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거래
이모탈 길드의 공격적인 스카우트가 시작되었다.
무방비로 있던 대기업들은 랭커들이 계약 해지를 신청하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했다.
“이런 머저리 같은 놈들, 도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한 거야?”
오성 그룹 전략기획실.
이현국 상무이사가 노발대발하며 부하 직원들을 다그쳤다.
“죄송합니다!”
“설마 이모탈 길드 쪽에서 역으로 스카우트를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서.”
“하아!”
이현국 상무이사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골치가 아팠다.
법이 개정되며 플레이어 스카우트가 손쉽게 변했다.
그건 플레이어 협회가 열심히 키운 과실을 빼앗기 위해서였다.
한데 오히려 반대로 역공을 당해 버렸다.
과실을 빼앗기는커녕 반대로 빼앗겨 버린 것이다.
이런 결과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이모탈 길드일 줄이야.’
처음에는 이모탈 길드가 아니라 손을 잡았던 대기업 중 하나가 배신을 한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한데 아니었다.
이모탈 길드는 오성 그룹뿐 아니라 국내에 있는 거대 길드 랭커들을 무차별적으로 스카우트했다.
‘이놈들이 미친 건가?’
오죽하면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대한민국에서 대기업이 키운 과실을 도둑질하는 대담한 놈이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같은 대기업이 아니라면 경쟁자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전에 대비를 했다.
‘담합으로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법이 개정되기 전.
대기업들은 각자 합의를 했다.
상대의 과실을 탐해 서로 싸우지 말고, 적당히 과실을 나눠 먹기로 말이다.
싸우면 서로에게 손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모두 순순히 합의했다.
한데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이모탈 길드가 대기업들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이런 배은망덕한 놈들.’
오성 그룹을 버리고 신생 길드인 이모탈 길드로 소속을 옮겨 버린 랭커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모탈 길드로 떠난 랭커들에게 보복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오성 그룹 소속으로 끌고 오기 위해 싹싹 빌어야 하는 형국이었다.
“이종만 이 머저리 같은 새끼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괜히 이종만 장관에 대한 원망이 치솟았다.
이모탈 길드에게 손을 쓰라는 지시를 내린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라는 말인가.
이현국 상무이사가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이종만 장관을 가만두지 않을 참이었다.
-여보세요.
“저 오성 그룹 이현국입니다. 제가 분명히 이모탈 길드 문제 해결해 달라고 하지 않았었나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입니다.”
-미안하네.
“미안이고 나발이고 무조건 해결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오성 그룹이 그렇게 우습게 보입니까? 지금 저랑 장난하세요?”
이현국 상무이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전에 통화했을 때는 그래도 이종만 장관의 체면을 챙겨 줄 여유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자기 밥그릇을 빼앗기게 생겼으니 고운 말이 나올 수가 없었다.
-그게…… 걸고넘어질 수 있는 게 없네. 신생 길드다 보니 그간의 행적이나 세금 문제로 꼬투리를 잡을 수도 없고…….
“합법적인 방법으로만 하려고 하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세요. 증거를 조작해서라도 당장 길드 등록을 취소시키라 이 말입니다.”
-그, 그게…….
이종만 장관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말을 이어 나가지 못했다.
“왜 못 하시겠습니까?”
-이야, 대기업이 무섭다, 무섭다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현직 장관한테 막말을 다 하고.
갑자기 수화기에서 낯선 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 누구야?”
이현국 상무이사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나? 이모탈 길드 자문위원장인데?
“최현성 플레이어?”
-맞아. 근데 넌 왜 우리 이모탈 길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 방금 통화한 내용 다 녹음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냐?
뚝!
이현국 상무이사가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빌어먹을!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종만 장관과 최현성이 왜 같이 있단 말인가.
열심히 머리를 굴려 봤다.
하지만 결론은 하나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종만, 이 개자식!”
이종만 장관의 배신.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 * *
“중간에 갑자기 전화를 끊어 버리다니, 매너가 없는 놈이네.”
현성이 태연한 표정으로 통화가 끊어진 스마트폰을 조작해 방금 전 통화 내용을 녹음한 녹취 파일을 자신의 웹하드로 옮겼다.
“자.”
현성이 스마트폰을 던졌다.
이종만 장관이 황급히 다가와 자신의 스마트폰을 붙잡았다.
“넌 이제 끝난 거 같다, 그치?”
현성의 말에 이종만 장관의 표정이 울상으로 변했다.
‘젠장, 이항구 장관 실각시킨 범인이 이놈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신경 껐어야 했는데.’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또 최현성을 최대한 품으려 했던 전 정권과 달리 현 정권은 그럴 의도가 없으니 협박을 해도 먹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비리 혐의가 발각되어도 무혐의로 유야무야 무마시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언론도 자신들의 편이니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설마 자신밖에 모르는 비밀을 가지고 협박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야, 너 진짜 큰일 났다. 대통령한테도 찍히고 대기업한테도 찍히면 이 나라에서 어떻게 사냐?”
