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2차 대격변 (25/225)

┃2차 대격변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한 현성이 다시금 던전으로 향했다.

그 후 특별한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날려 먹은 희귀 방패 값을 보상해야 했지만 3개의 칭호와 번개의 숨결을 얻은 것에 비하면 소소한 손해에 불과했다.

현성은 낮에는 사냥을 하고 밤에는 비상 대기조 근무를 서며 돈과 포인트를 모았다.

비상 대기조원들과의 친분도 더 쌓였다.

현성이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 무렵.

각 차원의 VVIP들 사이에서 묘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거 아무리 봐도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게시자 - 맥커바이스

게임기를 정말 사랑하는 플레이어입니다.

한데 최근 들어 최현성이라는 플레이어가 너무 과할 정도로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캠핑용 대용량 배터리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하나에 3천만 포인트입니다.

3천만 포인트짜리를 구매하면 얼마나 쓰는 줄 아십니까?

기껏해야 이삼일 쓰면 오래 쓰는 겁니다.

캠핑용 대용량 배터리 안에 들어 있는 에너지를 측정해 보니 하급 마석 하나만도 못한 분량이 들어 있더군요.

마석을 게임기에 쓰이는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방법만 알면 직접 제작해서 쓰고 싶은데, 그걸 모르니 울며 겨자 먹기로 대량 구매해서 사용할 수밖에 없네요.

아마 이거 원가는 하급 마석 가격도 안 나갈 겁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벌써 캠핑용 대용량 배터리 구입하는 데 수십억 포인트는 사용한 것 같습니다.

수십억 포인트가 누구 집 애 이름입니까?

수십 년 치 수명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겁니다.

문제는 앞으로 수십억 포인트가 아니라 수백억 포인트는 쓸 것 같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수천억 포인트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불매운동을 통한 가격 하락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내일부터 한 달간 캠핑용 대용량 배터리 불매운동을 벌일 생각입니다.

저의 뜻에 동참하실 분들은 댓글을 달아 주세요.

↳ 테루 - 거지는 가라.

↳ 바르투크 - 그렇게 이야기할 상황은 아니라고 봅니다. 정당한 가치를 지닌 물건이라면 수천억 포인트가 아니라 수조 포인트도 아깝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건 수백 포인트짜리를 수천만 포인트짜리로 부풀려 팔아먹는 수법입니다. 판매자의 버릇을 고쳐 놔야 합니다. 불매운동 동참하겠습니다.

↳ 진소평 - 바르투크 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저도 불매운동에 동참하겠습니다.

↳ 비파르 - 동참하겠습니다.

↳ 브로우 - 게임기의 노예가 된 개돼지들이 잘도 하겠다.

↳ 다샤트 - 너 같은 놈들 때문에 개돼지가 되는 거야. 난 동참한다.

↳장무국 - 동참하겠습니다.

↳브락스 - 동참하겠습니다.

……후략……

순식간에 댓글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무시하는 플레이어도 있었고, 거지라고 비아냥거리는 댓글도 있었지만, 의외로 많은 플레이어들이 불매운동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만큼 현성의 도를 넘어선 폭리에 분노를 표하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었다.

또 사실 나름 꿍꿍이가 있기도 했다.

불매운동에 동참의 뜻을 표한 플레이어들은 대부분이 대량 구매를 통해 한 달 이상은 버틸 캠핑용 대용량 배터리를 쟁여 놓은 상태였다.

어차피 떨어지면 구매할 생각이긴 했다.

하지만 한 달 뒤에 사서 가격이 내려간다면?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다.

많은 이들이 불매운동에 동참했다.

실제 현성의 포인트 수급에 문제가 생길 정도로 말이다.

* * *

불매운동이 시작된 다음 날.

현성은 목표로 했던 포인트를 모아 놓고 스킬 구입을 고민하고 있었다.

‘어떤 걸 구입하지?’

현성이 고민하고 있는 스킬은 2개였다.

첫 번째 스킬은 감지 스킬이었다.

야성의 본능 - 영웅 등급

-패시브 스킬북

-생명체나 무생물이 내뿜는 마력을 감지합니다.

-마력 감지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주변 상황을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야성의 본능에 따라 위협을 감지합니다.

-살기에 민감해집니다.

-판매자 : 스트프

-판매가 : 29,999,999,999포인트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스킬이다.

하지만 상당히 중요했다.

바로 마력 감지.

모든 스킬은 마력을 통해 발동된다.

즉, 야성의 본능 스킬을 익히면 상대방의 스킬 발동 타이밍을 읽을 수 있게 된다.

또 갑작스러운 기습을 받을 확률이 압도적으로 줄어든다.

야성의 본능 스킬은 무려 생존 본능보다 100억 포인트나 비싸다.

분명 그 정도 값어치를 한다는 뜻이다.

두 번째 스킬은 전투 스킬이었다.

흡혈공 - 영웅 등급

-패시브 스킬북

-마력의 성질을 암흑 속성으로 변화시킵니다.

-공격 계열 스킬의 위력이 상승합니다.

-치유 계열 스킬의 효력이 떨어집니다.

-스킬이나 타격으로 적의 피를 흡수해 체력과 마력을 회복합니다.

-체력과 마력 회복 속도가 증가합니다.

-판매자 : 백화

-판매가 : 29,999,999,999포인트

공격 계열 스킬 위력 증가는 말할 것도 없고 전투 중 체력과 마력을 회복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자체적인 체력과 마력 회복 속도도 증가한다.

몬스터와의 전투든 인간과의 전투든 상당히 큰 도움이 될 수밖에 없는 스킬이었다.

단점이 하나 있다면 바로 치유 계열 스킬의 효력 저하.

자가 회복 계열이 아닌 걸 보면 불사의 서에 악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힐과 같은 치유 계열 스킬의 효과가 떨어진다.

‘어떤 걸 살까?’

야성의 본능과 흡혈공 모두 좋은 스킬이다.

마음 같아서는 둘 모두를 구매하고 싶었다.

