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 친구 (51/225)
  • ┃친구

    강선영이 자신의 이마를 꾹꾹 눌렀다.

    “총 316명 전원 다 최현성 플레이어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네, 협회장님. 아무리 면밀하게 조사를 해 봐도 최현성 플레이어가 팀원으로 받기 전까지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습니다.”

    “알았어. 그만 나가 봐.”

    “예.”

    정보 팀 직원이 밖으로 나갔다.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강선영은 척살 팀에 이름을 올린 316명의 명단이 든 서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하지만 그런다고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316명의 공통점은 1차 전직도 하지 못한 저레벨 플레이어라는 것.

    물론 병아리들 중에서는 나름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갓 플레이어 아카데미를 졸업한 병아리들 중 랭커로 성장할 싹이 보이는 플레이어는 많다.

    문제는 그 싹이 잘 성장해 거목으로 자라나는 경우가 무척 드물다는 점이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해 보려고 해도 효율이 너무 떨어지는데.’

    성장 가능성이 높은 저레벨 플레이어 316명에게 골고루 투자하느니 차라리 고레벨 플레이어 1명에게 집중 투자를 하는 것이 낫다.

    즉시 전력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이미 성장을 마친 만큼 어중간하게 성장하거나 중간에 몸이나 마음이 꺾일 가능성도 낮았으니까 말이다.

    10년 뒤를 내다보고 팜을 육성한다는 마음으로 투자를 한다고 해도 차라리 중레벨 플레이어들을 지원하는 게 이득이다.

    그들은 어느 정도 윤곽이 나왔고, 비슷한 금액을 투자해 더 빨리 성과를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결정적으로…….

    ‘이건 완전히 방목인데.’

    현성은 한 번 찾아간 플레이어를 두 번 이상 찾아가지 않았다.

    소속만 척살 팀으로 되어 있을 뿐이지 사냥은 제각각이었다.

    현성을 만나기 전이나 후나 달라진 게 없었다.

    ‘이런 식이면 나중에 떠나 버릴 수도 있는데…….’

    플레이어 협회에서 뉴비들에게 과한 투자를 하지 않는 이유는 계약 기간과 연관이 있다.

    뉴비들은 투자금이 많이 들어간다.

    그런데 어느 정도 성장을 하고 나서 쓸 만해질 때가 되면 계약 기간이 끝나 버린다.

    그래서 플레이어 협회는 계약서에 재계약 시 동일 조건이면 타 길드가 아닌 플레이어 협회와 계약한다는 조건을 넣는다.

    가망이 없는 플레이어는 버리고, 잘 성장한 플레이어는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 주고 붙잡는 것이다.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뉴비라고 해도 성장 가능성이 높은 경우는 확실하게 지원을 해 주고 장기 계약으로 묶어 버린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을 해도 잘 크면 계약 기간이 끝나기 무섭게 떠나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의 파티를 꾸려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투자만 하면 완전히 호구 잡힐 수 있는데.’

    316명 중에 정말 잘 성장한 케이스가 나온다면 현성의 뒤통수를 때리고 독립할 확률이 높다.

    ‘도대체 왜 이런 짓거리를 하는 거야?’

    전설 등급 직업, 군주의 존재를 모르는 강선영으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강선영은 현성이 자신의 측근들을 척살 팀에 꽂아 넣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장 부친만 해도 플레이어가 아닌가.

    한집에서 동거하는 사이인 최현성의 여자 친구 우시아 역시 플레이어였다.

    거기다 현성의 도움으로 노예 계약에서 풀려난 백우신도 있다.

    한데 그들 중 그 누구도 팀원으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전혀 상관없는 이들만 팀원으로 삼았다.

    ‘분명히 무슨 목적이 있을 텐데.’

    강선영이 명단이 적힌 서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들과 현성의 공통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명단을 뚫어져라 봐도 알 수 있을 턱이 없었다.

    * * *

    현성은 루시아와 함께 부지런히 영웅 등급 몬스터를 사냥하며 업적을 쌓아 나갔다.

    아버지와 백우신 역시 무럭무럭 성장했다.

    그리고 현성의 휘하에 들어왔던 저레벨 플레이어들의 성장 속도도 상당히 빨랐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현성은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두각을 나타내는 이들만 선별했다.

    기본 바탕이 동 레벨 플레이어들보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말이었다.

    거기다 경제적인 이유든 개인적인 욕심이든 빠르게 성장하는 것에 집착하는 이들이었다.

    여기에 현성의 지원이 더해졌다.