현성의 말에 이종만 장관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이종만 장관은 신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
그래서 차원 게이트 관리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처음 최현성이 좋은 일로 찾아왔다고 했을 때는 백기를 드려는 것으로 착각했다.
이모탈 길드의 투자금은 중국에서 흘러나온 스톤 달러였다.
이종만 장관은 외환 관리법 위반으로 투자금의 한국 유입을 막거나 막대한 세금을 물리려고 했다.
일단 급하게 이모탈 길드의 법인 계좌에 스톤 달러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외 계좌 입출금부터 막았다.
해외 계좌 입출금이 정지되자 최현성이 며칠 전에 찾아와 잔뜩 화를 내고 갔다.
오늘 최현성이 다시 찾아왔을 때 이종만 장관은 길드 법인 계좌의 해외 출입금을 풀어 달라고 사정하러 온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최현성이 이종만 장관에서 내민 것은 두툼한 서류 뭉치였다.
서류 뭉치 안에는 이종만 장관이 현 대통령 모르게 빼돌린 비자금 장부와 차명 계좌 통장이 들어 있었다.
이종만 장관은 현 대통령이 정치 초년병으로 초임 국회의원이 되었을 무렵 보좌관으로 인연을 맺었다.
그 후 온갖 굳은 일을 도맡아 하며 신뢰를 쌓았다.
그 결과 현재에 이르러서는 최측근 중에 최측근이 되었다.
‘이걸 어떻게 찾은 거야?’
현 대통령은 상당히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아랫사람들을 제대로 챙겨 주지도 않았다.
실컷 부려 먹다 토사구팽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종만 장관은 보좌관 시절 자신의 살길을 마련하기 위해 비밀리에 비자금을 조성했다.
그런데 안 걸렸다.
그 후 점점 빼돌리는 비자금의 액수가 커졌다.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 떡값을 받으면 그중 일부를 빼돌리는 식으로 삥땅을 쳤다.
그게 아니면 대통령의 이름을 팔아 혼자 떡값을 받아 꿀꺽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차명 계좌로 비자금을 모을 때 이종만 장관도 차명 계좌를 만들어 비자금을 모았다.
그렇게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 현재에 도달했다.
비자금 장부와 차명 계좌는 보좌관들에게도 맡기지 않고 이종만 장관이 직접 관리했다.
당연히 비자금 장부와 차명 계좌 통장의 위치와 존재를 아는 사람도 자신뿐이다.
한데 그게 떡하니 최현성의 손에 들려 있었다.
-너 이거 대통령이 알면 가만히 안 있겠다, 그치?
최현성의 그 한마디에 이종만 장관은 무릎을 꿇었다.
검찰과 언론을 이용하면 비자금 장부와 차명 계좌를 묻어 버릴 수는 있다.
검찰이 무혐의를 때리고 언론이 입 다물고 있으면 된다.
하지만 검찰과 언론을 동원하면 자신의 비리가 대통령의 귀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믿었던 측근이 수십 년 동안 자신의 등에 빨대를 꽂고 비자금을 빨아먹었다?
현 대통령이 절대 용서할 리 없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국민이 아니라 대통령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난 이제 어떻게 하나.’
대기업의 귀에 자신과 최현성이 같이 있다는 사실이 들어갔다.
이제 곧 대통령의 추궁이 들어올 것이다.
“야.”
“네?”
현성의 부름에 이종만 장관이 화들짝 놀랐다.
“너 혹시 대통령 비리 중에서 한 방에 훅 갈 만한 치명적인 거 알고 있냐? 검찰이나 언론이 덮기 불가능할 정도로 큰 거.”
뜨끔했다.
당연히 모를 리가 없었다.
대통령에게 팽 당할까 봐 비자금도 빼돌린 인물이 이종만 장관이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대통령의 숨통을 단칼에 끊어 버릴 수 있는 비수 몇 개는 준비해 놨다.
문제는 그 비수를 쓰면 자신도 같이 죽는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자폭용 폭탄이었다.
“모릅니다. 그런 거 없습니다!”
“아닌데. 없을 리가 없는데. 네가 대통령 최측근이라며? 그런데 그런 것도 몰라?”
“모릅니다!”
현성의 물음에 이종만 장관이 힘차게 대답했다.
그건 죽어도 말할 수가 없다.
지금 이종만 장관이 현성에게 끌려다니는 이유가 뭔가.
대통령에게 찍히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데 대통령의 비리를 현성에게 공개한다?
그럼 자동으로 대통령에게 찍힌다.
“야, 그럼 좀 약한 건 없냐?”
현성의 물음에 이종만 장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도 대통령한테 댈 만한 핑곗거리가 있어야 할 거 아냐? 비자금 장부나 차명 계좌 통장 말고.”