하지만 포인트가 부족한 게 문제였다.

결국 둘 다 구매할 생각이기는 했지만 우선 하나를 먼저 구매하고 다른 하나는 나중에 구매해야 한다.

‘내일까지 결정하자.’

현성이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TV를 틀었다.

오늘은 휴식일이었다.

하루 종일 쉬는 건 아니고 비상 대기조 근무를 하루 쉬고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는 날이었다.

비상 대기조 근무는 출동이 없는 경우가 더 많지만 드물게 출동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런 상황이 되면 수면을 제대로 취하기가 힘들었다.

그렇기에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근무 없이 편안하게 쉬는 날로 정해 놨다.

한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TV에서는 플레이어들의 사랑과 우정을 다룬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대격변 20주년 기념작으로 막대한 예산이 투자되어 만든 한중일 합작 드라마였다.

그런 만큼 액션도 화려했고 볼거리도 많았다.

‘그때 고생 좀 했지.’

대격변 20주년이 되는 날.

전 세계가 바짝 긴장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대격변 10주년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히려 우려의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대격변 10주년 후로 던전이 늘어나지 않았다.

20주년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으니 혹시 던전이 서서히 사라지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나온 것이다.

일부 기자들은 던전이 줄어들고 있다는 허위성 기사를 올려 플레이어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결론은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것이었다.

현상 유지.

모두가 가장 바라는 결과였다.

‘뭘 구입하지?’

드라마를 보는 와중에도 현성의 머릿속에서는 야성의 본능과 흡혈공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우르르릉!

그때 커다란 진동과 함께 현성이 있던 모텔 건물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

꽈아아아앙!

“꺄아아아악!”

그게 끝이 아니었다.

커다란 폭음과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뭐야?”

현성은 화들짝 놀랐다.

‘지진이라도 난 건가?’

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사태를 목격할 수 있었다.

건물 한 채가 완전히 반파되어 있었다.

건물이 반파된 장소에는 커다란 차원 게이트가 열려 있었다.

크아아아앙!

열린 차원 게이트에서 커다란 포효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오크 무리가 차원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와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와장창!

현성이 모텔 창문을 깨고 그대로 몸을 날렸다.

바닥으로 낙하하며 흡혈검을 뽑아 든 현성이 오크 무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서걱!

현성의 검이 번개같이 움직이며 오크들을 베어 냈다.

‘파이어 스톰.’

오크들이 뭉쳐 있는 곳에는 스킬도 사용했다.

그 덕에 차원 게이트를 빠져나오던 오크들을 한 번에 쓸어버릴 수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이미 차원 게이트를 빠져나와 흩어진 오크들의 숫자가 수천을 넘어간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이랑 너무 섞여 있어.’

파이어 스톰이나 파이어 월 같은 범위 스킬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현성은 일단 차원 게이트 앞에 파이어 월 스킬을 사용했다.

마력이 지속적으로 소모되기는 하겠지만 지금은 더운밥 찬밥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오크들의 추가 유입을 막는 게 중요했다.

현성은 그 후 흡혈검을 휘두르며 단일 스킬을 사용해 오크들을 처리했다.

거리로 뛰쳐나온 것은 현성만이 아니었다.

현성이 머무는 곳은 붉은 독거미 던전 근처였다.

파티원을 구하던 플레이어들이 무기를 뽑아 들고 오크들과의 전투를 시작했다.

던전 안에서 사냥 중이던 플레이어들 역시 소식을 듣고 던전 밖으로 뛰쳐나와 전투에 합류했다.

* * *

위이이이잉!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도시 전체를 점령했다.

갑작스럽게 생겨난 차원 게이트 때문이었다.

차원 게이트는 20년 전 처음 발생한 이후 10년간 지속적으로 열렸다.

하지만 정확히 10년간 새로운 차원 게이트가 열린 적이 없었다.

한데 그 규칙이 깨진 것이다.

한국 플레이어 협회에는 비상이 걸렸다.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린 차원 게이트 때문에 완전히 업무가 마비되었다.

“계엄령이 선포되었습니다!”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플레이어 비상 동원령을 선포한다!”

한국 플레이어 협회장은 플레이어들을 강제로 소집했다.

이건 국가 비상사태였다.

문제는 이게 한국에서만 일어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북미, 남미, 유럽, 러시아, 중국, 일본, 동남아 등.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새로운 차원 게이트가 열렸다.

2차 대격변의 시작이었다.

* * *

사이렌 소리와 함께 전투가 더 치열해졌다.

현성은 플레이어들과 힘을 합쳐 오크들을 처리하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그러던 와중에 비상 호출기와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현성이 이어폰을 꽂고 전화를 받았다.

“최현성입니다.”

-저 신윤아예요! 현성 씨, 지금 어디시죠?

“신촌역 근처에 있는 붉은 독거미 던전 근처입니다. 갑자기 차원 게이트가 열리고 오크들이 쏟아져 나와 교전 중입니다.”

-그곳 상황은 어떻죠? 오크들의 레벨은요?

“다행히 저레벨 같습니다. 붉은 독거미 던전에서 대기하던 플레이어들이 합세해 현재 정리 중입니다.”

-플레이어 비상 동원령이 선포되었습니다. 현성 씨를 그곳에 있는 플레이어들의 임시 지휘관으로 임명할게요. 현장이 정리되는 즉시 다른 플레이어들을 인솔해 남영역으로 이동해 주세요. 현재 그곳에서도 차원 게이트가 열렸는데 인력이 부족합니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현성 씨 가족분들은 모두 무사하세요. 다른 주민분들과 함께 방공호로 몸을 피하셨다는 보고를 받았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최대한 빨리 남영역으로 이동해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현성은 대답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가족들이 무사하다니 일단 안심이었다.

‘역시 여기서만 나타난 게 아니었어.’

오히려 이곳에 나타난 던전은 제압이 쉬운 편이었다.

