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작업 (20/225)
  • ┃작업

    “그건 그쪽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닙니다.”

    -이거, 이거, 너무 뻣뻣하시네. 원하는 금액을 맞춰 주겠다는데 왜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겁니까?

    “그런 계약서를 보내 놓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계약서가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걸 몰라서 묻는 겁니까? 변호사와 상담을 해 보니 문제가 한둘이 아니더군요.”

    현성의 대답에 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넣어 놓은 조항일 뿐입니다. 최현성 씨가 우리가 원하는 인재라면 문제 될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쪽이 원하던 인재가 아니라면 제 상태창만 털리겠죠.”

    -현성 씨, 좋게 좋게 생각합시다. 서우 길드는…….

    서대웅의 설득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현성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서우 길드가 약속한 조건 중 현성이 메리트를 느낄 만한 조건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상태창을 오픈함으로써 다가올 위험이 더 크게 느껴졌다.

    ‘상태창을 오픈하지 않는 조건으로 계약을 한다면 나쁠 게 없지만…….’

    그런 조건은 서우 길드 쪽에서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할 말이 그것뿐이라면 이만 끊겠습니다. 통화 끝나는 즉시 번호를 다시 바꿀 생각이니까 또 이 번호로 전화하셔도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한 번만 더 어머니 댁에 찾아가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현성이 그 말과 함께 전화를 끊어 버렸다.

    * * *

    “어린놈이 싸가지없이.”

    꺼져 버린 스마트폰을 들고 있던 서대웅이 얼굴을 찌푸렸다. 최현성의 농간 때문에 당했던 수치를 생각하면 당장 산 채로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막대할 수도 없었다.

    비위를 맞춰 주며 전화 통화를 최대한 오래 끌어야 했다.

    “위치는 파악됐어?”

    “네.”

    “어디야?”

    “이곳입니다.”

    “오성 길드 영역이잖아?”

    “어떻게 할까요?”

    “우현 길드에 연락해서 작업 시작하라고 해.”

    “네.”

    우현 길드.

    길드장 장우현을 중심으로 뭉친 플레이어 길드다.

    겉으로 보면 평범한 길드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상적인 길드와는 많은 것이 달랐다.

    몬스터를 사냥해 돈을 벌기보다는 사람을 사냥해 돈을 버는 길드.

    그게 바로 우현 길드였다.

    “적당히 위기감을 느끼게 해 줘야 우리 품으로 기어들어 오겠지.”

    죽일 생각은 없다.

    멍청이처럼 서우 길드에 들어오라고 협박할 생각도 없다.

    그저 플레이어 최현성이 우현 길드와 시비가 붙고 그 과정에서 작은 사고를 당할 뿐이다.

    사고를 당한 최현성은 더 이상 플레이어로서 활동할 수 없을 거다.

    그런 상황이 되면 분명 지금과는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또한 부수적인 결과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당했던 모욕에 대한 앙갚음도 되어 줄 것이다.

    * * *

    현성은 전자 제품 매장과 백화점을 돌며 대량의 물품을 구입했다.

    노트북부터 시작해 고가의 명품 시계나 화장품 등.

    온갖 종류의 물품을 구매해 판매창에 올렸다.

    게임기와 캠핑용 대용량 배터리가 주력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판매창이 늘어난 만큼 팔 수 있는 건 다 팔아야지.’

    단일 품목만 팔아서는 어느 순간 판매 속도가 정체된다.

    지속적으로 판매 물품을 늘려야 장기적으로 유리했다.

    가격도 탄력적으로 운용했다.

    잘 팔리지 않는 물품의 가격은 하향 조정했고, 잘 팔리는 물품의 가격은 상향 조정했다.

    ‘이 정도면 대충 된 것 같네.’

    현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끝났다.

    ‘다시 사냥 시작이다.’

    포인트를 수급하면서 강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사냥이었다.

    * * *

    -믿을 수 없는 업적 – 전설 등급

    -단독으로 상위 레벨의 몬스터 토드맨 10,000마리를 사냥하셨습니다.

    -업적 보상 : 칭호 [토드맨 학살자 - 전설 등급]

    ‘끝났다.’

    토드맨 업적 달성이 끝났다.

    ‘아직 시간이 남았어.’

