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 마분석 (56/225)
  • ┃마분석

    “사, 살인이다!”

    “꺄아아악!”

    기자들 중 일부가 놀라 비명을 터트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대다수의 기자들은 놀라서 물러나기는커녕 더 가까이 다가와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곳에 있던 기자들 중에는 인터넷으로 생방송 중계를 하던 이들도 있었다.

    왕진광 장관의 폭로와 죽음이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퍼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현성은 어둠 속에 숨어 그 광경을 지켜봤다.

    ‘말끔하게 해결됐어.’

    죽은 자가 입을 열 수는 없으니 왕진광 장관이 랫맨을 만났다는 사실은 영원히 공개되지 않을 것이다.

    왕진광 장관의 폭로 내용 중에는 한국에서 벌인 공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절대 아니라고 오리발 내밀던 일을 누가 주도했고 누가 지시를 내렸는지 상세하게 공개된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그들의 목을 따 버리고 싶었지만, 경호원들이 많이 그러기가 힘들었다.

    강제로 쳐들어간다면 가능이야 하겠지만 그러면 죄 없는 이들의 목숨을 수도 없이 거둬야 했다.

    현성은 더 이상 무의미한 살생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현성이 마력을 끌어 올려 파이어 스톰을 사용했다.

    목표는 왕진광 장관의 자택이었다.

    꽈아아아앙!

    커다란 폭발과 함께 시뻘건 화염이 왕진광 장관의 자택을 뒤덮었다.

    기자들은 놀라면서도 물러나기는커녕 더욱 열정적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걸로 복원 스킬이나 추적 스킬로 꼬리를 잡힐 일도 해결했고…….’

    이제 남은 것은 중국 플레이어 협회장이었다.

    * * *

    중국이 발칵 뒤집혔다.

    왕진광 장관의 폭로와 죽음 때문이었다.

    전 세계에서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그간 미제로 남았던 사건들을 비롯해 사고라고 여겨졌던 일들이 중국 정부의 공작이었음이 드러났다.

    -이건 모함이다.

    -왕진광 장관이 헛소리를 한 거다.

    중국 정부는 다시 한번 오리발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특히 중국의 공작에 피해를 입은 국가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거기다 국내 정세조차 심상치가 않았다.

    가장 먼저 들고일어난 건 소수민족들이었다.

    비밀 요원들의 공작의 상당수가 소수민족들을 대상으로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번 기회에 정말 독립을 쟁취해 내겠다는 각오로 거세게 들고일어났다.

    당의 정책에 반대하다 비밀 요원들의 공작으로 생을 마감한 내국인들 역시 들고일어났다.

    그러던 와중에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사건이 터졌다.

    중국 정부에서 운영하던 비밀 요원들의 행적과 신상 정보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다.

    왕진광 장관이 공개한 기밀 자료에는 작전 지시 문서만 있었지 실행에 옮긴 비밀 요원들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한데 인터넷에 작전을 실행한 비밀 요원들의 행적과 신상 정보가 공개되었다.

    당연히 왕진광 장관의 폭로가 힘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 정부는 모두 거짓이고 중국을 무너트리려는 타국의 공작이라며 자국민 집결시키기에 나섰다.

    하지만 제대로 통할 리가 없었다.

    타국이 모두 등을 돌렸다.

    자국 내에서도 분란이 끊이지 않는다.

    2차 대격변, 이무기 사태를 겪으며 흔들리던 중국이 랫맨 사태와 왕진광 장관의 폭로로 인해 빠르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 * *

    “억울합니다! 전 이번 일에 절대 관여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야 자네를 믿고 있네. 하지만 자네를 의심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야.

    “위원장님,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내가 최대한 자네 변호에 힘써 보겠네.

    “잘 부탁드립니다. 선물은 섭섭하지 않게 보내 드리겠습니다.”

    -기대하지.

    뚝.

    전화가 끊어졌다.

    “욕심 많은 돼지 새끼.”

    중국 플레이어 협회장 마분석이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얼굴이 금세 근심으로 물들었다.

    ‘상황이 심상치가 않아.’

    협회장 마분석이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협회장 마분석의 뒷배였던 왕진광 장관이 실각당할 때만 해도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왕진광 장관은 상황에 따라 당에서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카드다.

    하지만 협회장인 마분석은 다르다.

    마분석은 중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을 지닌 랭커 중에 랭커다.

