병 지원을 통해 현성이 얻은 전설 등급 아이템은 무려 10개였다.

    ‘가장 하급이기는 하지만 랭커들 입장에서는 눈이 뒤집히겠지.’

    현성에게 필요한 아이템은 따로 챙겨 놨다.

    성장형 스킬의 먹잇감으로 사용한 스킬북이 2개.

    루시아, 이누쿠소, 마분석에게 넘겨줄 요량으로 남겨 놓은 게 3개였다.

    10개 중에 하급이라고 할 수 있는 5개 중 2개를 경매에 내놓은 것이다.

    경매에 나온 물량을 기준으로 20%를 주면 되니 미국과 러시아는 전설 등급 아이템을 받으려면 좀 더 기다려야 했다.

    ‘다음 경매를 준비해야 하니 좀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겠어.’

    러시아에 줄 전설 등급 아이템도 하나 준비해 놔야 했다.

    파르티샤가 현성을 한두 번만 더 고용해 주면 해결될 것 같았다.

    경매가 끝났다.

    경매는 비공개로 이루어졌다.

    경매 참석 인원 또한 이모탈 길드 소속 플레이어로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하지만 이번 경매는 세계 각국의 강대국들이 펼친 대리전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단하네.’

    현성은 아이템을 수령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2명의 플레이어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과연 미국의 저력은 대단했다.

    ‘2개를 다 쓸어 갈 줄은 몰랐는데.’

    미국은 신윤아가 차지한 피어 스킬북을 제외한 2개의 전설 등급 아이템을 모두 독점했다.

    미쳤다고 생각될 정도로 돈을 퍼부으니 다른 강대국들도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수락하세요.”

    현성이 2명의 플레이어들에게 직업 전용 스킬 등용을 시전했다.

    2명의 플레이어는 망설이지 않고 현성의 등용 제의를 수락했다.

    “정말 대단하군!”

    “모든 스텟이 늘어났어!”

    미국 랭커 2명이 감탄사를 토해 냈다.

    이런 엄청난 버프 스킬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현성은 휘하에 들어온 두 사람에게 아이템을 넘겼다.

    “스킬북은 바로 익히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현성의 말에 스킬북을 받은 죠셉이 재빨리 대답하고는 그 자리에서 익혀 버렸다.

    “스킬이 마음에 드시는 모양입니다?”

    현성의 말에 죠셉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설 등급 스킬이지 않습니까? 거기다 제가 익히고 있던 스킬들과 상성도 좋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죠셉의 모습에 현성은 살짝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가장 안 좋은 건데…….’

    그냥 받은 것도 아니고 엄청난 거액을 투자해 구매해서 익혀 놓고 좋아하고 있다.

    ‘미국 랭킹 1위에 전 세계 랭킹 3위 안에는 항상 들던 양반이라고 들었는데.’

    현성의 등장과 신윤아의 약진.

    그와 더불어 이누쿠소와 마분석이라는 신흥 강자의 출현에 죠셉의 랭킹은 5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거기다 현성의 휘하에 들어오며 목줄까지 걸린 처지이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입니다. 이모탈 지부 미국 지부장으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현성과 죠셉이 훈훈하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 * *

    “고마워요.”

    피어 스킬북을 익힌 신윤아가 현성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공짜로 준 것도 아니고 빌려준 건데요, 뭐.”

    신윤아가 4,000억 스톤 달러를 투자해 피어 스킬북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현성이 그 돈을 빌려줬기 때문이다.

    어차피 경매 대금은 현성에게 들어온다.

    현성은 완전 면세 혜택을 받고 있기에 세금으로 빠져나가는 돈도 없다.

    현성의 입장에서는 그냥 자신의 돈 4,000억 스톤 달러를 한 바퀴 돌린 꼴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신윤아에게 4,000억 스톤 달러라는 채무가 생겼다.

    그 채무를 갚아야 하는 대상은 바로 현성이었다.