    현성은 곧바로 토드맨 던전을 나갔다.

    택시를 잡아탄 현성은 곧바로 미리 점찍어 두었던 고블린 던전을 향해 이동했다.

    “저놈이냐?”

    “맞습니다.”

    “조용히 따라가자.”

    “예, 형님.”

    승합차 한 대가 현성이 탄 택시를 조용히 뒤따르기 시작했다.

    고블린 던전에 도착한 현성은 곧바로 택시에서 내려 던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승합차를 타고 들어온 이들도 현성의 뒤를 따라 고블린 던전으로 들어갔다.

    ‘숲이네.’

    고블린 던전은 현성이 처음 접해 보는 타입의 던전이었다.

    던전의 천장은 해 질 녘 노을처럼 은은한 붉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던전의 내부는 5미터가 넘는 크기의 나무와 풀 들이 마치 정글처럼 자라나 있었다.

    ‘들어가자.’

    처음 보는 타입이긴 했지만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

    현성의 스펙보다 월등히 낮은 레벨의 던전이다.

    환경이 조금 다를 뿐 기존의 던전 사냥과 난이도 차이는 없었다.

    ‘은신.’

    현성은 스킬을 사용한 후 평소처럼 안전 요원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던전의 중심부로 향했다.

    ‘이쯤이면 괜찮겠네.’

    안전 요원도 다른 플레이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주변에 있는 것은 몬스터인 고블린들뿐이었다.

    ‘매직 미사일.’

    퍼억!

    현성이 스킬을 사용한 순간 고블린 1마리의 머리통이 그대로 박살 났다.

    캬아아악!

    사방에서 고블린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조잡한 무기를 든 고블린들의 공격에 현성도 반격을 시작했다.

    파이어볼과 매직 미사일 스킬을 사용해 원거리의 적들을 제거하고, 근접한 적들은 흡혈검으로 베어 넘겼다.

    그리고 중간중간 날아오는 독침은 흡혈 박쥐의 망토를 통해 막아 냈다.

    고블린들이 순식간에 쓸려 나가기 시작했다.

    방금 전 사냥했던 토드맨과 동일한 난이도였다.

    콰직!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고블린 한 마리가 현성의 검에 심장을 꿰뚫렸다.

    ‘끝났다.’

    이제 아공간으로 마석과 아이템을 회수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만 하면 끝이다.

    부스럭!

    그때, 뒤쪽 수풀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남은 놈들이 있었나?’

    현성이 몸을 돌려 원거리 공격 스킬을 사용할 준비를 했다.

    “도대체 어떤 놈이 우리 사냥터에서 분탕질을 친 거야?”

    그런 현성의 귀에 인간의 목소리가 들렸다.

    ‘플레이어?’

    수풀을 가르며 나타난 것은 고블린이 아닌 한 무리의 플레이어였다.

    “저놈인 것 같습니다!”

    선두의 플레이어가 현성을 가리키며 외쳤다.

    “넌 뭔데 우리 사냥터에서 멋대로 사냥을 한 거야?”

    선두에 선 사내가 위협적인 목소리로 현성을 윽박질렀다.

    “똑같이 사용료 내고 입장한 마당에 내 사냥터 네 사냥터가 어디 있습니까?”

    현성이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여기는 우리가 매일 사냥하던 곳이야. 그러니까 당연히 우리 사냥터지.”

    완전 억지였다.

    “우리 사냥터에서 멋대로 사냥을 했으니까 마석은 그대로 두고 가. 그리고 우리가 잡을 몬스터들을 대신 사냥한 보상으로 네놈 장비도 두고 가고.”

    ‘미친놈들.’

    현성은 난생처음 보는 진상의 등장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인터넷에서 이야기로만 듣던 양아치들을 내가 직접 만날 줄은 몰랐네.’

    던전 내부에서는 현대 전자 장비가 작동하지 않는다.

    당연히 던전 내부에서 플레이어들끼리 트러블이 발생하면 서로의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사망 사고가 발생해도 몬스터에 의한 사망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문제는 그 점을 악용하는 플레이어들이 있다는 점이다.

    소수의 플레이어들을 협박해 아이템과 장비를 빼앗거나 심한 경우 살해까지 하는 범죄자들 말이다.