    또 당에 친화적인 플레이어이기도 했다.

    추종 세력도 많아 왕진광 장관이 사임되었어도 계속 자리를 유지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왕진광 장관의 미친 짓 때문이다.

    ‘그놈은 곱게 죽을 것이지, 왜 그딴 짓을 해서…….’

    왕진광 장관에게 비밀 요원들을 보낸 당사자가 바로 협회장 마분석이었다.

    당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일부러 더러운 일에 발을 담갔다.

    문제는 일이 꼬이면서부터다.

    당의 간부들이 협회장 마분석을 의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협회장 마분석이 왕진광 장관에게 당의 뜻을 알려 배신하게 만들었다.

    그 후 암살해 이슈를 키움과 동시에 꼬리를 잘라 버렸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음모론이 당의 간부들에게 퍼지고 있었다.

    그런 음모론이 나온 이유는 중국 플레이어들이 당에 가지고 있는 불만에서 기인했다.

    중국은 전 세계를 통틀어 플레이어들의 대접이 가장 좋지 않은 나라 중 하나다.

    일단 습득하는 마석과 아이템은 정부가 운영하는 던전 출입구 관리소에서 정가를 정해 일괄 구매했다.

    정부는 플레이어들에게 직구매한 마석이나 아이템을 사기업에 판매하거나 타국에 수출했다.

    중간에서 정부가 마진을 챙기다 보니 플레이어들의 수입은 당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플레이어 특별법을 제정해 세금도 어마무시하게 뜯어 갔다.

    그뿐이 아니었다.

    중국 정부는 플레이어들이 만든 길드를 직접적으로 통제했다.

    또 비상 소집령을 통해 플레이어들을 소집해 대량의 사망자가 발생한 경우에도 제대로 된 보상을 해 주지 않았다.

    이무기 레이드에 동원되었다가 사망한 플레이어들은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나라가 정상적일 때는 어떻게든 통제가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무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플레이어들의 불만이 제대로 통제되지 못했다.

    플레이어들은 이무기 레이드와 랫맨 레이드에서 사망한 동료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 주라며 정부를 압박했다.

    그뿐 아니라 던전 출입구 관리소가 아닌 사기업에 직접 마석을 팔 수 있는 시스템을 요구했다.

    중국 플레이어 협회장인 마분석은 당에 충성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플레이어다.

    당의 간부들은 그가 플레이어들을 등에 업고 독자적인 세력을 키우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난 억울하다고.’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던 마분석 협회장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내가 할 수 있으면 진작 했지.’

    마분석 협회장은 플레이어면서도 정치인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다.

    당연히 권력에 대한 탐욕이 철철 흘러넘쳤다.

    실제로 당의 간부들이 의심하는 일을 계획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권력자들의 탐욕은 엄청났고, 플레이어가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반란을 일으켜 현 권력자들을 한 번에 쓸어버리지 않는 한 마분석이 권력을 쥐기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반란은 불가능했다.

    플레이어들 중 마분석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이들의 숫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반란을 일으키면 군대가 나서기도 전에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제압당할 것이다.

    반란을 일으키면 마분석만 개죽음을 당할 뿐이다.

    ‘이놈을 믿을 수 있을까?’

    아마 뇌물은 뇌물대로 받아먹고 제대로 힘을 써 주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붙잡아야 할 때였다.

    이대로 의심만 받다가 실각당하는 것은 너무도 억울하지 않은가?

    “망할 놈의 새끼들!”

    개처럼 충성했다.

    그런데 버림받을 위치에 놓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다 때려 죽여 버리고 싶었다.

    “플레이어들이 나를 중심으로 단합만 했어도 그 개새끼들을 다 쓸어버릴 수 있는데.”

    “그럼 뭐가 달라지지?”

    그때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

    화들짝 놀란 마분석이 자신의 무기인 창을 움켜쥐고 등 뒤로 휘둘렀다.

    팅!

    창날이 무언가에 막혔다.

    마분석은 당황하지 않고 반동을 이용해 적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 후 몸을 돌려 갑자기 등장한 불청객을 향해 창을 겨눴다.

    “헉!”

    하지만 불청객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죽고 싶지 않다면 무기는 내려놓는 게 좋지 않을까? 거래를 할 생각이긴 하지만, 계속 그렇게 불쾌한 태도를 보이면 애초 목적대로 네놈을 죽여 버릴 수밖에 없거든.”

