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국의 일이 마무리되자 현성이 완전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 플레이어 협회는 현성이 중국에 간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중간중간 현성이 한국을 들락날락거렸기 때문이다.
현성은 일상으로 돌아가 루시아와 함께 영웅 등급 던전을 클리어했다.
꽈아아앙!
영웅 등급 몬스터들이 힘없이 쓸려 나갔다.
‘엄청 강해졌네.’
현성은 중국행 이후 엄청나게 강해졌다.
익히고 있는 스킬도 엄청나게 늘렸고, 포인트를 투자해 흑뢰룡의 숨결과 불사의 서를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전설 등급으로 성장한 불사의 서에 옵션은 바뀐 게 없었다.
그저 회복력이 크게 올라갔을 뿐이다.
문제는 그 회복력이 엄청나다는 점이다.
중국에서 1만 명의 플레이어를 상대로 접전을 벌였을 당시 불사의 서는 반쯤 녹아내린 상반신을 순식간에 회복시켰다.
화살이 심장을 관통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화면을 거꾸로 돌리듯 상처가 생기기 무섭게 사라졌다.
현성은 전설 등급 스킬북 중 상처 회복이나 뇌전 계열 스킬을 구입해 불사의 서와 흑뢰룡의 숨결을 강화했다.
‘신화 등급 스킬로 성장시켜야지.’
1,000조 포인트는 중국행으로 어마어마한 포인트를 벌어들인 현성으로서도 너무 까마득한 수치였다.
신화 등급에 이르지 못하면 신화 등급 스킬을 구입할 수 없다.
하지만 성장이 가능한 흑뢰룡의 숨결과 불사의 서는 사정이 달랐다.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해야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스킬북을 흡수해 성장이 가능했다.
포인트를 지속적으로 투자하다 보면 신화 등급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성장형 유일 등급 스킬을 더 늘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아쉽게도 성장형 유일 등급 스킬을 얻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현성은 용혈검과 불사의 서를 얻을 때 죽을 고비를 넘겼다.
‘네임드 몬스터.’
단 한 개체밖에 등장하지 않는 특별한 몬스터.
그런 놈들이 유일 등급 스킬을 줄 확률이 높았다.
‘용혈검도 성장시켜야 하는데…….’
용혈검은 용종의 피를 먹고 성장한다.
그러다 보니 흑뢰룡의 숨결이나 불사의 서와 달리 성장시키기가 상당히 까다로웠다.
‘이무기 같은 전설 등급 용종 몬스터를 사냥한다면 좀 성장하려나?’
현성은 과거 벌어졌던 이무기 레이드에서 사실상 깍두기 같은 존재였다.
용혈검이 없었다면 기여도 1위는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페널티가 큰 소모형 아이템을 사용한다면 전설 등급 몬스터를 일대일로 상대해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전설 등급 몬스터가 일본에 있다는 점이었다.
‘후쿠오카라도 가야 하나.’
변신 주문서를 사용하면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조인족들을 사냥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이 문제였다.
현성이 변신 주문서를 사용해 몬스터로 변한 후 조인족과 전투를 벌이면 분명 큰 주목을 끌 것이다.
당연히 일본이 알아차릴 것이고, 그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일본이 어부지리를 노릴 게 당연한 상황.
잘되면 일본만 좋은 일 시켜 주는 꼴이 되고, 자칫 잘못하면 페널티를 가진 상태로 일본 플레이어들과 대적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다.
거기다 조인족이 도주하거나 현성이 밀릴 가능성도 따져 봐야 했다.
조인족은 공중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공중형 몬스터.
상황이 불리해지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다.
또 현성이 공중에서 몰아치는 조인족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물러나야 할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지상형 전설 등급 몬스터가 등장하면 좋은데.’
차원 게이트로 도망친 오크들이 오크 대족장이나 오크 주술사 같은 녀석 하나 데리고 오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아직 소식이 없었다.