    ‘그런데 이 광경을 보고도 이런 말이 나오나?’

    현성은 홀로 고블린 무리를 쓸어버렸다.

    고블린 던전에서 사냥하는 플레이어들보다 월등히 높은 스펙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 자신에게 먼저 시비를 걸다니.

    ‘네놈들은 큰 실수를 한 거다.’

    놈들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말로 해서는 못 알아듣는 모양이네. 그럼 행동으로 보여 줘야지. 얘들아, 가자!”

    “예!”

    양아치들이 일제히 현성에게 달려들었다.

    ‘느려.’

    전체적인 움직임이 눈에 훤하게 보였다.

    고블린 던전에서 사냥하는 레벨대의 플레이어들보다는 수준이 높아 보였다.

    하지만 고블린 던전의 수준을 한참 전에 뛰어넘은 현성에 비하자면 어른과 아이만큼이나 스펙 차이가 컸다.

    휘익!

    가장 먼저 도착한 플레이어가 거침없이 창을 찔러 넣었다.

    목표는 현성의 다리.

    ‘이놈들이…….’

    사람을 향해 망설임 없이 무기를 찔러 넣는 놈들의 행태에 현성의 눈빛이 분노로 물들었다.

    서걱!

    흡혈검을 휘둘러 창대를 베어 냈다.

    그와 동시에 발꿈치로, 창을 들고 공격을 가한 놈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퍼억!

    현성에게 가격당한 놈의 몸이 허공에서 반 바퀴쯤 회전하더니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죽여!”

    동료가 쓰러진 모습을 목격한 양아치들이 노성을 터트리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현성은 침착하게 적들을 쓰러트렸다.

    사람을 상대로 한 실전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간 인간형 몬스터들을 상대해 봐서인지 그렇게 까다롭지는 않았다.

    현성은 검과 방패를 이용해 수비를 하며 팔꿈치나 발을 사용해 양아치들을 하나하나 제압해 나갔다.

    그때 양아치 하나가 현성의 검을 향해 돌진했다.

    마치 자살행위처럼 보이는 행동.

    현성이 재빨리 검을 비틀었다.

    사악!

    하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그 결과 흡혈검의 칼날이 양아치의 어깨 부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퍼억!

    현성이 검을 쥔 손으로 양아치의 안면을 날려 버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현성의 의도를 알아차린 건지 놈들은 고의적으로 흡혈검을 향해 몸을 날렸다.

    ‘진짜 미친놈들이네.’

    현성은 흡혈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방패 하나만 들고 적들을 때려눕히기 시작했다.

    승부는 순식간에 갈렸다.

    현성은 간단하게 자신에게 덤벼들었던 양아치들을 때려눕혔다.

    스텟 차이가 심하게 나다 보니 양아치들은 현성에게 작은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부스럭.

    그때 수풀을 가르고 사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전 요원인가?’

    몸에 걸치고 있는 장비의 수준이 꽤 높았다.

    “저기…….”

    “길드장님!”

    현성이 상황을 설명하려고 입을 열려는 순간 바닥에 쓰러진 양아치들이 밝은 얼굴로 사내를 불렀다.

    “네가 우리 길드원을 이 꼴로 만들었냐?”

    사내가 살기 어린 음성으로 현성에게 물었다.

    “이 사람들이 먼저 덤벼…….”

    탁!

    현성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사내가 현성을 향해 쇄도했다.

    * * *

    ‘애들이 잘 당해 줬네.’

    장우현이 피투성이가 된 길드원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던전 내부에서 벌어진 플레이어들의 분쟁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당연히 법적으로 처벌하기도 어려웠다.

    만약 분쟁을 벌인 플레이어들이 양쪽 다 부상을 당했다면?

    경찰이나 검찰은 쌍방 폭행으로 결론을 내고 신경을 꺼 버렸다.

    ‘죽이라는 의뢰였으면 더 간단했을 텐데.’

    의뢰자의 까다로운 요구 조건 때문에 이런 연극이 필요했다.

    ‘빨리 끝내 버려야지.’

    장우현이 표적을 향해 달려들며 대도를 뽑아 들었다.

    ‘다리 하나 정도 잘라 내면 되겠지.’

