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 가족 (10/225)
  • ┃가족

    뿔 토끼 던전에서 하루에 소화해야 할 칭호 업그레이드 작업을 마무리하고 모텔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던 현성에게 문자가 왔다.

    -경매장에 등록된 물품이 판매되었습니다.

    드디어 스킬북이 팔린 것이다.

    현성은 지친 몸을 이끌고 바로 경매소로 향했다.

    스킬의 장인 스킬북의 판매 가격은 무려 17억.

    단단한 몸을 비롯한 자잘한 스킬북 역시 2,000만 원이 넘는 고가에 팔렸다.

    문제는 세금이었다.

    던전에서 습득한 물품들은 각 단계에 따라 과세 기준이 달랐다.

    단단한 몸처럼 저가의 스킬북은 세금을 얼마 내지 않는다.

    문제는 스킬의 장인 스킬북이었다.

    세율이 무려 42%였다.

    7억이 넘는 거액이 순식간에 세금과 중계 수수료로 빠져나갔다.

    ‘더럽게 많이 뜯어 가네.’

    절로 욕이 나왔다.

    예상은 했다.

    하지만 직접 당하니 더 가슴이 아팠다.

    역시 포인트로 스킬북을 구매해 현금화하는 것은 전혀 남는 장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엄청난 손해였다.

    ‘포인트로 스킬북을 파는 짓은 그만두자.’

    포인트는 현성의 수명이다.

    수명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은 효율이 좋지 않았다.

    이번의 경우에는 목돈이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었지만, 다음부터 이런 일은 없어야 했다.

    ‘빨리 부지런히 사냥해야지.’

    사냥을 하면 현성이 강해진다.

    당연히 더 상위 던전에 입장할 수 있다.

    저레벨들이 사냥하는 하급 던전이 아닌 고레벨들이 사냥하는 상급 던전으로 가게 된다면?

    얻을 수 있는 칭호도 많아지고 포인트도 더 많이 쌓인다.

    그뿐인가.

    더 질 좋은 마석을 얻을 수 있다.

    칭호는 현성을 강해지게 만들어 준다.

    포인트와 마석은 현성을 부유하게 만들어 준다.

    특히 마석을 판매해 얻는 수익은 세금을 감안하더라도 상상도 하기 힘든 거액이었다.

    최하급 던전을 전전하고 있는데도 고작 열흘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마석만으로 1,000만 원이 넘는 수익을 올렸다.

    가끔 나오는 스킬북까지 합치면?

    한 달 수익 1억을 넘기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포인트를 현금화하지 않고 순수한 사냥만으로도 엄청난 거액을 벌어들인 것이다.

    ‘이 추세라면 예상보다 빨리 엘릭서를 구입할 수 있겠어.’

    현금은 포인트고 포인트는 현금이다.

    양쪽 다 수익이 높으면 높을수록 좋았다.

    현성은 짐 가방을 뒤져 가장 깔끔한 옷을 찾아 입었다.

    깔끔하다고 해 봐야 대학교를 다닐 때 입던 캐주얼복이다.

    현성은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진 후로 새 옷을 사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살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여자인 어머니와 누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오늘로 끝이야.”

    현성이 모텔을 나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어머니와 누나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 * *

    컨베이어 벨트에서 빠른 속도로 물건들이 내려왔다.

    박미숙이 재빠른 손놀림으로 물건을 포장해 다른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놓았다.

    동일한 작업이 하루 종일 반복되었다.

    서서 일하다 보니 다리와 허리에 무리가 온다.

    손가락과 팔 역시 계속되는 작업에 고통을 호소한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하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단순히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육체의 고통은 참을 수 있다.

    그만큼 단련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희망이 없는 삶.

    처음에는 아이들 학원비라도 벌어 볼 요령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힘들기는 했지만 나름 보람도 있었다.

    하나 남편이 쓰러진 후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취직한 딸의 월급은 모조리 남편의 병원비로 쓰였다.