    “무이자로 기한 없이 빌려주신 거잖아요.”

    신윤아의 말에 현성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 족쇄로 달아 놓은 건데.’

    전설 등급 스킬북 하나로 이미 전설 등급 스킬과 아이템을 보유하고 있는 신윤아를 온전히 품을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이득이다.

    시스템상으로는 휘하에 두고, 사회적으로는 채무자로 만들어 버렸다.

    신윤아는 이제 좋든 싫든 이모탈 길드를 떠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신윤아가 안 떠나면?

    강선영도 안 떠난다.

    현성의 입장에서는 스킬북 하나로 제대로 뽕을 뽑은 것이다.

    ‘괜히 미안하네.’

    자신의 이런 시커먼 속내도 모르고 그저 고마워만 하고 있으니 양심이 콕콕 찔려 왔다.

    * * *

    현성은 경매가 끝난 후 러시아를 포함한 각국의 랭커 중 몇몇을 휘하로 들였다.

    다음 경매는 언제냐고 세계 각국이 아우성을 쳤지만 현성은 일단 무시했다.

    경매를 할 아이템이 있어야 경매를 할 게 아니겠는가.

    현성은 사냥과 용병 지원에 몰두하며 부지런히 포인트와 아이템을 긁어모았다.

    업적과 탐식의 서를 통해 스텟을 늘리는 일도 당연히 병행되었다.

    그 와중에 전 세계적으로 전설 등급 몬스터가 꾸준히 등장했다.

    하지만 현성에게 도움을 요청한 나라는 단 하나도 없었다.

    보험은 들어 놨지만 현성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전설 등급 몬스터를 사냥한 것이다.

    당장 입는 피해는 컸지만 미래를 대비한 결정이었다.

    아마 피해 규모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자체적으로 수습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했다면 현성에게 도움을 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경우는 없었다.

    세계 각국은 더 이상 전설 등급 몬스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철저한 대비 시스템을 만들어 훌륭하게 전설 등급 몬스터를 사냥했다.

    그렇지만 과한 자신감은 독이 되는 법이었다.

    프랑스의 경우가 그랬다.

    -크아아아앙!

    몬스터의 성난 포효와 함께 땅이 뒤틀렸다.

    지하에 매설된 수도관과 가스관이 터져 나가며 연쇄적인 폭발을 만들어 냈고 도시는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플레이어들은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몬스터를 제대로 공격하지 못했다.

    아니, 공격할 수가 없었다.

    “레이드가 불가능한 몬스터입니다!”

    “이모탈 길드에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자체적으로 레이드를 시도하던 프랑스 랭커들이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코드명 블랙 웜.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지렁이가 프랑스의 땅속을 헤집고 다니며 난동을 피웠다.

    애석하게도 프랑스의 플레이어들은 땅속에 숨어 있는 블랙 웜을 공격할 방법이 없었다.

    * * *

    “프랑스요?”

    “예, 당장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강선영 길드장의 말에 현성이 인천공항을 향해 이동했다.

    프랑스 역시 현성이 만든 투자회사에 투자금을 유치한 고객이다.

    받은 게 있으면 갚아 주는 게 인지상정이다.

    덤으로 전설 등급 아이템까지 얻을 수 있으니 현성으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현성이 비행기에 탑승해 프랑스로 향했다.

    그러는 와중에 새롭게 등장한 전설 등급 몬스터에 대한 브리핑이 이어졌다.

    “처음 등장한 건 이틀 전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자체적으로 레이드를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레이드 도중 블랙 웜이 땅속으로 숨어 버렸습니다. 그 후에는 아예 레이드 시도 자체가 불가능한 모양입니다.”

    땅속에서 나오지를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도발 스킬은 안 통했나요?”

    “예, 특별한 저항 스킬이 있는 건지 아니면 프랑스 탱커들의 수준이 낮아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 지금 프랑스는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건가요?”