    빠르게 성장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물론 군주의 깃발 효과로 모든 스텟이 6% 증가한 것도 상당히 큰 힘을 발휘했다.

    그런데 그런 점을 감안해도 성장 속도가 무척 빨랐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사냥에 열중했다.

    현성은 단순하게 생각했다.

    절박한 사람이 기회를 잡았기에 열심히 노력하는구나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들이 미친 듯이 사냥에 열중하는 데는 현성도 모르고 열심히 사냥하는 당사자도 모르는 이유가 숨겨져 있었다.

    바로 현성이 지나가듯 던진 ‘열심히 사냥하세요.’, ‘빨리 고레벨 플레이어가 되시면 좋겠네요.’ 같은 한마디였다.

    그저 대화를 나누던 중 의례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심신을 자극했다.

    그렇기에 여유가 생겼음에도 더욱 열정적으로 사냥에 매달렸다.

    현성은 기회를 잡더니 정말 독하게 사냥하는구나 하고 넘겨 버렸고, 저레벨 플레이어들도 기회를 잡으니 사냥할 의욕이 샘솟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는 현성과 저레벨 플레이어들 모두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부과했다.

    현성은 사냥을 마치고 던전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꺼 놓은 스마트폰을 켰다.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어?”

    현성이 놀란 표정으로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오랜 시간 듣지 못했던 친구 윤성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지냈냐?”

    -나야 잘 지냈지. 그런데 넌 왜 번호 바꾸고서 새 연락처를 안 알려 줬냐?

    현성의 물음에 친구의 타박이 이어졌다.

    “내가 좀 바빴어.”

    -새끼야, 아무리 바빠도 연락처 바뀌었으면 단체 문자라도 날렸어야지.

    “미안하다. 그런데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냐?”

    -삼촌 각성하셨다며? 그래서 병도 말끔하게 나으셨고?

    “아버지 만났어?”

    현성과 윤성호는 어릴 때부터 한 동네에서 살았다.

    그 덕분에 유지원을 시작으로 초중고를 거쳐 대학교까지 같이 다녔다.

    현성의 아버지와 성호의 아버지도 죽이 잘 맞아 서로 호형호제하며 지냈다.

    그래서 현성과 윤성호는 서로의 아버지를 아버님이라는 호칭 대신 삼촌이라고 불렀다.

    -아니, 직접 뵌 건 아니고 어제 아버지랑 삼촌이랑 술 한잔하셨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삼촌한테 전화로 축하한다고 말씀드리고 네 번호 물어봤지.

    ‘아버지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셨나 보네. 친구분과 술 도 한잔하시고 말이야.’

    현성은 그렇게 생각하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사실 어제 아버지가 윤성호 아버지를 만나 술을 마신 건 현성의 영향이 컸다.

    현성은 모르고 있었지만 아버지와 백우신 역시 전설 등급 직업 군주의 숨겨진 효과를 받고 있었다.

    아버지와 백우신은 사냥에만 열중했다.

    어머니가 걱정하실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현성이 지나가는 말로 ‘이제 병도 나으셨는데 좀 쉬엄쉬엄하세요. 엄마랑 데이트도 하시고 친구분들도 좀 만나시고요.’라고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들은 현성의 아버지는 자신도 모르게 ‘내가 너무 무심했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머니와 데이트를 즐기고 다음 날 친구에게 연락을 돌렸다.

    그러다 윤성호의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하자.

    윤성호의 말에 현성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자. 언제 볼까?”

    -오늘 바로 보자.

    “알았다.”

    현성이 윤성호가 시간과 장소를 정한 뒤 전화를 끊었다.

    “친구분이신가 봅니다.”

    루시아의 말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무심했네요, 친구들한테 연락할 생각도 못 하고.”

    플레이어로 각성하고 서우 길드와의 마찰 때문에 폰 번호를 바꿨다.

    그리고 혹시 친구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바뀐 연락처를 알려 주지 않았다.

    그 후에는 플레이어로서 성장하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엘릭서를 구입해 아버지가 완치되신 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겨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야지 하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몬스터 웨이브가 터져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더 강해져야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사냥에만 빠져 지냈다.

    “주군께도 어느 정도 휴식이 필요하십니다. 너무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는 끊어지기 마련이니까요.”

    “루시아는 바로 집으로 갈 거죠?”

    “네, 드라마 본방 사수하려면 지금 들어가야 합니다.”

    “그럼 내 차 타고 가요. 난 택시타고 가면 되니까.”

    현성이 그 말과 함께 자신의 차 키를 루시아에게 넘겼다.

    루시아는 한국 생활에 빠르게 적응했고 운전면허도 순식간에 땄다.

