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 히드라 레이드 (59/225)

┃히드라 레이드

긴 비행이 끝나고 현성이 미국에 도착했다.

‘이렇게 미국 땅을 밟아 보네.’

평생 올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미군 전용기를 타고 올 줄이야.

“미국의 요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최현성 씨.”

“아, 예.”

“저는 미국에서 머무르실 동안 최현성 씨의 편의를 봐줄 데이비드라고 합니다. 편하게 데이브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반갑습니다, 데이브. 당분간 잘 부탁드립니다.”

“일단 히드라 대책 본부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현성이 데이브의 안내에 따라 히드라 대책 본부로 향했다.

히드라 대책 본부 근처에는 플레이어들이 가득했다.

‘엄청 많네.’

대부분 랭커와 고레벨 플레이어 같았다.

한데 그 수가 족히 수천은 되어 보였다.

‘세계 최고의 레이드 강국이라더니 역시 만만치가 않네.’

미국은 전 세계에서 랭커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나라였다.

당연히 모두 미국 출신은 아니었다.

미국은 타국에서 플레이어를 수집하기로 유명했다.

플레이어에게 주는 혜택이 상당히 많았기에 후진국의 플레이어들이 밀입국을 통해 미국으로 많이 유입되었다.

미국은 플레이어라면 밀입국자든 뭐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다.

시민권도 주고 집도 줬다.

그 외에도 수많은 혜택을 베풀었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플레이어 우대 정책을 펼쳤지만 미국은 그 정도가 상당히 심했다.

돈 많은 놈이 제대로 돈지랄을 한다고 생각하면 편했다.

특히 랭커급 실력자들에게 해 주는 대우는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대단했다.

대저택은 물론이고 전용기까지 제공해 준다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였다.

하지만 현성은 그런 것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전설 등급 몬스터 슬레이어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최현성 씨.”

히드라 대책 본부장 윌리엄이 현성을 반갑게 맞이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미국은 아직 전설 등급 몬스터 레이드 경험이 없습니다. 그런 만큼 많은 지도 편달을 부탁드립니다.”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하하하, 최현성 씨가 오셨으니 히드라 레이드도 아무런 사고 없이 무난히 종료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온갖 찬양이 쏟아져 나왔다.

듣고 있던 현성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말이다.

그 외에도 ‘오크 대족장을 쓰러트렸을 때 어떤 기분이었냐?’, ‘홀로 오크 주술사와 오크 무리를 막아 설 때는 어떤 각오였냐?’ 등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간단하게 대답하면 ‘대단하다.’, ‘진정한 영웅이다.’ 등의 감탄사가 이어졌다.

‘너무 대놓고 띄워 주네.’

윌리엄의 모습은 마치 스타를 만난 열성팬 같았다.

현성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러다 적당한 타이밍에 궁금한 점을 물어봤다.

“히드라 레이드는 언제 시작될 예정입니까?”

“내일 정오입니다. 군의 폭격으로 시작될 예정입니다. 히드라가 갑자기 이동 경로를 바꾸면 예정보다 빨라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전 어느 팀에 소속되죠?”

“제1척살대입니다. 미국의 최정예 랭커들이 모여 있는 팀이죠.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푹 쉬시고 내일 아침 간단하게 인사라도 나누시죠.”

“미리 합을 맞춰 봐야 하지 않을까요?”

“원하신다면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하지만 최현성 씨는 제1척살대에 속해 있다고 해도 프리롤이니 자유롭게 전투에 임하시면 됩니다.”

“아, 감사합니다.”

프리롤이라니.

편의를 봐줘도 엄청 봐주는 티가 팍팍 났다.

“그리고 먼저 들어가서 쉬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오래 비행하시느라 피곤하셨을 테니 오늘 밤은 푹 쉬십시오. 특이 사항이 생기면 곧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현성에 윌리엄에게 인사를 하고 히드라 대책 본부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 데이브의 안내를 받아 숙소에 도착했다.

‘완전 최고급 호텔 수준이네.’

숙소는 임시로 마련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호화찬란했다.

‘내일 정오에 레이드가 시작된다면 시간이 얼마 없어.’

전설 등급 몬스터 1인 레이드.

현성의 입장에서는 꼭 이루고 싶은 업적이었다.

‘오늘 밤에 처리한다.’

현성이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그 후 미리 준비한 아이템을 사용했다.

도플갱어의 진혼이라는 아이템으로, 중국에서 활동할 때도 꽤 쏠쏠하게 사용했던 녀석이었다.

도플갱어의 진혼을 사용하면 사용자의 모습으로 바뀐다.

그리고 사용자의 기억을 읽고 최대한 동일하게 행동하고 말하려고 노력했다.

그게 다였다.

전투 능력은 전무했다.

거기다 너무 복잡한 대화는 이해하지 못했다.

