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무기
‘그나저나 이거 정말 좋네.’
사이코 메트리 - 영웅 등급
-액티브 스킬북
-사물에 깃든 과거의 정보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홀로그램 영상과 소리를 제공합니다.
-한 달 이상이 지난 정보는 열람할 수 없습니다.
-마력이 깃든 사물의 과거 정보는 열람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비싼 가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거의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능력은 정보전에 엄청난 힘을 실어 줬다.
사실 사이코 메트리 스킬이 없었다면 이항구 장관에게 큰 굴욕을 주는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일의 주체가 이항구 장관이라는 사실 자체도 몰랐을 수 있다.
하지만 사이코 메트리 스킬 덕분에 진실을 알 수 있었고, 이항구 장관을 완벽하게 매장시킬 수 있었다.
‘이건 앞으로도 써먹을 일이 많겠어.’
실질적인 전투에는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정보가 곧 무기인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현성의 입장에서 사이코 메트리 스킬은 최고의 첩보원이자 공격 무기였다.
위이이잉!
그때 현성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신윤아였다.
“예, 윤아 씨.”
-지금 만날 수 있을까요?
“네,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럼 현재 있는 숙소를 알려 주세요. 제가 그리로 가겠습니다.
“아, 잠시만요.”
현성이 재빨리 근처에 있는 커피숍을 검색했다.
현재 현성이 머무는 숙소는 모텔.
모텔 방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잡을 수는 없었다.
“상도역 근처에 있는 스몰 커피로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30분쯤 후면 도착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현성이 옷을 챙겨 입고 외출 준비를 갖췄다.
30분 후.
커피숍에서 현성과 신윤아가 만났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이번에 일어난 이항구 장관 스캔들 현성 씨 작품인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런 일을 벌일 사람이 현성 씨밖에 없으니까요.”
현성과 이항구 장관이 대립한 일은 정부 주요 관계자와 플레이어 협회 간부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현성의 승리였다.
하지만 이항구 장관도 체면을 구겼다는 점을 제외하면 크게 손해 본 건 없었다.
플레이어와 마찰을 일으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경질시키기에는 이항구 장관이 평소 쌓아 놓았던 인맥이 너무 탄탄했다.
결정적으로 이항구 장관은 공개적으로 현성에게 사과할 거라는 뜻을 상부에 알렸다.
이항구 장관이 바보가 아닌 이상 저번과 같은 실수를 반복할 리는 없었다.
정부 관계자들은 이항구 장관의 사과로 이번 일이 마무리되리라 여겼다.
한데 갑자기 이항구 장관의 비리 장부가 공개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번 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은 이항구 장관만이 아니다.
국회의원을 비롯해 거대 길드들도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정부 관계자들은 이항구 장관 비리 장부를 공개한 인물이 플레이어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범인으로 가장 의심받고 있는 인물이 바로 현성이었다.
증거는 없다.
하지만 심증은 충분했다.
“정부 관계자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어요.”
플레이어는 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이자, 국가를 유지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위험 요소를 가지고 있다.
플레이어의 무력은 현대 병기를 위협할 정도로 위력적이다.
온갖 기상천외한 스킬들은 마법처럼 보일 정도다.
기득권자들은 플레이어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
또한 플레이어가 범죄에 가담하거나 민간인을 공격할 경우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해도 상당히 무겁게 가중처벌을 했다.
“현성 씨가 한 일로 의심받고 있으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만약 제가 한 일로 밝혀지면 어떻게 되죠?”
현성의 물음에 신윤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가택침입죄와 절도죄로 구속될 수도 있어요.”
“플레이어 특별법에 의해서 가중처벌 받겠네요.”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여론을 등에 업어야 해요.”
“그러는 게 좋겠네요. 하지만 전 범인이 아니니까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현성의 말에 신윤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방금 전 대화를 통해 신윤아는 현성이 이번 일을 벌인 범인이라고 확신했다.
“조심하세요. 기득권자들은 플레이어들이 권력을 갖는 걸 원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번 일로 충분한 경고는 됐을 거예요.”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는다.
이번 일로 인해 정부 관계자들은 현성을 조금 더 조심스럽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무력이 아니라 비밀 장부와 여론이라는 무기를 이용해 이항구 장관을 실각시켜 버렸으니까 말이다.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항구 장관의 비리 장부를 찾아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게 더 강한 공포로 느껴질 수도 있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들도 같은 꼴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게 분명했으니까 말이다.
정치를 하는 이들 중 티끌 하나 없이 순수한 이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번 일로 적이 많이 생겼을 거예요. 현성 씨에 대한 경계심도 더 강해졌을 거고요. 그러니까 당분간은 조용히 있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뭐, 저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때가 뒤숭숭하니 얌전히 있는 게 좋겠네요. 저도 괜한 의심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요.”
“잘 생각하셨어요. 쓸데없는 의심은 피하는 게 좋죠.”
그 후 현성과 신윤아는 일상적인 내용의 대화를 나눴다.
이번 2차 대격변 때 있었던 에피소드만 해도 할 이야기가 넘쳐 났다.
사실 신윤아는 현성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신윤아도 이항구 장관을 실각시키기 위해 여러 노력을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정황상 증거는 있지만 물적증거가 없었다.
한데 현성은 순식간에 이항구 장관을 실각시켰다.
궁금했다.
도대체 어떻게 정부나 플레이어 협회에 아무런 인맥이 없는 현성이 이항구 장관을 실각시킬 수 있었을까?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괜히 현성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 * *
한국은 비교적 빠르게 2차 대격변을 극복했다.
다른 나라들 역시 차원 게이트를 하나둘 정복해 가며 서서히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정을 찾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깊은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나라도 있었다.
꽈아아아앙!
공중에서 폭격이 연이어 떨어졌다.