    현성의 물음에 보고자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인명 피해가 크겠네요.”

    “아, 다행히 그렇지는 않다고 합니다. 프랑스 정부가 초기 대처를 잘한 덕에 국민들 대피가 빨랐습니다. 또 놈이 땅속에서만 움직이고 있어서 가스 폭발이나 상하수도 폭발로 인한 부수적인 피해 외에 직접적인 피해는 없다고 합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놈을 어떻게 잡아야 하나?’

    땅속에서 나오지를 않다 보니 군대의 도움을 받기도 힘들었다.

    “혹시 놈이 파 놓은 땅굴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나요?”

    “프랑스 플레이어들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기는 한데, 불가능했습니다. 블랙 웜이 땅을 파먹은 후에는 바로 항문으로 배설을 해서 땅굴이라고 할 만한 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으흠…….”

    상당히 골치 아픈 타입이었다.

    ‘직접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겠어.’

    일단 도발 스킬로 놈을 유인하는 것 말고는 마땅한 방법이 없어 보였다.

    프랑스는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도로가 바스러지거나 부서져서 차량은커녕 사람도 다니기 힘들어 보였다.

    건물들 역시 반쯤 기울어져 있거나 아예 무너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인명 피해가 크지 않다는 게 기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크우어어어!

    그때 커다란 포효와 함께 족히 수천 마리는 되어 보이는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

    현성이 적지 않게 당황했다.

    ‘왜 갑자기 몬스터들이……?’

    “막아!”

    “막아 봐야 개죽음이야! 일단 피해!”

    플레이어로 보이는 이들이 몬스터에게 쫓기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왜 몬스터들이 폐허로 변한 도시를 활보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현성을 안내한 프랑스 플레이어들도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것 같았다.

    ‘일단 막고 보자.’

    타악!

    현성이 가볍게 몸을 날렸다.

    현성의 뒤를 따라 프랑스 플레이어들이 각자 무기를 뽑아들고 몬스터들에게 달려들었다.

    현성을 마중 나온 이들은 랭커급 실력자는 아니었지만 모두가 300레벨을 넘긴 고레벨 플레이어였다.

    화르르륵!

    현성이 화염의 서를 사용했다.

    몬스터들의 몸에 붙은 불길이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캬아아악!

    몬스터들이 비명을 지르며 한 줌의 재로 변했다.

    화염의 서는 명색이 준신화 등급 스킬이었다.

    파괴력 면에서 흑뢰룡의 숨결에 비해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건 전설 등급 몬스터를 상대할 때 이야기다.

    희귀 등급과 영웅 등급 몬스터들 정도는 화염의 서로도 충분했다.

    “윈드 스톰!”

    “파이어 스톰!”

    현성에게 합류한 프랑스 고레벨 플레이어들이 각자 스킬을 난사하며 순식간에 몬스터들을 정리했다.

    “왜 갑자기 도시에 몬스터들이 나타난 겁니까? 차원 게이트가 추가로 열린 겁니까?”

    현성의 물음에 구원받은 플레이어들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게…… 던전 입구가 무너졌습니다.”

    “예?”

    현성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프랑스 고레벨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설명이 부족했음을 느꼈는지 구원받은 플레이어가 자세한 정황을 이야기했다.

    “블랙 웜의 짓입니다. 놈이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지반이 약해졌는데, 그러면서 차원 게이트를 봉쇄하고 있던 던전 입구가 망가져 버렸습니다.”

    “망할 놈의 지렁이 새끼!”

    “당장 잡아 죽여야 하는데!”

    프랑스 고레벨 플레이어들이 분노한 표정으로 길길이 날뛰었다.

    도시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

    당장 블랙 웜을 사냥한다고 해도 도시 복구에 천문학적인 자금이 날아가게 생겼다.

    한데 여기다 지반 붕괴로 던전 출입구가 부서지면 더 큰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크아아아앙!