50레벨 이하로 추정되는 오크 무리가 나타났을 뿐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다른 곳은 상황이 다를 것이다.

200레벨이나 300레벨의 몬스터가 등장하는 차원 게이트가 열렸다면?

그 자체로 재앙이나 다름이 없었다.

‘고민할 시간이 없어.’

흡혈공을 구입해야 했다.

이 전투는 상당한 장기전이 될 것이다.

그럼 무엇보다도 체력과 마력을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흡혈검의 도움으로 체력과 마력을 회복하고 있기는 하지만 회복되는 양보다 소모되는 양이 더 많았다.

-패시브 스킬북 흡혈공 - 영웅 등급을 구매하시겠습니까? 한번 구매한 물품은 환불이나 교환이 불가능합니다.

-[예] [아니오]

예를 눌렀다.

-패시브 스킬북 흡혈공 - 영웅 등급을 습득하시겠습니까?

-[예] [아니오]

당연히 예였다.

흡혈공을 익히자마자 공격 스킬의 위력이 강해진 것이 체감되었다.

그와 동시에 오크들을 베어 낼 때마다 그들이 흘린 피가 체력과 마력이 되어 현성에게 돌아왔다.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움직이자.’

현성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그 덕분이었을까?

예상보다 빠르게 오크 무리를 정리할 수 있었다.

현성이 차원 게이트 입구에 깔아 놓은 파이어 월이 상당히 큰 효과를 발휘했다.

차원 게이트를 빠져나오던 오크들이 그대로 타 죽어 버린 것이다.

“플레이어 협회에서 나왔습니다! 플레이어분들은 비상 동원령에 따라 집결해 주십시오!”

현성이 커다란 목소리로 플레이어들을 소집했다.

하지만 현성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플레이어들은 몇 되지 않았다.

대부분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고 몇몇은 현장을 이탈하고 있었다.

아마 가족들에게 향하는 것이리라.

현성은 일단 소집에 응해 준 플레이어들을 나눴다.

일부는 차원 게이트 앞을 지켰고, 일부는 현성을 따라 남영역으로 이동했다.

잠시도 쉴 새가 없는 전투의 연속이었다.

* * *

남영역.

크르르르!

인간과 도마뱀을 반반 섞어 놓은 것 같은 백색 비늘의 리자드맨들이 도심을 누비며 사람들을 사냥했다.

플레이어들이 사력을 다해 저항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남영역 인근에는 던전이 없었다.

당연히 플레이어도 많을 수가 없었다.

플레이어들은 사람들을 지키며 사력을 다해 싸웠다.

하지만 점점 열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실력은 플레이어들의 우위였다.

문제는 리자드맨들의 숫자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콰직!

플레이어 하나가 커다란 도끼로 리자드맨의 머리통을 부숴 버렸다.

하지만 리자드맨들은 끝도 없이 몰려들었다.

1마리를 처치한 건 끝이 아닌 시작에 불과했다.

점점 체력이 고갈되고 있었다.

후방에서 지원해 주던 마법사 계열 플레이어와 힐러 계열 플레이어들도 서서히 마력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도대체 지원은 언제 오는 거야?”

선두에 선 전사가 악을 쓰며 도끼와 방패를 휘둘렀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더 이상 사람들을 지킬 수가 없다.

아니, 사람들의 안전은 고사하고 자신들의 목숨도 간당간당했다.

레벨의 우위를 바탕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끝도 없이 밀려오는 인해전술에는 당해 낼 도리가 없었다.

화르르륵!

그때 거대한 화염의 폭풍이 한자리에 몰려 있던 리자드맨들을 강타했다.

꽈아아아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리자드맨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화르르륵!

그 후에는 차원 게이트 근처에 거대한 화염의 벽이 생겨났다.

“지원군이 왔다!”

불만을 토로하던 전사가 환호성을 터트렸다.

다른 플레이어들도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지원 온 병력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 * *

‘심각하네.’

남영역의 상황은 신촌역보다 더 심각했다.

근처에 던전이 자리 잡고 있어 빠른 해결이 가능했던 신촌역과 달리 남영역은 완전 난장판이었다.

파이어 월로 차원 게이트 입구를 막아 놨지만 이미 풀려난 녀석들이 너무 많았다.

‘마력 관리를 잘해야 해.’

파이어 월은 희귀 등급 스킬이기는 하지만 단발성이 아닌 지속성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마력을 공급해 줘야 했다.

당연히 가만히 있어도 마력이 펑펑 빠져나간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흡혈공 덕분에 파이어 월에 피해를 입은 리자드맨들의 피가 현성의 체력과 마력을 회복시켜 준다는 점이다.

타악!

현성이 흡혈검을 뽑아 들고 리자드맨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신촌역에서 온 지원군은 대부분 100레벨을 넘어서 2차 전직을 마친 플레이어들었다.

붉은 독거미 던전이 100레벨대 던전이기에 일어난 행운이었다.

현성은 파이어 월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마력만 남겨 놓고 전투에 임했다.

마력이 떨어지면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흡혈검을 휘둘러 리자드맨들을 사냥했고, 마력이 충전되면 스킬을 사용했다.

캬아아아악!

그때 커다란 포효와 함께 차가운 냉기가 차원 게이트 입구를 막고 있던 파이어 월을 꺼트려 버렸다.

‘뭐야?’

희귀 등급 스킬이긴 하지만 마력 스텟이 300이 넘는 현성이 사용한 스킬이다.

지속적으로 마력을 공급해 주기도 했다.

그런데 단번에 파이어 월이 소멸해 버렸다.

차원 게이트로 고개를 돌린 현성의 눈에 다른 리자드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리자드맨의 모습이 들어왔다.

단순히 덩치만 큰 게 아니었다.

단출한 무장을 갖춘 일반 리자드맨에 비해 새롭게 등장한 리자드맨은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전신을 뒤덮은 갑주와 화려하게 장식된 투구.

거기다 딱 봐도 일반 등급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 창까지.

‘빨리 처리해야 해.’