    대학교에 다니던 아들은 학교를 휴학하고 노가다 판에 뛰어들었다.

    자신의 삶을 저당 잡힌 것은 괜찮았다.

    하지만 사랑하는 딸과 아들의 인생까지 저당 잡아 버렸다는 사실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죽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남편과 함께 죽어 버리면 아이들에게 짐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병원에 누워 있는 남편의 생각은 어떨까?

    말 한마디 손짓 하나 할 수 없는 삶.

    자식들의 인생을 갉아먹으며 하루 종일 누워 연명해 나가는 삶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남편도 자신과 같은 생각이 아닐까?

    하루에도 몇 번씩 끔찍한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박미숙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가족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사람이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돈을 모아야 한다며 총각 시절 그렇게 좋아하던 술과 담배도 끊고 악착같이 일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랑하는 남편을 자신의 손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끔찍한 현실이 떠오르며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엎치락뒤치락하던 생각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일이 끝났다.

    박미숙이 공장 문을 나섰다.

    하지만 쉴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바로 식당으로 가서 일을 해야 했다.

    식당 일은 자식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 스스로 선택했다.

    하지만 그녀가 버는 돈은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빚만 늘어 갔다.

    답답한 현실을 떠올리자 다시금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엄마!”

    그때 등 뒤에서 이곳에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아들!”

    고뇌로 가득하던 박미숙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 * *

    현성은 그대로 달려들어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가끔 전화 통화로 목소리만 들었다.

    제대로 얼굴을 본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왜 이렇게 야위셨어요.’

    어머니의 가냘픈 몸이 현성의 품속에 쏙 들어왔다.

    전에 봤을 때보다 살이 많이 빠지셨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많이 지치신 듯했다.

    “아들이 여기는 어쩐 일이야?”

    박미숙이 놀란 목소리로 현성에게 물었다.

    “엄마 만나러 왔죠.”

    현성의 말에 박미숙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그래, 잘 왔다. 밥은 먹었니?”

    일은 어떻게 하고 여기에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몸만 건강하면 된 것이다.

    박미숙의 머릿속에는 그간 고생했을 아들이 이 늦은 저녁 시간까지 밥을 굶고 다닌 것이 아닌가에 대한 걱정만 가득했다.

    “아직 안 먹었어요, 엄마랑 같이 먹으려고.”

    “아, 그래?”

    현성의 말에 박미숙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식당 일을 하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집으로 달려가 그간 고생한 아들에게 직접 만든 따듯한 밥을 먹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녀가 주머니를 뒤졌다.

    천 원짜리 몇 장과 교통 카드 하나가 딸려 나왔다.

    그게 다였다.

    맛있는 밥이라도 사 먹으라고 하고 싶은데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박미숙은 아침은 굶고 점심은 공장 식당에서 해결했다.

    저녁은 자신이 일하고 있는 식당에서 해결했다.

    그녀의 월급은 고스란히 남편의 병원비로 사라진다.

    주머니에 있는 천 원짜리 몇 장이 그녀의 전 재산이었다.

    “엄마가 지금은 집에 못 가. 식당 일을 가야 해서. 먼저 집에 가서 자장면이라도 시켜 먹어. 내일 아침은 엄마가 맛있게 차려 줄게.”

    장 볼 돈도 없지만 박미숙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전 재산을 아들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 현성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어머니의 행동이 하나하나 다 눈에 들어왔다.

    “엄마도 저녁 안 먹었잖아요. 어차피 먹을 거면 같이 먹어요.”

    “엄마는 일하는 식당에서 먹으면 돼. 그러니까 먼저 들어가.”

    “같이 가요. 제가 엄마 일 도와줄게요.”

    “그럴 필요 없어. 너도 피곤할 텐데 먼저 들어가서 쉬어.”

    어머니의 말에 현성이 씩 하고 웃음을 지었다.

    “엄마 저 사실 할 말이 있어서 내려왔어요.”

    현성의 말에 박미숙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박미숙은 현성이 좋지 않은 일로 내려왔다고 생각했다.