    그때 멀리서 다시금 몬스터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현성과 프랑스 고레벨 플레이어들이 재빨리 사건 현장으로 이동했다.

    ‘빌어먹을.’

    현성이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수천 마리의 몬스터가 무너진 던전 출입구를 통해 빠져나오고 있었다.

    방금 전과 동일한 상황인 것이다.

    ‘블랙 웜을 잡아야 해.’

    놈을 내버려 두면 이 도시가 아니 프랑스 전역이 몬스터들의 천국으로 변할 것이다.

    현성이 화염의 서를 흩뿌리고 야생의 본능 스킬에 집중했다.

    하지만 날뛰는 몬스터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마력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드드드득!

    그때 멀리서 건물들이 연달아 붕괴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현성이 공간 이동 계열 스킬들을 연속적으로 사용해 사건 현장으로 이동했다.

    콰지지직!

    아스팔트가 갈라지고 건물 벽에 균열이 일어났다.

    ‘땅속에 있구나.’

    하지만 여전히 야생의 본능 스킬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땅속 깊숙한 곳에 있는 모양이었다.

    파지지직!

    현성이 땅을 향해 흑뢰룡의 숨결을 사용해 봤다.

    꽈아아아앙!

    하지만 별다른 타격이 없었다.

    땅이 천연 방어막이 되어 준 것이다.

    ‘도대체 이놈을 어떻게 잡지?’

    블랙 웜을 잡을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현성은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스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흙을 파고 땅속으로 기어 들어갈 수 있는 스킬은 없었다.

    설사 들어간다고 해도 문제였다.

    현성은 육체를 가진 살아 숨쉬는 사람이다.

    당연히 땅속 전투에서는 블랙 웜보다 환경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흙속에 매몰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

    블랙 웜을 공격할 수단을 생각하던 현성의 머릿속에 뚱이의 존재가 떠올랐다.

    ‘뚱이는 정령이야. 벽도 가볍게 통과할 수 있다고.’

    정령인 뚱이는 굳이 벽을 파괴하지 않아도 유령처럼 통과하는 게 가능했다.

    “뚱아!”

    현성이 뚱이를 소환했다.

    파지직!

    작은 스파크와 함께 귀차니즘 가득한 표정의 뚱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장 들어가서 그놈 잡아.”

    현성이 말에 뚱이가 의욕 없는 얼굴을 하고는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표정은 참 뺀질뺀질하게 생겼는데 일 하나는 성실하게 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땅속으로 스며든 뚱이가 갑자기 현성의 마력을 쭉쭉 빨아들였다.

    꽈아아아아앙!

    그와 함께 대지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하기 힘들었다.

    엄청난 강진이 발생한 것처럼 연쇄적으로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현성은 답답했다.

    뚱이가 블랙 웜과 전투를 치르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 상황이 유리한지 불리한지 알 수가 없었다.

    ‘마력 발전소 역할이나 충실히 하자.’

    지금 현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뚱이에게 지속적으로 마력을 전달해 주는 것뿐이었다.

    “뭐야?”

    “최현성 플레이어가 블랙 웜 사냥을 시작한 건가?”

    갑작스럽게 시작된 엄청난 지진에 프랑스 플레이어들이 적지 않게 당황했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던전에서 빠져나온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차원 게이트 앞을 틀어막는 것뿐이었다.

    프랑스 플레이어들은 최선을 다해 몬스터 웨이브를 진압했다.

    프랑스의 랭커들과 고레벨 플레이어들이 모두 소집되었기에 몬스터 웨이브 진압은 의외로 손쉽게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문제가 하나 생겼다.

    블랙 웜이 뚱이와 전투를 벌이며 날뛰기 시작하자 지반 붕괴가 가속화된 것이다.

    건물들이 무너지고 차원 게이트를 봉인하고 있던 던전 출입구들이 연쇄적으로 파괴되었다.

    도시가 난장판으로 변했다.

    ‘이놈이 왜 이렇게 안 죽지?’