시간을 오래 끌면 더 많은 리자드맨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현성이 전력을 다해 달려갔다.

그와 함께 선공으로 관통력이 뛰어난 파이어 스피어를 날렸다.

꽈아앙!

리자드맨이 방패를 들어 파이어 스피어를 막아 버렸다.

‘리자드맨 킹 같은 건가?’

현성이 얼굴이 찌푸리며 다가가 흡혈검을 휘둘렀다.

파강!

리자드맨의 창과 현성의 흡혈검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렇게 강한 놈은 아니네.’

파이어 스피어를 막아 냈기에 한 수 재간이 있는 놈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다른 리자드맨들보다 레벨이 높은 편이기는 했지만 현성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서걱!

위풍당당하게 등장했던 리자드맨의 목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현성이 다시금 파이어 월을 시전하려는 순간 차원 게이트에서 방금 쓰러트린 놈과 동일한 무장을 갖춘 리자드맨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킹이 아니라 전사였냐?’

설마 이렇게 무더기로 나올 줄은 몰랐다.

‘파이어 스톰.’

현성이 광역 스킬을 사용했다.

꽈아아앙!

커다란 폭염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부상을 입은 리자드맨 전사는 있어도 죽은 놈은 없었다.

리자드맨 전사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차가운 냉기 때문이었다.

‘화염 스킬 저항력이 높아.’

캬아아아악!

특유의 포효 소리와 함께 리자드맨 전사들이 일제히 현성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서걱!

화염 스킬 저항력이 꽤 좋은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현성이 까다로워할 레벨이 아니었다.

거기다 물리 공격 저항력은 그다지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

현성은 스킬이 아닌 흡혈검을 휘둘러 새롭게 등장한 리자드맨 전사들을 정리했다.

그때 차가운 냉기의 창이 현성을 향해 날아들었다.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리자드맨 전사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버려 가면서까지 현성을 둘러싸며 경로를 차단했다.

꽈앙!

현성이 방패를 들어 공격을 막았다.

방패가 박살 나는 불상사는 없었다.

문제가 있었다면 현성의 왼팔이 빠르게 얼어붙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현성은 마력을 흘려 보내 왼팔에 들러붙은 냉기를 제거했다.

‘뭐야?’

현성이 냉기의 창이 날아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이마에 커다란 뿔이 달린 리자드맨 1마리가 서 있었다.

덩치도 다른 녀석들과 비교해 2배 이상 컸다.

‘저놈이 진짜 리자드맨 킹인가 보네.’

좌악!

현성이 앞을 가로막는 리자드맨 전사들을 베어 버리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휘리리릭!

허공에 냉기의 창이 생겨나 연속적으로 현성을 향해 날아왔다.

현성의 왼팔을 얼려 버렸던 장거리 스킬이었다.

‘파이어 실드.’

현성은 방어 스킬로 응전했다.

꽈앙! 꽈앙!

화염 계열 스킬과 냉기 계열 스킬은 서로가 서로에게 상극이다.

당연히 위력이 축소되었다.

현성은 파이어 실드에 계속해서 마력을 주입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캬아아아아악!

현성이 가까이 다가오자 놈이 입을 쩍 하고 벌렸다.

사아아아악!

그와 함께 강력한 한기를 머금은 냉기 브레스가 작렬했다.

‘지가 드레이크야? 왜 브레스를 쏴?’

현성이 파이어 실드에 더욱더 마력을 집중했다.

하지만 리자드맨 킹의 냉기 브레스를 막아 낼 수는 없었다.

차가운 냉기가 현성의 몸에 작렬했다.

몸이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마력을 아끼고 있을 때가 아니야.’

현성이 액티브 스킬 번개의 숨결을 사용했다.

파지지지직!

현성의 몸에서 푸른 스파크가 피어올랐다.

얼어붙어 가던 몸이 순식간에 자유를 되찾았다.

현성은 냉기 브레스를 정면으로 뚫고 리자드맨 킹을 향해 달려들었다.

파강!

현성의 흡혈검과 리자드맨 킹의 창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현성과 리자드맨 킹이 전투를 시작하자 주변에 있던 리자드맨 전사들이 왕을 돕기 위해 달려들었다.

200레벨은 넘어 보이는 리자드맨 킹.

150레벨대로 보이는 리자드맨 전사.

파강! 파강!

사방에서 적들을 상대해야 하는 현성으로서는 죽을 노릇이었다.

‘버텨야 해. 내가 막지 않으면 끝장이야.’

현재 이곳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100레벨 초반이 대다수였다.

리자드맨 전사들이 왕을 돕기 위해 자신에게 달려든 게 다행이었다.

리자드맨 킹과 전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날뛰기 시작한다면?

대학살극이 벌어졌을 것이다.

일반 리자드맨이라면 몰라도 리자드맨 킹이나 리자드맨 전사는 현재 전장에 있는 플레이어들이 감당할 레벨이 아니었다.

당연히 순식간에 몰살당할 수밖에 없었다.

플레이어라는 방패가 사라지면 그다음은 일반인들 차례였다.

‘차근차근 정리하자.’

현성은 리자드맨 전사들을 우선적으로 공격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리자드맨 킹을 끝으로 더 이상 차원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가 없다는 점이었다.

꽈아앙! 꽈아앙!

뇌전과 냉기가 충돌하며 거친 충격파를 만들어 냈다.

리자드맨 전사들은 모두 사체가 되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리자드맨 킹이었다.

치열한 혈전이었다.

현성의 몸과 리자드맨 킹의 몸은 마치 피로 목욕을 한 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생존 본능만 발동하면 단숨에 끝내 버릴 수 있는데.’

하지만 생존 본능 스킬은 발동하지 않았다.

현성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름 위기처럼 보였지만 까다로운 상대였을 뿐 생명의 위기를 느낄 정도의 상대는 아니었다.

적들의 숫자가 많다고는 해도 장기전에 있어서는 현성이 유리했다.