현성의 말을 들은 이종만 장관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맞아. 내가 실각하면 효용이 사라져. 최현성은 내가 실각 당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대통령 역시 실각시킬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저 자신과 대통령을 꼭두각시 삼아 이용하려는 게 최현성의 목적이었다.
“기왕이면 대통령에게 치명적인 건으로 걸고넘어져야 앗 뜨거워라 할 거 아니야? 너 말고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는 비리 정보 같은 거면 네가 의심받을 일도 없잖아. 그런 거 없어?”
“이, 있습니다!”
“뭔데?”
“그게 국회의원 시절 음주 운전으로 사람을 치어 죽이고 암매장하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뭐?”
현성이 화들짝 놀랐다.
그냥 음주 운전 뺑소니 사망 사고도 아니고 암매장이 왜 나온다는 말인가.
“그게 음주 운전 하다가 사람을 차로 치어 죽였는데, 술이 너무 취해 상황 판단이 안 됐는지 시체를 차에 싣고 산으로 갔다가 술기운에 그대로 잠들어 버린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정신 차린 후에는 그냥 일반 교통사고로 위장시켰습니다.”
“운전은 자기가 했다고 하고?”
“아닙니다! 그 자리에 없었던 운전기사에게 대신 뒤집어씌웠습니다.”
“운전기사가 순순히 받아들였어?”
“돈을 주고 입막음시켰습니다. 어차피 단순 교통사고면 사망 사고라도 형량이 높지 않으니까요.”
“그 운전기사는 지금 뭐 하고 있는데?”
“필리핀으로 이민 간 뒤 잠적했습니다.”
“호오, 그래? 증거는?”
“사고 당시 블랙박스 영상을 제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 사실은 대통령도 모르겠네?”
당연했다.
대통령은 블랙박스 영상이 영구 삭제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당장 그 영상 나한테 가지고 와.”
현성의 말에 이종만 장관이 재빨리 스마트폰을 조작해 내밀었다.
웹하드에 영상을 보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영상을 재생시켰다.
사고 장면이 명확하게 찍혀 있었다.
놀라 소리를 지르는 대통령의 목소리도 확실하게 녹음이 되어 있었다.
그 후 쓰러진 사람을 차에 태우고 야산으로 향하는 장면도 있었다.
단지 아쉬운 게 있다면 블랙박스의 각도였다.
대통령의 얼굴이 명확하게 나오지 않았다.
그저 뒷모습이 살짝 스치듯 나왔을 뿐이다.
“이걸로 대통령을 아예 보내 버리기는 좀 힘들겠지?”
“증거는 충분합니다. 목소리도 그렇고 영상에 스치듯 나왔던 옷과 대통령이 그 당시 지역 행사에 참여했을 때 입었던 옷이 동일하니까요. 또 운전기사와 체형도 완전히 다릅니다. 하지만 아마 언론이 입을 닫고 검찰은 눈을 가릴 겁니다. 하지만 이 영상이 인터넷에 퍼지면 퇴임 후에는 분명히 문제가 될 겁니다.”
대통령을 보내 버리기는 무리다.
하지만 협박은 가능하다.
“이 영상을 인터넷에 퍼트린다고 하면 효과가 상당히 좋을 겁니다.”
이종만 장관의 말을 들은 현성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 * *
“너 이 자식, 무슨 일 처리를 이따위로 한 거야?”
박기만 대통령이 노성을 터트렸다.
방금 전 대기업 회장들과의 전화 통화에서 개망신을 당했다.
대놓고 뭐라고 한 건 아니다.
하지만 은근히 돌려서 박기만 대통령을 압박했다.
특히 약속했던 대가를 받기는커녕 전에 받은 것도 토해 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 차원 게이트 관리부 장관 다른 놈으로 바꿔 줘? 믿고 맡겼더니 일 처리를 이따위로밖에 못 해?”
박기만 대통령의 노성에도 이종만 장관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오랜 측근 생활로, 박기만 대통령이 화가 났을 때 변명을 해 봐야 자신만 손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 설명해 봐.”
한참 노성을 터트리던 박기만 대통령이 화가 좀 가라앉았는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최현성 플레이어에게 약점을 잡혔습니다.”
“평소에 처신을 어떻게 하고 다닌 거야? 너 내일 당장 자진 사퇴해!”
이종만 장관의 말에 박기만 대통령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고 다니다가 약점을 잡힌 거야? 나랑 관련된 일은 아니지?”
박기만 대통령의 물음에 이종만 장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최현성 플레이어가 잡은 약점이 제 것이 아니라 각하 겁니다.”
“뭐?”
“최현성 플레이어가 이은미 씨 사고 블랙박스 영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은미가 누군데?”
박기만 대통령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각하께서 국회의원 시절 일어났던 교통사고 있지 않습니까?”