    불청객의 말에 마분석이 창을 내렸다.

    자신에게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랫맨.”

    1만 명의 플레이어들을 쓸어버린 전설 등급 몬스터.

    홀로 저 괴물을 쓰러트리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어, 어떻게 인간의 말을…….”

    마분석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몬스터와 플레이어는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플레이어와 플레이어는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도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플레이어와 몬스터는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지능이 있고 단체 생활을 하는 오크나 고블린 같은 인간형 몬스터들은 서로 대화를 한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그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와 문자를 자유자재로 읽고 해석할 수 있는 플레이어의 기본적인 이능이 몬스터들에게는 먹히지 않는 것이다.

    “플레이어였나?”

    마분석이 허탈한 음성으로 물었다.

    랫맨은 영어를 사용했다.

    마분석의 영어 실력은 그리 출중하지 않다.

    하지만 랫맨이 하는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랫맨의 물음에 마분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대가 몬스터든 플레이어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눈앞의 상대가 자신쯤은 가볍게 찢어 죽일 수 있는 강자라는 것뿐이었다.

    “원래는 네놈을 죽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원하는 게 뭐지?”

    “네놈이 원하는 권력을 주마.”

    “뭐?”

    “네가 욕하던 당의 간부들을 내가 대신 죽여 주겠다. 그럼 권력을 잡을 수 있겠나?”

    랫맨의 물음에 마분석의 머릿속이 맹렬히 회전했다.

    거절하면 자신은 죽는다.

    하지만 설사 랫맨의 손에 죽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의 미래는 상당히 어두웠다.

    “지금 당의 간부들을 죽여 주겠다고 했나?”

    마분석의 물음에 랫맨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게 뭐지?”

    마분석의 물음에 랫맨의 쭉 찢어진 주둥이가 흉측하게 벌어졌다.

    “여기에서 서명해라.”

    랫맨이 마력이 스며들어 있는 고풍스러운 종이를 내밀었다.

    마분석이 재빨리 아이템 효과를 확인했다.

    “영혼의 계약서라.”

    아이템의 효과는 확실했다.

    하지만 계약서에 쓰여 있는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기에 서명하는 순간 난 네놈의 꼭두각시가 되겠군.”

    계약 내용이 너무 편파적이었다.

    “이런, 이런, 난 나름대로 상당히 큰 편의를 봐준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

    “고작 10년이다. 10년 후면 넌 자유가 되는 거야. 또 계약 기간 동안 난 너에게 그 어떠한 위해도 끼칠 수 없어. 오히려 도움을 주겠지.”

    랫맨의 말에 마분석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10년간의 노예 생활.

    10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하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꿀이 너무 달콤했다.

    이 계약서에 서명을 하면 마분석은 중국을 다스리는 시황제가 될 수도 있다.

    “어차피 내 손에 죽임을 당하지 않아도 넌 끝났어. 너도 그걸 알고 있잖아.”

    랫맨의 말은 사실이었다.

    당의 간부들에게 의심을 받고 있다.

    그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면 마분석은 끝이다.

    하지만 당의 간부들이 모두 죽는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성공 확률이 너무 희박하군. 당의 간부들이 모두 죽는다고 해도 내가 권력을 잡을 확률은 상당히 희박하다.”

    마분석은 플레이어 협회장이지 정치인이 아니다.

    랫맨에 의해 당의 간부들이 모두 죽는다고 해도 그가 단번에 권력을 휘어잡을 수는 없다.

    오히려 간부들 아래 포진한 정치인들이 권력을 움켜쥘 것이다.

    “아니, 충분히 가능할 거야. 넌 중국에 수많은 피해를 일으킨 전설 등급 몬스터 랫맨을 사냥한 영웅이 될 테니까.”

    “뭐?”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은 마분석이 화들짝 놀랐다.

    “한 편의 연극을 하는 거지.”

    “연극?”

    “그래, 그 연극이 성공하면 넌 중국 국민들과 플레이어들에게 신처럼 추앙받는 존재가 될 거야.”

    쭉 찢어진 주둥이에서 흘러나오는 랫맨의 목소리는 절로 구토가 나올 정도로 불쾌하고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그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목소리가 마분석의 귀에는 너무나도 달콤하고 부드럽게 들렸다.