멀리 떨어진 포병 부대의 포신 역시 동일한 목표물을 향해 계속해서 포탄을 쏟아부었다.
도시의 인프라를 포기하더라도 몬스터를 처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하지만…….
크아아아앙!
몬스터는 건재했다.
랭커들의 총공격 실패.
폭격 실패.
칠흑빛 비늘로 전신을 뒤덮고 있는 거대한 이무기 앞에서 플레이어도 군대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핵폭탄을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수용되지 못했다.
자국의 수도에 핵을 사용한다는 건 나라를 말아먹겠다는 뜻과 동일했다.
거기다 도시 외곽에는 아직 몸을 피하지 못한 수백만 명의 민간인들이 공포에 떨고 있었다.
플레이어들이 다시금 무기를 들었다.
군대도 포신을 정비했다.
콰콰콰콰콰!
그때 이무기의 입에서 모든 것을 녹여 버리는 산성 브레스가 뿜어져 나왔다.
플레이어들의 몸이 힘없이 녹아내렸다.
포병 부대의 포신이 녹아내렸고 쌓아 놓았던 포탄들이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전투기들의 날개와 엔진이 빠르게 녹아내리며 연속적으로 추락했다.
산성 브레스 한 방에 수도 수비를 위해 싸우던 플레이어들과 군인들이 순식간에 전멸해 버렸다.
최정예 플레이어들과 군대의 전멸.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국가의 수뇌부는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 도주를 선택했다.
일단 수도를 빠져나가 지방에 흩어져 있는 플레이어들과 군대를 정비해 이무기와 2차전을 벌일 요량이었다.
하지만…….
콰콰콰콰콰!
불행하게도 이무기의 브레스는 플레이어들과 군대를 녹여 버리고도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뿜어지며 도시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국가 수뇌부들이 미처 도주할 틈도 없이 방공호가 녹아내렸다.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방공호 안으로 기체 형태의 산성 브레스가 유입되었다.
미처 도주할 틈도 없이 국가 수뇌부들의 몸이 녹아내렸다.
캬아아아아앙!
이무기가 승리의 포효를 토해 냈다.
한때 평양이라 불렸던 도시가 지상에서 사라졌다.
* * *
위이이잉!
“어?”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신윤아의 호출기가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먼저 일어나 봐야겠습니다.”
신윤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위이이잉!
신윤아가 호출 내용을 확인하기도 전에 현성의 호출기 역시 요란하게 울렸다.
“저도 같이 가죠.”
“그렇게 하는 게 좋겠네요.”
현성과 신윤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플레이어 협회 본부를 향해 이동했다.
“진돗개 하나가 발령됐어요.”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제가 본부에 연락을 해 볼게요.”
신윤아가 전화를 거는 사이 현성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었다.
현성은 인터넷 브라우저가 열리자마자 호출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포털 메인에 대문짝만 하게 난 기사 덕분이었다.
-평양이 사라졌다!
-북한 정권 붕괴!
-등급 측정 불가 몬스터 이무기의 남하 가능성은?
-한국은 이무기를 막아 낼 수 있을까?
현성이 기사들을 하나하나 읽어 봤다.
내용은 별거 없었다.
제목에 모든 기사 내용이 압축되어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심각한데.’
플레이어의 수준이 낮거나 군사력이 약한 국가들이 종종 차원 게이트를 막지 못하는 사고가 생긴다.
그럴 경우 타국의 도움을 받아 진압에 들어간다.
그렇게 진압된 던전은 타국과 소유권을 나눠 가지게 된다.
약소국의 경우 자국의 던전이 완전히 타국의 식민지화되는 경우도 존재했다.
하지만 북한은 그런 약소국이 아니었다.
북한은 경제적으로는 최빈국에 속한다.
하지만 군사력 자체는 세계 20위권 안에 드는 군사 강국이다.
플레이어들의 수준도 결코 낮지 않다.
보유한 고레벨 플레이어의 수가 국력으로 치부되는 시대다.
북한의 독재 정권은 고레벨 플레이어들을 위해 많은 투자를 했고, 그 결실을 거뒀다.
한데 그런 북한의 수도가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평양에 갑자기 생겨난 차원 게이트 하나를 막지 못해서 말이다.
‘설마 전설 등급은 아니겠지?’
현존하는 최고 등급의 던전은 영웅 등급이다.
몬스터 역시 영웅 등급이 끝이었다.
아마 각국의 수뇌부들은 영웅 등급 이상의 몬스터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성은 고유 스킬을 통해 전설 등급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정말 전설 등급이면 큰일인데…….’
어쩌면 핵을 쏴서 처리해야 할 수도 있다.
* * *
대한민국에 비상이 걸렸다.
2차 대격변이 끝나고 겨우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평양 소멸 사태.
한국 정부로서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무기도 이무기였지만, 수뇌부를 잃은 북한군이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하기가 힘들었다.
중국과 러시아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중국과 러시아는 국경 지대의 방비를 강화하며 군을 전면 배치했다.
하지만 현재 중국과 러시아는 이무기를 신경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자국 내에 열린 차원 게이트를 모두 던전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2차 대격변으로 인한 피해가 엄청났다.
영토가 워낙 넓었기에 새롭게 열린 차원 게이트도 많았다.
차원 게이트가 많으니 그만큼 몬스터도 많이 출몰했다.
국내의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국외 문제까지 생겨 버리니 중국과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무기가 자국의 영토를 침공해 온다면 그나마 없는 군과 플레이어들을 쪼개서 방어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무기의 움직임에 한중러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 * *
이무기는 거칠게 북한 지역을 누비고 다녔다.
남쪽으로 향하면 한국이 바짝 긴장했고, 북쪽으로 향하면 중국과 러시아가 비상 경계령을 발동했다.