    공사장에 문제가 생겨 잘린 게 아닌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게 아니고서는 갑자기 내려올 일이 없었다.

    전에 현성과의 통화에서 앞으로 1년은 더 있어야 끝나는 큰 공사에 투입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중간에 내려왔으니 당연히 문제가 생겼으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어두운 얼굴이 아니라 환하게 웃는 얼굴로 할 말이 있다고 하니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저 각성했어요.”

    현성의 말에 박미숙은 순간 멍해졌다.

    “그게 무슨 말이니?”

    박미숙의 물음에 현성이 품에서 플레이어 등록증을 꺼내 들었다.

    “제가 플레이어가 됐다고요.”

    “…….”

    박미숙은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멍한 표정으로 현성의 손에 들린 플레이어 등록증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공장 일이랑 식당 일 그만두시라고 말씀드리려고 왔어요.”

    이어진 현성의 말에 드디어 박미숙이 정신을 차렸다.

    “위험한 일이야.”

    정부는 최대한 플레이어들의 안전을 신경 쓰고 있다.

    던전에 안전 요원을 기용하는 것도 그 일환 중 하나다.

    하지만 안전 요원이 배치되어 있는 것은 저레벨 던전까지다.

    저레벨을 벗어나면 플레이어는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스스로 각자도생해야 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플레이어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다.

    중 레벨 던전까지 안전 요원을 배치하기에는 고레벨 플레이어의 숫자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상황이 이러니 중 레벨 던전이나 고레벨 던전에서는 사망자가 자주 나왔다.

    플레이어는 보험사에서 가입을 거부하는 위험 직종 중 하나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전 항상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움직이니까요.”

    현성의 말에 박미숙이 고개를 푹 하고 숙였다.

    분명 좋은 일이었다.

    희망 하나 없던 가정에 작은 희망이 생긴 것이니까.

    하지만 박미숙은 차마 아들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제 일 그만두세요.”

    “그럴 수는 없어.”

    박미숙이 단호하게 말했다.

    플레이어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들은 풍문이 있다.

    “플레이어도 무조건 돈 버는 건 아니지 않니. 오히려 처음에는 돈을 많이 써야 한다고 들었다.”

    무기와 방어구.

    스킬북.

    던전 입장료.

    모두 적지 않은 돈이 들었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 전까지 돈을 벌기는커녕 까먹는 게 바로 플레이어였다.

    “그건 그런데, 제가 대박이 터졌어요.”

    현성이 그 말과 함께 통장 하나를 내밀었다.

    “보세요.”

    어리둥절해하던 박미숙이 현성의 말에 통장을 열었다.

    동그라미의 숫자를 헤아려 보던 박미숙의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1, 10억?”

    “사냥하던 도중에 희귀 등급 스킬북을 얻어서 경매로 팔았어요. 이 돈이면 당분간 아빠 병원비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요. 빚도 당장 갚을 수 있고요.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조금 편하게 사세요.”

    현성의 말을 들은 박미숙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실 매달 내야 하는 억제제 구입비와 병원비를 마련하기가 버거웠다.

    그간 모아 놓았던 재산은 눈 녹듯 사라졌고 오히려 빚이 생겼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정신적인 고통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런데 드디어 희망이 생겼다.

    너무도 위험한 희망이 말이다.

    “미안해, 엄마가 정말 미안해.”

    박미숙의 입에서 끊임없이 미안하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대학생이던 아들이 아버지의 치료비 마련을 위해 스스로 노가다 일에 나섰다.

    가슴이 미어졌다.

    힘들고 위험한 일에 스스로 뛰어든 아들이 대견하면서도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한데 이제는 더 힘들고 위험한 일에 뛰어들려 한다.

    자신과 남편을 위해서 말이다.

    자식에게 무엇이든 주고 싶은 게 게 부모의 마음이다.

    한데 자신과 남편은 주기는커녕 오히려 자식에게 받기만 하고 있었다.