심한 경우에는 패닉에 빠져 같은 말만 반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간단한 대화는 가능했다.

물론 현성과 절친한 사이라면 금방 이상한 점을 발견할 정도로 어설펐다.

그러나 현성과 오늘 처음 만난 미국인 친구들 정도는 충분히 속일 수 있을 것이다.

‘어둠의 장막.’

은신 스킬을 시전한 현성이 조용히 자신의 숙소를 빠져나갔다.

* * *

“최현성을 너무 띄워 준 거 아닐까요?”

부관의 물음에 히드라 대책 본부장 윌리엄이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상부의 지시였지 않나? 거기다 최현성 플레이어는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충분해.”

“누가 보면 최현성이 혼자 오크 대족장과 오크 주술사를 레이드한 줄 알겠습니다.”

“그런 건 아니지만 가장 큰 기여를 한 건 틀림없지 않나?”

“그렇기는 하지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게. 최현성에게 최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 주는 게 우리가 맡은 임무야. 자네도 의문은 접어 두고 임무에 최선을 다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 애송이는 어떤가?”

금빛 머리카락과 수염을 가진 사내의 물음에 윌리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허락도 하기 전에 들어올 거면 노크는 도대체 왜 한 건가?”

“그냥 예의상 한 것뿐이야. 그보다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하게.”

“내가 뭘 알겠나? 난 그저 상부의 지시에 따라 최대한 최현성 플레이어의 기분을 맞춰 줬을 뿐이야.”

“그 애송이가 내일 얼마나 활약할지 기대되는군.”

금빛 머리카락과 수염을 가진 사내의 이름은 죠셉.

제1척살대의 대장이자 미국 랭킹 1위의 플레이어였다.

“자네보다 더 활약할지도 모르지.”

윌리엄의 말에 죠셉이 얼굴을 찡그렸다.

“오크 대족장과 오크 주술사가 미국에 나타났다면 첫 번째 토벌에서 숨통이 끊어졌을 거야. 아마 한국처럼 두 번이나 토벌을 시도할 필요도 없었을걸.”

“그건 뚜껑을 열어 봐야 아는 법이야. 괜히 내일 까칠하게 대하지 말고 잘해 줘. 애송이라는 말은 입에 담지도 말고.”

“지시 사항은 잘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크아아아앙!

갑자기 맹수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대화를 나누고 있던 윌리엄과 죠셉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

“당장 비상 대기령 발동해!”

웨에에에엥!

윌리엄의 외침과 함께 사이렌이 울렸다.

죠셉은 이미 밖으로 뛰쳐나간 뒤였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히드라는 그동안 잠잠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활동을 시작했다는 말인가?

* * *

파지지직!

칠흑빛 뇌전에 휩싸인 현성이 히드라의 몸에 용혈검을 꽂아 넣었다.

-크아아아앙!

히드라가 비명을 터트리며 아홉 개의 머리를 거세게 흔들었다.

‘최대한 빨리 잡아야 해.’

현성은 조급했다.

히드라와 미국 플레이어들의 거리는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괜히 히드라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상당히 널찍하게 포위망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의 신체 능력이라면 이곳까지 도달하는데 20여 분이면 충분했다.

20분 안에 레이드를 끝낸다.

그게 현성의 계획이었다.

물론 상당히 무리한 계획이었다.

상대는 무려 전설 등급 몬스터였으니까 말이다.

현성은 계획이 실패할 것 같으면 깔끔하게 몸을 뺄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계획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놈이 자고 있는 틈을 타 선공을 가했고 그게 제대로 먹혔으니까 말이다.

솔직히 현성은 기습이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다.

‘용의 혈조.’

현성이 스킬을 발동시킴과 동시에 히드라의 피가 날카로운 맹수의 발톱으로 화했다.

좌아악!

히드라의 비늘이 쩍쩍 갈라지며 붉은 피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용혈검이 히드라의 피를 쭉쭉 빨아 먹었다.

흡혈공 역시 히드라의 피를 흡수해 현성에게 마력과 체력을 더해 주었다.

-귀속 아이템 용혈검 - 유일 전설 등급이 성장했습니다.

‘잘 크네.’

히드라의 피를 빨아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용혈검이 성장했다.

-패시브 스킬 불사의 서 - 유일 전설 등급이 성장했습니다.

‘어라?’

기대하지 않았던 불사의 서까지 성장 메시지가 떴다.

히드라의 자가 회복력도 상당히 뛰어난 모양이다.

현성은 계속해서 흑뢰룡의 숨결과 용의 혈조를 발동시켰다.

캬아아악!

히드라가 비명을 지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이놈 너무 굼뜬데?’

어째 움직임이 그리 빠르지 않았다.

이무기와 비교하면 어른과 아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거기다 회복력도 상당히 떨어졌다.

히드라의 피는 유일 전설 등급 패시브 스킬 불사의 서를 성장시켰다.