이무기의 이동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하루에 100킬로미터 가까이를 이동하며 북한 전역을 초토화시켰다.
중앙정권이 붕괴한 북한군은 이무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이무기와 마주하지 않은 북한군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평양에서 열린 차원 게이트는 봉인하지 못했다.
이무기가 튀어나온 차원 게이트는 와이번과 드레이크 같은 용종에 속하는 몬스터들을 끊임없이 토해 냈다.
차원 게이트를 빠져나온 몬스터들은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하며 날뛰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날뛰는 몬스터들을 감당하지 못한 군부와 플레이어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사실 평양이 사라진 순간부터 북한 군부에는 승산이 없었다.
랭커와 고레벨 플레이어 들이 평양에서 이무기와 싸우다 전멸했기 때문이다.
랭커와 고레벨 플레이어 들 없이 군대만으로 영웅 등급 몬스터를 사냥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여기다 설상가상으로 다른 던전들까지 문제를 일으켰다.
이무기와 영웅 등급 몬스터들의 난동으로 던전에서 사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연히 시간이 흘러 던전 안의 몬스터는 포화 상태가 되었고, 그중 일부가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켰다.
던전 밖으로 일반 등급과 희귀 등급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순간부터 북한은 더 이상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몬스터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결국 수많은 피난민들과 패잔병들이 남한으로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 * *
비상소집령이 발동되었다.
그 대상은 현성을 포함한 협회 직속 플레이어들과 랭커들 및 고레벨 플레이어들이었다.
정부는 소집한 랭커와 고레벨 플레이어 들을 최전방에 배치했다.
이무기의 남하를 대비하고 북한 지역에서 흘러들어 오는 몬스터들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무기가 남하하지 않고 시간만 흐르는 상황이 되자 점점 랭커들과 고레벨 플레이어들의 불만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이런 조무래기들만 상대하고 있어야 하는 거야?”
“그러게 말이야. 벌써 일주일 넘게 공치고 있다고. 도대체 손해가 얼마야?”
랭커 및 고레벨 플레이어 들은 걸어 다니는 일인 기업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그들이 200레벨도 안 되는 중, 저레벨 몬스터들만 사냥하고 있었다.
이건 소 잡는 칼로 닭 잡는 꼴이었다.
정부에서 수당을 지급해 주기는 하지만 랭커 및 고레벨 플레이어 들의 입장에서는 용돈 정도밖에 안 되는 돈이었다.
랭커와 고레벨 플레이어 들의 불만이 커짐과 동시에 또 다른 문제가 드러났다.
남한 지역에 자리한 고레벨 던전들이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킬 징후를 보인 것이다.
고레벨 던전을 청소해야 할 랭커와 고레벨 플레이어 들을 모두 국경 지대에 배치한 게 원인이었다.
결국 정부는 고심 끝에 고레벨 플레이어들을 두 부류로 나눴다.
레벨과 전투 능력을 기준으로 삼아 상위 그룹과 하위 그룹으로 나눈 것이다.
상위 그룹은 그대로 최전방에 대기하며 몬스터의 남하를 막았다.
하위 그룹은 수도권과 지방을 오가는 로테이션 순환 근무를 통해 고레벨 던전을 클리어했다.
정부는 하위 그룹의 기동성을 위해 군용 수송 헬기까지 동원했다.
상위 그룹이 불만을 가졌지만 하위 그룹은 환호했다.
“이제야 사냥다운 사냥을 해 보겠네.”
“이 답답한 곳은 이제 안녕이다.”
하지만 하위 그룹의 환호는 오래가지 못했다.
2차 대격변과 함께 고레벨 던전의 숫자는 엄청나게 늘어났다.
하위 그룹이 감당하기에는 던전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2차 대격변 발생 초기처럼 이동 중에 눈만 붙이고 하루 종일 몬스터를 사냥해야 하는 강행군이 펼쳐졌다.
“차리리 최전방에 있는 게 더 나았어.”
“그러게 도무지 쉴 시간을 안 주네.”
하위 그룹이 몸이 부서져라 던전을 순례하고 있음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고레벨 던전들이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킬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고레벨 플레이어들의 불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어쩔 수 없이 정부의 지시를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고레벨 플레이어들의 불만은 실로 엄청났다.
2차 대격변을 막느라 쉬지도 못하고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겨우 2차 대격변이 종료되어 자유를 만끽하는 와중에 다시금 비상소집령이 발동되었다.
상위 그룹은 최전방을 지키느라 레벨을 올릴 기회 및 금전적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북한 지역에 있던 영웅 등급 몬스터가 국경을 넘어오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했다.
하지만 가뭄에 콩 나는 수준이었고 국경을 넘어오는 몬스터의 대다수가 일반 등급과 희귀 등급이었다.
경험치도 얻을 수 없었고, 아이템도 얻을 수 없다.
상위 그룹 입장에서는 돈과 시간을 허공에 버리고 있는 꼴이었다.
레벨에 맞는 던전에서 사냥을 하고 있는 하위 그룹의 불만도 만만치 않았다.
하위 그룹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루 종일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정해진 던전을 클리어해야 했다.
이무기 침공을 대비해 최전방에 있는 상위 그룹이 사냥에 참여하지 않는 만큼 하위 그룹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제대로 쉴 시간이 없었다.
상위 그룹의 숫자를 줄이고 하위 그룹의 숫자를 늘리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다 이무기가 남하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 거냐는 반론에 결국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평양을 소멸시키고 북한 전역을 초토화시킨 등급 측정 불가의 존재가 바로 이무기였다.
상위 그룹의 숫자를 줄였다가 이무기가 남하하기라도 하면 어마어마한 대참사 벌어질 수도 있었다.
랭커 및 고레벨 플레이어 들이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는 사이…….
꽈아아아앙!
‘정말 대단하네.’