“주군, 정말 강해지셨습니다.”
루시아의 말에 현성이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다 루시아가 건네준 포인트 덕분이죠.”
현성이 중국에서 설치고 돌아다니는 동안 루시아는 장사를 통해 계속 포인트를 모았다.
현성은 한국으로 돌아올 때마다 그 포인트를 받아 스킬북을 구입해 불사의 서와 흑뢰룡의 숨결을 강화시켰다.
그 덕에 구매창에 회복 계열 스킬북과 뇌전 계열 스킬북이 씨가 마른 상태였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루시아가 덤덤하게 말했다.
“루시아도 많이 강해졌네요.”
“주군의 은총 덕분입니다.”
루시아는 현대 물품을 팔고 얻는 10%의 마진으로 착실하게 강해졌다.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아이템이었다.
안타깝게도 루시아는 얼마 전까지 전설 등급 아이템이 하나도 없었다.
이에 현성은 중국에서 돌아온 후 루시아에게 전설 등급 무기와 방패를 선물해 줬다.
루시아가 현성을 대신해 해 준 일을 생각하면 그 정도 선물은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루시아는 현성의 첫 번째 신하이자 현성이 군주로 전직할 수 있게 해 준 은인이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중국 똘마니 마분석에게도 전설 등급 아이템을 줬다.
그런데 똘마니 마분석보다 서열이 한참 위인 현성의 심복 루시아가 열악한(?) 영웅 등급 장비로 몬스터를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현성은 양심이 콕콕 찔렸다.
그래서 통 크게 전설 등급 무기와 방패를 선물했다.
루시아는 처음에는 사양했지만 결국은 못 이기는 척 선물을 받아 갔다.
전설 등급 검과 방패를 착용한 루시아는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보여 줬다.
‘역시 지갑이 빵빵하면 부담이 없다니까.’
루시아에게 전설 등급 장비를 2개나 선물해 줬지만, 현성의 포인트는 아직도 빵빵했다.
DVD 플레이어와 TV 판매는 시들해졌지만 영화 DVD 판매는 여전히 잘되고 있었다.
캠핑용 대용량 배터리 역시 잘 팔려 나가고 있었다.
거기다 중국에서 전리품으로 얻어 온 쓸모없는 영웅 등급 아이템들 역시 빠르지는 않지만 나름 잘 팔려 나갔다.
루시아에게 전설 등급 아이템 2개 정도를 선물로 주는 건 현성에게 아무런 부담도 되지 않았다.
‘아직도 안 올라왔네.’
현성은 사냥하는 중간중간 구매창을 확인했다.
회복 계열 전설 등급 스킬북이나 뇌전 계열 전설 등급 스킬북이 올라왔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전설 등급 스킬북은 수량이 너무 적어.’
영웅 등급을 스킬북을 먹여 성장시키는 방법도 있었지만 효율이 너무 떨어졌다.
현성이 영웅 등급 회복 계열 스킬북과 뇌전 계열 스킬북을 사들이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두 종류 스킬북의 가격이 확 올라갔기 때문이다.
전설 등급이라면 가격이 어느 정도 올라도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충분히 그만큼의 값어치를 하니까.
하지만 성장에 큰 도움도 안 되는 영웅 등급 스킬북을 그런 고가에 살 수는 없었다.
현성은 나중에 가격이 하락하면 그때 회복 계열과 뇌전 계열 영웅 등급 스킬북들을 싹쓸이할 생각이었다.
“주군, 이제 그만 돌아갈 시간입니다.”
루시아의 말에 현성이 마석으로 작동하는 시계를 확인했다.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우리 조금만 더 사냥하다 갈까요? 한 3시간 정도만 더 사냥하면 업적 하나 깰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럼 생활 패턴이 어그러집니다. 내일 더 많은 몬스터를 사냥을 위해서는 오늘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루시아의 말에 현성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렇게 몇 시간만 더, 몇 시간만 더 하다가 반나절을 더 사냥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 돌아가죠.”