그 말은 자가 회복력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한데 히드라는 현성에게 처음 기습당했을 때 입은 상처조차 제대로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정도 자가 회복력이라면 이무기는커녕 블루 드레이크보다도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화르르륵!

히드라의 머리들이 붉은 화염을 내뿜으며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히드라의 등에 매달려 있는 현성에게도 그 뜨거운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하는 건가?’

현성이 그렇게 생각하고 더욱 가열하게 공격을 가했다.

그런데…….

불길이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하고 금방 수그러들었다.

-끼이이익!

히드라가 가냘픈 비명을 토해 냈다.

움직임은 더욱 굼떠졌고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마력은 더 줄어들었다.

‘뭐야, 이거? 정말 전설 등급 몬스터 맞아? 혹시 영웅 등급 몬스터 아니야?’

현성은 히드라 레이드 전 페널티가 큰 소모형 아이템으로 자체 버프를 했다.

그렇게 늘어난 현성의 스텟은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전설 등급 몬스터와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는 게 현성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치열하게 싸운 것도 아니고 공격 몇 번 했다고 이렇게 손쉽게 무너지다니?

움직임이 전설 등급 몬스터답지 않게 굼떴고 느껴지는 마력 역시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솔직히 말해 이무기와 비교하면 같은 전설 등급 몬스터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파지지직!

현성이 쉬지 않고 흑뢰룡의 숨결을 전력으로 발동시켰다.

용의 혈조도 마찬가지였다.

사방이 히드라의 피였기에 스킬을 발동시켜 피해를 줌과 동시에 소모된 체력과 마력이 회복되었다.

한 3분이나 지났을까?

쿠우우웅!

히드라가 힘없이 바닥에 몸을 뉘였다.

-믿을 수 없는 업적 – 전설 등급

-단독으로 400레벨 이상 차이 나는 상위 레벨의 네임드 몬스터를 사냥하셨습니다.

-업적 보상 : 칭호 [최초의 레벨 파괴자 - 전설 등급]

-믿을 수 없는 업적 – 전설 등급

-단독으로 상위 레벨의 전설 등급 네임드 몬스터 히드라 헤라를 사냥하셨습니다.

-업적 보상 : 칭호 [홀로 히드라 헤라를 쓰러트린 자 - 전설 등급]

‘업적도 제대로 들어오네.’

히드라의 잔존 마력이 응축되어 아이템으로 변했다.

아이템도 제대로 나왔다.

전설 등급 스킬북 3개와 방어구 1개가 나왔다.

‘전설 등급 네임드 몬스터는 맞네.’

업적도 제대로 뜨고 아이템도 주는 걸로 봐서 히드라는 전설 등급 몬스터가 맞았다.

한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뭔가 문제가 있어 보였다.

움직임도 굼떴고 뿜어내는 마력도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나 보네.’

차원 게이트를 넘어서도 그다지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았다더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이무기 같은 경우는 하루에 수백 킬로미터를 휩쓸고 다니면서 난동을 피웠는데.’

히드라의 체급은 이무기 못지않다.

그런데 활동 반경 차이가 너무 컸다.

아마 차원 게이트를 넘기 전에 큰 부상을 당했던 듯했다.

솔직히 그게 아니고서는 전설 등급 네임드 몬스터가 이렇게 약할 리가 없었다.

‘땡잡았네.’

실패할 각오를 하고 한 도전이었다.

한데 너무 손쉽게 성공해 버렸다.

미국에게 살짝 미안하기도 했다.

히드라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아마 미국 척살대가 나섰다면 별다른 피해 없이 히드라 레이드를 성공시켰을 것이다.

어쩌면 인명 피해 제로라는 성과를 올렸을 수도 있다.

한데 현성이 히드라 레이드 하루 전날 그 과실을 쏙 빼앗아 먹었다.

미국은 한국에 이어 두 번째로 전설 등급 몬스터 레이드에 성공한 국가라는 타이틀을 얻을 기회를 놓쳐 버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전설 등급 스킬북과 아이템을 얻을 기회도 날려 버렸다.

명예와 실속을 둘 다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현성을 초대함으로 인해 날려 버린 것이다.

‘제대로 꿀 빨았네.’

미국에 도착한 지 몇 시간 만에 엄청난 이득을 봤다.

업적 2개에 전설 등급 아이템 4개.

하지만 살짝 아쉽기도 했다.

‘굳이 소모형 아이템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는데.’

히드라가 이런 상태인 줄 알았다면 굳이 페널티를 감수하며 자체 버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르는 상태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현성은 전리품을 아공간에 넣어 버리고 숙소로 귀환했다.

숙소는 난리가 나 있었다.

자다 일어난 플레이어들이 허겁지겁 무기와 방어구를 착용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심지어 어떤 플레이어는 잠옷 차림에 무기만 들고 뛰쳐나온 사람도 있었다.