    현성은 점점 초조해졌다.

    뚱이가 빨아먹는 마력과 체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블랙 웜과 전투를 벌이는 뚱이가 흑뢰룡의 숨결을 연속적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성의 마력과 체력이 빠른 속도로 고갈되어 갔다.

    -캬아아아악!

    그때 흉포한 포효와 함께 일단의 와이번 무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와이번 던전을 막고 있던 던전 출입구가 파괴된 듯했다.

    그 모습을 목격한 현성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굳이 찾아갈 필요가 없네.’

    도시락이 알아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아아아아아!”

    현성이 광역 도발 스킬을 사용했다.

    하늘로 날아오르던 와이번 무리가 일제히 현성을 향해 날아들었다.

    화르르륵!

    그 순간 화염의 서가 하늘을 뒤덮었다.

    -끼이이익!

    와이번들이 비명을 토해 내며 죽어 나갔다.

    와이번들이 화염에 휩싸이며 현성의 마력과 체력이 빠르게 회복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했다.

    ‘부지런히 움직이자.’

    현성은 뚱이와의 거리를 적절히 조절하며 연속적으로 도발 스킬을 사용했다.

    그와 함께 도시 전역에 흩어져 있던 몬스터들이 현성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현성은 전설 등급 도발 스킬을 익힌 상태였다.

    당연히 끌리는 어그로 자체가 과거 일반 등급 도발 스킬을 사용할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현성은 사방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시락들이 알아서 모여들고 있었다.

    현성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화염의 서를 이용해 빠르게 정리했다.

    아공간을 통해 전리품을 챙기고 탐식의 서를 사용해 스텟을 노가다를 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현성이 부지런히 마력 충전소의 역할을 소화하고 있는 동안 지하에서 벌어지는 블랙 웜과 뚱이의 전투는 점점 더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지진은 더 심해져서 제대로 서 있는 건물이 없을 정도였고 지반의 뒤틀림이 심해져 갑자기 땅이 푹푹 꺼지거나 솟아올랐다.

    ‘뚱아, 밖으로 유인 좀 해 봐라.’

    현성의 명령도 뚱이는 요지부동이었다.

    ‘하긴 거리가 더 멀어지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긴 하지.’

    정령술로 뚱이를 부릴 수 있는 거리에는 큰 제한이 없다.

    문제는 현성과 뚱의 거리가 1킬로미터 이상 벌어지는 경우였다.

    그때부터는 지속적으로 마력 손실이 발생한다.

    뚱이는 지금까지 현성이 전달해 주는 마력을 단 1할의 손실도 없이 100% 받아들였다.

    현성과의 거리를 1킬로미터 안쪽으로 유지하며 블랙 웜과의 전투를 이어 나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실로 훌륭한 성과였다.

    ‘몬스터도 다 떨어졌는데 큰일이네.’

    도시락이 바닥났다.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 도발 스킬을 사용해도 현성에게 다가오는 몬스터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하면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현재 현성은 뚱이를 통해 원거리 스킬만 사용하고 있는 상태다.

    근접 전투 능력이 봉인된 것이다.

    이건 현성의 전투력이 절반 이상 줄어든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

    그때 갑자기 뚱이에게 전달되던 마력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블랙 웜이 더 깊은 땅속으로 도주한 것이다.

    ‘이대로는 놓치겠어.’

    여기서 놈을 놓치면 완전히 닭 쫓던 개의 꼴이 된다.

    ‘뭔가 방법이 없나?’

    현성이 다급하게 구매창을 열었다.

    하지만 마땅한 스킬이 보이지 않았다.

    땅을 움직이거나 갈라지게 해서 적을 공격하는 스킬은 많았다.

    하지만 땅을 파는 스킬이 없었다.

    ‘비행기 안에서 봤던 거랑 똑같네.’

    온통 공격 계열 스킬밖에 없었다.