    * * *

    마분석은 결국 영혼의 계약서에 서명했다.

    화악!

    영혼의 계약서가 보랏빛에 휩싸이며 현성과 마분석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영혼의 계약서가 정상적으로 발동한 것이다.

    ‘결국 또 이렇게 살리게 되네.’

    영혼의 계약서가 제대로 발동하지 않았다면 현성은 마분석을 죽일 계획이었다.

    하지만 영혼의 계약서는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현성에게 살해당하는 게 두려워 거짓 서명을 한 게 아니라 진심으로 계약서의 내용에 동의해 자의로 서명한 것이라는 뜻이었다.

    ‘어쩔 수 없지.’

    원래는 가차 없이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분석이 코너에 몰려 있는 모습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마분석과 손을 잡으면 현성의 가족에게 위해를 가했던 진짜 원흉을 제거할 수 있다.

    거기다 중국의 차기 실권자를 자신의 노예로 만들 수 있었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받아라.”

    현성이 마분석에서 등용을 제의했다.

    -플레이어 마분석에게 등용을 제의하셨습니다.

    “이건 뭐지?”

    “널 더 강하게 만들어 줄 수단이자 우리 둘을 더 단단히 묶을 수 있는 연결 고리다.”

    “좋아 받아들이지.”

    -플레이어 마분석이 등용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통솔력 60이 소모됩니다.

    마분석이 현성의 신하가 되었다.

    현성은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알려 준 것과 달리 마분석에게는 신하가 가지는 페널티를 알려 주지 않았다.

    “정말 대단한데? 내가 더 강해졌어.”

    마분석이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10년간 충성을 다하려면 그 말투부터 바꾸는 게 좋을 거다.”

    “죄송합니다.”

    현성의 말에 마분석이 아무런 거부감 없이 사과했다.

    마분석은 현성에게 강한 호감을 느꼈다.

    자신에게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신하가 되면서 현성에 대한 신뢰도와 충성심이 상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분석은 자신의 심적 변화를 인식하지 못했다.

    마분석 스스로도 인식하기 힘들 정도의 미미한 변화였고, 애초에 마음을 굳게 먹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차피 10년 후면 끝날 관계다. 그 전에 최대한 단물을 빨아먹는다.’

    영혼의 계약서에 서명을 한 순간 좋든 싫든 10년 동안은 충성을 다해야 했다.

    하지만 상대가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없는 만큼 이건 일종의 동맹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완전히 동등한 관계는 아니었다.

    자신은 을이었고 상대는 갑이었다.

    마분석은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10년간 모셔야 할 상관이 생겼다.

    그렇다면 그 상관에게 밉보이는 것보다는 예쁨 받는 게 자신에게도 이득이었다.

    ‘10년 동안은 네놈의 충실한 노예가 되어 주마.’

    마분석은 견마지로를 다해 충노 코스프레를 할 것을 다짐했다.

    하지만 마분석이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었다.

    영혼의 계약서는 10년이지만 군주와 신하의 계약은 영원히 종속된다.

    10년 후 마분석이 현성을 등진다면 그간 올린 레벨, 스텟, 스킬이 무효화된다.

    10년 후 과연 그간의 노고를 모두 포기할 수 있을까?

    여기에 현성과 마분석 둘 다 모르는 변수가 하나 더 숨어 있었다.

    바로 10년간 마분석에게서 일어날 심적 변화였다.

    마분석은 전 세계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강자였다.

    그렇기에 군주의 명령에 대한 강제성은 상당히 낮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현성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의 능력치다.

    마분석의 스텟을 모두 합쳐도 현성의 스텟에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차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벌어질 것이다.

    마분석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현성의 휘하에 있는 것을 당연시하고 편안하게 여길 것이다.

    그런 마분석이 과연 10년 후 현성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물론 결과는 10년이 지나 봐야 알 것이다.

    하지만 결코 손쉽지 않을 것이다.

    * * *

    중국에서 당 대회가 열렸다.

    본래는 정식으로 열릴 시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중국의 현 상황을 타개하고자 급하게 열렸다.

    당 대회에는 소수민족 당대표들도 참여한다.

    당 대회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소수민족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이 이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음지에서 시행되던 비밀공작이 드러남에 따라 소수민족들의 반발이 극심해졌기 때문에 충분히 예상 가능한 조치였다.