현성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도플갱어의 진혼이 낑낑거리며 방어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현성은 도플갱어의 진혼을 아이템 상태로 되돌리고 태연하게 숙소 밖으로 나갔다.

현성은 플레이어들을 통제하고 있는 윌리엄에게 다가갔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현성의 물음에 윌리엄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전설 등급으로 추정되는 몬스터가 1마리 더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그놈이 히드라를 사냥했습니다.”

‘멀리서도 감시는 철저히 하고 있었나 보네.’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예상하고 변신 주문서를 사용하고 히드라를 사냥했다.

“히드라를 사냥했으면 전설 등급 몬스터가 확실하겠네요.”

“그렇다면 좋겠지만, 본국 정보부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몬스터가 전설 등급보다 더 상위 등급의 몬스터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어? 설마 날 신화 등급 몬스터로 오해한 거야?’

이건 현성이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새롭게 등장한 몬스터가 히드라를 고양이 쥐를 잡듯 손쉽게 사냥했습니다.”

‘그건 히드라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어서 그랬던 건데…….’

“이게 믿기십니까? 무려 전설 등급 몬스터인 히드라를 불과 10여 분 만에 사냥했단 말입니다.”

‘사냥한 저도 놀랐어요.’

“문제는 놈이 히드라 사냥 직후 모습을 감췄다는 겁니다. 놈이 언제 어디서 다시 모습을 드러낼지 모릅니다. 그리고 놈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미국은 지옥으로 변할 겁니다.”

‘저 여기 있는데요. 그리고 미국을 지옥으로 만들 생각은 없어요.’

현성이 속으로 윌리엄의 말에 대답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윌리엄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척했다.

“전투 장면을 촬영한 영상이 있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네, 그렇게 하죠.”

굳이 볼 필요는 없었지만 괜한 의심을 받기 싫어 궁금한 척을 했다.

“몬스터가 사용한 스킬의 여파로 전투 장면이 자세히 찍히지는 않았습니다.”

윌리엄의 말 대로였다.

여러 각도에서 촬영한 전투 장면은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적외선 장비를 사용해 촬영했지만 현성이 사용한 흑뢰룡의 숨결과 히드라가 뿜어낸 화염 때문에 일그러진 화면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과 구도는 충분히 확인이 가능했다.

그냥 작은 몬스터가 히드라를 일방적으로 때려잡았다.

“어떤 몬스터인지 확인하기도 힘들군요.”

현성은 변신 주문서를 사용해 고블린으로 변신해 히드라를 잡았다.

하지만 흑뢰룡의 숨결 때문에 고블린인지 다른 몬스터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전문가들이 달라붙어 분석한 결과 인간형 몬스터로 키는 대략 4피트 5인치에서 5피트 사이로 판명되었습니다.”

‘132~152센티미터 정도라. 짧은 시간에 정확하게 파악했네.’

현성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고블린으로 변신한 이유는 키가 작기 때문이다.

오크나 랫맨은 괜히 어설프게 촬영되면 사람으로 오인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블린은 그럴 걱정이 없다.

“그래서 더 까다롭습니다. 히드라 사냥 후 모습을 감춘 놈을 찾기 위해 관측 장비를 총동원했지만 아직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범인이 윌리엄 바로 옆에 있으니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당분간은 비상 대기 체제를 유지할 계획이니 협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얼마든지 협조해 줄 수 있었다.

* * *

미국 연방정부는 히드라를 사냥한 몬스터를 찾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랭커와 고레벨 플레이어 들 역시 무한 대기해야 했다.

미국 연방정부는 히드라를 사냥한 몬스터가 금방 사고를 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아무 일도 없었다.

미국의 비상 대기 체제는 풀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일주일이 지나고 2주일이 지나도 아무 일도 없자 슬슬 랭커와 고레벨 플레이어 들의 불만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편하게 쉴 수도 없고 던전으로 사냥을 갈 수도 없다.

고소득자인 랭커와 고레벨 플레이어 들의 입장에서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미국에 존재하는 고레벨 던전들도 서서히 몬스터 웨이브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결국 미국 연방정부는 비상 대기 체제를 해제하고 랭커와 고레벨 플레이어 들을 해산시켰다.

사실 히드라를 사냥한 몬스터의 행방도 알지 못하면서 랭커와 고레벨 플레이어 들을 무한 대기시킨 것 자체가 실수였다.

비상 대기 체제가 해제되자 현성도 한국에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기왕 미국에 오신 김에 관광이라도 하고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윌리엄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현성에게 물었다.

“관광요? 그럴 여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많이 쉬었으니 한국에 돌아가서 사냥을 해야죠.”

“사냥은 미국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던전 숫자는 한국보다 미국이 더 많습니다.”