    초조해하던 현성의 눈에 아이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하급 작업용 골렘 - 전설 등급

    -마석을 동력원으로 사용해 가동시킬 수 있습니다.

    -작업용입니다.

    -땅을 잘 팝니다.

    -집이나 성을 잘 짓습니다.

    -자동 복구 기능이 탑재되어 있습니다.

    -300레벨의 고정 레벨을 가지고 있습니다.

    -레벨 업이 불가능합니다.

    -핵이 파괴되지 않는 한 소멸되지 않습니다.

    -핵을 만진 당사자가 마스터가 됩니다.

    -판매자 : 불카드곤

    -판매가 : 999,999,999,999포인트

    현성이 구매했던 인간형 골렘이 아닌 작업용 골렘.

    ‘일단 사 보자.’

    이대로 블랙 웜을 놓칠 수는 없었다.

    현성이 실드 스킬을 사용해 외부의 시야를 차단했다.

    -하급 작업용 골렘 - 전설 등급을 구매하시겠습니까? 한번 구매한 물품은 환불이나 교환이 불가능합니다.

    -[예] [아니오]

    현성이 예를 선택했다.

    화악!

    밝은 빛무리와 함께 거대한 강철 거인과 구체 하나가 현성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성이 구체를 만졌다.

    -골렘의 마스터로 등록되셨습니다.

    -전설 등급 작업용 골렘이 기동을 시작합니다.

    구체가 강철 거인의 동체 속으로 흡수되었다.

    화악!

    그와 함께 강철상처럼 보이던 강철 거인이 동체를 움직였다.

    “땅을 파!”

    다급한 현성의 외침에 강철 거인의 팔이 넓적한 삽처럼 변했다.

    퍼억! 퍼억!

    그러더니 맹렬한 속도로 땅을 파고 들어갔다.

    현성은 강철 거인의 몸 위에 올라탔다.

    ‘엄청 빠르네.’

    강철 거인은 두더지보다 땅을 잘 팠다.

    양손으로 땅을 파고 두 발로 흙을 뒤로 밀어 냈다.

    인간과 비슷한 외형을 가지고 있던 강철 거인의 외형이 어느새 두더지와 비슷한 형태로 변해 있었다.

    ‘형태 변환이 정말 자유롭네.’

    인간형 골렘들보다 변화의 폭이 월등히 컸다.

    작업용 골렘을 타고 땅속으로 들어가자 점점 시야가 어두워졌다.

    ‘공기도 점점 줄어드는 것 같고.’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땅속에 매몰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여차하면 장거리 공간 이동용 스크롤을 사용해서 탈출해야겠네.’

    작업용 골렘이 열심히 땅을 파고 들어가자 현성과 뚱이의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땅이 미친 듯이 진동하네.’

    깊은 땅속은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사방에서 흙이 밀려들었고 천장의 흙이 무너져 내렸다.

    현성과 작업용 골렘의 몸을 보호해 주던 실드에 가해지는 압력이 점점 극심해졌다.

    작업용 골렘은 묵묵하게 땅을 팠고 현성은 최선을 다해 실드를 유지했다.

    쿠우웅!

    그러던 도중 칠흑빛 동체가 현성의 실드와 충돌했다.

    ‘드디어 찾았다.’

    현성이 작업용 골렘을 아공간에 넣었다.

    그 후 흑뢰룡의 숨결과 화염의 서에 휩싸인 용혈검을 블랙 웜의 동체에 찔러 넣었다.

    -쿠에에에엑!

    블랙 웜이 처절한 비명을 터트리며 몸을 마구 비틀었다.

    현성은 실드 스킬을 최대한 유지하며 버텼다.

    아니, 용혈검을 지지대 삼아 블랙 웜의 몸속으로 점점 파고들어 갔다.

    블랙 웜의 몸에서 강력한 산성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현성을 녹여 버리려는 의도였다.