    “제가 약속 장소까지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완전 반대 방향이라 저 태워다 주고 가면 드라마 본방 사수 못 해요. 얼른 들어가세요.”

    드라마 본방 사수를 못 한다는 말에 루시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루시아는 사양 한번 하지 않고 바로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해 버렸다.

    “드라마가 그렇게 재밌나?”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택시를 잡아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술집에 도착한 현성이 먼저 안주를 주문했다.

    안주는 과거 현성과 윤성호가 즐겨 먹던 김치찌개와 계란말이로 시켰다.

    ‘괜히 긴장되네.’

    거의 5년 만에 만나는 친구다.

    그래서 그런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아마 전설 등급 몬스터에게 덤벼들 때도 이렇게 심장이 뛰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는 자주 만나야지.’

    현성은 과거와 달라졌다.

    강해졌고, 경제적으로도 풍족해졌으며, 심적으로도 여유가 생겼다.

    가끔 쉬는 시간에 친구들을 만나 술 한잔 기울이는 게 부담될 상황이 아닌 것이다.

    ‘루시아의 말대로 적당한 휴식이 필요하긴 하지.’

    각성한 이후 너무 정신없이 달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각성하기 전에도 정신없이 달리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과거에는 경제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여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여유를 즐길 수 있다.

    딸랑!

    방울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의 윤성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윤성호가 가게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성호야!”

    현성의 부름에 윤성호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더니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야, 너 왜 이렇게 때깔이 좋아졌냐? 누가 보면 나랑 열 살 차이는 나는 줄 알겠다. 그동안 노가다 뛴 게 아니라 피부숍에서 살았냐?”

    윤성호의 말에 현성이 어설프게 웃었다.

    아버지가 자신이 각성한 것만 이야기했지 현성이 각성한 것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으셨나 보다.

    현성도 굳이 밝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어깨도 딱 벌어지고 근육도 각이 잡힌 게 완전 훈남이네.”

    “이게 노가다 근육의 힘이다.”

    현성의 말에 윤성호가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한잔하자.”

    “이모님, 여기 소주 하나 맥주 하나요!”

    현성의 말에 윤성호가 목소리를 높여 술을 주문했다.

    금방 소주 하나와 맥주 하나가 왔다.

    미리 시켜 놓은 김치찌개와 계란말이도 같이 나왔다.

    타이밍이 맞았던 모양이다.

    “소맥 제조는 내가 또 기가 막히지.”

    윤성호가 소맥을 말았다.

    소맥이 완성되자마자 현성과 윤성호가 그대로 원샷했다.

    “크, 이 맛이지!”

    윤성호가 탄성을 내질렀다.

    “넌 요즘 뭐 하고 사냐?”

    현성의 물음에 윤성호가 지갑에서 명함을 내밀었다.

    “오성 물산 플레이어 영업 팀?”

    현성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윤성호가 플레이어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짜식, 놀랐냐? 내가 인마, 오성맨이다.”

    윤성호가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대기업인 오성의 계열사 중 하나인 오성 물산 소속이라는 사실에 현성이 놀랐다고 착각한 것이다.

    그것 때문에 놀란 건 아니었지만 현성은 대충 넘겨 버렸다.

    “넌 복학 안 하냐?”

    “안 해.”

    윤성호의 물음에 현성이 딱 끊어 대답했다.

    대한민국에서 대학교는 지식의 전당이 아니라 취직의 전당이다.

    취직할 필요가 없는 현성의 입장에서는 대학교에 다시 복학할 이유가 없었다.

    “왜, 삼촌이 헌터로 각성하셨으니까 대학교 등록금 정도는 대 주실 수 있잖아. 아, 아직 초반이라 힘드신가?”

    윤성호는 혼자 물어보고 혼자 결론을 내렸다.

    윤성호는 원래 저런 놈이었다.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직장 생활은 할 만하냐?”

    현성의 그 말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대화가 이어졌다.

    현성은 윤성호와 직장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학창 시절 추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좋다.’

    현성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현성과 윤성호는 근 5년 만에 만났다.

    하지만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마치 5년이 아니라 5일 만에 만난 것같이 말이다.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술이 계속 들어갔다.

    “아, 사실 직장 생활 하기 힘들어 죽겠다. 특히 영업직은 기본급이 적어서 더 죽을 것 같아.”

    윤성호가 하는 일은 플레이어들이 사냥해서 얻은 마석과 몬스터 사체를 구매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오성 길드 소속 플레이어들은 자신이 사냥한 몬스터의 사체와 마석을 오성 물산에 넘겨 판매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대기업인 오성 그룹에서 필요로 하는 만큼의 물량을 확보할 수 없다.

