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93화 (완결) (293/293)
  • 293.

    개선군은 성 밖에서 하루를 쉬고 성으로 들어왔다. 포로가 된 콜린 코크는 몸이 묶인 채 말에 실려 입성했다.

    대전으로 끌려온 그는 허탈해 보였다.

    “미셸 에이드, 그 멍청한 게……. 작전대로만 움직였다면…….”

    원래 세상은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못 배운 모양이다.

    나 자신도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 타인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 줄 거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나도 예전에는 그랬지만.

    에드워드도 왕비님도 내 마음대로는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마음은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뿐이다.

    콜린은 이전의 나와 비슷한 사람이어서, 당혹스럽고 화난 듯했다.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나도 저렇게 보였을까 싶을 뿐이다.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에드워드를 쏘아봤다.

    “왜 그랬지? 내가 핑계를 만들어 주었는데! 당신이 조프리 왕자를 돕지 않아도 아무도 비난할 수 없었을 텐데. 정적이 죽게 내버려 두면 좋았잖아! 이런 어리석은!”

    순간 대전에 있던 사람들이 에드워드를 쳐다봤다. 콜린을 걷어찰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나도 그랬기 때문에 비난할 순 없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훌륭하게도 그를 무시했다. 대신들이 일제히 안도하는 가운데 필리프 왕만 에드워드를 미심쩍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튼 큰일은 아니었다.

    역시 비스코티의 반란을 부추긴 쪽은 콜린인 듯했다.

    반란이 일어났는데 외국 상황을 신경 쓸 나라는 없다. 에드워드는 동맹국과 형제를 돕지 않을 명분이 있었다. 그 형제가 가짜라는 소문이 파다할 때는 더욱 그랬다.

    에드워드의 가세는 콜린의 예정에 없었던 일인 듯했다.

    콜린이 반란을 부추겼다는 건, 나를 절벽으로 몰아넣은 사람도 그라는 의미였다.

    에드워드가 몰라서 다행이었다. 자기 때문에 내가 멍청한 짓을 한 걸 알면 좋아할지 싫어할지 모르겠는데, 내가 부끄러운 건 확실했다.

    콜린은 미셸처럼 자기 목숨 가지고 뻗대는 성격은 아니었다.

    포로가 된 바움쿠헨의 기사들은 콜린의 수중에 있었다. 그들의 귀환이 예정되었다.

    코크 공작이 협상에 응할 때까지 콜린은 탑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난 그가 미셸이 갔던 길을 따라 끌려가는 걸 보고 있었다.

    내 뒤로 에드워드가 다가와서 말했다.

    “다녀왔어.”

    모든 일이 끝났다.

    이상하게도 난 갑자기 긴장되기 시작했다.

    * * *

    왕성에서는 승리한 군인들을 환영하기 위한 연회가 크게 열렸다.

    내전으로 명성을 얻은 기사는 여럿 있었으나, 이 연회의 주인공은 그들이 아니었다.

    하인이 내 입장을 알렸다. 연회장에 들어선 순간 기시감이 느껴졌다. 전공을 세운 왕자인 에드워드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서 누구나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특색 없는 사람들 사이로 에드워드의 눈부신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몇 달 전 저 자리에서 나를 무시하고 있었다.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는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냥 나를 보고 있었다.

    입장하는 순간부터 에드워드가 나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보지 말라니까.

    한숨을 참다가 깨달았다. 에드워드는 흰 예복을 입고 있었다.

    너 오늘 어디 예식장 가?

    개선식에서도 잘 차려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예 작정한 듯했다. 저 어처구니없는 옷이 눈에 띄지 않는 이유는 순전히 얼굴 때문이었다.

    머리를 뒤로 넘기고 시원하게 이마를 드러냈다. 얼굴에 진주라도 뿌린 것처럼 반짝이는데 피부는 매끄러워 보였다. 이상하게 빛이 에드워드 뒤에 머무는 느낌이었다.

    다시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에드워드와 눈을 마주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내게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축하드립니다, 전하.”

    “전부 전하의 공입니다.”

    말만 들으면 내가 콜린을 잡아온 듯했다.

    누군가 잔을 줘서 받았다. 사람들은 멋대로 인사를 하고 건배도 했다.

    이게 무슨 분위기일까? 돌아보니 이미 반은 취해 있었다. 셔벗인들은 연회장에선 빨리 취하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지만 에드워드는 그 자리에 없었다.

    제시간에 맞춰 왔기 때문에 아직 춤은 시작되지 않았다. 들뜨고 웅성거리고, 취해 가는 분위기였다. 누군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전하, 파트너가 없으시다면 제게 전하와 한 곡을 함께할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주변이 웅성거렸다.

    난 이 용감한 제안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한쪽으로 비켜섰다.

    에드워드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머리를 넘기고 안경을 쓴 그레이가 붙어 있었다.

    그레이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에드워드에게 무슨 말인가를 전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의 귀엣말은 내게는 들리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앞에 와서 잔을 빼앗아 들었다.

    어?

    “환자잖아.”

    환자니까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논리였다. 누가 보면 골절이라도 당한 줄 알겠다.

    하지만 뼈는 멀쩡했고 난 겉으로 봐서는 어디 다친 사람 같지도 않았다.

    주변이 조용해진 게 영 미심쩍었다. 에드워드가 나를 쓸데없이 연약한 사람 취급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은데…….

    “춤출래?”

    잔을 아무 데나 버리더니 에드워드가 제안했다.