    현성이 방어 스킬에 마력을 더욱 강하게 밀어 넣었다.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블루 드레이크의 몸속 구경도 해 봤던 현성이다.

    블랙 웜의 몸속도 얼마든지 파고들어 갈 수 있었다.

    용혈검, 흡혈공, 흡혈왕의 액세서리 세트가 블랙 웜의 체액을 쪽쪽 빨아먹었다.

    그와 동시에 소모되었던 체력과 마력이 빠르게 차올랐다.

    현성이 블랙 웜의 몸속에서 공격을 가하고 뚱이가 밖에서 공격을 가했다.

    -꾸웨에에엑!

    블랙 웜이 거칠게 저항했다.

    가가가각!

    블랙 웜이 단단한 지반에 몸을 비벼 현성을 떨쳐 내려고 했다.

    ‘절대 안 떨어진다.’

    현성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구구구구구!

    블랙 웜이 엄청난 속도로 땅속을 질주하며 몸을 마구 비틀었다.

    몸속으로 파고든 현성을 튕겨 내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이미 블랙 웜의 몸속에 안전하게 자리를 잡은 현성을 떼어 낼 수는 없었다.

    현성은 판매용으로 보관하고 있던 전설 등급과 영웅 등급 무기들을 블랙 웜의 몸 이곳저곳에 꽂아 지지대로 삼았다.

    -꾸웨에에엑!

    블랙 웜이 아무리 발광을 해도 현성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염의 서를 이용해 블랙 웜의 몸을 내부에서부터 불태웠다.

    화염의 서는 마력을 원료로 타오르는 불꽃이다.

    그런 화염의 서에게 있어 마력으로 가득 찬 블랙 웜의 몸은 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현성은 블랙 웜에게서 흡수한 체력과 마력을 발판 삼아 지속적으로 화염의 서에 마력을 불어 넣어 주었다.

    -캐에에엑!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거칠게 저항하던 블랙 웜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졌다.

    ‘이제 끝이다.’

    파지지직!

    현성이 강한 파괴력을 가진 흑뢰룡의 숨결을 뿜어냈다.

    뚱이 역시 외부에서 블랙 웜을 공격했다.

    -키이이익!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은 블랙 웜이 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죽은 것이다.

    ‘이겼다.’

    현성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놈은 뭘 주려나?’

    분명 전설 등급 아이템이 나올 것이다.

    현성은 차분히 기다렸다.

    ‘어?’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잔존 마력이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이게 뭐야? 대체 왜 이래?’

    현성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기다렸다.

    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설마 꽝인 거야?’

    현성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블랙 웜의 사체를 바라보았다.

    몬스터 사냥에 성공하면 플레이어는 세 가지 형태 전리품 중 하나를 받는다.

    가장 많이 나오는 게 몬스터의 사체.

    그다음이 마석.

    가장 잘 나오지 않는 게 아이템이다.

    현성은 1레벨 플레이어다.

    그 덕에 그간 전설 등급 몬스터를 사냥해 아이템이 나오지 않은 적이 없었다.

    가끔씩 마석이 나오기는 했지만 거의 아이템이 나왔다.

    전설 등급 몬스터를 사냥해서 사체 그 자체가 전리품으로 떨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운도 지지리 없지.’

    여태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형태의 전리품인 몬스터 사체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사체, 마석, 아이템.

    아무리 레벨 차이가 많이 나더라도 확률상 가장 많이 나오는 전리품은 몬스터 사체였다.

    사실 지금까지 전설 등급 몬스터가 사체만 남지 않았던 것은 현성의 운이 좋았던 거였다.

    ‘이 큰 놈을 어떻게 지상까지 가지고 가냐?’

    몬스터의 사체도 돈이 된다.

    특히 전설 등급 몬스터의 경우 꽤 큰돈이 될 것이다.

    문제는 족히 수십 미터가 넘어가는 블랙 웜의 크기였다.

    아공간에 들어가지도 않는 사이즈다.

    ‘잠깐.’