    그래서 오성 물산에서는 파티 단위로 활동해 소속이 없는 플레이어들을 대상으로 마석을 구매하는 영업 팀을 운영했다.

    주 영업 대상은 길드 소속이 아닌 파티 단위로 활동하는 플레이어들이었다.

    “진짜 영업하려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줘야 된다. 거기다 플레이어 자식들이 콧대가 얼마나 높은지 이제 겨우 1차 전직해서 병아리티 벗은 놈들도 건방이 하늘을 찌른다니까.”

    윤성호가 영업 사원으로 일하며 힘든 점들을 한풀이하듯이 털어놓았다.

    “그건 아버지가 도와주실 수 있겠네.”

    “삼촌이?”

    “아버지도 플레이어시잖아.”

    “아, 그렇긴 하지.”

    대답은 했지만 윤성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윤성호는 현성의 아버지를 이제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저레벨 플레이어로 알고 있다.

    사실 아직 저레벨이기는 했다.

    하지만 생산하는 마석 물량은 웬만한 중 레벨 파티 여러 개를 합쳐 놓은 것보다 많았다.

    “내가 아버지한테 말씀드릴게. 마석은 너한테 처분하라고.”

    “그렇게 해라. 이 바닥이 사기꾼도 많거든. 내가 최대한 좋은 조건으로 구매해 드릴게.”

    윤성호는 현성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는다기보다는 도움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대답했다.

    ‘나중에 입이 쩍 벌어질 거다.’

    윤성호의 그런 내심을 짐작한 현성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현성이 직접적으로 도와줄 수는 없었다.

    현성은 협회 직속 플레이어였고 사냥을 통해 얻은 마석을 전량 협회에 넘겨야 했으니까 말이다.

    마석을 빼돌리려면 얼마든지 빼돌릴 수 있었지만, 그럼 그 마석은 장물이 된다.

    장물 거래를 해 봐야 현성이나 윤성호에게 좋을 게 없었다.

    현성과 윤성호는 계속해서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위이잉!

    그때 갑자기 윤성호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윤성호의 얼굴이 확하고 구겨졌다.

    “누군데 그래?”

    “아까 이야기했던 갑질 제대로 한다는 플레이어 놈.”

    “그놈이 이 시간에 너를 왜 불러?”

    “100% 지가 처먹은 술값 대신 계산해 달라고 전화한 걸 거다.”

    “어차피 그놈 잡아 봐야 돈도 얼마 못 번다며? 그냥 버려.”

    윤성호에게 전화를 건 인물은 150레벨대 파티의 파티장이었다.

    문제는 이놈이 윤성호의 몫으로 떨어지는 인센티브를 이런저런 명목으로 다 빼먹는다는 점이다.

    지금처럼 야밤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먹은 술값을 대신 계산하게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럼에도 윤성호가 그놈을 버리지 못하는 건 개인에게 배당된 희귀 등급 마석 할당량 제도 때문이었다.

    “아씨, 이번 달 희귀 등급 마석 할당량이 간당간당한데.”

    윤성호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스마트폰을 무음으로 바꿔 버렸다.

    “오, 버린 거냐?”

    현성의 물음에 윤성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야 있냐. 그냥 내일 아침에 연락해서 일찍 자서 전화 못 받았다고 구라 쳐야지.”

    윤성호의 말에 현성이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잘했다. 그리고 내일 괜히 그놈한테 전화하지 말고 그냥 우리 아버지한테 전화드려, 마석 좀 팔아 달라고.”

    아버지와 백우신은 벌써 100레벨이 넘는 희귀 등급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최대한 저레벨 몬스터부터 사냥을 해 나갔음에도 압도적인 스텟과 스킬 탓에 레벨이 너무 빨리 올랐다.

    그 때문에 아버지와 백우신은 현성의 예상보다 적은 업적을 획득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의적으로 레벨을 떨어트리거나 몬스터가 주는 경험치를 줄이는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아마 내일 현성의 아버지와 통화를 하고 나면 그간 윤성호를 골치 아프게 하던 희귀 등급 마석 할당량 문제는 가볍게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야, 일반 등급 마석이 아니라 희귀 등급 마석이라니까? 네가 마석에 대해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딸랑!

    “야, 윤성호!”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마력이 실린 음성이 터져 나왔다.

    가게 안에 있던 손님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현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플레이어가 일반인을 상대로 스킬을 사용하는 건 엄격하게 금지된 행동이었다.

    “어, 박형욱 파티장님?”