현성의 말에 루시아가 던전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뭔가 묘하게 서두르는 것 같았다.
“오늘이 월요일이었죠?”
“그렇습니다.”
“최고의 로맨스 방송날이네요.”
루시아가 어깨를 살짝 움찔거렸다.
“어쩐지 오늘따라 묘하게 설명이 많다 했더니.”
평소라면 ‘그만 돌아가시죠.’ 또는 ‘그럼 조금 더 사냥하죠.’라고 짧게 자신의 의사를 밝혔을 것이다.
한데 오늘따라 말이 많다 했다.
“드라마 때문에 그런 거 아닙니다.”
“누가 뭐라고 했나요?”
현성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묘하게 설명이 많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냥 설명이 많아서 많다고 한 건데요.”
“이익!”
루시아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먼저 가겠습니다.”
그러더니 그 말과 함께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삐진 것이다.
‘은근히 귀여우시다니까.’
나이는 루시아가 현성보다 월등히 많을 것이다.
한데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은근히 귀여웠다.
현성이 모른 척하며 루시아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인범이한테 술이나 한잔하자고 할까?’
현성은 윤성호를 만난 이후 인연이 끊겼던 친구들과 다시 연락이 닿았다.
그 후 가끔 연락해 친구들과 술 한잔하는 여유를 즐겼다.
끼이익!
던전 출입구를 열고 현성과 루시아가 던전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켰다.
현성은 친구 한인범에게 전화를 할 생각이었다.
‘어?’
하지만 그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윤아 씨네.’
신윤아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도대체 밥은 언제 사 줄 생각이에요?
그게 문자 내용의 전부였다.
‘완전히 까먹고 있었네.’
일본에서 돌아오면 밥 한 끼 사겠다고 했는데, 이런저런 일이 터지며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현성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저 최현성입니다. 문자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서 문자로 보냈어요.
“던전에 들어가 있어서요.”
-칩거는 끝나신 건가요?
“중국이 당분간 사고 칠 정신은 없을 것 같아서요.”
-그렇기는 하죠.
“밥은 언제 사 드릴까요?”
-지금 당장요.
신윤아의 말에 현성이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하죠.”
현성과 신윤아가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신윤아 씨입니까?”
루시아가 물었다.
“네, 아무래도 뭔가 또 일이 생긴 것 같아요.”
신윤아와 밥 한 끼 같이하자고 약속한 건 꽤 오래전이다.
하지만 계속 일이 터지고 정신이 없어 반쯤 잊고 있었다.
그건 신윤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실 정신없이 바쁜 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한국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밥을 사 달라고 한다?
그것도 현성이 칩거했다고 알고 있던 상황에서?
이전 절대 가볍게 밥이나 먹자고 부르는 게 아니었다.
현성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신윤아는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뵙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현성과 신윤아가 가볍게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식당은 룸 형식으로 이루어진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그동안 많이 바빴죠?”
“윤아 씨만 했을까요?”
“가족분들은 좀 진정되셨나요?”
“예, 정신과 치료를 지속적으로 받아서 그런지 많이 안정되셨습니다.”
현성와 신윤아가 안부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미리 예약한 음식이 나왔다.
현성과 신윤아는 식사를 하며 가벼운 잡담을 나눴다.
식사가 거의 끝나 갈 때쯤, 신윤아가 현성을 부른 진짜 용건을 꺼냈다.
“오늘 여섯 번째 전설 등급 몬스터가 등장했어요.”
신윤아의 말에 현성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어느 나라입니까?”
한국이라면 신윤아와 현성이 레스토랑에서 잡담을 나누며 스테이크를 썰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미국이에요.”
현성이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나 중국이 아니라 미국이라니? 미국은 태평양 건너편에 있는 나라가 아닌가.
지리상 한국과 미국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왜 저에게 연락을?”