현성은 흡혈검과 흡혈공으로 리자드맨 킹과 전사들의 피를 흡수하며 지속적으로 체력과 마력을 회복했다.

하지만 리자드맨 킹과 전사들은 지칠 수밖에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현성의 몸에 난 상처들은 생기기가 무섭게 아물었다.

그에 반해 리자드맨 킹과 전사들은 부상을 회복하지도 못하고 점점 지쳐 버렸다.

그 결과가 바로 리자드맨 전사들의 전멸이었다.

리자드맨 킹도 거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체력이 떨어졌는지 몸놀림이 둔해졌고 마력이 고갈되기 시작했는지 뿜어내는 냉기가 점점 희미해졌다.

‘빨리 끝내자.’

현성이 맹공을 이어 나가자 리자드맨 킹의 몸에 하나둘 상처가 늘어 갔다.

서걱!

치열한 접전이 오가던 와중에 현성의 검이 창을 들고 있던 리자드맨 킹의 오른팔을 날려 버렸다.

사실 리자드맨 전사들이 전멸했을 때 승부는 이미 갈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캬아아아아악!

리자드맨 킹이 마지막 발악을 했다.

브레스를 쏘려는지 강대한 마력이 입 주변에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현성이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봐 줄 리 만무했다.

좌악!

흡혈검이 리자드맨 킹의 목을 깔끔하게 베어 버렸다.

털썩!

브레스를 준비하던 리자드맨 킹의 사체가 힘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헉! 헉! 헉!”

현성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실 현성도 꽤 지쳐 있었다.

오크 무리를 막은 뒤 쉬지도 못하고 신촌역에서 남영역까지 달려왔다.

그 뒤에는 리자드맨들과 드잡이질까지 했다.

라자드맨 킹과 전사들을 상대하면서는 번개의 숨결과 불사의 서를 동시에 사용했다.

번개의 숨결은 스킬을 유지하는 데 엄청난 마력을 잡아먹었다.

불사의 서는 상처를 치료하며 지속적으로 체력을 갉아먹었다.

아무리 흡혈검과 흡혈공으로 체력과 마력을 수급한다고 해도 소모한 양이 더 많을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나쁘지 않네.’

전황은 플레이어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현성이 리자드맨 킹과 전사들을 홀로 상대한 덕분이었다.

사아아악!

리자드맨 킹의 잔존 마력이 하나로 뭉쳐지기 시작했다.

‘좋은 것 좀 나와라.’

리자드맨 전사들은 전원 마석을 뱉어 냈다.

리자드맨 킹까지 마석을 뱉어 내면 완전 꽝이었다.

툭!

다행히 마석이 아닌 스킬북이었다.

화이트 리자드맨 킹의 냉기 브레스 - 희귀 등급

-액티브 스킬북

-마력을 소모해 화이트 리자드맨 킹의 냉기 브레스를 날린다.

‘희귀 등급이네.’

-액티브 스킬북 화이트 리자드맨 킹의 냉기 브레스 - 희귀 등급을 습득하시겠습니까?

-[예] [아니오]

‘익히자.’

현성이 예를 선택했다.

그 후 아공간을 열어 리자드맨 전사들이 토해 낸 마석을 쓸어 담았다.

아공간은 확실히 투자할 가치가 있는 스킬이었다.

파이어 월로 쓸어버린 오크들과 리자드맨들이 토해 낸 마석과 아이템을 말끔하게 쓸어 담은 것이 바로 아공간이었다.

아공간은 액티브 스킬이었지만 마력 소모가 없었다.

거기다 똘똘하게 현성이 마석의 존재를 인식만 하면 알아서 마석을 먹어 치워 주니 지금처럼 급박한 상황에서는 이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아마 아공간이 없었다면 오크와 리자드맨을 사냥하면 나온 마석과 아이템은 모두 포기했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의 목숨이 경각에 처한 상황에서 한가하게 마석이나 줍고 있을 시간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슬슬 움직이자.’

어느 정도 체력과 마력을 회복한 현성이 몸을 일으켰다.

타앙! 타다다다당!

그때 한 발의 총성을 시작으로 육공 트럭에 탑승한 군인들이 리자드맨들을 향해 무자비한 총알 세례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군대가 도착한 것이다.

던전 내부에서는 현대 화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던전 밖에서는 아니었다.

강력한 현대 화기를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현성은 군대를 도와 남은 리자드맨들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 군인들의 화력이 무시무시해 보인다.

하지만 사실 개인 화기인 소총으로는 리자드맨들에게 치명상을 입히기가 쉽지 않았다.

몬스터인 리자드맨들은 인간과 달리 총알 한두 발 맞았다고 전투 불능 상태가 되지 않는다.

소총으로 리자드맨들의 숨통을 끊기 위해서는 화망을 구성해 집중사격을 가해야 했다.

현성은 플레이어들을 소집해 일부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일반인들을 지키게 하고 일부는 군인들의 호위를 맡겼다.

총소리를 듣고 미친 듯이 달려드는 리자드맨들이 화망을 뚫고 군인들에게 접근하면 대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플레이어와 군인 들은 사력을 다해 함께 싸웠다.

그리고 그 결과, 남영역에서 열린 차원 게이트를 점령할 수 있었다.

* * *

두두두두!

탱크와 장갑차가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지상에서는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실탄을 쏘며 몬스터와 전투를 벌였다.

하늘에서는 전투기들이 날아다니며 비행형 몬스터와 혈전을 벌였다.

평화롭던 도시가 전쟁터로 변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건물이 파괴당했다.

하지만 인간의 군대는 강했다.

빠른 속도로 몬스터들을 제압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차원 게이트 앞에 바리케이드가 만들어졌고, 차원 게이트를 빠져나온 몬스터들은 모습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현대 화기의 화망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빠른 속도로 2차 대격변을 방어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한 번의 사례가 있었기에 빠른 속도로 진압이 가능했다.

하지만 피해는 심각했다.