    표적이 플레이어로서 활동하기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라는 게 의뢰인의 요청이다.

    팔 같은 경우는 변수가 있다.

    변수를 제거하려면 다리 하나 자르는 게 제격이었다.

    장우현이 표적의 왼쪽 다리를 향해 대도를 휘둘렀다.

    파강!

    ‘막아?’

    장우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자신은 2차 전직을 마친 플레이어다.

    그런 자신의 공격이 고작 저레벨 던전에서 사냥하던 애송이에게 막히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장우현이 더욱 맹렬한 기세로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표적의 방어는 무척 탄탄했다.

    ‘고블린 던전에서 놀 만한 실력이 아니잖아.’

    물론 자신보다는 한참 아래였다.

    하지만 애초 목적대로 깔끔하게 다리 하나만 잘라 내기는 상당히 까다로워 보였다.

    ‘귀찮은 놈.’

    생각이 바뀌었다.

    ‘깔끔하게 끝내 주려고 했는데.’

    저항이 심하니 다리 하나가 아니라 팔 한쪽 정도는 더 가져가야 할 것 같았다.

    ‘강해.’

    현성의 등 뒤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갑자기 덤벼든 상대는 방금 전 쓰러트렸던 양아치들과는 그 격이 달랐다.

    힘과 속도.

    모든 면에서 현성보다 우월했다.

    검은 가볍고 대도는 무겁다.

    하지만 사내의 대도는 현성의 검보다 빨랐다.

    사내의 대도가 집요하게 현성의 사지를 노렸다.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그대로 사지 중 하나가 잘려 나갈 판이었다.

    아마 방패가 없었다면 지금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현성은 지금의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해. 파이어 스피어.’

    현재 가지고 있는 스킬 중 가장 위력이 강한 파이어 스피어를 사용했다.

    화르르륵!

    화염의 창이 사내를 향해 날아갔다.

    꽈아아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파이어 스피어가 사내에게 적중했다.

    거리가 워낙 가까워서 피하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현성은 맹공 대신 후퇴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옳았다.

    “이 버러지 같은 새끼가 감히……!”

    사내가 노성을 터트리며 화염을 뚫고 나왔다.

    ‘치명타가 아니야.’

    사내의 머리카락과 눈썹이 홀라당 타 버리기는 했지만 그게 다였다.

    갑옷이 조금 그을린 것 말고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파이어 스피어의 관통력으로도 상대의 갑옷을 꿰뚫지 못한 것이다.

    현성은 전력을 다해 달렸다.

    등 뒤에서 쩌릿쩌릿한 살기가 느껴졌다.

    ‘괜히 포인트를 아껴서…….’

    현성은 포인트를 아낀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250억이 넘는 포인트를 얻었지만, 훗날 엘릭서를 구입할 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최대한 모아 놓고 있었다.

    포인트를 사용하는 경우는 사냥하는 던전의 수준이 올라갈 때로 잡았다.

    현재 사냥하는 저레벨 던전에서 자신이 위험에 처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데 아니었다.

    던전에서 현성이 마주할 위협은 몬스터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단순한 우연이 아니야.’

    처음에는 자신이 재수가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내의 공격 패턴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내 목숨을 노린 건 아니야.’

    사내의 실력은 명백하게 현성보다 우위에 있다.

    승부를 빠르게 가르는 방법은 급소를 노려 상대의 숨통을 끊는 것이다.

    그게 뒤처리도 더 깔끔했다.

    현성이 살아나가게 되면 분명 문제가 생길 테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집요하게 현성의 사지를 노렸다.

    처음에는 몰랐다.

    하지만 방어에 열중하다 머리와 몸통 부위의 방어가 허술해졌음에도 전혀 공격하지 않는 상대의 모습을 보고 알아차렸다.

    저들은 처음부터 현성을 타깃으로 함정을 팠다.

    목적은 현성을 불구로 만드는 것이다.

    ‘도대체 왜?’

    저들이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 지금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뭘 사야 하지?’

    구매창을 연 현성이 빠르게 영웅 등급 스킬북 목록을 훑었다.

    파이어 스피어를 연달아 던지며 적을 견제하고 있었지만, 언제까지 통할지 알 수가 없었다.