“미국이 현성 씨를 원하고 있어요.”
“네? 그게 무슨……?”
현성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미국이 자신을 원하다니.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사실 미국이 현성 씨를 원한 건 꽤 오래전부터예요. UN을 통해 연락이 왔었지만, 사실상 미국의 뜻이나 마찬가지였죠.”
현성은 자신이 모르는 뒷이야기가 있음을 느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그게…….”
신윤아가 설명을 시작했다.
현성은 모르고 있었지만 UN은 지속적으로 한국에 플레이어 파견을 요청했다.
그것도 최현성이라는 플레이어를 콕 찍어서 말이다.
예상 투입 국가는 미국.
UN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가 미국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특히 그때 미국에는 UN 연합군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다급한 일이 없었다.
한국 플레이어 협회는 미국이 현성을 회유하려 한다고 생각하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때마침 중국 비밀 요원 습격 사건이 터져 현성이 칩거해 버렸기에 적당한 변명거리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 들어온 요청은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여섯 번째 전설 등급 몬스터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미국이 UN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한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한국과 미국은 동맹국이었고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있었다.
문제는 이게 타국의 침략을 받았을 때만이 아닌 몬스터의 침공을 받았을 때도 발동한다는 점이었다.
대격변 초기 한국과 미국은 상호 동의하에 상호방위조약의 범위를 넓혔다.
지금까지 몬스터 침공으로 인해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발동한 적은 없었다.
사실 몬스터에 관해서는 한국이 미국에 도움을 주면 줬지 받을 일은 없었다.
미국 역시 굳이 한국에 손을 벌릴 정도로 사정이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한미 양국은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한쪽이 도움을 요정하면 지원을 가야 했다.
“미국에서 콕 집어서 저를 보내 달라고 했다고요?”
현성의 물음에 신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솔직히 명분상으로 거절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뭐, 그럴 만도 하죠.”
동맹국이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한국이 군사적인 면에서 미국에 도움을 준 적은 거의 없다.
아마 미국이 본토가 위기에 처했다며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발동해 한국에 지원을 요청한 건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미국이 자존심까지 꺾어 가며 처음으로 한 지원 요청을 한국이 무시한다?
아마 후폭풍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저기, 그런데 전 민간인인데요?”
현성은 군인이 아니다.
플레이어 협회와 계약을 맺기는 했지만 계약 내용 어디에도 타국까지 가서 몬스터를 잡아야 한다는 내용은 없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마련한 거예요. 협회장님이 저보고 현성 씨를 잘 좀 설득해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미국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게 단속도 단단히 하고요.”
한국 플레이어 협회는 현성을 설득해 미국에 보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렇게 보냈다가 현성이 미국의 회유에 홀라당 넘어가 그대로 눌러앉으면 큰일이다.
“플레이어 협회 입장이 난감하긴 하겠네요.”
“알아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그렇다고 제가 플레이어 협회의 부탁을 들어줄 필요는 없지 않나요? 더군다나 이건 전설 등급 몬스터를 상대해야 하는 위험한 일이잖아요.”
현성이 천연덕스럽게 위험한 일이라고 말했다.
방금 전까지 전설 등급 몬스터 사냥을 위해 ‘후쿠오카로 가야 하나?’ 하고 고민했던 주제에 말이다.
아마 신윤아가 현성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사기꾼이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신윤아에게 현성의 속마음을 읽는 능력 따위는 없었다.
“그렇죠. 위험한 일이죠. 그래서 플레이어 협회 차원에서 그에 합당한 보상을 준비했어요.”
“뭐죠?”
솔직히 플레이어 협회가 현성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조 단위의 돈을 거머쥘 수 있었다.
아이템?
플레이어 협회에서 제공해 줄 수 있는 아이템은 현성에게 별다른 가치가 없었다.
“일단 마석 수익 배분을 10 : 0으로 수정해 드릴게요.”