박기만 대통령의 얼굴이 확 하고 일그러졌다.
“최현성 플레이어가 사고 블랙박스 영상을 가지고 있다고? 그거 확실히 파기하지 않았어?”
“당시 운전기사였던 놈이 파기 전에 따로 복사본을 만들어 놓은 모양입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보험 삼아 보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망할 자식이!”
박기만 대통령이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런데 최현성 플레이어가 그 사건을 어떻게 알고 그 망할 놈에게서 블랙박스 영상을 받은 거야? 그놈 필리핀에서 잠적했잖아?”
“거기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영상 있는 건 확실해?”
“저에게 협박용으로 보내 준 블랙박스 영상입니다.”
이종만 장관이 자신의 스마트폰에 저장되어 있는 블랙박스 영상을 재생시켰다.
“젠장!”
영상에는 뒷모습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다.
“당장은 묻어 버릴 수 있겠지만 영원히 감추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놈이 요구하는 게 뭐야?”
“저, 그게…… 요구 사항은 직접 각하를 뵙고 말씀드리겠다고…….”
“뭐?”
어이가 없었다.
일개 플레이어 주제에 감히 대통령을 협박한 것도 모자라 직접 독대를 해서 요구 사항을 말하겠다니?
마음 같아서는 당장 죽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박기만 대통령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각하, 일단 만나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종만 장관이 조심스럽게 박기만 대통령을 달랬다.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하기가 힘듭니다. 일단 요구 사항을 들어주고 블랙박스 영상을 완전히 폐기한 후에 처리하시죠.”
“그게 가능하겠나?”
박기만 대통령은 영상이 더 퍼지는 걸 원치 않았다.
“시간을 주시면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결해 보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박기만 대통령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 *
‘뭔 검사를 이렇게 까다롭게 해?’
현성은 평상복 차림이었다.
한데 청와대 경호원들은 속옷까지 뒤져 볼 기세로 현성의 몸을 수색했다.
현성의 신발은 물론이고 옷 단추까지 확인했다.
‘아주 지랄들을 하는구먼.’
대통령의 안전을 위해서 하는 검사가 아니다.
비무장 상태라도 플레이어가 마음만 먹으면 일반인을 해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다.
아마 녹음기나 카메라가 있는지 살피는 것 같았다.
현성이 태연한 표정으로 몸수색을 끝마치고 발걸음을 옮겼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전자 기기는 모두 반납한 상태였다.
“들어가시죠.”
비서실장의 말과 함께 청와대 상춘재의 문이 열렸다.
TV에서 봤던 박기만 대통령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현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끼이익.
문이 닫혔다.
경호원 따위는 없었다.
외빈 접견실인 상춘재 내에 있는 사람은 현성과 박기만 대통령 그리고 이종만 장관뿐이었다.
저벅저벅.
현성이 성큼성큼 발을 옮겨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로 맞은편 바로 코앞에 박기만 대통령과 이종만 장관이 앉아 있었다.
“자네는 예의도 모르나?”
박기만 대통령의 말에 현성이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봐요, 박기만 씨.”
“뭐?”
“댁이야말로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시는 모양이네. 지금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몰라?”
박기만 대통령의 두툼한 턱살이 부들부들 떨렸다.
“네놈이 감히…….”
“자자, 우리 쉽게 쉽게 가자고. 일단 이모탈 길드 일에는 신경 꺼. 도와주는 건 바라지도 않으니까 괜히 방해하지 말라고. 알았어?”
박기만 대통령이 현성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하지만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작은 건수 하나 잡았다고 아주 기고만장하구나. 하지만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거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 같은 놈은 언제든지 보내 버릴 수 있으니까.”
박기만 대통령이 이를 뿌득뿌득 갈며 말했다.
“어떻게 보내 버릴 건데? 무력으로? 아니면 공권력으로? 괜히 허튼수작 부릴 생각하지 마. 난 영상 인터넷에 풀고 해외로 뜨면 그만이야. 미국이 나한테 계속 러브콜 보내는 건 알고 있지?”
“네놈이 만든 이모탈 길드를 산산조각 낼 수도 있어.”
“그럼 길드 자체를 미국으로 옮겨 버리지 뭐. 아마 미국에서는 좋다고 받아 줄걸.”
박기만 대통령은 말문이 막혔다.
분명 자기가 대통령이다.
대한민국의 국가원수이자 행정권의 수반이며, 국군 통수권자다.
대기업 회장들도 자신에게 이렇게 막말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눈앞의 새파랗게 젊은 청년 하나를 어찌할 힘은 없었다.
“내가 좋게 좋게 가자고 했지? 나도 웬만하면 한국 떠날 생각은 없어. 오히려 제대로 뿌리를 내릴 생각이지.”
“제대로 뿌리를 내린다고?”
박기만 대통령은 기가 막혔다.