“글쎄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세금 문제는 한국과 동일하게 면세 조치를 해 드리겠습니다. 아직 상황이 완전히 종료된 게 아니니 조금만 더 미국에 머물러 주시죠. 머무시는 동안 발생하는 경비는 미 연방정부에서 전부 책임지겠습니다.”

“한국 정부에서 그걸 허락할까요?”

“한국 정부의 허락은 이미 받아 놨습니다. 히드라가 사라졌다고 해서 몬스터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니까요.”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제 친구를 미국으로 불러와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친구분이 미국에 체류하시는 동안 발상하는 경비도 전부 미 연방정부에서 책임지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미국을 지키기 위해 와 주신 분께 이 정도 대접은 당연히 해 드려야죠.”

현성과 윌리엄 모두 목적을 이뤘다.

‘당분간 미국 던전에서 사냥 좀 하려고 했는데 잘됐네. 루시아까지 불러서 미클리어 던전을 싹 다 쓸어버려야지.’

현성은 이번 기회에 한국 던전에서 나오지 않는 몬스터들을 집중적으로 사냥해 업적을 늘릴 계획이었다.

윌리엄이 가라고 해도 관광한다는 핑계로 남을 생각이었는데, 적극적으로 잡아 주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윌리엄의 입장에서도 나쁠 게 없었다.

-무조건 붙잡아 두게.

이게 상부의 지시였다.

현성이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않으면 한미 상호방위조약까지 언급하려고 했다.

한데 현성이 손쉽게 허락한 덕분에 별다른 마찰 없이 상부의 지시를 이행할 수 있었다.

현성은 루시아를 미국으로 불렀다.

루시아에게 걸려 있는 5년간의 출국 금지 조치가 살짝 걸림돌이 되었지만, 현성이 보증을 서 주는 조건으로 출국이 허락되었다.

현성과 루시아는 미국 연방정부가 제공해 준 숙소에서 여유로운 휴가를 보냈다.

미국 연방정부가 제공해 준 숙소는 무척 호화로웠다.

수영장이 딸린 저택을 제공해 주기도 했고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을 제공해 주기도 했다.

식사 때는 최고의 만찬이 제공됐다.

현성은 루시아와 함께 미국 관광을 즐겼다.

현성이 가끔 영웅 등급 던전을 들락날락거리기는 했지만 거의 대부분을 숙소에 처박혀 휴식을 취했다.

미국 정보부는 루시아를 현성의 연인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이었다.

현성과 루시아는 낮에는 잠을 잤다.

낮에 루시아와 함께 관광을 하거나 현성 혼자 영웅 등급 던전에 들락날락거린 것은 겉으로 보여 주기 위한 위장이었다.

현성과 루시아는 밤마다 몰래 숙소를 빠져나가 일반 던전과 희귀 등급 던전에서 업적 작업을 했다.

일반 던전과 희귀 등급 던전에 출입할 수 있는 플레이어 등록증은 이누쿠소가 제공해 줬다.

위조가 아닌 진품으로 미국으로 원정 사냥을 온 일본인 신분이었다.

조인족에게 규슈 지역을 잃은 후 던전의 숫자가 줄어든 일본에서는 해외 원정 사냥을 떠나는 일본인들이 많았기에 크게 의심받을 일도 없었다.

현성과 루시아는 야밤에 부지런히 던전을 돌며 업적을 늘려 나갔다.

미국은 땅이 넓었기에 돌아야 할 던전도 많았다.

현성과 루시아는 미국 전역을 순회하겠다는 듯 각 주를 넘나들며 호화 생활을 즐겼다.

미국은 이런 현성과 루시아의 행보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반면 한국은 돌아올 때가 됐음에도 돌아오지 않는 현성의 행보에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 * *

“도대체 왜 안 오는 거야? 벌써 미국에 간 지 석 달이 넘었잖아.”

한국 플레이어 협회장 강선영이 초조한 표정으로 신윤아에게 물었다.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신윤아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야, 협회에서 그나마 최현성 씨랑 가장 친분 있는 사람이 너잖아. 그런데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친분은 무슨.”

신윤아의 구시렁거림에 강선영 협회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 너까지 왜 그러냐? 최현성 씨한테 전화는 해 봤어?”

“해 봤어요.”

“그래? 뭐래? 한국에는 언제 온대?”

“미국 간 김에 느긋하게 관광하다 돌아올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던데요.”

“아니, 무슨 관광을 그렇게 오래해? 미국에 볼 게 뭐가 있다고.”

“그야 저도 모르죠.”

“야, 그런데 너 왜 그렇게 까칠하냐?”

강선영 협회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신윤아는 말도 짧았지만 표정도 좋지 않았다.

뭔가 잔뜩 심통이 난 것 같다고나 할까?

“제가 뭐가 까칠하다고 그러세요?”

신윤아가 발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까칠한 거 맞구먼.’

심통도 잔뜩 나 있었다.