    윤성호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가 일부러 내 전화를 씹어?”

    박형욱이라는 남자가 마력을 풀풀 뿜어내며 현성과 윤성호에게 다가왔다.

    “저, 그게 아니고 술자리가 시끄럽다 보니 전화가 온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내가 밖에서 다 봤다. 네가 전화 온 거 확인하고 무음으로 돌리는 거.”

    “죄송합니다.”

    윤성호의 허리가 90도로 꺾였다.

    “술 처먹을 시간은 있고 내 전화 받을 시간은 없다 이거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이 친구를 너무 오래간만에 만나…….”

    “닥쳐! 지금 누구 앞에서 변명질이야?”

    박형욱이 윤성호의 말을 끊었다.

    “너 앞으로 우리 파티에서 나온 마석 할당받을 생각하지 마라.”

    “죄송합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윤성호는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며 박형욱에게 더더욱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머리가 허리 아래로 내려갈 정도로 말이다.

    “죄송한 걸, 아는 놈이, 그따위로 행동해?”

    박형욱이 윤성호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욕감만 느껴지지 실질적인 타격은 없는 행동이다.

    하지만 현성의 눈에 박형욱의 손가락에서 뻗어 나온 마력이 윤성호의 몸으로 흩어져 강한 충격을 주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하아!”

    현성은 깊은 분노를 느꼈다.

    무려 5년 만에 만난 친구다.

    그런 친구와 한창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웬 개새끼 1마리가 나타나 좋은 분위기를 망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친구를 보이지 않게 괴롭혔다.

    “당장 튀어나와, 이 새끼야.”

    박형욱의 말에 윤성호가 자신의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현성에게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성호야.”

    “미안하다, 현성아. 여기는 내가 계산할게. 다음에 보자.”

    “괜히 저 개새끼 따라갈 필요 없으니까 그냥 앉아.”

    현성이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성호의 표정이 흙빛이 되었다.

    현성과 윤성호의 대화를 들은 박형욱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했는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박형욱의 얼굴은 금방 분노로 물들었다.

    “뭐? 개새끼? 너 지금 그 말 나한테 한 거냐?”

    박형욱이 흉신악살 같은 표정을 지으며 현성의 멱살을 잡았다.

    박형욱의 손이 위로 올라가자 현성의 몸 역시 허공으로 올라갔다.

    “파티장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윤성호가 달려들어 박형욱의 팔을 잡았다.

    “넌 저리 짜져 있어.”

    박형욱이 그 말과 함께 윤성호를 밀쳐 냈다.

    그때 현성이 박형욱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야.”

    “뭐? 야?”

    “플레이어가 일반인한테 무력을 쓰면 되냐, 안 되냐?”

    “하!”

    현성의 물음에 박형욱이 코웃음을 쳤다.

    이런 상황에서도 윤성호의 동행인 저놈이 겁을 먹지 않은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박형욱이 현성의 멱살을 잡았던 손을 풀었다.

    현성의 몸이 다시금 지상으로 내려왔다.

    “당연히 쓰면 안 되지. 쓴 적도 없고.”

    “여기 눈이 몇 개나 되는데 그런 구라를 치냐?”

    현성의 말에 박형욱이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내가 폭력 쓴 거 본 적 있는 사람?”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괜히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봐 은근히 시선을 피했다.

    “아무도 없는 거 같은데.”

    “내가 봤다.”

    “네 말을 누가 믿어 줄 거 같아? 경찰 불러도 소용없다. 원래 사건 당사자 의견은 반영이 안 되는 거야. 그리고 내가 미쳤다고 무력을 쓰냐? 그러지 않아도 너희 같은 놈들 손봐 줄 방법이 넘쳐 나는데.”

    박형욱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윤성호 너는 앞으로 나한테 마석 받을 생각하지 마라. 나랑 친분 있는 파티장들한테도 다 말해 놓을 거니까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너.”

    박형욱이 검지로 현성을 가리켰다.

    “넌 밤길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언제 쥐도 새도 모르게 반병신될지 모르니까.”

    “너 지금 나한테 상해 협박한 거지? 일반인 폭행 및 위협, 던전 밖에서 스킬 및 마력 사용, 거기다 상해 협박까지……. 이 정도면 플레이어 자격 박탈에 넉넉하게 징역 20년 이상은 받을 수 있겠다?”

    “뭐?”

    박형욱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상대가 지나치게 당당했다.

    박형욱의 시선이 현성의 왼손에 들려 있는 스마트폰으로 향했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박형욱은 현성이 녹음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박형욱이 그대로 손을 뻗었다.