    스텟 증가 비약을 구입해 하나하나 먹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지금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강력한 스킬이 필요했다.

    포인트를 아낄 때가 아니었다.

    ‘이거다.’

    생존 본능 - 영웅 등급

    -패시브 스킬북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60초간 전 스텟이 50% 증가합니다.

    -한번 발동하면 1시간의 쿨타임을 가집니다.

    -판매자 : 발리두인

    -판매가 : 19,999,999,999포인트

    무려 200억 포인트.

    하지만 지금은 포인트를 아낄 때가 아니었다.

    -패시브 스킬북 생존 본능 - 영웅 등급을 구매하시겠습니까? 한번 구매한 물품은 환불이나 교환이 불가능합니다.

    -[예] [아니오]

    ‘무조건 예지.’

    은은한 보랏빛을 풍기는 화려한 스킬북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성이 스킬북을 움켜쥐었다.

    -패시브 스킬북 생존 본능 - 영웅 등급을 습득하시겠습니까?

    -[예] [아니오]

    역시 예를 선택했다.

    -패시브 스킬 생존 본능 – 영웅 등급이 발동합니다.

    익힌 순간 바로 스킬이 발동했다.

    현성은 지금 극도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늘어난 스텟은 바로 체감이 되었다.

    5%도 아니고 50%다.

    체감이 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스텟이 400도 넘게 늘어났으니까 말이다.

    고작 60초간이기는 하지만 현성의 스텟 총합은 3차 각성을 마친 플레이어와 맞먹는 수준으로 상승했다.

    물론 모든 스텟이 고르게 늘어났기에 주력 스텟을 집중적으로 키운 3차 각성 플레이어보다는 전투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내를 상대로는 이 정도로 충분했다.

    바로 몸을 돌렸다.

    분노에 찬 얼굴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위력적으로 보이던 사내의 움직임이 너무나도 굼뜨게 느껴졌다.

    ‘완벽하게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어야 해.’

    생존 본능의 발동 시간은 지금 이 시간에도 줄어들고 있다.

    최대한 빨리 승부를 봐야 했다.

    현성이 흡혈검을 들어 올렸다.

    현성과 사내가 충돌하려는 순간…….

    탁!

    갑자기 여성 한 명이 현성과 사내 사이에 모습을 드러냈다.

    휘익.

    여성이 사내를 향해 가볍게 창을 휘둘렀다.

    파강!

    사내의 손에 들려 있던 대도의 칼날이 창날과 부딪치는 순간 종잇장처럼 베여 나갔다.

    “어?”

    사내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손잡이만 남은 자신의 대도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두 번째 공격이 이어졌다.

    대도의 칼날을 베어 낸 창이 가볍게 회전하며 창대가 그대로 사내의 후두부를 후려친 것이다.

    퍼억!

    창대에 후두부를 가격당한 사내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현성을 극도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사내가 너무 허무하게 쓰러져 버렸다.

    사내를 쓰러트린 여성이 가볍게 몸을 돌렸다.

    저벅저벅.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현성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갑작스러운 반전에 당혹감이 밀려왔다.

    현성이 잔뜩 긴장한 상태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여성을 바라보았다.

    생존 본능 스킬이 발동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눈앞의 여성을 상대로는 감히 저항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최현성 씨.”

    사내를 쓰러트린 여성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현성의 이름을 불렀다.

    “저번에 뵈었을 때는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누구지?’

    의문의 여성이 자신을 향해 알은체를 하자 현성은 적지 않게 당황스러웠다.

    ‘확실히 낯이 익은데…….’

    분명히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아!”

    드디어 기억이 났다.

    ‘희귀 등급 포션을 준 여자다.’

    삼두표가 난동을 피웠을 때 자신과 마주쳤던 플레이어 협회의 플레이어였다.

    그녀가 준 포션은 현재 현성의 아공간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상대의 정체를 알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사실 처음부터 쭉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네?”

    여성의 말에 현성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작업 당하실 때부터 쭉 지켜보고 있었다고요. 미리 나서지 못해서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작업요?”

    “예, 이놈들 상습범이거든요.”

    여성의 말에 현성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아, 이 녀석들의 범죄 행위를 입증하기 위해서 일부러 지켜보셨다는 거군요.”