강선영 협회장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신윤아가 왜 저렇게 화가 났는지 알아내야 했다.

현성과의 가교 역할을 해 줘야 할 신윤아의 화를 풀어야 일을 진전시킬 것 아니겠는가.

‘어?’

그때 강선영 협회장이 현성과 신윤아 사이에 흐르던 미묘한 감정의 기류를 떠올렸다.

“너 혹시…… 최현성 씨한테 그런 감정 가지고 있는 거 아니지?”

“뭐, 뭐가요?”

신윤아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거기다 얼굴도 빨개졌다.

“맞네, 맞아. 너 지금 질투 때문에 그러는 거지?”

“제가 무슨 질투를 한다고 그래요? 제 나이가 몇인데 아직 20대인 현성 씨한테 그런 감정을 품고 질투를 해요?”

“에이,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이 되나. 또 네가 나이가 많고 상대의 나이가 적은 게 무슨 상관이야? 원래 그런 감정에는 나이 따위 상관없는 거야. 질투 맞지?”

강선영 협회장의 말에 신윤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자신의 속을 모두 드러낸 기분이다.

당장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 사람이 마음이라는 게 어디 생각대로 되냐? 원래 머리와 가슴은 따로 노는 거야. 머리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데, 가슴이 멋대로 움직이거든.”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맞으면서. 이제야 네가 왜 계속 그렇게 까칠했는지 알겠다. 좋아, 내가 해결해 줄게.”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신윤아가 다시금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면서도 강선영 협회장이 한 말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그런 문제쯤은 손쉽게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강선영 협회장의 자신만만한 표정에 자꾸만 기대감이 생겼다.

강선영 협회장은 자칭 연애의 고수였다.

거기다 일찍 결혼해 애가 셋이나 있는 유부남이었다.

연장자의 관록이 뚝뚝 묻어나는 강선영 협회장의 얼굴이 갑자기 엄청나게 믿음직해 보였다.

“어, 어떻게 해결해 줄 건데요?”

신윤아의 애써 용기를 쥐어짜 내 물었다.

강선영 협회장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야 간단하지.”

“간단하다고요?”

신윤아의 물음에 강선영 협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가.”

“네?”

“너도 미국으로 가라고. 그래서 최현성 씨를 만나.”

강선영 협회장의 말에 신윤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미국에 가서 최현성 씨를 만나라고요?”

“그래.”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요?”

“응? 뭘 어떻게 해?”

강선영 협회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현성 씨를 만나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요?”

“당연히 곁에 꼭 붙어 있어야지. 네가 질투했다는 사실은 절대 티 내지 말고.”

“그건 당연한 거고요! 미국에 가서 최현성 씨를 만나서 곁에 꼭 붙어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요!”

“당연히 한국으로 오라고 설득해야지.”

“네?”

“아, 그리고 너도 현성 씨랑 같이 좀 푹 쉬다가 와.”

강선영이 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경비는 걱정하지 말고. 우리 한국 플레이어 협회도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다. 절대 미국한테 꿀리지 않아. 그러니까 괜히 현성 씨한테 우리 욕은 하지 마라. 너도 섭섭한 감정 풀고.”

“뭐, 뭐라고요?”

“미국한테 공짜 접대 못 받아서 삐진 거잖아. 괜히 한국 플레이어 협회랑 의리 지킨다고 손해 보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품었을 거고. 우리도 너한테 미국 휴가 정도는 얼마든지 보내 줄 수 있어. 경비도 무한대로 지원해 줄 수 있고. 그러니까 맘 풀어.”

“…….”

신윤아가 멍한 표정으로 강선영 협회장을 바라봤다.

“알았어! 앞으로도 절대 차별 안 한다! 내가 VIP 앞에 무릎을 꿇는 한이 있더라도 비공식 던전 소유권 받아서 너한테 줄게. 또 앞으로도 현성 씨한테 주는 만큼 너한테도 똑같이 줄게. 그러니까 현성 씨 질투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 알았지?”

붉게 달아올랐던 신윤아의 얼굴이 빠르게 냉각되기 시작했다.

강선영 협회장은 이제야 신윤아의 화가 풀렸다고 생각했다.

퍼억!

그때 신윤아의 주먹이 강선영 협회장의 눈두덩이를 강타했다.

“아악!”

연약한 마법사 계열 플레이어인 강선영 협회장이 처절한 비명을 토해 냈다.

“저런 인간을 믿은 내가 바보지.”

타악!

신윤아가 강선영 협회장이 꺼낸 카드를 집어 들었다.

꽈앙!

그리고 협회장실 문을 부서질 듯 거칠게 닫고 사라졌다.

“우씨.”

강선영 협회장의 눈에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눈이 터질 듯이 아팠고 눈두덩이가 시퍼렇게 변해 부풀어 올랐다.

“저 계집애는 왜 사람을 때리고 지랄이야?”