엄청난 사상자가 나왔고 몬스터와의 전투는 현재 진행형이었다.

한국은 비교적 적은 피해로 차원 게이트들을 봉쇄해 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전 국토에 군이 주둔해 있다는 점이 상당히 큰 도움이 되었다.

비행기나 헬기를 통해 플레이어들을 이동시키기도 수월했다.

국토가 넓어 지원을 가려면 비행기나 헬기를 타고 몇 시간씩 가야 하는 나라들과 달리 짧으면 30분 길어야 1시간 안에 이동이 가능한 한국은 기동성 면에서 월등히 유리했다.

하지만 상황이 완전히 종료된 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새로운 던전이 추가로 열릴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 * *

‘쉴 틈이 없네.’

현성을 비롯한 플레이어들은 전력을 다해 몬스터들과 전투를 치렀다.

몸이 10개라도 모자랄 지경.

하지만 상황이 조금씩 진정됨에 따라 점점 여유가 생기고 있었다.

‘추가로 던전만 더 열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그럴 확률이 상당히 낮았다.

현재 유일하게 좋은 소식은 2차 대격변의 시작과 함께 열린 던전의 대부분이 중저 레벨의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는 차원 게이트라는 점이었다.

‘물건 공급도 차질이 심해.’

갑자기 열린 차원 게이트 때문에 전 세계가 난리가 났다.

캠핑용 대용량 배터리와 전자 제품을 구매하러 갈 시간도 없었지만, 아마 갔다고 해도 정상적으로 영업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대부분의 국민들은 1차 대격변 이후 건설된 방공호에 몸을 숨기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아마 당분간 캠핑용 대용량 배터리를 포함한 전자 제품을 수급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소량밖에 안 팔렸네.’

평소보다 판매량이 많이 떨어졌다.

‘벌써 사재기가 끝났나?’

건전지 때도 그랬지만 캠핑용 대용량 배터리의 경우도 한 번에 대량 구매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 시간이 흐르면 정상적인 구매 패턴으로 돌아올 것이다.

‘평소 같으면 그대로 뒀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

언제 상황이 종결되고 물품이 정상 생산될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물량 조절을 하자.’

현성의 아공간에 쌓여 있는 물품들이 모두 소모되면 더 이상 판매창에 상품을 등록할 수가 없다.

당분간은 한정된 물량만을 가지고 장사를 해야 하는 것이다.

‘가격을 올리자.’

생산량이 줄어들면 가격이 올라가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현성은 캠핑용 대용량 배터리를 비롯한 전자 제품의 가격을 상승시킨 후 상태창을 닫아 버렸다.

* * *

게시판이 뒤집어졌다.

불매운동 5일째.

가격이 내려가기는커녕 반대로 올라가 버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게시자 - 비파르

가격이 내려가기는커녕 반대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이거 심각한 문제 아닌가요?

설마 올린 가격 그대로 고정되는 건 아니겠죠?

↳ 테루 - 큭큭큭, 내 그럴 줄 알았다. 원래 이 바닥은 물건 가진 놈이 왕이고 그 물건이 꼭 필요한 놈은 노예야. 어디서 노예가 왕한테 반기를 들어?

↳ 장무국 - 동참도 안 한 놈은 간섭하지 마라.

↳ 브락스 - 아직 결론을 내리기는 성급하다고 봅니다. 차분하게 기다려 보죠. 지금은 쌓아 놓은 포인트의 여유가 있어서 저러겠지만 곧 다급해질 겁니다.

↳ 다샤트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번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합니다. 판매자가 승리하면 더한 갑질을 부릴 겁니다.

↳ 진소평 - 동의합니다. 시작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전쟁을 선포한 이상 끝까지 싸워 승리를 쟁취해야 합니다.

↳ 비파르 - 제가 마음이 약해져서 괜한 글을 올린 모양입니다. 맞습니다. 전쟁을 시작했으면 끝까지 싸워서 승리해야죠.

불매운동에 동참했던 구매자들은 잠시 흔들렸지만 굳건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고 이 주일이 지나도 물건의 가격이 내려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이기는 하지만 점점 더 가격이 올라가고 있었다.

당연히 불매운동에 동참했던 구매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미 게임기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무료한 삶을 달래 주는 소중한 친구이자 동반자가 바로 게임기다.

한데 그 게임기를 가동시켜 주는 캠핑용 대용량 배터리들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연히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불매운동에 동참하셨던 분들 진정하시기 바랍니다.

게시자 - 맥커바이스

일단 제가 주도한 불매운동에 모두 동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조하신 분들이 많겠지만 아마 판매자도 많이 초조해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흔들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분열되면 모든 게 끝입니다.

굳건하게 단결합니다.

그와 동시에 여러분께 한 가지 건의드리고 싶은 안건이 있습니다.

단순한 불매운동을 넘어 컴플레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격을 낮추라는 압박과 동시에 컴플레인을 통해 판매자를 압박하는 겁니다.

컴플레인에 동의하시는 분들은 댓글을 달아 주시기 바랍니다.

↳ 비파르 - 그런데 컴플레인 걸었다가 영업정지 당하면 어떻게 하죠? 그럼 그 기간 동안은 물품을 구매할 수가 없잖아요.

↳ 브락스 - 동의합니다. 저도 컴플레인은 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판매자분이 저번에 되팔렘에게 작업당하셔서 자칫 잘못하면 정말 3개월 영업정지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 다샤트 - 그럼 3개월 동안 물품 구입을 못 한다는 거잖아요. 그건 절대 안 됩니다.

↳ 장무국 - 동의합니다. 남은 배터리로 3주 버티기도 빠듯합니다. 그런데 3개월 영업정지라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 맥커바이스 – 여러분, 우리는 단결해야 합니다. 이렇게 분열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 비파르 - 우리는 가격을 떨어트리기 위해서 단결한 거지 올리기 위해서 단결한 게 아닙니다. 가만히 있었으면 3천만 포인트에 사서 쓸 걸 괜히 싸움 걸어서 가격이 올라간 거 아닙니까? 이게 다 맥커바이스 님 탓입니다.