    방금 환자 취급하지 않았나?

    넌 환자한테 춤을 신청해?

    하지만 거절하면 에드워드가 실망할 것 같았다. 다른 사람과 춤을 추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난 그의 손을 잡았다.

    에드워드의 손에 움찔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가 나를 잡아끌었다.

    우리가 중앙으로 나가자 주변이 점점 조용해졌다. 부채 부치는 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상석에 있던 필리프 왕이 의자에서 반쯤 일어났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를 로잘린 왕비가 다시 제자리에 앉혔다.

    난 갑자기 뭔가가 떠올라서 에드워드를 잡았다.

    “나 여자 파트 못 추는데?”

    “괜찮아. 내가 출 줄 알아.”

    “그런 걸 왜 아는데?”

    “연습했어.”

    그러니까 그런 걸 왜 연습했는데? 아니. 이게 아니라.

    에드워드는 정말로 잘 췄다. 검을 그렇게 잘 쓰는 애가 춤을 못 추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별로 집중하지 못해서 전체적인 그림은 엉망이었다.

    이 춤은 얼굴을 맞대는 시간이 왜 이렇게 긴지 모르겠다. 서로를 봐야 하는 시간이 길어서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에드워드가 내 의문을 알아챈 것처럼 말했다.

    “네가 춤을 너무 못 춰서.”

    “…….”

    시비 거나?

    “연습해야겠다고 생각했어. 네가 못 추는 부분을 내가 출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내가 가르쳐 줄 수도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가 언제 이야기를 하는지 깨달았다. 그건 정말 오래전 이야기였다.

    에드워드는 잘 잊지 않는다.

    그런 애가 왜 출전 전에 했던 말은 기억하지 못하는지 의문이었다.

    나만 초조한 건가? 그가 돌아온 순간부터 난 그 질문에 대한 답만 생각하고 있었다. 나만 기다리고 있는 건가?

    내가 발을 멈추자 에드워드도 따라서 멈췄다.

    “다리 아파?”

    그가 물었다. 금방이라도 옷을 걷고 내 다리를 살필 것 같았다. 난 그의 팔을 잡았다.

    “왜 청혼 안 해?”

    그의 눈이 커졌다.

    춤을 추는 귀족들이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갔다. 주변이 빙글빙글 돌고 있어서 어지러웠다. 숨이 모자란 것 같았다. 입술이 말랐다.

    에드워드가 조심스레 물었다.

    “나갈까?”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잡고 테라스로 나갔다. 나쁜 일을 꾸미는 것처럼 커튼부터 쳤다.

    소음과 빛이 가시자 사방이 조용했다. 심장 뛰는 소리만 들렸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에드워드가 있었다. 그가 품에 손을 넣었다. 반지 케이스가 나왔다.

    예상하지 못한 물건도 아니었는데 난 깜짝 놀랐다.

    “조프리.”

    손을 잡고 이곳으로 빠져나올 때부터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랑 결혼해 줄래?”

    “…….”

    “반란은 끝났고 널 위협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앞으로 넌 내가 필요 없을지도 몰라. 내 도움이 필요하대도, 네가 부르면 언제든 난 오겠지만. 그래도…….”

    “…….”

    “같이 있을래?”

    전형적인 청혼이었다.

    막연하게 청혼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그대로여서 달리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에드워드는 이렇게 이상한 사람인데도, 이 순간은 고전적이었다.

    사실 난 이미 에드워드가 청혼을 했다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이 이미 ‘저 둘 결혼하나 보다’ 생각하고 있는데 또 무슨 청혼을 하겠다는 걸까. 의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에드워드가 뭘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냥 약속받고 싶은 것이다.

    에드워드는 바라는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받은 적이 없다. 그에게 소중한 것은 모두 그에게 금지된 것뿐이어서, 그는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어린애여야 했다.

    그가 무엇보다 바라는 것이 있고, 그걸 그에게 허락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 나뿐이었다.

    그 사실이 기분 좋게 느껴지는 걸 보면 나도 정말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갑자기 온몸의 힘이 빠져서 당황스러웠다. 오랜 시간 배 위에 있다가 땅에 발을 딛는 기분이었다.

    나만을 위한 장소를 갖고 싶었다.

    언제나 내가 있을 수 있는 곳이 있었으면 했다. 나를 붙잡아 줄 사람이.

    사실 나도 욕심이라면 만만치 않았다.

    “좋아, 그러자.”

    나도 고전적으로 대답해 봤다.

    아무래도 우리는 상상력이라고는 없는 것 같다. 그 부분은 둘 다 비슷해서 다행이다. 에드워드는 너무 빠르고 괴상해서, 보조를 맞추기 버거울 때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순서는 아니야. 속도를 좀 낮춰 봐. 내 이성은 말하고 있었지만.

    에드워드가 놀란 사람처럼 나를 바라봤다.

    이미 결혼할 수밖에 없게 상황을 만들어 놓은 주제에 뭘 저렇게 쳐다보는지 모르겠다.

    속눈썹이 느리게 깜빡이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난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가 갑자기 나를 끌어안았다. 지금 놓으면 잃어버릴 것처럼. 그의 손이 내 등을 더듬었다. 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그는 다시 나를 쳐다봤다.

    에드워드는 세상을 가진 사람 같았다. 그가 다시 나를 꽉 안아서, 어쩔 수 없이 나도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는 언제나 가진 게 없었고 그래서 미련도 없었지만.

    내가 속한 세계에서 나는 하나뿐인 것을 가지고 있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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