아니, 대한민국에 뿌리를 내리고 싶으면 대통령인 자신에게 이렇게 막나가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이봐, 박기만 씨, 플레이어 협회가 해 오던 감찰 업무나 비상 대기조 근무 그리고 던전 치안 유지 임무 같은 거, 대기업 소속 거대 길드들한테 위탁하려고 했지?”
현성의 물음에 박기만 대통령이 찔끔했다.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다.
플레이어 협회를 축소시킨다, 그 후 플레이어 협회가 하던 일을 거대 길드들에게 맡긴다.
당연히 공짜는 아니다.
아마 이 계획이 실행되면 위탁 비용으로 막대한 혈세가 거대 길드로 흘러들어 갈 것이다.
플레이어 협회의 역할은 싹수가 보이는 저레벨 플레이어들을 발굴해 거대 길드에 넘기는 걸로 축소된다.
저레벨 플레이어들을 성장시키기 위해 막대한 혈세가 투입되는 것도 당연했다.
“그거 이모탈 길드한테 넘겨.”
“뭐?”
“거대 길드한테 주려고 했던 업무 위탁을 이모탈 길드한테 넘기라고. 우리는 거대 길드 놈들처럼 삥땅도 안 칠 거야. 거기다 길드 구성원 자체가 원래 플레이어 협회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라 임무 파악도 빠삭해.”
박기만 대통령은 기가 막혔다.
그런 짓을 하면 대기업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대기업이 움직이면 언론도 움직인다.
여당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현성의 말을 들어주면 박기만 대통령은 완전히 정치적으로 고립된다.
어쩌면 임기 첫해부터 레임덕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결정적으로 대기업으로부터 약속받은 대가를 받지 못한다.
아니, 받기는커녕 기존에 받았던 것도 토해 내야 할 판이다.
“하, 기가 차는군.”
“거절이야?”
“블랙박스 영상을 인터넷에 공개하든 말든 마음대로 해라. 대신 네놈도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이 나라에서는 절대 발붙이고 살지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박기만 대통령이 살기 어린 표정으로 현성을 노려봤다.
그런 영상 따위 조작이라 밀어붙이면 그만이다.
전문가를 동원해 영상과 음성이 조작된 거라고 하면 그만인 것이다.
임기 후에는 외국으로 떠나 편하게 살면 된다.
박기만 대통령에게는 명예보다 돈이 훨씬 더 중요했다.
“음, 아깝네. 대기업 이상으로 두둑하게 챙겨 줄 생각이었는데.”
“뭐?”
현성의 중얼거림에 박기만 대통령의 표정이 변했다.
“내가 소유한 해외 투자회사 계좌에 쌓아 놓은 투자금이 얼마나 되는 줄은 알아?”
현성의 말에 박기만 대통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무슨 수로 해외 투자회사 계좌에 쌓인 투자금의 액수를 알겠는가.
“30조 스톤 달러야.”
현성의 말을 들은 박기만 대통령은 눈이 튀어나올 듯 놀랐다.
“일만 잘 처리해 주면 수고비로 1조 스톤 달러 정도는 줄 생각이었는데, 아깝네.”
1조 스톤 달러.
원으로 환산하면 무려 10조 원이다.
그간 수십억 단위의 금액을 받아 챙기던 박기만 대통령의 눈이 뒤집혔다.
대기업들이 약속한 보수를 모두 합쳐도 고작 수천억 수준이다.
그런데 1조도 아니고 10조를 준다니.
“그게 정말인가?”
“정말이지. 내가 지금까지 랭커들 스카우트에 쓴 돈만 해도 수십조는 될걸.”
박기만 대통령의 시선이 이종만 장관에게로 향했다.
“사실입니다.”
이종만 장관의 확인에 박기만 대통령의 눈빛이 변했다.
“여당이랑 야당 국회의원 들 잘 버무려서 업무 위탁 이모탈 길드에 넘겨. 그럼 제대로 한몫 잡게 해 줄게. 대기업 놈들이 줘 봐야 얼마나 주겠어? 끽해야 1, 2조 수준이겠지.”
박기만 대통령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악귀 같던 현성의 모습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보였다.
“그 약속 정말 지킬 수 있나?”
현성이 아공간을 열어 외국 통장 하나를 꺼냈다.
“스위스 은행 시크릿 계좌야. 확인해 봐.”
현성의 말에 박기만 대통령이 잔고를 확인했다.
정확히 1조 스톤 달러가 들어 있었다.
“일만 잘 마치면 그건 네 거야. 일단 통장은 네가 가지고 있어. 일만 잘 성사되면 비밀번호도 알려 줄게.”
시크릿 계좌는 인터넷 뱅킹이나 모바일 뱅킹이 되지 않는다.
오직 실물 통장을 가지고 있어야만 잔고를 출금할 수 있다.