기존에 가져가던 2할조차 받지 않겠다는 뜻이다.
현성이 던전에서 습득하는 마석 수량은 엄청나다.
2할이라고 해도 꽤 큰 수익이다.
하지만…….
“그냥 계속 가지고 가셔도 되는데.”
현성에게는 그리 큰 의미가 없는 수치였다.
“또 현성 씨 개인에게 면세 혜택을 줄 생각입니다.”
“면세 혜택요?”
“네.”
“그건 지금도 받고 있는 거 아닌가요?”
현성은 어차피 면세 혜택을 받고 있었다.
이미 받고 있는 걸 어떻게 다시 준다는 말인가.
“현성 씨가 지금 면세 혜택을 받고 있는 건 플레이어 협회 직속이기 때문입니다. 플레이어 협회를 떠나면 면세 혜택이 사라지죠.”
“아, 조건부 혜택이었는데 그 조건을 빼겠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음…….”
이것도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현성은 플레이어 협회를 통째로 집어삼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플레이어 협회를 떠날 생각을 접은 것이다.
그런 현성에게 개인 면세 혜택은 그리 큰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플레이어 협회에 적만 두고 있으면 받을 수 있는 혜택이 아닌가.
“시큰둥하시네요.”
“어차피 이번에 플레이어 협회랑 재계약할 생각이었거든요.”
“감사한 말씀이네요.”
“설마 이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혜택이 전부인가요?”
현성이 말에 신윤아가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협회장님과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 플레이어 협회에서 현성 씨에게 해 드릴 수 있는 혜택이 딱히 없더라고요.”
“그럼 이게 끝입니까?”
“그건 아니에요.”
“그럼 진짜 패를 까 주시죠.”
“협회장님이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어요. 사실 이번 일의 발단은 정부잖아요. 그랬더니 통 크게 던전 소유권 카드를 꺼내 들더군요.”
“던전 소유권요?”
현성의 눈이 번뜩였다.
던전은 모두 국가 소유다.
지금까지 그 어떤 단체나 개인도 던전을 사유화하지는 못했다.
그건 국내에서 날고뛰는 대기업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편법을 이용해 전용 던전처럼 사용했을 뿐이다.
“정부에서 최현성 씨에게 원하는 던전 1개의 소유권을 완전히 넘기기로 했습니다. 그 던전을 독점해서 혼자 사냥을 하시든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개방해 입장료를 받든 정부는 일절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아, 물론 비공식적인 소유권 이전입니다. 공개적으로 소유권을 넘기면 대기업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거든요.”
던전 소유권.
개인 사냥터로 사용해 포인트를 버는 용도로 쓰거나 신하들에게 제공해도 된다.
그게 아니라면 입장료만 받아먹어도 어마어마한 수익이 지속적으로 들어온다.
“1개는 너무 적고, 3개로 하시죠.”
현성의 말에 신윤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1개도 정부에서 큰마음 먹고 넘기는 거예요. 영웅 등급 던전 1년 입장료 수익이 얼만지나 아세요? 웬만한 중견 기업 매출 뺨 치고 남을 정도예요.”
영웅 등급 던전은 숫자가 적다.
던전을 이용하는 플레이어들도 중, 저레벨이 아니라 고레벨 플레이어와 랭커 들이다.
당연히 많은 수익이 나고 던전 입장료 자체도 어마어마한 고가였다.
입장료만 받아먹어도 대대손손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었다.
거기다 던전은 경기를 탈 일도 없고 부동산처럼 가치가 등락할 일도 없었다.
“그럼 영웅 등급 던전 하나에 희귀 등급 던전 둘로 하시죠.”
“안 된다니까요.”
치열한 실랑이가 이어졌다.
하지만 신윤아는 을이었고 현성은 갑이었다.
“영웅 등급 던전 하나에 희귀 등급 던전 하나. 이게 최후 마지노선이에요.”
신윤아의 말에 현성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제가 그 정도에서 양보하죠.”