    이대로 스마트폰을 빼앗아 박살 내 버리면 된다.

    그럼 증거는 말끔하게 사라진다.

    탁!

    현성의 왼손을 향해 나아가던 박형욱의 오른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현성이 오른손으로 박형욱의 오른팔을 잡았기 때문이다.

    “어?”

    “호오, 이제는 절도죄까지 저지르시겠다?”

    현성의 말에, 자신만만하던 박형욱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이익!”

    박형욱이 현성에게 잡힌 오른팔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마력까지 총동원했다.

    하지만 박형욱의 오른팔은 작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프, 플레이어? 어떻게……?”

    박형욱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박형욱은 힘 스텟을 주력으로 찍은 157레벨의 공격형 딜러다.

    일반인은 절대 힘으로 박형욱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같은 플레이어라면 사정이 다르다.

    그것도 박형욱보다 까마득히 높은 레벨의 플레이어라면 말이다.

    하지만 박형욱은 평소 호구 및 꼬봉 정도로 생각하던 윤성호에게 고레벨 플레이어 지인이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런 인맥이 있다면 굳이 자신에게 그런 수모를 받아 가며 마석을 공급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왜, 내가 플레이어라고 뭐 달라지는 거 있냐?”

    현성의 말에 박형욱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하하하, 동종 업계 종사자셨군요. 진작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박형욱의 얼굴에 비굴한 미소가 맺혔다.

    “제가 윤성호 씨와 전매 계약 맺겠습니다. 저와 친한 파티장들에게도 이야기해서 윤성호 씨한테 마석 몰아주도록 설득하겠습니다.”

    “이제 곧 플레이어 자격 박탈당해서 감옥에 들어갈 일만 남은 놈이 무슨 재주로?”

    현성의 말에 박형욱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무슨 말을 그렇게 험악하게 하십니까? 같은 플레이어끼리 굳이 척질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좋게 좋게 넘어가시죠.”

    “싫은데?”

    “제 육촌 누님이 서우 길드 제1팀 부팀장이십니다. 저랑 다투어 봐야 그쪽도 좋을 게 없을걸요.”

    박형욱의 말에 현성은 기가 찼다.

    친누나도 아니고 사촌 누나도 아니고 육촌 누나란다.

    요즘 같은 세상에 육촌이면 거의 남이나 다름없었다.

    결정적으로 정말 아끼는 친척 동생이라면 자신의 길드로 불러오지 뭐 하러 이렇게 방치하겠는가.

    박형욱이 자신의 파티가 사냥한 마석을 서우 길드 측에 넘기지 않은 걸로 봐서 절대 돈독한 사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설사 사이가 돈독하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서우 길드 제1팀 부팀장이 뭐 어쨌다는 말인가?

    부길드장 정성우와 그 파벌이 축출된 후 서우 길드는 결국 한국 10대 길드에서 밀려났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서우 길드랑 척을 지고 싶으신 겁니까?”

    “서우 길드가 너 따위를 위해서 나랑 각을 세울 것 같지는 않은데?”

    “제 육촌 누님이 서우 길드장님 최측근입니다.”

    박형욱이 그 말과 함께 왼손을 호주머니에 넣어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러더니 재주도 좋게 왼손으로 주소록을 검색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누님, 저 형욱이에요!”

    박형욱의 말이 아예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은 걸 보면 말이다.

    -왜 전화했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

    그다지 절친한 사이는 아닌 모양이다.

    -너 또 서우 길드에 넣어 달라는 말 하려고 전화한 건 아니지? 네 레벨이 좀 더 오르거나, 최소한 동 레벨 대비 어느 정도 수준은 되어야 서우 길드에 추천해 줄 수 있다고 내가 전에 분명히 이야기했다.

    “아, 누님, 그게 아니고요. 실은 제가…….”

    박형욱이 열심히 상황을 설명했다.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 같은데…….’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목소리가 낯설지가 않다.

    분명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였다.

    -하! 야, 이 새끼야, 내가 네 보모냐? 다른 플레이어랑 트러블 생긴 걸 왜 나한 전화해서 지랄이야?

    ‘분명히 어디서 들었는데.’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박형욱이 열심히 구라를 쳤다.

    “이 플레이어가 서우 길드를 완전히 무시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랑 시비가 붙은 겁니다. 그리고 제가 누님 이야기를 했더니 서우 길드 같은 건 하나도 무섭지 않다고…….”

    -하, 규모가 줄었다고 이제는 별 거지 같은 것들까지 우리 길드를 무시하네. 바꿔 봐.