↳ 진소평 - 맞습니다. 사실 3천만 포인트가 그렇게 비싼 가격은 아니죠. 지금 가격 보니 3천만 포인트가 합리적인 가격이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돕니다.

내분이 시작되었다.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던 불매운동 구매자들이 점점 올라가는 가격과 앞으로 3개월간 물품을 구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내부 분열을 시작한 것이다.

경제의 경 자도 모르는 것들이 벌인,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쟁.

게시자 - 테루

저도 최현성 판매자가 올린 캠핑용 대용량 배터리를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불매운동에 동참하지는 않았습니다.

한데 이번 불매운동으로 가격이 올라가서 저까지 피해를 보게 생겼네요.

이게 다 힘만 세면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설치는 바보들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사실 파는 사람이 여럿이면 모를까 한 차원에서만 나는 독점 물품에는 가격이 따로 없는 법입니다.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스텟 증가 비약이 처음 나왔을 때 거품이 정말 엄청났습니다.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었죠.

하지만 우리는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스텟 증가 비약을 판매하는 판매자가 늘어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현재의 시세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스텟 증가 비약이 한 차원에서만 생산되는 독점 물품이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우리는 아직도 바가지를 엄청나게 씌운 스텟 증가 비약을 비싼 포인트를 투자해 가며 구매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왜?

우리에게는 꼭 스텟 증가 비약이 필요하니까요.

이번 사태도 마찬가지입니다.

배터리가 필요하지 않은 분들에게는 가격이 얼마나 올라가든 상관없는 일입니다.

구매하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배터리가 꼭 필요한 분들은 가격이 얼마로 올라가든 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자신들에게 꼭 필요한 물품을 독점으로 판매하는 판매자에게 불매운동을 하는 건 바보짓입니다.

그 물품을 진짜 더 이상 구매할 생각이 없을 때라면 모를까요.

테루의 게시물이 올라옴과 동시에 불매운동을 하던 구매자들의 내분은 더욱 격렬해졌다.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아니다. 조금만 더 하면 이길 수 있다.

둘로 찢어진 불매운동 참여자들이 치열하게 대립했다.

그때 사고가 터졌다.

완판.

누군가가 현성이 고가에 올려놓은 캠핑용 대용량 배터리를 싹 쓸어 간 것이다.

문제는 판매되고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음에도 더 이상 새로운 캠핑용 대용량 배터리가 판매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난리가 났다.

처음 불매운동을 주도했던 맥커바이스는 죽일 놈이 되었고, 보유하고 있던 캠핑용 대용량 배터리의 수량이 줄어들수록 불매운동자들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한편 그 시각.

게스피트는 곁에 두둑하게 쌓여 있는 캠핑용 대용량 배터리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격이 조금 오르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인가.

올랐다고 해 봐야 고작 몇천만 포인트밖에 하지 않는 저렴한 물건일 뿐이다.

여마왕 게스피트는 그저 보유하고 있던 캠핑용 대용량 배터리가 고갈되었기에 새로 구매했을 뿐이다.

VVIP 게시판에서 벌어지는 불매운동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 * *

중급 정신력 스텟 증가 비약 - 영웅 등급

-정신력 스텟이 1 상승한다.

-정신력 스텟이 300이 넘는 플레이어에게는 효과가 없다.

-사용 방법 : 섭취

-판매자 : 리커머스

-판매가 : 39,999,999포인트

-중급 정신력 스텟 증가 비약 - 영웅 등급을 구매하시겠습니까? 한번 구매한 물품은 환불이나 교환이 불가능합니다.

-[예] [아니오]

‘예.’

-중급 정신력 스텟 증가 비약 - 영웅 등급을 구매하셨습니다.

‘깔끔하게 다 썼네.’

현성이 마지막으로 구매한 중급 정신력 스텟 증가 비약을 입에 넣었다.

남은 포인트는 고작 29억.

하지만 현성은 만족했다.

영웅 등급인 중급 스텟 증가 비약을 복용하느라 포인트를 쌓을 틈도 없이 소모해 야성의 본능 스킬 구입은 한참 뒤로 미뤄 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차 대격변이 일어난 상황에서는 영웅 등급 스킬을 하나 익히는 것보다 기본 스텟을 올리는 게 더 중요했다.

그런 이유로 포인트가 모일 때마다 야금야금 비약을 구매해서 먹었고, 드디어 중급 스텟 증가 비약을 모두 섭취할 수 있었다.

‘완전 배수로 오르네.’

최하급 스텟 증가 비약은 500만 포인트.

하급 스텟 증가 비약은 2배인 1,000만 포인트.

중급 스텟 증가 비약은 4배인 4,000만 포인트.

아직 구매 등급을 올리지 못해 전설 등급 스텟 증가 비약을 습득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런 추세대로라면 아마 전설 등급인 상급 스텟 증가 비약은 하나에 3억 포인트가 넘을지도 몰랐다.

‘그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 지금은 이 정도로도 충분해.’

현성은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순수한 스텟 총합이 어느새 2,000을 넘어섰다.

이 정도라면 소위 랭커라고 불리는 최고 레벨 유저들과 비슷한 수치의 스텟이었다.

고유 스킬은 현성에게 엄청난 성장 속도를 부여해 주었다.

어떤 플레이어가 각성 1년도 지나지 않아 이렇게 엄청난 성과를 이룰 수 있겠는가?

스텟만 높은 게 아니다.

현성이 보유하고 있는 영웅 등급 스킬은 무려 4개였다.

불사의 서, 생존 본능, 번개의 숨결, 흡혈공.

불사의 서와 생존 본능은 현성 마음대로 발동할 수 없는 스킬이었지만 번개의 숨결과 흡혈공은 다르다.

번개의 숨결은 강력한 전투력을, 흡혈공은 전투의 지속성을 올려 준다.