현성은 최전방에서 상위 그룹의 전투를 지켜보며 감탄을 터트리고 있었다.
크아아앙!
그런 현성을 향해 일반 등급 몬스터 한 마리가 덤벼들었다.
서걱!
현성이 가볍게 검을 휘둘러 몬스터를 정리했다.
최전방 대기.
현성은 큰 불만이 없었다.
몬스터의 레벨에 상관없이 포인트를 얻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업적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리긴 했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맞추면 되는 일이다.
현성은 협회 직속 플레이어들과 함께 최전방에서 몬스터를 사냥하고 있었다.
북한과 남한의 국경선은 상당히 길다.
당연히 랭커와 고레벨 플레이어 들만으로 모두 커버할 수가 없다.
그 외에 지역을 커버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 바로 협회 직속 플레이어들이었다.
현성은 익숙한 얼굴들과 함께 국경을 넘는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캬아아아앙!
설표로 수인화한 이수영이 최전방에서 날뛰었고, 서태철은 광역 스킬로 후방 지원을 했다.
현성은 최전방에서 날뛰며 스킬을 난사해 몬스터들을 쓸어버렸다.
아공간을 이용해 마석과 아이템을 회수하는 일도 빼먹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현성이 몬스터들을 쓸어버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큰 불만이 없다는 거지 불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업적이 뒤죽박죽이 되는 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고유 스킬 판매를 통해 판매할 물품을 수령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누나 최현지의 도움으로 최전방 근처의 민가에 창고를 매입해 물품을 보충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먼저 치고 올라가면 되는 거 아닌가?’
북진.
북한 영토도 수복하고 이무기도 잡고, 꿩 먹고 알 먹고 아닌가?
하지만 한국 정부는 신중한 건지 겁이 많은 건지 국경 지대를 철통같이 지키라는 지시만 내리고 있었다.
* * *
두두두두두!
북한과 중국의 접경 지역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중국은 영토가 넓었다.
그만큼 2차 대격변 당시 차원 게이트가 많이 열렸다.
자국 내 차원 게이트를 다 소탕하지 못한 상황이기에 중국 당국은 북한과의 국경 지역에 대규모 군대를 배치했다.
부족한 플레이어 숫자를 군의 화력으로 막는다는 계획이었다.
도시 내부에 생긴 차원 게이트는 플레이어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그게 가장 적은 피해로 빠르게 차원 게이트를 던전화시키는 방법이다.
섣불리 군대를 투입해 폭격을 가해 버리면 차원 게이트를 던전화해도 기간 시설이 남아나지 않는다.
그런 면에 있어서 국경 지대는 중국 당국 입장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군대를 배치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자국민이 살지 않는 지역.
타국의 영토.
폭격을 아무리 가해도 시설물 피해나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 장소.
꽈아앙! 꽈아앙!
포탄이 연달이 터지며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다.
일반 등급과 희귀 등급 몬스터 들은 중국군 근처에도 오기 전에 산화해 버렸다.
쿵! 쿵! 쿵!
폭음을 듣고 등장한 레드 드레이크가 지축을 울리며 중국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꽈아앙! 꽈아앙!
캬아아아악!
폭격과 함께 레드 드레이크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레드 드레이크는 폭격에 피해를 입으면서도 꾸역꾸역 중국군을 향해 달려 나갔다.
휘익!
그 순간 중국군과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중국 랭커들이 나섰다.
퍼퍼퍼퍼펑!
연속적으로 스킬들이 날아갔다.
쿠웅!
이미 폭격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어 있던 레드 드레이크는 랭커들의 화망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현대 병기의 위력은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하다.
지리적인 위치상 시설물 피해와 인명 피해를 방지하고자 사용하지 못할 뿐, 그런 것을 무시하고 진행되는 현대 병기의 화력은 대지를 불바다로 만들고 산을 가루로 만들 정도로 강력하다.
거기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이무기의 침공을 대비하기 위해 파견된 랭커들까지 있다.
중국의 국경 지대는 철옹성이나 마찬가지였다.
중국군은 자신감이 넘쳤다.
설사 이무기가 쳐들어온다고 해도 충분히 막아 낼 자신감이 있었다.
위이이이잉!
사이렌이 울리며 최고 경계령이 떨어졌다.
“무슨 일이야?”
중국 랭커 우위안이 귀찮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무기가 현재 이곳을 향해 빠른 속도로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그래?”
우위안의 표정에 흥미로움이 피어올랐다.
이무기.
평양을 소멸시킨 등급 측정 불가 몬스터.
하지만 중국 정부는 이미 이무기의 등급을 파악하고 있었다.
몬스터 감별사의 존재 덕분이었다.
던전의 등급은 다양하다.
같은 등급의 던전이라도 등장하는 몬스터의 레벨과 등급은 천차만별이다.
그런 이유로 초창기에는 갑자기 범람한 던전을 막는 데 상당히 큰 문제가 발생했다.
그때 대활약을 한 이들이 바로 몬스터 감별사라는 특수 직업을 얻은 플레이어들이었다.
직업 스킬 감별의 눈을 통해 던전의 등급을 알아내고 몬스터의 이름과 레벨을 알아내는 이들.
평소에는 중요도가 상당히 떨어지지만 새로운 몬스터가 출몰할 경우에 꼭 필요한 직업군이다.
그 때문에 정부에서는 몬스터 감별사들을 꼭 자국의 협회 직속으로 삼았다.
일종의 공무원이 된 것이다.
중국 정부에서는 북한 지역에 몬스터 감별사를 파견해 원거리에서 이무기의 등급과 레벨 파악을 시도했다.
그러나 레벨을 파악하는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등급 파악은 성공했다.
전설 등급.
현재까지 단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던 새로운 등급의 몬스터였다.
우위안은 내심 이런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지루한 임무에 자원했다.