나이를 먹더니 폭력 성향이 더 강해졌다.

“아니, 그리고 그 정도면 해 줄 만큼 해 준 거 아닌가?”

강선영 협회장은 억울했다.

최현성과 똑같은 대우를 해 주겠다는데 왜 자신을 폭행한다는 말인가.

“휴, 내가 참아야지.”

강선영 협회장이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진짜 많이 섭섭했었나 보네. 진작 좀 잘해 줄 걸 그랬나?”

잡은 고기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 법이긴 했지만, 그게 너무 심했었나 보다.

강선영 협회장은 앞으로 신윤아에게 더욱더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강선영 협회장은 끝까지 자신이 왜 맞았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협회장실을 나선 신윤아는 스마트폰으로 미국 비행기 표를 끊었다.

그리고 곧바로 공항으로 가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런 인간을 믿음직하다고 생각했다니.’

강선영 협회장의 얼굴을 떠올리자 다시금 노기가 치밀어 올랐다.

‘한 대 더 때리고 오는 건데.’

공평하게 양쪽 눈탱이를 모두 밤탱이로 만들어 주지 못한 게 한이었다.

‘도대체 결혼은 어떻게 한 거야?’

저렇게 눈치 없는 사람은 난생처음 봤다.

신윤아는 몰랐다, 강선영 협회장이 스물두 살의 어린 나이에 네 살 연상이었던 지금의 부인을 만나 그대로 결혼에 골인했음을.

강선영 협회장은 연애 고수는커녕 연애 초짜였다.

아마 지금의 부인이 강선영 협회장을 엄청 마음에 들어 해 적극적으로 대시하지 않았으면, 지금까지 장가도 못 갔을 것이다.

지금의 부인이 그 당시에 엄청나게 적극적으로 대시했음에도 사귀는 데 1년이 넘게 걸렸을 정도로 강선영 협회장은 눈치가 없었다.

* * *

현성은 루시아와 함께 열심히 던전을 클리어했다.

언제 또 공식적으로 미국에 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만큼 기회가 왔을 때 제대로 업적 작업을 해야 했다.

“어?”

야밤에 몰래 사냥을 마치고 숙소로 복귀한 현성이 스마트폰의 부재중 문자를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왜 그러십니까, 주군?”

“윤아 씨가 온다는데요?”

“플레이어 협회에서 꽤 강하게 나오는군요. 주군의 행보에 불안감을 느꼈나 봅니다.”

“뭐, 그럴 만도 하죠.”

겉으로 보기에 현성은 미국의 호화로운 생활에서 제대로 빠져든 것처럼 보였다.

한국이 불안감을 느끼고 신윤아를 보낼 만도 했다.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돌아갈까. 괜한 짓을 하시네.”

현성이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현성과 루시아는 서로 합을 맞추기가 편하다.

둘이 입만 맞추면 얼마든지 미국 정보 요원들을 속일 수 있다.

하지만 신윤아가 끼면 일이 곤란해진다.

감시원 한 명이 더 생기는 꼴이기 때문이다.

“윤아 씨가 오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겠어요.”

“장거리 이동용 스크롤을 꽤 많이 써야겠군요.”

“뭐, 그렇기는 한데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어요. 지금도 한국에 왔다 갔다 하면서 사용하고 있긴 하잖아요.”

현성은 미국에 있는 동안 몇몇 장소를 장거리 이동용 스크롤의 이동 장소로 저장해 놨다.

한국에서 칩거하고 중국에서 일본인 신분증을 이용해 활동했던 것처럼 미국에서도 동일하게 활동할 계획이었다.

지금도 장거리 이동용 스크롤을 이용해 중간중간 한국을 오가고 있었다.

판매 물품을 채워 넣기 위해서였다.

미국에서도 전자 제품은 구매할 수 있지만 괜히 대량 구매를 했다가 미국 연방정부의 정보망에 걸려들 위험이 있었기에 장거리 이동용 스크롤을 이용했다.

“현지 시각으로 오전 10시에 도착이니까 아침 먹고 마중 나가면 되겠네요.”

“전 제 방으로 가서 외출 준비를 하고 오겠습니다.”

“그러세요.”

현성은 외출 준비를 하며 적당히 며칠 정도 버티다 한국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애를 태워야지.’

신윤아가 왔다고 바로 쪼르르 한국으로 갈 생각은 없었다.

신윤아에게는 미안하지만 적당히 한국 플레이어 협회의 애간장을 태운 뒤 귀국할 생각이었다.

* * *

신윤아가 미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출국 게이트를 빠져나온 신윤아는 미리 마중 나오기로 했던 한국 플레이어 협회 미국 지부 직원을 찾았다.

“어?”

그런 신윤아의 눈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얼굴이 들어왔다.

“현성 씨!”

신윤아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여 현성을 불렀다.

