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92화 (292/293)
  • 292.

    에드워드의 동맹군은 필리프 왕의 주력과 함께 떠났다. 에드워드 곁에는 새벽 내내 부랴부랴 준비한 파벨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붙어 있었다.

    에드워드도 그를 만만치 않게 싫어하는 것 같아서 균형이 맞는 호위였다. 에드워드는 사람을 잘 싫어하거나 좋아하지 않았다.

    파벨을 싫어하는 이유는 나 때문이겠지. 내 측근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왠지 모르겠다.

    날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일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워드는 보기보다 남 탓을 잘하니까.

    새벽안개 속에서 에드워드가 이곳을 돌아보는 걸 봤다. 표정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가 웃고 있다고 느꼈다.

    안심하라는 의도 같은데 전혀 안심이 되지 않았다.

    돌아오면 청혼할 거야, 하던 표정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그러니까 에드워드는 청혼하기 위해 출전하는 셈이었다.

    출전하는 병사들을 배웅한 뒤에는 회의의 연속이었다. 필리프 왕은 나를 빼놓지 않고 데리고 다녔다.

    그가 나를 조프리 왕자라고 불러서, 관리들도 나를 전하라고 불렀다.

    며칠 만에 나는 이들이 나를 ‘필리프 왕의 후계자’라는 의미로 왕자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복도를 지나가면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비스코티 왕성으로 돌아간 듯했다.

    관리들의 이름을 전부 외우고 귀족들의 얼굴을 전부 익혔을 무렵 비스코티에서 편지가 날아왔다.

    파이 공작과 바움쿠헨 백작에게서였다.

    공식적인 서신은 아니었다. 그냥 편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물건이었는데, 그 안에는 예상 가능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게 뭡니까? 이대로 진행되는 겁니까? 전하, 결혼하십니까?

    이 편지에 뭐라고 답해야 할까?

    아무튼 에드워드는 국경에 있는 바움쿠헨 백작에게까지 소문이 들어가게 하는 데 성공했다. 역시 출전 준비는 전혀 안 한 모양이었다.

    편지를 가져온 사람은 그레이였다.

    내가 편지를 접어서 책상에 올려 두자 그가 물었다.

    “결혼하실 거예요?”

    의미를 알 수 없어서 나는 그를 쳐다봤다.

    에드워드가 혼자 사방을 돌아다닌 것 같지만, 사실 그는 왕자여서 협력자 없이 혼자 일을 꾸미지는 않았다.

    에드워드의 가장 큰 조력자는 그레이였다. 에드워드가 무슨 일을 한다면, 그건 그레이가 돕고 있다.

    지금만 해도 그레이가 편지를 가져왔다. 아마 본국에 소문을 퍼뜨린 사람도 그레이일 것이다. 에드워드가 저 두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했을 리는 없으니까.

    본인이 추진한 일이면서 뭘 묻는 거지?

    “전하께서 원하시면 제가 에드워드 전하를 막을게요.”

    그레이가 말했다. 잠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전하께서……. 내키지 않아 하시니까요?”

    “그렇게 보여?”

    그레이가 나를 봤다. 그의 표정이 변하더니 멍해져서 다시 나를 쳐다봤다.

    “왜……. 그분은 뭐가 달라서…….”

    그가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에드워드는 누구와도 달랐다. 사람 자체가 이상한데 누구랑 뭘 비교해도 다를 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다르지.”

    “저는…….”

    그레이는 당황한 듯했다.

    그의 손이 책상 위를 더듬거렸다. 그가 너무 당황해서, 저번처럼 이상한 말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레이가 결혼을 반대할 이유는 없지만.

    비스코티 입장에서 결혼 동맹은 두 손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어서, 실은 파이 공작이나 바움쿠헨 백작도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건 아니었다.

    같은 판단으로, 그레이는 같은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올까 봐 긴장하고 있었다.

    그레이는 그런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요. 저는……. 죄송합니다.”

    그러더니 그레이는 나갔다.

    “…….”

    편지는 왜 가져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당황해서 가져간 것 같긴 했다.

    한숨이 나왔다. 그레이와는 애초에 제대로 된 친구는 아니었다. 하지만 무언가 관계가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을 끊는다거나,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레이는 전처럼 내게 다가오진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내 앞에서 긴장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묻고 싶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내가 책임질 감정을 늘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레이는 예전부터 내 소관이 아니기는 했다.