    현성이 열심히 목소리의 주인공을 떠올리고 있을 때 박형욱의 스마트폰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수희 누님

    스마트폰에 저장되어 있는 이름을 보자 그제야 기억이 났다.

    현성의 첫 사냥 때 명함을 줬던 플레이어.

    서우 길드와의 악연을 만들어 줬던 인물.

    -야, 저 새끼가 한 말 정말이야?

    스피커폰을 통해 이수희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현성은 일단 박형욱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아줬다.

    이에 박형욱이 잔뜩 기세등등한 표정을 짓고 현성을 노려봤다.

    현성이 박형욱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을 빼앗았다.

    -왜 대답이 없어? 박형욱, 너 전화 바꾼 거 맞아?

    “오랜만입니다, 이수희 씨.”

    현성의 말에 이수희의 말이 끊겼다.

    박형욱도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누구시죠?

    “플레이어 협회 신설 팀 팀장 최현성입니다.”

    현성은 척살 팀이라는 단어 대신 신설 팀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척살 팀은 전설 등급 레이드로 너무 유명해졌다.

    일반인들도 그 존재를 알 정도로 말이다.

    -…….

    고요한 침묵이 이어졌다.

    이수희는 현성이 누군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이수희에게 현성은 길드를 두 쪽 낸,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놈이었다.

    현성과 플레이어 협회 덕에 부길드장이었던 정성우를 몰아내기는 했지만 피해가 너무 컸다.

    이수희와 서우 길드장은 호시탐탐 현성을 노렸다.

    단순히 복수가 목적이 아니라 현성이 가지고 있는, 20레벨의 법칙을 무시하는 능력이 탐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과 2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현성의 존재는 너무도 커졌다.

    이무기 레이드, 오크 대족장 레이드, 오크 주술사 레이드.

    세 번의 레이드에 모두 참여하고 오크 대족장과 오크 주술사의 숨통을 끊은 장본인.

    서우 길드 역시 세 번에 걸친 전설 등급 몬스터 레이드에 플레이어들을 파견했다.

    그렇기에 현성의 무력과 영향력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이수희 씨, 제 말 듣고 있으신가요?”

    -네! 듣고 있습니다!

    이수희가 훈련소에 갓 들어간 신병처럼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수희 씨 육촌 동생이라는 분이 지금 제가 보는 앞에서 일반인 폭행 및 위협, 던전 밖에서 스킬 및 마력 사용, 일반인 상해 협박, 절도죄를 저지르셨거든요.”

    -…….

    다시금 침묵이 이어졌다.

    아마 현성의 말을 들은 이수희의 표정은 하얗게 질려 있을 것이다.

    플레이어가 저 중 하나의 죄만 저질러도 플레이어 가중처벌법에 의해 일반인보다 몇 배는 강력한 형량을 받는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서우 길드의 뒷배를 믿고 그런 짓을 한 것 같아서요. 서우 길드 부팀장의 육촌 동생이 이 정도로 안하무인이면 서우 길드원들은 얼마나 개차반일까요? 협회장님께 건의해서 서우 길드에 특별 감사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 자식이랑 서우 길드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그냥 저 미친놈이 제 이름을 팔고 다닌 거예요!

    “음, 그럼 죄목에 명예훼손이 추가되겠네요. 박형욱 씨한테 명예훼손으로 고소장 넣으실 거죠?”

    -그, 그게…….

    “아, 역시 한통속이셨…….”

    -넣겠습니다! 내일 아침 당장 명예훼손으로 고소장 접수하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전화 끊겠습니다.”

    뚝!

    현성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박형욱에게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하지만 박형욱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받을 정신이 없었다.

    현성과 이수희의 통화 내용을 모두 들은 박형욱은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현성은 박형욱 손에 스마트폰을 쥐여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플레이어 협회 감찰 팀에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플레이어 협회 소속 감찰 팀원들이 도착했다.

    현성은 녹음 파일을 증거물로 제시했고, 박형욱은 현장 검거 되어 끌려 나갔다.

    박형욱은 플레이어 자격 박탈과 함께 플레이어 가중처벌 법에 의해 중형을 선고받을 확률이 높았다.

    “에이, 술 다 깼네.”

    현성이 김빠진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성호야, 2차 가자.”

    현성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윤성호가 정신을 차렸다.

    “야, 너 플레이어였어? 그것도 협회 소속?”

    “어.”

    “그런데 왜 말을 안 했어?”

    “막 하려고 했는데 아까 그놈이 끼어든 거야. 술이나 더 마시러 가자. 자세한 이야기는 2차 가서 하고.”