통장을 넘긴 이상 현성이 계좌 안에 있는 돈을 빼돌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통장 진위 여부는 얼마든지 확인해 봐도 좋아.”
현성의 말에 잠시 망설이던 박기만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게. 며칠 후에 다시 부르도록 하지.”
“어느 쪽 손을 잡는 게 이득인지 잘 생각해서 결정하는 게 좋을 거야.”
현성이 그 말과 함께 청와대 상춘재를 나섰다.
“당장 전문가 불러서 이 통장이 진짜인지 확인해 봐.”
현성이 모습을 감추자마자 박기만 대통령이 이종만 장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알겠습니다, 각하.”
이종만 장관이 깍듯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물러나는 이종만 장관의 눈빛이 진한 탐욕으로 물들었다.
‘무조건 설득해야 해.’
박기만 대통령을 협박해서라도 최현성과 손을 잡게 만들어야 했다.
그럼 자신에게도 1조 원이 떨어진다.
10조.
한 사람의 인생은 물론 영혼까지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거금이다.
‘아주 눈깔이 썩어 빠졌네.’
탐욕에 물든 정치인의 눈빛은 구토가 나올 정도로 역겨웠다.
강선영 길드장과 신윤아는 10조가 아니라 300조라는 거금을 목도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의 눈빛은 맑고 깨끗했다.
돈을 탐욕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상을 이룰 도구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기만 대통령과 이종만 장관은 달랐다.
썩은 동태 눈깔처럼 맛이 갔다.
10조 원이라는 거금이 주는 마력에 완전히 홀려 버린 것이다.
‘실컷 단꿈을 꿔라.’
박기만 대통령에게 준 1조 스톤 달러 시크릿 통장과 이종만 장관에게 준 1,000억 스톤 달러 시크릿 통장.
둘 모두 진품이었다.
하지만 그 둘에게 말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그 통장에 걸려 있는 위치 추적 스킬이었다.
‘랭커급 실력자라면 눈치챌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 실력자에게 그런 거액이 든 통장을 보여 줄 리가 없지.’
박기만 대통령과 이종만 장관은 분명 그 통장을 소중하게 보관할 것이다.
어쩌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비자금 계좌와 같은 장소에 보관할지도 모른다.
그럼 현성이 가서 회수해 오면 그만이다.
‘일이 마무리되면 모두 터트린다.’
박기만 대통령과 이종만 장관을 포함해 이번 일에 연루된 국회의원들의 비리를 모조리 폭로할 계획이었다.
증거를 수집하는 것은 걱정하지 않았다.
박기만 대통령이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줄 테니까 말이다.
* * *
바로 다음 날, 다시 청와대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마음이 급한가 보네.’
현성은 최소한 사흘, 길면 일주일 이상은 기다려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바로 다음 날 아침 연락이 왔다.
견물생심.
10조 원이 들어 있는 통장의 진위 여부를 확인한 후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다.
현성은 차를 끌고 청와대로 향했다.
청와대에 도착한 후 어제와 동일하게 외빈 접견실인 상춘재로 안내를 받았다.
어제와 같은 몸수색은 없었다.
청와대 경호원들은 현성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눈빛도 달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독 오른 뱀처럼 현성을 경계했다.
하지만 오늘은 주인을 만난 강아지처럼 순한 눈빛을 보냈다.
“들어가시죠.”
상춘재에 도착한 현성이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박기만 대통령이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현성을 맞이했다.
어제와 비교하면 대우가 천양지차였다.
“옳은 선택을 하신 것 같군요.”
“하하하,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일국의 대통령이면 나라의 미래를 위한 선택을 해야죠.”
현성의 말에 박기만 대통령이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제의 싸늘한 분위기는 없었다.
현성과 박기만 대통령 모두 말투가 바뀌었다.
상호 존대.
두 사람 모두 다 된 밥에 재 뿌릴 이유는 없었다.
“진품이더군요.”
“제가 거짓 통장을 드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비밀번호는 일이 다 끝나면 알려 주시겠다고 하셨지요?”
“물론입니다. 일이 완벽하게 처리되기만 하면 그 통장은 대통령님 것이 될 겁니다.”
현성의 말을 들은 박기만 대통령의 눈빛이 진한 탐욕으로 물들어 있었다.
10조 원이 들어 있는 통장이 박기만 대통령의 이성을 집어삼켰다.
“그런데 국회의원들을 설득하려면 착수금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욕심 많은 돼지 새끼.’
10조 원이나 되는 대가를 약속받고도 더 욕심을 내다니.
현성은 박기만 대통령에게 1원 한 푼 줄 생각이 없었다.
10조 원이 든 통장은 어차피 회수할 예정이다.
하지만 지금 착수금을 지급하면 당장 사용할 수 있는 현금으로 줘야 한다.
그건 사양이다.
“그건 대통령님께서 알아서 해결하셔야죠. 전 1조 스톤 달러를 드렸습니다. 그거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당장 쓸 수는 없는 돈이지 않습니까?”