    한참 블랙 웜의 사체를 옮길 생각을 하던 현성의 머릿속에 탐식의 서가 떠올랐다.

    ‘그냥 먹이로 주는 게 좋겠다.’

    그동안 나온 몬스터 사체는 모두 탐식의 서에 먹이로 줬다.

    전설 등급 몬스터의 사체는 처음이기에 가지고 갈 생각을 하긴 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먹어라.’

    현성이 탐식의 서를 발동시켰다.

    콰직! 콰직!

    탐식의 서가 게걸스럽게 블랙 웜의 사체를 먹어 치웠다.

    그때였다.

    -액티브 스킬 탐식의 서 - 유일 영웅 등급이 성장했습니다.

    -액티브 스킬 탐식의 서 - 유일 영웅 등급이 성장했습니다.

    -액티브 스킬 탐식의 서 - 유일 영웅 등급이 성장했습니다.

    ……후략……

    그동안 무엇을 먹여도 전혀 성장할 기미가 없었던 탐식의 서의 성장 메시지가 연속적으로 떠올랐다.

    ‘이게 뭐야?’

    온갖 종류의 몬스터 사체를 탐식의 서에게 먹잇감으로 던져 주었다.

    하지만 성장한다는 메시지가 뜬 적은 없었다.

    ‘설마 상위 개체를 먹어야만 성장하는 거야?’

    그간 현성이 탐식의 서에게 먹잇감으로 준 것은 일반, 희귀, 영웅 등급 몬스터들의 사체였다.

    전부가 유일 영웅 등급인 탐식의 서보다 낮거나 동급의 몬스터 사체였다.

    하지만 지금 먹어 치우고 있는 건 전설 등급 몬스터의 사체였다.

    ‘입이 아주 고급이시구먼.’

    자신의 등급보다 상위 등급 몬스터의 사체를 섭취해야만 성장하다니?

    최하 수조, 최고 10조 이상의 아이템으로 변할 가능성 있는 전설 등급 몬스터의 사체를 먹고 성장한다니, 아주 기가 막혔다.

    현성은 허탈한 표정으로 탐식의 서가 블랙 웜의 사체를 먹어 치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탐식의 서가 탐식한 사체의 스텟 중 일부를 영구적으로 흡수했습니다.

    -체력 스텟이 4 증가했습니다.

    그때 현성에게 스텟이 늘어났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어라?’

    아직 블랙 웜의 사체 중 일부만 먹어 치웠을 뿐이다.

    그런데 무려 4가 증가했다.

    현성이 기대감 어린 시선으로 탐식의 서를 바라보았다.

    -탐식의 서가 탐식한 사체의 스텟 중 일부를 영구적으로 흡수했습니다.

    -체력 스텟이 5 증가했습니다.

    다시금 스텟이 늘어났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실망감 가득하던 현성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연속적으로 탐식의 서가 성장했다는 메시지와 체력 스텟이 상승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탐식의 서가 블랙 웜의 사체를 작은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말끔하게 먹어 치웠다.

    ‘대박.’

    현성이 경악한 표정으로 탐식의 서로 인해 상승한 체력 스텟을 하나로 합쳐 보았다.

    ‘27.’

    무려 체력 스텟이 27이나 늘어났다.

    ‘이건 전혀 손해가 아니야.’

    전설 등급 아이템이 나온다고 해도 어차피 현성이 사용할만한 게 아니면 모두 팔아 치워야 한다.

    ‘돈과 포인트는 충분해.’

    현성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강해지는 것이었다.

    지구 물품 판매와 전설 등급 아이템 판매로 포인트와 돈은 착실하게 불어나고 있다.

    ‘전설 등급 몬스터의 사체가 더 많이 필요해.’

    현성은 방금 전까지 몬스터 사체가 전리품으로 나와 적지 않게 실망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이템이나 마석보다 사체가 더 필요해.’

    전리품에 대한 현성의 선호도가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