그 결과 현성은 이번 2차 대격변에서 상당히 큰 활약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얼른 정상화가 되어야 하는데.’

2차 대격변으로 세계경제가 일시적으로 마비되었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전기, 석유, 가스, 식량, 물 등이 부족해졌다.

한국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방어진을 구축하고 소도시의 주민들을 소거했다.

방어할 공간을 최소화시키고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물류와 유통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생활에 필수적인 식량과 물이 부족한 상황에서 공산품의 생산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판매창에 올려 둔 물건들이 다 팔렸어.’

고정적인 수익을 올려 주던 캠핑용 대용량 배터리와 전자 제품의 판매가 일시적으로 막혀 버렸다.

그건 당분간 현성이 강해질 방법이 사라졌다는 뜻과 동일했다.

‘부지런히 움직이자.’

최대한 열심히 움직여야 조금이라도 빨리 2차 대격변을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2차 대격변을 극복해야 장사도 재개할 수 있다.

애애애애애앵!

‘또 출동 사이렌이네.’

다시 움직일 시간이었다.

* * *

두두두두두!

군용 수송 헬기에 탑승한 현성과 플레이어들은 사건 현장으로 향했다.

현성만 협회 직속 플레이어였고 나머지 인원은 비상 동원령에 따라 소집된 이들이었다.

평균 200레벨 중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현성은 현재 이들을 통솔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처음부터 현성이 지휘권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신촌역과 남영역에서 지휘를 맡은 것은 임시에 가까웠다.

당시 플레이어들에게 지시를 내려 줄 협회 간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현성에게 지시가 내려간 것이다.

하지만 현성은 신촌역과 남영역 차원 게이트 봉쇄를 시작으로 수많은 작전에서 활약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보여 준 무력은 플레이어 협회에서 파악하고 있던 현성의 무력을 월등히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플레이어 협회는 현성의 실력을 150레벨 중반에서 250레벨 중후반으로 상향 조정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현성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볼 여유도 없었다.

물어본다고 대답해 줄 현성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군용 수송 헬기 조종사의 말에 현성이 지상을 바라보았다.

빌딩 숲이 자리를 잡고 있는 번화가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단 1명도 보이지 않았다.

대도시가 아닌 소도시로 분류되었기에 주민들이 모두 대피한 것이다.

상대해야 할 몬스터는 트롤.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개체가 아닌 만큼 개체 수가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군대에게 트롤은 상당히 까다로운 몬스터였다.

뛰어난 재생력 때문에 소총으로는 사냥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군대가 트롤을 상대하려면 강력한 폭격을 가해 일대를 날려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게 되면 시설물의 피해가 크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에서는 플레이어들이 투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외곽부터 포위망을 좁혀 나가 처리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각자 맡은 구역은 숙지하고 계시죠?”

“물론입니다.”

“지휘권은 각 파티의 파티장분들에게 맡기겠습니다.”

“네.”

현성의 말을 끝으로 작전이 시작되었다.

사실 현성이 지휘권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전투는 파티장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저레벨이 아닌 중 레벨이나 고레벨 플레이어들의 경우는 길드에 소속되지 않더라도 평소 합을 맞춰 가며 고정적으로 사냥을 하는 파티가 있기 마련이다.

괜히 현성이 중간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보다 파티장들에게 지휘권을 주는 게 전투의 효율이 좋았다.

“그럼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현성이 군용 수송 헬기 밖으로 몸을 날렸다.

바람을 가르며 지상으로 하강하는 현성의 눈에 차원 게이트의 모습이 들어왔다.

현성이 자청해서 맡은 임무는 차원 게이트 봉쇄였다.

‘파이어 월.’

스킬을 시전하자 차원 게이트 앞에 시뻘건 불의 벽이 생겨났다.

캬아아아악!

차원 게이트를 빠져나오던 트롤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탁!

지상에 도착한 현성이 흡혈검을 뽑아 들고 불길에 휩싸여 있는 트롤들을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현성의 마력 스텟이 낮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스텟의 대부분을 마력에 투자하는 마법사 계열 플레이어들보다는 낮을 수밖에 없다.

현성은 좋게 말하면 균형 있는 플레이어고, 나쁘게 말하면 잡캐다.

총스텟 2,000 정도인 랭커 플레이어가 마법사 계열이라면 아무리 낮게 잡아도 현성보다 마력 스텟이 2~3배는 높을 것이다.

다른 계열도 마찬가지다.

힐러는 현성보다 정신력이 높을 것이고, 근접 딜러라면 힘과 민첩이 높을 것이다.

현성의 스텟의 총합은 랭커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전투력으로만 따지면 랭커보다 한참 낮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범용성은 월등히 뛰어났다.

현성은 탱커이자 근접 딜러 겸 원거리 딜러이며 힐러였으니까 말이다.

현성이 지상에서 한참 전투를 벌이고 있을 무렵 군용 수송 헬기는 미리 계획된 작전에 따라 번화가 외곽을 돌며 플레이어들을 내려놓았다.

‘순조롭네.’

일반적인 트롤의 레벨은 200레벨 초반.

200레벨 중반으로 이루어진 파티들은 무난하게 트롤들을 소탕해 나가고 있었다.

캬아아악!

그때 한 무리의 트롤들이 차원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런 트롤들을 반긴 것은 뜨거운 불길이었다.

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견디며 파이어 월을 뚫고 나온 트롤들에게 현성의 흡혈검이 날아갔다.

서걱!

트롤 1마리의 목이 너무도 손쉽게 날아갔다.

하지만 현성의 적은 1마리가 아니었다.

크르르르르!

불길을 뚫고 나온 다른 트롤들이 현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드는 줄 알았다.

트롤들은 현성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뭐야?’

호전적인 트롤이 선공을 당한 상태에서 도주하다니?

거기다 나온 숫자도 꽤 많았다.

지금까지 트롤들은 많아야 두 개체 정도가 한꺼번에 차원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한데 이번에는 무려 15마리가 한꺼번에 뛰쳐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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