‘사냥에 성공하면 최초 업적은 무조건 뜬다.’
우위안은 총 3개의 업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업적은 스텟을 상승시켜 준다.
그중에서도 최초 업적은 상당히 큰 폭으로 스텟을 상승시켜 준다.
우위안은 일반 업적은 보유하고 있지만 최초 업적은 손에 넣은 적이 없었다.
‘이번 기회에 꼭 손에 넣어야지.’
우위안의 가슴이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다른 랭커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랭커들이 레벨을 올릴 수도 없고 돈도 벌 수 없는 임무에 자원한 이유는 오직 하나.
최초 업적을 얻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 * *
슈우우우우욱!
전투기가 출격했다.
포병들 역시 장거리 사격 준비를 마쳤다.
이무기의 공격 방향이 아군 진영인 것을 확인하자마자 중국군은 과감하게 선공을 결정했다.
어차피 전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면 전장은 북한 영토가 되어야 했다.
꽈아아아아앙!
폭격과 포격이 시작되었다.
현대 병기의 총화가 이무기 한 마리를 향해 집중되었다.
우위안을 포함한 중국의 랭커들은 제발 이무기가 죽지 않기를 소망했다.
이무기가 죽어 버리면 최초 업적 역시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우위안을 포함한 중국 랭커들의 소망이 하늘에 닿았는지 이무기는 오히려 더욱 빠른 속도로 북진하기 시작했다.
폭격과 포격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쏟아졌다.
그와 동시에 랭커들이 전투준비를 마쳤다.
국경 지대에 배치된 랭커의 숫자는 총 181명.
9인 파티 20개를 파견한 것이다.
그 외에 4차 전직을 마친 고레벨 플레이어들도 3천 명 넘게 배치했다.
중국은 자신감이 넘쳤다.
북한 랭커들보다 자국 랭커의 실력이 월등히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국 랭커들의 생각도 동일했다.
북한에서는 랭커라고 뻐기고 다녔겠지만 중국은 다르다.
북한 랭커들이 중국인이었다면 랭커는커녕 고레벨 플레이어 중에서도 중하위권에 머물렀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중국은 대국이다.
보유한 플레이어 숫자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다.
채 3천만도 되지 않는 인구수를 가진 국가에서 뽑힌 랭커와 14억이 넘는 인구수를 가진 중국에서 뽑힌 랭커는 질이 다르다.
중국인들은 그렇게 믿었다.
또 현실적으로 그 이상의 랭커들을 빼낼 만한 여력이 없기도 했다.
캬아아아아악!
비늘이 깨지고 피를 줄줄 흘리는 이무기가 광폭한 포효를 터트리며 중국군을 향해 덤벼들었다.
“가자!”
“중화인의 위대함을 보여 주자!”
중국 랭커들이 중국군을 향해 달려드는 이무기를 향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빅토리! 헤이스트! 불타는 투지!”
유일한 버퍼가 랭커들에게 버프를 돌렸다.
힐러들은 언제든지 힐을 쏟아부을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선더 스톰!”
“체인 라이트닝!”
“작열!”
“기가 플레어!”
버프를 받은 원거리 딜러들이 일제히 공격력이 강력한 뇌전계와 화염계 스킬을 이무기에게 날렸다.
탱커와 근접 딜러 들 역시 직업 스킬을 발동시키며 이무기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었다.
중국 랭커들과 이무기가 격돌하는 순간…….
크아아아아아앙!
이무기가 다시금 사나운 포효를 터트렸다.
그리고 그 순간…….
-정신계 공포 스킬 피어에 걸리셨습니다.
-공포에 잠식당한 신체가 10초간 경직됩니다.
모든 랭커들의 눈앞에 동일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물론 내용은 조금씩 달랐다.
-피어 스킬에 저항합니다. 경직 시간이 1초로 감소합니다.
-피어 스킬에 저항합니다. 경직 시간이 3초로 감소합니다.
-피어 스킬에 저항합니다. 경직 시간이 2초로 감소합니다.
-피어 스킬에 완벽하게 저항했습니다.
랭커들이 가지고 있는 스킬 저항력에 따라 피어가 가진 신체 경직이 다르게 적용되었다.
피어에 완벽하게 저항한 랭커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콰직!
이무기의 날카로운 이빨이 탱커와 근접 딜러 들의 몸을 집어삼켰다.
콰아아아앙!
이무기의 거대한 꼬리가 원거리 딜러들과 힐러들을 휩쓸었다.
생사를 가르는 전투에서는 1초가 아니라 0.001초도 방심 할 수 없다.
피어 스킬에 걸린 순간 승부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피어에 완벽하게 저항한 랭커들은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이미 대다수의 동료들은 전사한 후였다.
중국인 랭커 중 피어에 완벽하게 저항한 플레이어의 숫자는 고작 여덟.
아무리 랭커라고 해도 8명이 힘을 합쳐 전설 등급 몬스터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생존한 랭커들이 살기 위해 도주를 선택했다.
그 순간 이무기의 마력이 요동치며 칠흑빛 뇌전과 폭풍을 불러냈다.
꽈아아아앙!
도망치는 랭커들을 향해 이무기의 스킬이 연속적으로 작렬했다.
피한 이들도 있었고 막아 낸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의 최후는 모두 동일했다.
파지지직! 콰직!
이무기의 스킬과 이빨에 생존한 랭커 여덟이 죽음을 맞이했다.
물론 랭커들이 죽음을 맞이했다고 해도 중국군에는 아직 3천 명이 넘는 고레벨 플레이어들이 남아 있었다.
중국의 고레벨 플레이어들과 군대가 반격을 가하려는 순간…….
크아아아아앙!
다시 한번 이무기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피어에 걸린 고레벨 플레이어들과 군인들의 몸이 그대로 경직되어 버렸다.