    자식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짐이 되는 부모.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뭐가 미안하세요. 이건 당연한 거예요. 엄마랑 아빠가 아니었으면 제가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지금처럼 건강하게 자랐겠어요?”

    현성의 말에 박미숙의 눈시울이 다시금 붉어졌다.

    “그러니까 이제 좀 쉬세요. 아빠도 직접 돌봐 주시고요.”

    “고마워, 아들.”

    현성은 결국 어머니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갑자기 일을 그만둘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현성은 직접 식당에 따라가 어머니의 일을 도와드렸다.

    어머니가 식당에서 하던 일은 설거지.

    기름때가 잔뜩 낀 불판을 닦는 게 바로 어머니의 일이었다.

    현성은 순식간에 불판을 닦아 나갔다.

    예전에 식당에서 불판 닦는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이 있었다.

    거기다 비약 덕분에 올라간 스텟의 힘으로 초인적인 속도로 기름때가 잔뜩 낀 불판들을 처리했다.

    다른 아주머니들이 효자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현성을 칭찬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맺혔다.

    늦은 밤.

    식당 일이 모두 마무리된 후 현성은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 * *

    현성의 집은 작은 원룸이었다.

    원래는 24평짜리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지만 아버지가 쓰러진 이후 팔아치웠다.

    그 후 자리를 잡은 것이 바로 이 작은 원룸이었다.

    달칵!

    “오셨어요.”

    어머니와 함께 문을 열고 원룸으로 들어가자 피로에 지친 젊은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현성의 누나 최현지의 목소리였다.

    오래간만에 직접 듣는 누나의 목소리에 현성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누나, 나 왔어.”

    “어?”

    현성의 목소리를 들은 최현지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가 갑자기 웬일이야?”

    최현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안 좋은 일로 온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렸을 때는 서로 싸우기 바빴다.

    성인이 된 후에도 서로 데면데면했다.

    그저 어쩌다 한 번 무슨 일이 있을 때만 통화를 하는 평범한 남매 사이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쓰러진 후로 달라졌다.

    따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서로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또 힘들 때마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버텼다.

    “좋은 일이니까 얼굴 풀어, 누나.”

    현성의 말에 최현지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자신의 가족에게 좋은 일이 있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 각성했어.”

    “뭐!”

    현성의 말에 최현지가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대박도 터졌어.”

    현성이 어머니께 보여 드렸던 통장을 누나 최현지에게도 내밀었다.

    “백만, 천만, 억, 10억?”

    최현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현성은 놀라는 최현지에게 운 좋게 희귀 등급 스킬북을 얻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게 정말이야?”

    “응. 그러니까 이제 너무 걱정하지 마, 고생하지도 말고. 내가 다 해결할게.”

    현성의 말을 들은 최현지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간의 고통이 끝났다는 안도.

    동생에 대한 미안함.

    온갖 감정이 눈물과 함께 흘러내렸다.

    “이제 알바는 그만 나가. 뭣하면 회사도 때려치우고.”

    현성의 말에 최현지가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녀도 거의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죽어 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몸이라도 팔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서 현성의 말은 구원 그 자체였다.

    현성은 그날 밤 가족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 울고 웃으며 그간의 힘든 시간을 토로했다.

    10억.

    그 돈으로 당장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어찌 보면 당장 급한 불만 끈 상태라도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직도 많은 문제가 남아 있다.

    하지만 그 돈은 지금까지 정신없이 쉬지 않고 달려온 현성의 가족들에게 마음의 안정을 선물해 주었다.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모두 함께 비좁은 원룸에서 잠이 들었다.

    몸은 불편했지만 마음은 편했다.

    절망과 좌절만이 가득했던 집안에 따듯한 희망이 생긴 날이었으니까 말이다.

    * * *

    다음 날 아침.

    현성은 10억이 든 통장을 어머니께 넘겨드렸다.

    그리고 집 근처에 있는 뿔 토끼 던전으로 향했다.