    현성은 일종의 잠복 수사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아뇨. 최현성 씨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고 싶었거든요.”

    “네? 저요?”

    “정식으로 제 소개를 하죠. 플레이어 협회에서 감찰대장직을 맡고 있는 신윤아라고 합니다. 저는 저놈들이 아니라 최현성 씨를 따라 고블린 던전으로 들어왔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일단 제가 최현성 씨를 찾아온 목적은 던전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놈들 뒤처리를 해야 하니까요.”

    신윤아의 말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상습범이라고 하셨는데, 전에도 비슷한 범죄를 저지른 전적이 있는 건가요?”

    “예, 증거는 없지만 다수의 던전에서 발생한 실종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던 이들입니다.”

    “실종 사건요?”

    “말이 실종 사건이지 사실상 살인 사건이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신윤아의 말에 현성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와 함께 의문이 들었다.

    저 사내는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파이어 스피어에 한 방 먹은 후 생각이 바뀐 모양이긴 하지만 그 전까지는 분명 현성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절 죽일 생각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첫 전투에서 길드원들이 최현성 씨의 검에 달려드는 모습을 보인 걸로 보아 던전 밖으로 나간 후 쌍방 폭행으로 몰아가려던 생각 같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인 걸까요?”

    현성은 저레벨 던전에서 주로 사냥하는 플레이어다.

    고가의 아이템이라고 해 봐야 흡혈검 정도고 나머지는 모두 대여한 장비였다.

    저들이 흡혈검의 가치를 알고 있을 리도 없다.

    설사 알았다고 해도 현성을 죽이고 빼앗아 가는 게 편했다.

    “이제부터 그 이유를 알아봐야죠.”

    신윤아가 쌩긋 웃은 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내를 창대로 툭툭 쳤다.

    “깨어난 거 알고 있으니까 일어나.”

    신윤아의 말에도 사내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과격한 방법은 안 쓰려고 했는데.”

    살짝 얼굴을 찌푸린 신윤아가 가볍게 창을 찔러 넣었다.

    푸욱!

    날카로운 창날이 갑옷의 틈새로 파고들어 사내의 허벅지를 찔렀다.

    “아악!”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진작 일어났으면 서로서로 좋잖아. 왜 최현성 씨를 작업한 거야?”

    신윤아의 물음에 사내가 억울함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 억울하게 폭행당한 길드원들을 지키기 위해 나섰을 뿐입니다! 그리고 플레이어 협회 간부가 선량한 플레이어를 이렇게 폭행해도 되는 겁니까? 거기다 기절해 있는 상대를 공격하다니요! 이 일은 정식으로 언론에 알리고 경찰에도 고발하겠습니다!”

    사내의 항의에 신윤아가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기절해 있었다는 놈이 내가 플레이어 협회 간부인 건 어떻게 알아?”

    신윤아의 물음에 사내의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너 바보야? 그렇게 상황 파악이 안 돼? 여기가 어딘지 몰라?”

    신윤아가 살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여긴 던전이야. 네가 여기서 죽어 나자빠져도 내가 죽였다는 증거 같은 건 없다고. 설마 네가 작업하려 했던 최현성 씨가 너를 대신해서 경찰에 고발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사내가 할 말을 잃었다.

    던전은 약육강식의 세상이다.

    법의 보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던전 안에서 현성을 목표로 작업을 했던 것이다.

    한데 반대로 자신이 작업을 당하게 생겼다.

    “고블린 던전이 너랑 길드원들의 무덤이 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순순히 부는 게 좋을 텐데. 증인으로 써먹을 가치가 있어야 살려 줄 거 아니야.”

    “지금 절 협박하시는 겁니까? 플레이어 협회 간부가 선량한 플레이어를 죽이겠다고요?”

    “이놈, 이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최현성 씨, 잠시 자리 좀 비워 주실 수 있나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왕이면 아까 쓰러트렸던 녀석들이 상황 파악하고 도망치지 못하게 해 주세요. 한 놈이라도 빠져나가면 곤란하거든요.”

    “알겠습니다.”

    현성이 아까 제압한 양아치들이 있는 장소를 향해 움직였다.

    그런 현성의 등 뒤로 사내의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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