“양보는 무슨.”
신윤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중얼거렸다.
“윤아 씨도 종신 계약 파기하시죠. 그럼 혹시 압니까, 정부에서 윤아 씨한테도 던전 줄지?”
“미국이 현성 씨를 원하는 것만큼 간절하게 저를 원했다면 가능했을 수도 있는데 그렇지는 않아서요.”
오크 대족장 레이드와 오크 주술사 레이드 이후 현성의 주가는 수직 상승했다.
반면 그 전까지 한국 최고의 플레이어로 평가받던 신윤아의 주가는 수직 하락했다.
“어쨌든 미국으로 가기로 하신 거예요.”
“당연하죠.”
사실 안 보내 준다고 했어도 자원해서 가려고 했었다.
“그리고 미국이 아무리 사탕발림을 해도 절대 넘어가지 말고 꼭 다시 돌아오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던전 소유권도 받았는데 미국으로 넘어갈 수는 없죠.”
정부에서 현성에게 던전 소유권을 준 이유는 단순히 줄 게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정부 입장에서는 현성에게 막대한 보상금을 줄 수도 있었고, 대량의 토지를 줄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영웅 등급 스킬북을 잔뜩 안겨 줘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현성에게 대기업에도 넘기지 않았던 던전 소유권을 넘겨줬다.
그간의 관례를 깨고 국가 소유였던 던전을 비공식적으로나마 개인에게 넘긴 것이다.
그건 바로 던전 소유권이 가지는 특수성 때문이다.
던전 소유권은 다른 재화처럼 가지고 갈 수 없다.
팔아서 현금화시킬 수도 없고 환전할 수도 없다.
현성이 한국인이었을 때는 던전 소유권을 온전히 인정받을 수 있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 넘긴 만큼 현성이 타국으로 국적을 바꾸면 정부의 의사에 따라 언제든지 던전 소유권을 되찾아 올 수 있다.
던전 소유권은 현성을 절대 미국에 빼앗기지 않겠다는 한국 정부의 굳건한 의지의 상징이었다.
뭐, 잔뜩 퍼 줘서 미국에 가면 손해라는 식으로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게 조금 모양 빠지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미국에 등장한 전설 등급 몬스터는 어떤 놈입니까? 아직 인터넷에 공개되지는 않은 모양이던데요.”
“히드라라고 합니다, 머리가 아홉 개나 달린.”
“용종이네요.”
“분류상으로 따지자면 그렇죠.”
현성이 속으로 폭소를 터트렸다.
다른 종의 전설 등급 몬스터라도 기꺼웠겠지만 무려 용종이다.
그간 지지부진하던 용혈검을 성장시켜 줄 수 있는 촉매제가 등장한 것이다.
거기다 용혈검은 용종을 상대할 때 월등히 좋은 효율을 발휘한다.
전설 등급 몬스터 1인 레이드의 성공 가능성이 더 올라간 것이다.
‘용의 혈조 스킬을 제대로 써먹을 수 있겠네.’
용종의 피로만 발동시킬 수 있다는 제약 때문에 그동안은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히드라를 상대로는 얼마든지 사용이 가능했다.
‘그냥 가기만 해도 이득인데 던전 소유권까지 받았네.’
이쯤 되니 현성에게 간, 쓸개 가릴 것 없이 다 내준 한국 정부에게 미안한 감정이 생길 정도였다.
“다행히 차원 게이트가 열린 지역이 도시가 아니라 허허벌판이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아직까지 인명 피해는 없는 모양이더군요.”
“그놈이 얌전히 있나 보네요?”
“주변을 탐색하기는 하는데, 그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지는 않다고 하더군요.”
“그럼 전 언제 출발하면 되나요?”
현성의 물음에 신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지금 당장요.”
결국 그날 현성은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곧바로 미군기지로 향해야 했다.
그리고 곧바로 미군 전용기에 탑승해 미국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