    그것도 끝이었다.

    에드워드는 역시 머리가 좋을지도 모르겠다. 주변에서 전부 기겁해서 처음에는 시험에 들게 하나 싶었다.

    그런데 반대를 들으면 들을수록 영 기분이 애매해졌다.

    결혼 동맹은 아무리 생각해도 양국에 나쁜 얘기가 아니다. 나 자신에게도 그런 게, 에드워드는 꽤 괜찮은 상대였다.

    엄밀히 따지면 비교할 만한 상대가 없는 수준이다. 내가 얠 안 좋아하더라도 그럴 것 같은데.

    다들 평가가 이상하게 박하다.

    내가 이상한 건지 주변이 이상한 건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에드워드가 나 모르게 일을 꾸미고 있다는 듯이 말했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았다.

    물론 나 모르게 꾸미고 있던 짓은 맞지만.

    내가 싫어했다면 에드워드는 하던 짓을 멈췄을 것이다.

    그가 멈추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난 기자들이 기사를 쓰지 않게 막을 수도 있었다. 내가 로웰에게 말했다면 그는 반지 같은 건 준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에드워드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비슷한 짓을 이미 본국에서 해 봤으니까.

    난 에드워드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은 그냥 어울려 주고 싶은 모양이다.

    오히려 에드워드를 모르는 사람들은 반응이 좋았다. 에드워드가 좋은 동맹 상대인 데다가 결혼 상대로도 나무랄 데가 없다는 점을 금방 알아챈 듯했다.

    이델라가 하얗게 질려서 보고한 바에 따르면 귀족들의 편지가 반으로 줄었다는 모양이었다.

    에드워드는 결혼 시장에서 효과적으로 내 이름값을 낮춰 놓기까지 했다.

    에드워드만 한 상대와 혼인 동맹을 맺을 왕자에게 청혼할 만큼 대범한 귀족들은 많지 않았다.

    아쉽지는 않은데 어처구니없긴 했다. 내 냉대에는 굴하지 않더니. 결혼 당사자의 반응보다 강력한 라이벌의 등장이 효과가 더 좋았다.

    회의가 끝나고 난 어떤 귀족에게 붙잡혔다. 그 귀족은 한술 더 떠서 나를 붙잡고 에드워드를 칭찬하기도 했다.

    그렇게 훌륭한 기사는 살면서 본 적이 없다, 그분을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이는 듯했다, 참 좋으시겠다, 뭐 그런 얘기였는데 나쁜 뜻은 없어 보였다.

    뭐가 좋을 거라는 소릴까? 그건 모르겠지만.

    내게 말하면 에드워드의 귀에도 들어가리라 믿는 태도였다. 사실이어서 할 말은 없었다.

    정신 산란하게 하는 에드워드가 없어서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다. 필리프 왕의 제안을 받고 나는 거처를 옮겼다.

    왕자에게 주어지는 궁이 내게 배정됐다. 나는 그렇다 치고 시종들과 일꾼들이 가장 바빴다.

    그중에서도 도트는 가장 정신이 없어 보였는데, 그만큼 행복해 보여서 내가 그를 혹사시키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구경하러 왔다던 로잘린 왕비까지 합세해서 궁은 날로 화려해졌다.

    그러는 동안 칼라일 산맥은 단풍이 지고 잎이 떨어졌다. 승전보는 낙엽을 매달고 온 로웰과 함께 찾아왔다.

    “콜린 코크가 잡혔대요. 전하, 승리를 축하드려요.”

    그가 웃으며 말하자 함께 있던 관리들이 일제히 “전하, 감축드립니다.” 하고 외쳤다.

    “전부 전하의 공입니다.”

    “이 무도한 자들을 쓰러뜨리셨으니 전하의 위엄이 온 셔벗에 빛날 것입니다.”

    아무래도 좋을 찬사가 이어졌다.

    상대의 핵심 인물이 포로로 잡혔다.

    내전이 끝났다. 그 말은 떠난 사람들이 돌아올 거라는 소리였다.

    난 가장 먼저 물었다.

    “에드워드는 무사해?”