“돈을 꺼내서 사용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죠. 1조 스톤 달러가 든 통장을 보여 주시기만 해도 국회의원들이 알아서 넘어올 거 같지 않습니까?”
현성의 말에 박기만 대통령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크흠, 그게, 이런 일은 보안을 요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제 손을 떠난 돈입니다. 보안이 지켜지든 사방에 알려지든 전 관여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건 이미 대통령님의 돈 아닙니까?”
현성의 말에 박기만 대통령의 얼굴에 아쉬운 감정이 피어올랐다.
‘혼자 다 먹고 싶나 보네.’
박기만 대통령은 1조 스톤 달러가 들어 있는 통장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마 1조 스톤 달러를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국회의원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굶주린 아귀 떼처럼 1조 스톤 달러를 뜯어먹기 위해 달려들 것이다.
박기만 대통령은 그게 싫은 거였다.
어차피 일이 마무리되면 사라질 돈이건만 그걸 모르고 욕심을 부린다.
‘자신의 피와 살처럼 느껴지겠지.’
아직 온전히 자신의 소유가 되지 않은 1조 스톤 달러를 이미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건 현성이 그런 방향으로 박기만 대통령의 생각을 유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박기만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욕심이었다.
‘사기당하는 사람들 유형과 비슷하지.’
자신의 수중에 들어오지 않은 신기루를 쫓아 움직이다 결국에 모든 것을 잃는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 건은 제가 알아서 해결해 보도록 하지요. 일이 끝나는 즉시 비밀번호를 알려 주겠다는 약속, 그 약속은 꼭 지켜야 합니다.”
초조해 보이기까지 하는 박기만 대통령의 다짐에 현성이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비밀번호를 알려 드리지 않으면 영원히 묵혀 있을 돈 아닙니까?”
현성의 말에 박기만 대통령은 그제야 안심한 듯 보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현성이 손을 내밀었다.
“저 역시 잘 부탁드립니다.”
현성과 박기만 대통령이 서로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사이코 메트리 스킬이 작동했다.
지난 한 달간 박기만 대통령이 저질러 온 온갖 비리들이 현성의 눈앞에 펼쳐졌다.
‘한곳에 다 모아 놨구나.’
비리 장부들이 있는 장소를 알아냈다.
위치 추적 스킬이 알려 준 시크릿 통장의 보관 장소와 동일한 곳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현성이 살며시 고개를 숙이고 청와대 상춘재를 떠났다.
현성이 떠나간 뒤.
박기만 대통령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하지만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10조 원을 위한 투자야.’
박기만 대통령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대기업들의 반말을 무마시키려면 국회의원들을 구워삶아야 한다.
그들이 아무런 대가도 없이 박기만 대통령의 편을 들어 줄 리가 없었다.
대기업을 등지고 자신을 따르게 하려면 당연히 막대한 로비 자금이 필요했다.
“종만아.”
“예, 각하.”
이종만 장관이 바짝 긴장해 대답했다.
박기만 대통령이 자신의 이름만 불렀다.
이건 대통령과 장관이라는 공적인 관계를 떠나 사적으로 지시를 내린다는 뜻이었다.
“내 차명 계좌 총액이 얼마지?”
“대략 1,000억에 조금 못 미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기업과의 약속을 지켰다면 차명 계좌 총액은 수천억 원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당장 인출할 수 있지?”
“물론입니다.”
“의원들 로비하는 데 그 돈을 좀 써야겠다.”
“현명하신 선택이십니다.”
이종만 장관이 재빨리 꼬리를 쳤다.
‘이건 10조 원을 먹기 위한 투자야.’
박기만 대통령이 떨리는 마음을 애써 붙잡았다.
비자금을 다 합쳐 봐야 고작 1,000억도 되지 않는다.
1,000억을 투자해 10조를 먹는 일이다.
투자라고 치면 100배의 이익이 보장된 일이다.
돈에 대한 탐욕이 박기만 대통령을 완벽하게 먹어 치웠다.
* * *
현성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미국을 오가며 던전을 클리어해 스텟을 늘렸고, 고유 스킬을 이용한 장사도 계속 이어 나갔다.
현성이 지분 100%를 소유한 이모탈 길드는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쑥쑥 커 나갔다.
과거의 플레이어 협회처럼 덩치에 비해 내실이 약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중저레벨 플레이어들이 대거 줄어들고 랭커들이 유입된 덕에 수준이 더 올라갔다.
설립된 지 고작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이모탈 길드는 순식간에 국내 서열 부동의 1위로 등극했다.
거대 길드들이 단합해 여러 방해 공작을 걸기는 했지만 정부의 비호를 받고 있는 이모탈 길드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돈으로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무력으로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유일하게 믿고 있던 정부는 감감무소식이다.