콰콰콰콰콰!
굳어 버린 고레벨 플레이어들과 군인들의 머리 위로 이무기의 산성 브레스가 뿌려졌다.
고레벨 플레이어들과 중국군의 몸이 힘없이 녹아내렸다.
탱크의 장갑과 포신조차 녹여 버리는 산성을 인간이 맨몸으로 견딜 수는 없었다.
학살의 장이 펼쳐졌다.
중국과 북한의 국경 지대에 배치되어 있던 3천 명이 넘는 고레벨 플레이어들과 중국군 20만 명이 몰살당하는 순간이었다.
* * *
전 세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이무기와 중국군의 충돌.
중국 랭커와 중국군의 전멸.
UN은 위성 촬영과 무인 항공촬영으로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각국의 정부에 공개했다.
전 세계가 충격에 빠져들었다.
물론 사건 당시 중국 국경 지대에 배치되어 있던 랭커들의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굳이 한국 국경 지대에 배치되어 있는 랭커들과 비교를 하자면 최소 10배 이상 차이가 났다.
한국은 최상위 랭커들을 모두 동원했다.
그에 반해 중국은 랭커 20개의 파티와 한 명의 버퍼를 배정했다.
물론 랭커 20개 파티의 전력과 버퍼를 무시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비슷하게 대비를 하고 있던 한국과 비교하면 확실히 수준이 떨어졌다.
중국은 플레이어의 숫자가 많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머릿수만 많을 뿐 수준은 그리 높지 못했다.
중국은 수천 명에 달하는 랭커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그건 지방정부별로 순위를 매겨 랭커를 뽑기 때문이다.
세계 랭킹으로 따지자면 진짜 랭커라고 할 만한 이들의 숫자는 인구 대비 상당히 적은 수준이었다.
냉정하게 평가해 지방정부가 뽑은 랭커들의 실력은 한국의 상위권 고레벨 플레이어 수준에 불과했다.
한국에서는 랭커 순위에도 들지도 못할 수준의 플레이어들이 랭커라며 자부하고 다니는 꼴이었다.
물론 워낙 플레이어 숫자가 많다 보니 한국의 랭커들과 대등한 실력을 가진 진짜배기 랭커들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런 이들이 현재 베이징시에 집중 포진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20만에 달하는 병력과 중국 지방정부 랭커가 포함된 수천 명의 고레벨 플레이어들이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모습은 엄청난 충격과 공포일 수밖에 없었다.
평양이야 갑자기 기습을 당했다고 쳐도 중국은 나름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던 상황이 아닌가.
한데 그대로 전멸당해 버렸다.
그것도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말이다.
이무기의 피어 한 방에 랭커와 고레벨 플레이어 들이 돌처럼 굳어 버리는 장면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무려 3천 명이다.
4차 전직을 마친 300레벨대의 플레이어 3천 명이 고작 몬스터 한 마리를 어찌하지 못하고 전멸했다.
고레벨 플레이어들은 파티를 짜면 능히 영웅 등급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다.
그런 이들이 3천 명이나 모여 있었음에도 일방적인 학살을 당했다.
중국은 초상집이 되었고 한국과 러시아는 바짝 긴장했으며, 지리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들도 이무기의 등장을 강하게 경계하기 시작했다.
자국에 이무기 같은 전설 등급 몬스터가 나타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 * *
‘엄청나네.’
중국 국경 지대에서 벌어진 참사에 대한 기사를 읽은 현성의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솔직히 중국 국경이 뚫릴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수준이 좀 떨어진다고 해도 머릿수가 많지 않은가.
3천 명이 스킬을 한 번씩만 사용해도 무려 3천 번이다.
한데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전멸당했다.
이무기의 피어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심해야겠어.’
중국 플레이어들과 이무기의 전투 장면을 본 뒤 정신계 스킬의 위험성을 여실히 느꼈다.
‘야성의 본능 스킬을 사려고 했는데…….’
한 번 더 미뤄야 할 것 같았다.
사이코 메트리 구입 후 텅 비어 있던 포인트 잔고가 다시금 차올랐다.
그래서 야성의 본능 스킬북을 구입하려고 했다.
하지만 중국의 대패 영상을 본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최초 업적을 포기할 수는 없지.’
소식을 들은 한국 정부는 이무기와의 전투에 대비해 이무기 척살대를 선발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랭커 중에서 뽑았다.
하지만 랭커가 아니더라도 정신계 스킬 저항력이 높다면 선발될 확률이 높았다.
‘어떤 게 좋을까?’
현성은 구매창을 열어 저항력 계열 스킬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광범위하게 스킬 저항력을 올려 주는 패시브 스킬북부터 화염계, 뇌전계, 빙계처럼 특정 계열 공격 스킬의 저항력을 올려 주는 패시브 스킬북까지…….
하지만 지금 현성에게 필요한 건 정신계 공격에 대한 저항력을 올려 주는 패시브 스킬북이었다.
‘이게 가장 좋겠다.’
굴하지 않는 정신 - 영웅 등급
-패시브 스킬북
-정신계 스킬에 대한 저항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정신력 스텟에 따라 스킬 효과가 증폭됩니다.
-판매자 : 스트프
-판매가 : 29,999,999,999포인트
고작 두 개의 옵션밖에 없었다.
영웅 등급 스킬북치고는 상당히 빈약한 옵션이다.
하지만 후기가 상당히 좋았다.
기본적인 정신계 스킬 저항력 상승 폭이 상당히 높았고, 정신력 스텟과 연계되는 증폭 효율이 좋았기 때문이다.
베스트 구매평에는 탱커 계열은 필수적으로 익혀야 한다는 내용까지 들어가 있었다.