    “콜린 코크를 포로로 만들 정도로는요. 어마어마한 돌격이었다던데요. 신화에 나오는 젊은 영웅 같았다고요. 이건 제 의견이 아니라 전령이 전한 얘기예요.”

    로웰이 나를 힐끗 보며 말했다.

    얜 또 무슨 짓을 한 거지?

    전투의 자세한 양상은 알 수 없었다. 먼 길을 달려온 병사는 에드워드가 단독 작전으로 함정을 팠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가 몹시 흥분해서 떠들어 댄 덕분에, 하루 만에 온 수도가 에드워드의 활약을 알게 되었다.

    파벨은 아무런 쓸모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가 작전을 따라갔는지조차 의문이었다.

    짐을 달아 주면 몸을 사릴 줄 알았는데, 에드워드는 짐 덩이를 버리고 적진에 뛰어들 줄 아는 영리한 기사였다.

    결과적으로 그는 이 내전의 일등 공신이 됐다. 비스코티에 대해 여러 말을 하던 귀족들도 입을 다물 만한 전공이었다.

    필리프 왕은 크게 기뻐하며 연회 준비를 명령했다. 대승을 거둔 군대가 귀환하는 동안 수도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들뜨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등불이 내걸리고 축제가 열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필리프 왕은 인기 좋은 왕이었다.

    왕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동맹국의 왕자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에드워드에 대한 기사가 특집으로 편성되고 그의 초상화가 불티나게 팔렸다.

    어디서 많이 보던 일들이었다.

    내게는 새로 충신을 자처하는 셔벗 귀족들이 생겼다. 귀족들에게 충신이라는 말은 여러 의미로 쓰여서 그들의 충성심을 신경 쓰지는 않았다.

    이 귀족들은 얼마 전까지 콜린 코크와 어울려 다니던 독서 모임 친구들이었다.

    신분 높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이 귀족들은 내게 흥미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셔벗 귀족과 결혼하라고?”

    “예. 내전은 끝났습니다. 비스코티는 꼭 필요한 동맹이고 에드워드 왕자는 대단한 기사이지만, 전하께는 셔벗 내의 지지 세력이 더욱 중요합니다. 전하께서 자애롭고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시는 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셔벗의 귀족 사회는 비스코티보다 복잡합니다. 전하께서 혼자 헤쳐 나가시기는 어려운 곳입니다.”

    “필리프 폐하께서는 현명한 분이지만, 그런 분조차 공작들의 사갈 같은 마음은 막지 못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이와 같지 않습니까?”

    에드워드는 미래도 예지하는 모양이었다. 난 할 말이 없어서 물었다.

    “아, 그래. 누굴 추천하는데?”

    “제 사촌 중에 마농이라는 아이가 있는데, 성품도 참하고 가문도 훌륭합니다.”

    한 명이 준비해 온 듯 자신 있게 말했다. 반응이 빨라서 그의 친구들도 황당하다는 듯 그를 쳐다봤다.

    “마음이 넓어 전하께서 남자 애인을 만드셔도 투기를 부리지 않을 겁니다. 이만한 아가씨가 없다고 영지에 소문이 자자한…….”

    “헛소리하지 마! 애인이 바람피웠다고 머리채 잡았잖아!”

    “전하, 저 자식 말은 듣지 마십시오. 제게 여동생이 있습니다. 금이야 옥이야 길러서 용모도 훌륭하기 그지없고…….”

    “저놈 여동생 약혼자가 있습니다!”

    “…….”

    생각해 보니 조프리가 연애결혼을 할 수 있는 확률은 셔벗에 오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비스코티에서도 확률이 높진 않았다.

    셔벗 귀족들이 새삼스럽게 지적해 줘서 깨닫게 됐다.

    이곳은 조프리의 기반이 아예 없는 곳이어서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귀족들의 충고는 현실적이었다. 내가 있을 곳을 만들기 위해 셔벗의 귀족들과 연합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발판을 만들 생각이었다면 셔벗에 오지도 않았다.

    에드워드는 나를 보호하겠다고 말했다. 비스코티에 남는 것만으로도 나는 어떻게든 보호받을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선택하기 위해 셔벗에 왔다.

    내게 선택지를 온전히 넘긴 에드워드가 돌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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