    던전은 전국 방방곡곡에 널려 있다.

    굳이 원래 사냥하던 던전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

    앞으로는 가족과 함께 살 것이다.

    어머니는 바로 직장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대신 일할 사람이 구해질 때까지는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식당 일은 대신 일할 사람이 바로 구해져서 나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누나는 회사를 계속 다니겠다고 했다.

    말로는 툴툴거려도 정말 회사를 때려치울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알바는 바로 그만둬 버렸다.

    ‘어머니가 퇴근할 즈음 돌아와야지.’

    함께 아버지를 뵈러 갈 생각이었다.

    몬스터 사체로 만들고 마석으로 구동되는 시계를 구입했기에 던전에 들어가더라도 시간 파악에는 문제가 없었다.

    혼자 살 때는 시간이나 날짜 개념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가족들과 함께 살게 된 이상 달라져야 했다.

    현성은 평소처럼 김밥과 물을 준비한 후 던전으로 입장했다.

    어머니가 퇴근하실 저녁 시간 전까지는 사냥에 열중할 계획이었다.

    * * *

    그날 저녁 현성은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으로 갔다.

    아버지는 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뼈밖에 남지 않은 야윈 몸.

    링거와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겨우겨우 유지하는 삶.

    현성은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손이 따듯하지 않았다.

    마치 돌처럼 차가웠다.

    ‘꼭 낫게 해 드릴게요.’

    최대한 빨리 병에 걸리기 전의 건강한 모습으로 회복시켜 드리고 싶었다.

    * * *

    -믿을 수 없는 업적 - 전설 등급

    -단독으로 상위 레벨의 몬스터 뿔 토끼 10,000마리를 사냥하셨습니다.

    -업적 보상 : 칭호 [뿔 토끼 학살자 - 전설 등급]

    ‘드디어 끝났네.’

    열흘 넘게 이어진 노가다가 끝났다.

    현성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6시간은 더 사냥할 수 있어.’

    현성은 곧바로 뿔 토끼 던전을 빠져나가 택시를 타고 근처에 있는 흡혈 박쥐 던전으로 향했다.

    흡혈 박쥐 던전은 한산했다.

    다른 던전처럼 파티원을 구하는 사람도 없었다.

    ‘경쟁자가 없으니 수월하겠네.’

    흡혈 박쥐 던전은 인기가 없다.

    아니, 인기가 없는 수준을 넘어서 거의 버려진 사냥터였다.

    흡혈 박쥐는 몬스터가 아니라 일반 박쥐처럼 보일 정도로 덩치가 작았다.

    거기다 무리 생활을 했다.

    그게 문제였다.

    너무 작고 기동성이 좋아 웬만한 실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검이나 창을 휘둘러 맞히기가 어려웠다.

    무리 생활을 하니 1마리를 공격하면 수십,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차라리 덩치 큰 몬스터가 상대하기 편했다.

    ‘길드나 상위 레벨 플레이어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사냥이 불가능한 곳이지.’

    하지만 현성에게는 아니었다.

    오히려 현성의 입장에서는 이런 비인기 던전이 다른 던전 보다 편했다.

    경쟁자 없이 몬스터들을 독점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현성이 던전 안으로 진입했다.

    그와 동시에 스킬을 사용했다.

    ‘은신.’

    차원 게이트를 통과한 현성의 몸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안전 요원 임무를 맡고 있는 플레이어들은 현성이 들어온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현성의 스텟은 안전 요원들의 스텟을 월등히 뛰어넘었다.

    은신 스킬 역시 1차 전직을 마친 안전 요원들을 속이기에 충분했다.

    현성은 안전 요원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던전의 중심부를 향해 이동했다.

    ‘섬뜩하네.’

    천장에서 피처럼 붉은 눈을 가진 흡혈 박쥐들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은신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흡혈 박쥐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어 현성을 공격했을 것이다.

    ‘그럼 슬슬 몰이사냥을 시작해 볼까?’