-패시브 스킬북 굴하지 않는 정신 - 영웅 등급을 구매하시겠습니까? 한번 구매한 물품은 환불이나 교환이 불가능합니다.
-[예] [아니오]
예를 선택했다.
툭!
보라색 외장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스킬북이 현성의 손에 들어왔다.
-패시브 스킬북 굴하지 않는 정신 - 영웅 등급을 습득하시겠습니까?
-[예] [아니오]
스킬북을 움켜쥐자마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연히 예를 선택했다.
‘별로 변한 건 없는 거 같은데…….’
패시브 스킬북, 그것도 정신계 공격 방어 스킬이라 그런지 전혀 체감이 되지 않았다.
‘테스트에 지원해서 확인해 보면 되겠지.’
굴하지 않는 정신에 대한 검증은 플레이어 협회에서 해 줄 것이다.
현성이 테스트 장소로 향했다.
* * *
“이딴 게 뭐라고 사람한테 개망신을 줘?”
테스트를 끝마친 랭커 하나가 목소리를 높이며 테스트장을 빠져나왔다.
랭커의 얼굴은 홍시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잔뜩 흥분한 듯 보였지만 주변에 있는 대기자들을 의식했는지 빠르게 흥분을 가라앉히고 테스트장을 빠져나갔다.
이무기 척살대에 지원하는 이들은 상당히 많았다.
랭커가 아닌 고레벨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상당히 많은 지원자가 나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최초 업적.
고레벨 플레이어들 정도 되는 이들은 업적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역사상 최초로 진행되는 전설 등급 몬스터 이무기 레이드.
업적을 주지 않을 리가 없었다.
참가해서 숟가락을 얻기만 해도 업적을 얻을 수 있다.
물론 그 외에 다른 이유로 지원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무기가 뱉어 낼 아이템에 욕심이 났을 수도 있고, 명예욕에 지원을 했을 수도 있다.
대기자들이 줄줄이 들어갔다가 빠져나왔다.
‘이거 생각보다 합격률이 상당히 낮네.’
대한민국 최상위권 플레이어들이 도전하고 있음에도 합격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말 그대로 대부분이 탈락이었고, 가뭄에 콩 나는 수준으로 합격자가 나오고 있었다.
“최현성 씨.”
드디어 현성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현성이 플레이어 등록증을 내밀고 지문 인식기에 손가락을 찍었다.
“본인 확인되셨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안내원의 말에 현성이 테스트장으로 들어갔다.
테스트장 내부는 단순한 밀실이었다.
밀실에는 거울이 하나 있었다.
‘영화에서 보던 취조실 같네.’
아마 거울 밖에서 이곳을 주시하고 있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테스트 준비는 되셨나요?
스피커를 통해 들려온 음성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테스트를 시작하겠습니다.
-정신계 위압 스킬 여왕의 위엄에 걸리셨습니다.
-10초간 혼란 상태에 빠집니다.
-패시브 스킬 굴하지 않는 정신이 발동합니다.
-여왕의 위엄 스킬에 완벽하게 저항합니다.
순식간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역시 영웅 등급 스킬.
밥값은 충분히 했다.
“끝난 건가요?”
-네, 테스트 통과하셨습니다.
여유로운 현성의 물음에 스피커에서 합격 선언이 나왔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테스트를 통과한 현성이 가벼운 마음으로 테스트장을 벗어났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네, 현성 씨는.’
유리 너머로 멀어져 가는 현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신윤아의 눈빛이 진한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테스트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윤아가 무료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상대가 준비가 끝났다는 대답을 해 왔고 신윤아는 다시금 여왕의 위엄 스킬을 발동시켰다.
* * *
중국의 국경 지대를 초토화시킨 이무기는 다행히 더 날뛰지 않았다.
국제사회에서는 연합군을 결성해 이무기를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흘러나왔다.
이에 중국은 자체적으로 해결할 것이니 타국의 일에 신경 쓰지 말라는 입장을 국제사회에 전달했다.
일종의 자존심 싸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을 잃은 북한 영토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국가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몬스터 천국으로 변하기는 했지만 몰아내면 그만이다.
북한 영토가 보유하고 있는 지하자원과 수많은 차원 게이트는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줄 것이 자명했다.
특히 일본의 경우는 미국에 특사를 파견하고 과거에 실패했던 평화헌법 수정에 들어가는 등 온갖 개수작을 부리기 시작했다.
중국 역시 자국으로 흘러들어 온 북한 주민들과 조선족들을 이용해 북한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국의 영토를 타국이 욕심내는데 누가 가만히 있겠는가?
헌법에 나와 있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다.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의 영토를 불법 점유하고 있는 무장 단체였을 뿐이다.
북한 주민 역시 대한민국 정부가 보호해야 하는 대상이다.
탈북민들이 대한민국 국적을 얻을 수 있는 이유는 헌법상 북한 주민 역시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다.
북한은 유엔 가입국이며 올림픽, 월드컵, 아시안게임 등에 공식 참가하는 국가다.
하지만 그건 타국의 입장일 뿐이고, 한국의 입장에서 북한 지역은 무조건 수복해야 하는 자국의 영토일 뿐이다.
헌법에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북한 지역을 수복하라는 의미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북한 지역을 수복하는 것은 쉽지 않은 미션이었다.
최초의 대격변 이후 남한과 북한은 단 한 번도 물리적 충돌을 벌이지 않았다.
오히려 화해 무드가 감돌며 적당히 교류했다.
종전 선언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남한과 북한의 전쟁은 종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남한과 북한의 사이가 좋아졌다고 해서 통일을 이야기할 정도는 아니었다.
통일이 이루어지려면 최소 수십 년 이상의 장기적인 계획과 교류가 필요했다.
한데 갑자기 상황이 급변했다.
잃어버린 북한 지역을 평화적으로 수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북한 정권과 군대가 붕괴됐다.