박기만 정권을 통해 크게 도약하려던 거대 길드들은 오히려 랭커들을 대거 빼앗기며 세력이 약화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오성 그룹 상무이사 이현국이 노성을 터트렸다.
이종만 장관의 배신 이후 그 일을 회장에게 보고했다.
그 후 일이 원만히 잘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룹 회장이 직접 나섰으니까 말이다.
박기만 대통령도 자신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겠다고 했으니 믿고 기다렸다.
한데 상황이 더 악화되어 버렸다.
그간 대기업들은 대통령의 말을 믿고 꾹 참고 기다렸다.
한데 오늘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정부에서 플레이어 협회가 수행하던 임무를 사기업인 길드에 위탁하기로 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수의 계약인 것도 좋았다.
문제는 수의 계약을 맺는 대상이었다.
“왜 갑자기 이모탈 길드가 튀어나오는 거야?”
수의 계약 대상은 대기업을 뒷배로 둔 거대 길드들이 되어야 했다.
그게 대기업과 박기만 대통령의 밀약이었다.
한데 갑자기 박기만 대통령이 배신을 했다.
밀약을 깨고 수의 계약 대상을 이모탈 길드로 선정한 것이다.
대기업 입장에서는 온갖 노고를 기울여 맛있는 밥상을 차려 놨는데, 엉뚱한 놈이 중간에 나타나 자신들이 차린 밥상을 먹으려고 하는 꼴이었다.
“박기만 정권이 이모탈 길드에게 상당히 큰 대가를 약속 받은 거 같습니다.”
“그걸 누가 몰라? 그런 일이 있으면 진작 알아서 차단을 했어야지! 네놈들은 이모탈 길드와 박기만이 손발을 맞출 동안 도대체 뭘 한 거야?”
이현국 상무이사의 질책에 직원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도대체 얼마를 처먹인 거야?’
이번 일의 총괄을 맡은 이현국 상무이사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자신들이 약속한 대가도 결코 적지 않았다.
한데 도대체 얼마를 받아 처먹었기에 자신들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일을 이런 식으로 진행한다는 말인가.
아마 액수가 비슷했으면 박기만 대통령이 한 번 더 딜을 했을 것이다.
한데 그런 것도 없이 바로 안면을 몰수했다.
그건 대기업들이 약속한 액수보다 월등히 큰 대가를 받기로 했다는 증거였다.
“당장 언론사에 연락해.”
“예, 알겠습니다!”
돈으로도 안 되고, 힘으로도 안 되고, 권력으로 안 된다면 이제 이용할 수 있는 건 언론뿐이었다.
* * *
‘아주 발악을 하는구나.’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업무 위탁과 수의 계약의 효율성을 이야기하던 언론들이 갑자기 달라졌다.
수의 계약의 부정함을 질타하기 시작한 것이다.
언론은 특히 이모탈 길드의 짧은 설립 기간을 물고 늘어졌다.
이런 신생 길드가 플레이어 협회가 하던 일을 맡아 잘 처리할 수 있겠느냐, 이런 논조였다.
정치권도 시끄러웠다.
박기만 대통령도 모든 정치인들을 설득하지는 못했다.
사실 그게 가능했다면 박기만 대통령이 대기업의 눈치를 살필 필요도 없었다.
박기만 대통령의 편에 선 파벌도 있는 반면 대기업의 편에 선 파벌도 있었다.
여당 내부에서 파벌이 갈렸고 야당 내부에서도 파벌이 갈렸다.
이건 박기만 대통령과 대기업 간의 힘겨루기나 마찬가지였다.
‘슬슬 터트려 볼까?’
정부와 대기업 수뇌부들은 인의 장벽이라고 불릴 정도로 경호가 철저했다.
관련자를 만나 사이코 메트리 스킬을 사용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아마 이종만 장관을 통하지 않았다면 박기만 대통령을 만나 사이코 메트리 스킬을 사용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기업을 역시 휘하 거대 길드에서 인력을 지원받아 자체적으로 경호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론사는 달랐다.
사실상 경호라고 할 게 없었다.
그 덕분에 손쉽게 대기업과 언론 그리고 정치권의 연결 고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현성은 자신이 확보한 자료를 인터넷에 올렸다.
왜 갑자기 언론이 급변했는지.
정치권과 대기업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팩트에 기반한 설명도 덧붙였다.
물론 약간의 왜곡은 있었다.
이번 일의 핵심 주모자였던 박기만 대통령 파벌을 정의의 사자로 둔갑시키고, 아직까지 대기업과 협심해 움직이는 정치인들을 타깃으로 삼은 것이다.
‘난리가 나겠네.’
대기업과 언론사가 힘을 합치면 웬만한 인터넷 지라시 하나 묻어 버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정부가 가만히 있을 때 이야기다.
청와대를 비롯해 박기만 대통령과 손을 잡은 정치인들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