    현성이 실드 스킬을 사용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마력을 공급해 실드 스킬의 방어력을 올렸다.

    그 후 은신 스킬을 해제하고 미리 준비해 온 바늘로 손가락을 찔렀다.

    따끔거리는 통증과 함께 손가락 끝에서 핏방울이 몽글몽글 흘러나왔다.

    캬아아아악!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흡혈 박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붉은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네.’

    붉은 눈을 가진 흡혈 박쥐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흡혈귀가 등장하는 영화에서나 보던 광경이 현성의 눈앞에서 라이브로 펼쳐졌다.

    피 냄새를 맡고 잔뜩 흥분한 흡혈 박쥐들이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었다.

    콰직! 콰직!

    하지만 현성이 미리 발동한 실드 스킬을 뚫을 수는 없었다.

    ‘파이어볼.’

    현성이 파이어볼 스킬을 발동시키고 다시금 마력을 추가 공급해 공격력을 올렸다.

    동시에 두 가지 스킬에 마력을 투자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마력 스텟과 정신력 스텟이 모두 일정 수준 이상에 도달해야 시도라도 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흡혈 박쥐 던전 같은 저레벨 던전에서 사냥하는 플레이어에게는 불가능한 주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역시 인터넷이 최고야.’

    현성이 실드 주변에 새카맣게 달라붙은 흡혈 박쥐들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금 현성이 사용하는 사냥 방법은 돈이 많거나 거대 길드의 든든한 후원을 받는 저레벨 플레이어들이 폭렙을 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꼼수였다.

    상위 레벨의 플레이어가 만들어 준 안전한 실드 안에서 일방적으로 몬스터를 공격해 사냥하는 것.

    물론 이런 식으로 상위 레벨 플레이어의 도움을 받으면 경험치나 마석 수급에 상당한의 페널티가 있다.

    하지만 그런 페널티를 감안하더라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사냥이 가능했다.

    ‘특히 이런 소형 몬스터가 가득한 던전에서는 말이지.’

    대형 몬스터가 대부분인 다른 던전에서는 사용해 봐야 큰 효과를 보기 힘들다.

    하지만 손바닥 정도 크기의 흡혈 박쥐를 상대로는 최고의 사냥법이었다.

    화르르르륵!

    현성의 손에서 피어오른 파이어볼은 일반 등급 스킬이 아니라 희귀 등급 스킬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커다랗게 변해 있었다.

    ‘더 이상은 무리야.’

    마력과 정신력이 서서히 한계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가라.’

    현성이 실드 밖으로 파이어볼을 집어 던졌다.

    꽈아아아아아아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실드 주변에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었던 흡혈 박쥐들이 시커먼 재로 변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큭!’

    현성이 이를 악물었다.

    폭발의 충격이 실드에까지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다행히 실드는 건재했다.

    그와 동시에…….

    -믿을 수 없는 업적 - 희귀 등급

    -단독으로 상위 레벨의 몬스터 흡혈 박쥐 1,000마리를 사냥하셨습니다.

    -업적 보상 : 칭호 [흡혈 박쥐 포식자 - 희귀 등급]

    일반 등급 업적을 뛰어넘어 처음부터 희귀 등급 업적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잘만하면 남은 시간 안에 전설 등급까지 찍을 수 있겠어.’

    던전 하나를 홀로 독식해 몰이사냥을 한 결과였다.

    현성의 주변에는 재로 변한 흡혈 박쥐의 사체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사아아악!

    흡혈 박쥐들의 사체에서 뿜어져 나온 잔존 마력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현성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아이템이랑 마석이 얼마나 나오려나?’

    현성은 상위 플레이어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당연히 아무런 페널티 없이 전리품을 수확할 수 있었다.

    현성이 앞으로 생겨날 전리품을 습득하기 위해 실드를 해제했다.

    그 순간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흡혈 박쥐의 사체에서 뿜어져 나온 잔존 마력들이 하나로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화아아악!

    그와 함께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며 붉은빛 칼날을 가진 검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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