북한 주민들은 몬스터의 습격에 고통받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자국에서 벌어진 차원 게이트 봉쇄와 이무기 처리 때문에 빠르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입장에서는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국민들의 여론 또한 북한 지역을 수복해야 한다는 열망으로 가득했다.
군대는 이미 준비가 끝났다.
혹시 모를 이무기의 남하를 대비해 만든 척살대 역시 완성된 상태다.
미국을 포함한 동맹국들과의 조율도 끝마쳤다.
모든 준비를 마친 대한민국 정부가 북진을 결정했다.
* * *
드르르륵!
탱크와 장갑차를 위시한 육군 병력이 휴전선을 넘었다.
하늘에서는 전투기들이 북한 영공에 진입했다.
전함들은 해안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했다.
몬스터와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플레이어들과 군이 힘을 합쳐 몬스터들을 쓸어 나갔다.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 안에 들어가는 군사 강국이다.
플레이어의 수준 역시 상당히 높다.
일반 등급과 희귀 등급은 물론 영웅 등급 몬스터들까지 무차별하게 쓸려 나갔다.
대한민국의 군대는 빠른 속도로 북한의 영토를 수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대열에 현성도 끼어 있었다.
‘순조롭네.’
현성을 죽음의 위기에 몰아넣었던 드레이크가 군대의 폭격과 랭커들의 협공에 너무도 허무하게 죽어 나갔다.
현성은 후방에서 원거리 스킬을 사용하며 전투를 지원했다.
단순히 원거리 지원을 하는 것뿐인데도 포인트가 쏠쏠하게 들어왔다.
중, 저레벨 몬스터의 경우는 수가 엄청나게 많았고, 고레벨 몬스터의 경우는 마리당 주는 포인트가 많아서였다.
사실 이는 현성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20레벨의 법칙에 걸려 제대로 경험치를 정산받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현성은 편하게 꿀을 빨았다.
군대와 고레벨 플레이어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편안하게 사냥할 수 있는 기회는 결코 흔하지 않았다.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대량 구매가 끝나기는 했지만 지금도 지속적으로 물품들이 팔려 나가고 있었다.
아공간에 빵빵하게 재고를 쌓아 놓기는 했지만 몬스터 토벌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현성의 바람 때문이었을까?
플레이어와 군은 무척 빠른 속도로 북한의 영토를 수복해 나갔다.
불과 일주일도 걸리지 않아 압록강에 도달한 것이다.
중국은 한국군의 북진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지만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명분으로도 밀렸고 현실적으로도 북한 지역을 점령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국의 사정이 안정되고 나면 무슨 헛소리를 할지 모른다.
이미 동북공정을 포함한 온갖 개수작을 부리며 한반도에 대한 욕심을 드러낸 전적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중국이 더 이상 커지는 것을 좋아하는 나라는 중국밖에 없었다.
국제사회는 한국의 북한 지역 점령을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
* * *
“빌어먹을 빵즈 놈들!”
“당장 군을 동원해 쓸어버려야 합니다.”
“중국 인민이 된 조선족들의 땅을 왜 한국 놈들에게 빼앗겨야 합니까?”
중국의 당 수뇌부들이 강한 분노를 토해 냈다.
“하지만 당장은 어렵습니다. 일단 내부 안정부터 도모해야 합니다.”
중국은 다민족 국가다.
하지만 미국과 같이 자발적으로 여러 민족들이 모여 하나의 나라를 이룬 것과는 경우가 다르다.
중국에 속하기를 거부하고 독립된 국가로 거듭나고 싶어 하는 민족들을 하나 된 중국이라는 미명하에 강제적으로 억압하고 있을 뿐이다.
그 때문에 대격변이 발생하기 전에도 많은 문제가 일어났다.
대격변 후에는 중국이라는 나라가 여러 조각으로 찢겨질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문제를 수습하고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한데 이번에는 또다시 2차 대격변이라는 고난이 찾아왔다.
일단 국내의 문제를 수습해야 한다.
그래야 외부로 시선을 돌릴 수 있다.
“이무기는 무조건 자체적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당연합니다. 대중화인민공화국이 몬스터 한 마리를 처리하는 데 타국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건 역사에 길이 남을 대망신입니다.”
“베이징의 랭커들을 동원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건 조금 성급한 결정 아니오? 베이징에서 이무기 같은 전설 등급 몬스터가 나타나면 큰일 아니오?”
“하지만 지방정부 랭커들로 이무기를 상대하는 건 힘들지 않습니까?”
“힘들다니요?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라 각 지방정부의 최상위 랭커들을 모두 끌어모은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중국의 당 수뇌부들이 갑론을박을 벌였다.
그 시각…….
휴식을 끝마친 이무기가 다시금 활동을 시작했다.
* * *
꽈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중국군이 이무기의 진격을 막기 위해 보유하고 있는 모든 현대 무기들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산이 가루로 변할 정도의 포격을 퍼부었지만 이무기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했다.
한 번의 경험을 통해 이무기가 포탄의 위력을 알아차리고 방어 태세를 취한 것이다.
칠흑빛 뇌전이 비처럼 쏟아지며 포탄들을 허공에서 폭파시켰다.
뇌전의 비를 피한 포탄들은 태풍이 휘감아 이동 경로를 변경해 버렸다.
중국군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나마 남은 수는 미리 땅속에 숨겨 놓았던 대몬스터 지뢰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다.
파지지지직!
칠흑빛 뇌전이 지상을 강타했고 대몬스터 지뢰는 이무기가 오기도 전에 알아서 폭파되어 버렸다.
화약 냄새를 맡은 건지 탐지 스킬을 사용한 건지 대몬스터 지뢰의 위치를 기가 막히게 파악했다.
이제 믿을 건 중국의 지방 랭커들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