    또한 대격변 이후 최초로 플레이어 대표들이 당 대회에 정식으로 초대받았다.

    그와 함께 던전 출입구 관리소의 마석 및 아이템 판매 의무화를 폐지하고 플레이어 대표들을 중국의 당 대표로 인정할 거라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중국은 이런 소문이 함부로 돌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한데 소문이 대놓고 돌았다.

    그건 당에서 묵인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사실상 당 대회에서 결정될 사안들이 사전 공개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덕분인지 중국 내부의 혼란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전설 등급 몬스터 랫맨이 한 달 넘게 활동을 하지 않는 것도 중국 내부를 진정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중국 정부는 플레이어들과의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은 랫맨이 죽었을 거라는 루머를 퍼트렸다.

    그 루머 때문에 랫맨이 죽으면서 남긴 아이템을 찾겠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랫맨이 남긴 아이템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다른 소문이 돌았다.

    큰 부상을 입은 랫맨이 자신이 나왔던 차원 게이트를 통해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소문이었다.

    의외로 이 소문은 큰 호응을 얻었다.

    상식적으로 몬스터가 플레이어들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면 주변 시설을 파괴하고 일반인들을 학살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지금까지 등장한 전설 등급 몬스터들은 모두 그랬다.

    한데 잠잠하다.

    그럼 죽었거나 도주했을 확률이 높았다.

    한국에 나타났던 오크들도 자신들이 나왔던 차원 게이트를 통해 도주하지 않았는가.

    중국인들 사이에 랫맨이 죽거나 도주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와 함께 중국은 패배하지 않았다는 구호가 퍼져 나갔다.

    랫맨이 죽거나 도주했다는 소문은 이무기 레이드 실패, 랫맨 레이드 실패로 깊은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던 중국인들에게 상당히 큰 자부심을 부여했다.

    -사체만 못 찾았을 뿐이지 랫맨은 이미 죽었다더라.

    -아니다. 사체가 아이템으로 변했는데 어떤 플레이어가 독식하기 위해 정부에 보고를 하지 않았다더라.

    -아무개라는 사람이 랫맨이 차원 게이트를 통해 도망치는 걸 봤다더라.

    중국 정부에서 퍼트리지도 않은 루머들이 마구 생산되어 중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본래 사람은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성향이 있다.

    중국 정부의 루머는 중국인들이 믿고 싶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결과, 한 달이 지난 지금은 거의 기정사실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루머를 만들어 낸 중국 정부 역시 자신들의 말이 맞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당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중국 각지에서 당 대표들이 모여들었다.

    최초로 당 대회에 초청받은 플레이어 대표들도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플레이어 협회장 마분석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이번 당 대회에서 실각당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플레이어 대표들이 당 대표로 인정받으면 정부와 플레이어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플레이어 협회의 영향력은 자동적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당 대회 당일.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이어야 할 마분석은 담담한 표정으로 측근들을 이끌고 당 대회에 참석했다.

    당 대표들과 플레이어 대표들은 마분석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제 곧 실각할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협회장 마분석은 그런 주변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꾸 입꼬리가 올라가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당 대회를 열어 주다니. 하늘이 나를 돕는군.’

    어떻게 하면 한 번에 중국의 당 대표들을 쓸어버릴까 고민했는데 알아서 기회를 만들어 줬다.

    랫맨을 만나지 않았다면 당 대회에 참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진작 다른 나라로 망명했거나 그게 아니라면 스스로 플레이어 협회장 자리를 사퇴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비참한 선택지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은 자신의 날이었다.

    잠시 후면 자신은 곧 숙청당할 운명의 플레이어 협회장에서 위기에 빠진 중국을 구하고 이끌어 나갈 새로운 영도자로 거듭난다.

    협회장 마분석이 자신의 보좌관 중 한 명을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보좌관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이다.

    ‘랫맨을 이렇게 손쉽게 당 대회 내부에 진입시킬 수 있다니.’

    당 대회는 철저한 경호와 신분 확인 속에 이루어진다.

    당 대회장에는 마력 역장이 펼쳐져 있어 공간 이동 계열 스킬이 봉쇄된다.

    외부의 침입자을 철저히 격리하는 것이다.

    또 마력 보호장이 당 대회장 전체를 둘러싸고 있어 외부의 공격에서도 안전하다.