    “그래, 그렇게 하자.”

    현성과 윤성호가 자리를 옮겼다.

    현성이 플레이어라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윤성호의 태도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궁금한 게 많은지 속사포 같은 질문을 던졌다.

    현성은 그런 윤성호가 좋았다.

    몇 년 만에 만나도 며칠 전에 만났던 것처럼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친구.

    상대의 능력, 재산, 지위 여부와 상관없이 늘 한결같이 대해 주는 친구.

    그날 현성은 새벽 3시까지 윤성호와 술을 마셨다.

    현성은 얼마든지 더 마실 수 있었지만 윤성호가 버티지 못했다.

    중간에 약간의 트러블이 있기는 했지만 참 즐거운 하루였다.

    * * *

    미국 워싱턴 D.C.에 위치한 백악관.

    현 미국 대통령인 윌슨이 주최한 회의가 한창이었다.

    “현재까지 등장한 전설 등급 몬스터의 전투력을 기반으로 한 시뮬레이션 결과입니다.”

    “한 개 주에 1마리만 등장해도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가 어마어마하군. 그런데 너무 과장된 것 아닌가? 한국은 3마리의 전설 등급 몬스터를 훌륭하게 처리하지 않았나? 그것도 큰 피해 없이 말이야.”

    윌슨 대통령의 물음에 CIA 국장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건 빠른 조기 진압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랭커들을 모두 소집하는 데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습니다. 그에 반해 본국은 랭커들 중 일부만 소집한다고 가정해도 최소 6시간 이상이 걸립니다.”

    땅덩어리가 너무 넓다는 게 이럴 때는 참 골치 아픈 문제가 된다.

    “거기다 한국 역시 3마리의 전설 등급 몬스터를 처리하느라 실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랭커들의 희생이 컸습니다.”

    “정신계 광역 공격 스킬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거기다 조인족과 오크족같이 무리 생활을 하는 전설 등급 몬스터는 다수의 영웅 등급 몬스터를 거느리고 다니기에 이무기처럼 단독으로 활동하는 개체보다 처리하기가 월등히 힘든 상황입니다.”

    “골치가 아프군.”

    윌슨 대통령이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2차 대격변과 함께 등장한 전설 등급 몬스터의 존재는 세계 최강대국 미국으로서도 상당히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전설 등급 몬스터를 레이드하는 데 있어 다수의 고레벨 플레이어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레이드에 도움이 되려면 최소한 랭커급은 되어야 합니다.”

    “하긴 중국의 사례를 보면 잘 알 수 있지.”

    국제 무대에서 통용되는 랭커가 아닌 자국에서 통용되는 지방 정부 소속 랭커들로 전설 등급 몬스터 이무기를 상대하려고 했다가 호되게 당한 국가가 바로 중국이었다.

    “또한 이번 오크 대족장 레이드와 오크 주술사 레이드의 전투 패턴으로 볼 때 일반적인 랭커의 실력을 뛰어넘는 규격 외의 강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규격 외의 강자라……. 제이슨이 보고한 최현성 플레이어 같은 인물 말인가?”

    “그렇습니다.”

    CIA 국장의 말에 미 윌슨 대통령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현재 UN 플레이어 연합군의 수장을 맡고 있는 제이슨이 올린 보고서는 실로 충격적이었다.

    “추정 레벨이 최하 500 이상이라고 했던가?”

    “예, 최대 600레벨 이상, 최하 500레벨 이상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게 이론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2차 대격변 이후 전설 등급 몬스터의 등장과 함께 던전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의 레벨이 전체적으로 올라갔다.

    예를 들어 전에는 영웅 등급 몬스터의 레벨이 300레벨 후반에서 400레벨 초반이었다면, 지금은 400레벨 중후반으로 추정되는 영웅 등급 몬스터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최근에 벌어진 일이다.

    그 전까지 영웅 등급 몬스터의 최대 레벨은 400대 초반.

    20레벨의 법칙에 묶여 있는 플레이어들은 400레벨 중반 이상으로 레벨 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랭커들의 평균 레벨은 400대였고, 규격 외라고 평가받는 강자들의 레벨도 450을 넘지 못했다.

    한데 최현성의 추정 레벨은 최하 500 이상 최대 600레벨에 달했다.

    “그에 대한 의문을 품고 CIA 동북아시아 요원들이 조사를 시작한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게 뭔가?”

    윌슨 대통령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플레이어 최현성이 20레벨의 법칙을 무시할 수 있는 고유 스킬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CIA 국장의 말에 윌슨 대통령과 참모들의 표정이 일제히 돌처럼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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