“오느라고 고생하셨어요. 그런데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이유야 뻔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성은 모르는 척 시지미를 뚝 떼고 물었다.

“그야 당연히 현성 씨 때문에 왔죠. 한국에는 언제 돌아오실 건가요?”

신윤아의 물음에 현성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미국 생활이 워낙 편해서 언제 돌아갈지 모르겠는데요.”

“그래요? 잘됐네요. 좀 오래 있으셔도 돼요. 현성 씨가 한국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저도 미국에서 지낼 생각이거든요.”

“네?”

예상과 다른 반응에 현성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왜요? 제가 같이 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아뇨. 그건 아닌데요.”

“그럼 문제없네요. 휴가 겸해서 왔으니까 같이 미국 관광이나 제대로 해 보죠, 뭐.”

신윤아의 말에 현성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숙소는 정하셨나요?”

“네, 현성 씨가 머물고 있는 호텔로 잡았어요.”

“잘됐네요. 그럼 같이 가시죠. 짐은 제가 나눠 들겠습니다.”

현성이 신윤아의 짐 가방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신윤아의 스텟이면 짐 가방이 무거울 리는 없겠지만 양손이 묶여 있으면 움직이는 데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나눠 들겠습니다.”

그때 현성의 뒤에 병풍처럼 서 있던 루시아가 전광석화처럼 움직여 신윤아의 짐 가방 하나를 챙겼다.

“우시아 씨?”

“네.”

“감사해요.”

“별말씀을.”

신윤아와 루시아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제가 들어도 되는데……. 일단 가시죠.”

현성이 자신도 모르게 신윤아와 루시아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세 사람은 미국 측에서 제공해 준 차량을 타고 호텔로 이동했다.

호텔에 도착한 신윤아가 자신의 객실에 짐을 풀었다.

“그럼 전 제 룸에 들어가서 쉬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루시아가 자신의 객실로 들어갔다.

밤새워 사냥을 했으니 피로할 만도 했다.

“윤아 씨도 좀 쉬세요. 저도 제 룸에서 잠깐 쉬다 오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현성이 자신의 객실 문을 열었다.

“두 분이 룸을 따로 쓰시나 봐요?”

신윤아의 물음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미국 연방정부에서 호텔 숙박비를 결제해 주니까 굳이 둘이서 룸 하나를 같이 쓸 필요는 없죠. 그게 아니더라도 호텔 숙박비 걱정할 정도는 아니고요.”

현성의 말에 루시아의 등장 이후 살짝 쌀쌀맞게 변했던 신윤아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아, 숙소를 따로 쓰시는구나.”

“네, 그렇습니다.”

“아니에요. 그럼 저도 좀 쉬고 연락드릴게요. 주변 관광이나 시켜 주세요.”

“그럼 점심때쯤 뵙죠. 맛집부터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좋아요.”

현성과 신윤아가 각자의 객실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 * *

“신윤아라……. 그녀가 미국에 왔단 말이지.”

윌리엄이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공항에서 최현성과 접촉했습니다. 바로 옆 객실을 잡은 것으로 보아 앞으로도 계속 함께 움직일 모양입니다.”

부관의 대답을 들은 윌리엄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신윤아도 함께 포섭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부관의 물음에 윌리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애국심이 강한 인물이네. 이전에 있었던 회유 공작도 모두 실패했어. 그런 그녀에게 다시 공작을 한다고 넘어올 것 같지는 않군.”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일단은 최현성을 다시 한국으로 돌려보내 줘야겠지. 딱히 붙잡아 둘 명분도 없으니.”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한국 정부를 압박하면 체류 기간을 좀 더 연장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부관의 조언에 윌리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네. 최현성이 신윤아와 같은 타입이라면 그런 방법을 써서라도 강제로 붙잡아 놨겠지만, 자네도 봤다시피 최현성은 그런 타입이 아니지 않나?”

“그건 그런 것 같습니다.”

“최현성은 이미 우리 미국에 적지 않은 호감을 가지고 있네. 몇 번 이런저런 핑계로 초대해 호감을 산다면 완전히 미국에 눌러앉게 만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야. 괜히 강압적인 방법을 써서 미국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심어 줄 필요는 없네.”

“알겠습니다.”

“최현성은 물론 신윤아에게도 적당히 편의를 봐주게. 회유는 힘들겠지만 호감을 사서 손해 볼 일은 없는 플레이어니까 말이야.”

“그렇게 지시하겠습니다.”

윌리엄이 부관과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대화 대상은 최현성과 신윤아였고 주 내용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현성의 호감을 사라는 내용이었다.

덜컹!

그때 윌리엄의 집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무슨 일인가?”

윌리엄이 다급하게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정보 요원에게 물었다.

“큰일입니다! 히드라가 출현했던 차원 게이트에서 전설 등급 몬스터로 추정되는 개체가 등장했습니다!”

“뭐?”

윌리엄의 표정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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