    그것도 모자라 랭커와 고레벨 플레이어 들이 경호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랫맨이라도 이 정도 경호를 뚫으려면 꽤 큰 시간이 걸리지. 아마 그사이에 당 대표들은 모두 도망갔을 거야.’

    그럼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다.

    한데 놀랍게도 당 대회에 최초로 플레이어 대표를 초대했다.

    그 덕분에 협회장 마분석의 보좌관으로 위장한 랫맨은 너무도 손쉽게 당 대회장 내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보좌관으로 위장한 랫맨이 당 대회장에 입장하자 조용히 모습을 감췄다.

    협회장 마분석은 아무렇지 않게 당 대회장에 있는 자신의 자리에 착석했다.

    * * *

    어둠의 장막 스킬을 사용해 모습을 숨긴 현성이 랫맨 변신 주문서를 사용했다.

    현성의 모습이 완벽한 랫맨의 형상으로 변했다.

    ‘이런 기회가 올 줄은 몰랐네.’

    현성은 한 번에 중국 당 수뇌부를 쓸어버릴 준비를 했다.

    하지만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당 지도부는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경호도 너무 단단했다.

    또 죄 없는 이들이 휘말릴 가능성도 높았다.

    현성은 마분석을 미끼로 삼아 당 수뇌부들을 모으려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당의 수뇌부들이 스스로 한자리에 몰려들었으니까 말이다.

    ‘내부에는 플레이어들도 별로 없으니 일이 더 쉽게 돌아가겠어.’

    외부의 경계는 엄청나게 강했지만 막상 당 대회장 내부의 경호는 강하지 않았다.

    현성으로서는 호재였다.

    ‘썩어 빠진 놈들만 척살하면 끝나는 일이야.’

    현성은 죄 없는 당 대표들까지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건 무의미한 학살일 뿐이다.

    현성의 가족에 대한 공작과 더불어 온갖 끔찍한 짓을 저지른 자들을 일거에 쓸어버릴 계획이었다.

    “와아아아아!”

    커다란 함성과 박수 소리가 들렸다.

    당 대회가 시작된 모양이다.

    현성이 당 대회장으로 진입했다.

    플레이어들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현성은 조용히 제거해야 할 대상들을 확인했다.

    확인이 끝나자 트레이스 애로우 스킬을 연속적으로 사용했다.

    “뭐야?”

    “누가 마력을 사용한 거야?”

    현성이 트레이스 애로우 스킬을 사용하자 마력의 흐름을 느낀 플레이어들이 술렁거렸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뒤였다.

    슈슈슈슉!

    현성을 중심으로 비처럼 쏟아져 나간 트레이스 애로우가 미리 지정된 타깃을 향해 정확히 날아갔다.

    퍼퍼퍼퍽!

    트레이스 애로우에 적중당한 당 대표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갔다.

    그중에는 중국 서열 1위인 국가 주석도 포함되어 있었다.

    “꺄아아악!”

    “테러다!”

    난리가 났다.

    두두두두!

    경호원들의 총기를 난사했고 플레이어들 역시 테러 대상을 향해 공격 스킬을 날렸다.

    꽈아아아앙!

    현성을 중심으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당 대회장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살아남은 당 대표들이 공포에 질려 당 회의장을 벗어났다.

    경호원과 플레이어 들은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다.

    “죽었나?”

    플레이어 중 하나가 공격을 멈추며 중얼거렸다.

    “죽었겠지.”

    “그런데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

    플레이어들이 절망감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외쳤다.

    플레이어에 의한 테러.

    이건 절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중국은 더욱 강하게 플레이어를 배척할 것이다.

    타국 역시 비슷한 행보를 보일 게 뻔했다.

    이제 겨우 중국 내부에서 플레이어 대한 대우가 상향되려 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많은 것을 얻어 낼 수 있었다.

    한데 어떤 미친놈 때문에 모든 게 물거품이 되게 생겼다.

    -찌이이익!

    그때 엉망이 된 당 대회장 내부를 가득 울리는 포효가 터져 나왔다.

    도주하던 당 대표들과 경호원들의 몸이 돌처럼 굳어졌다.

    당 대회장 내부에 있던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이 울음소리는……?”

    “랫맨이다!”

    워크라이 스킬에 당하지 않은 플레이어 대표들이 당황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재빨리 전투준비를 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무기와 갑옷이 하나도 없었다.

    당 대회 자리에 참석하느라 무기와 갑옷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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