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91화 (291/293)
  • 291.

    “왕자님.”

    마지막 손님은 도트였다. 그는 모든 사람이 나간 뒤에야 슬그머니 등장했다.

    양손에 쟁반을 들고 있었다. 다과가 준비된 걸 보니 본래는 손님을 대접하려 했던 모양이었다.

    누구를 대접하려고 했는지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도트가 기숙사장이나 로웰을 손님 취급할 리 없었다.

    기숙사장은 어쨌든 기자여서 비스코티에 ‘조프리의 출생’ 기사를 냈다. 로웰은 공녀와의 문제 이후로 도트에게 단단히 밉보였다.

    ‘왕자님께 도움을 드리기는커녕 폐나 끼치는 난봉꾼’이라고 도트가 씩씩대던 게 떠올랐다.

    “다 들었어?”

    알렉스와 이델라를 대접하려 했다면 꽤 오래전부터 문 앞에 서 있었을 것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들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표정을 보아 하니 다 들은 듯했다.

    정말 에드워드보다 내가 더 소문을 퍼뜨리고 있나?

    “제가 들으려고 한 건 아니고요……. 들려서요. 죄송해요.”

    “뭘 들었는데?”

    “왕자님, 결혼하세요?”

    “아니.”

    “아니세요?”

    도트가 깜짝 놀랐다. 난 포기하고 그에게 물었다.

    “에드워드가 너한테도 접근했어?”

    “예? 에드워드 전하요? 아니요. 뵌 적도 없는데요.”

    아닌가? 그런데 왜 놀라는지 모르겠다. 에드워드가 헛소리를 해서 위기감을 느낀 사람들이 내게 경고하는 수순 아니었나?

    도트는 실망한 듯 보였다.

    난 미심쩍어져서 물었다.

    “내가 결혼했으면 좋겠어?”

    “앗, 아니에요, 왕자님! 전 절대로 왕자님의 후계자가 비스코티-셔벗 통합 왕국을 다스리는 늠름한 모습 같은 건 상상하지 않았어요! 왕자님께서 섭정을 하시면 얼마나 멋지실지 같은 건…….”

    “…….”

    그런 야망을 품었다고?

    황당해서 쳐다보자 도트는 강하게 부정했다.

    “절대 제 아이가 왕자님의 후계자를 돌보는 그런 상상은 하지 않았어요! 죄송해요, 왕자님!”

    상상이 구체적이다. 그새 가족계획까지 짰어? 그보다…….

    “만나는 사람이 있었어?”

    왕성에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도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아니요, 왕자님.”

    “아이는 혼자 낳게?”

    “왕자님께서 정착하시면 저도 결혼을 해서…….”

    “육아하면 바빠서 내 시종은 못 하겠네.”

    “네?”

    놀랍게도 도트에게는 대단한 야망이 있었다. 그의 야망은 언제나 조프리가 최고가 되는 쪽이어서 아주 놀랍지는 않았다.

    미셸은 에드워드에게 셔벗에 손을 뻗칠 야심이 있다고 말했는데, 정작 외국을 집어삼킬 속셈은 이쪽에 있었던 모양이다.

    도트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왕자님, 제가 비스코티 여론을 알아볼까요?”

    “왜?”

    얼마 전까지 숨기기 바쁘더니.

    도트가 흥분해서 말했다.

    “전하께서 어떻게 하셨는데, 그렇게 은혜를 받아 놓고 휙 돌아서면 안 되는 거잖아요. 전하께서 비스코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제가 아는데요! 못 미더운 기자가 한 말이지만요, 조사하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돌아가고 싶어 하셨잖아요.”

    논리가 있는 척 말하고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왕자를 사칭하고 있었으면 욕을 먹어야지.

    하지만 이건 이성이 하는 소리였고 감정은 별개의 문제였다.

    비스코티가 태어난 고향도 아니고, 사랑하느냐고 물어보면 거기까진 아닌 것 같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땐 발밑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발붙이고 살면 정이 드는 모양이다. 꽤 오랜 시간 그곳을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생각하긴 했다.

    나쁜 일도 많았지만, 추억이 없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냥 나는…….

    돌아갈 수 없는 건 싫었다.

    돌아가지 않는 것과 돌아갈 수 없는 건 완전히 다른 의미였다. 그런 곳은 하나로 충분했다.

    내가 선택해서 여기까지 왔지만.

    “그래 줄래?”

    도트에게 말하자 그는 기뻐하며 나갔다.

    “맡겨만 주세요! 전하께서 비스코티 왕성에 꽃과 함께 입성하시도록 준비할게요!”

    어? 방금 그런 소리 하고 있었나?

    내가 결혼 고민 중이라고 얘기한 건 안 들은 건가?

    * * *

    내 싱숭생숭한 기분과 상관없이 출전일은 다가왔다. 바쁘게 돌아다니던 에드워드는 출전 전날에야 시간이 난 모양이었다.

    그는 한밤중에 찾아왔다. 밤은 누군가를 방문하기에 좋은 시간이 아닌데, 에드워드가 그 사실을 아는지 의문이었다.

    매번 한밤중만 골라서 찾아오는 걸 보면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왕성에서처럼 창문으로 찾아오지는 않았다. 그가 복도를 통해 문으로 들어와서, 문 앞을 지키던 병사들과 알렉스, 도트까지 그의 방문을 알았다.

    신분이 신분이어서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에드워드가 들어오는 모습을 구경거리처럼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병사 중 한 명이 에드워드와 나를 번갈아 봐서, 난 정말 에드워드의 신분 때문인가 의문이 들었다.

    물어보지는 않았다.

    문이 닫히자 에드워드의 얼굴에 미소가 얹혔다. 왜 저 얼굴을 보면 힘이 빠지는지 모르겠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팔짱을 끼고 그를 봤다.

    “준비는 다 했어?”

    내 질문은 온갖 군데 수작 부리느라 바쁘던데 출전 준비는 했냐는 뜻이었다.

    “응.”

    에드워드는 순하게 대답했다.

    “그동안 바빴어?”

    “응.”

    “결혼한다고 소문 퍼뜨리느라?”

    “그것도 좀 바빴네.”

    부정도 안 한다. 화를 내야 하나?

    하지만 화나지 않아서 문제였다. 난 팔짱을 풀었다.

    “상대를 잘못 고른 거 아냐? 내 측근들한테 알리면 어떡해. 널 도울 리가 없잖아. 걔네 너 안 좋아하는데.”

    “괜찮아. 나도 그러니까.”

    “…….”

    아니…….

    너도 싫어하니까 괜찮다고? 무슨 논리인지 모르겠다.

    “일부러 알렸어? 왜?”

    “반대할 거면 지금 하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릴까?

    에드워드가 부드럽게 말했다.

    “지금 넌 나를 좋아하잖아. 지금 반대하면 네가 안 들을지도 모르니까.”

    “…….”

    에드워드는 계획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계획이란 게 어처구니없는 수준이었지만.

    나중에 반대하면 내가 들을 것 같아? 사람 뭘로 보는지 모르겠다.

    “나 변덕스러워 보여? 아침에는 누굴 좋아했다가 저녁에는 싫어하고 그럴 것 같아?”

    “그건 아닌데. 지금 날 보며 두근거리는 건 흔들다리 효과일지도 모르잖아.”

    아니…….

    “너 그래서 지금 결혼하자는 거야?”

    에드워드는 잠시 생각했다.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지.”

    그렇다는 소리를 길게 하고 있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입이 막히는 일도 있는 모양이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난 에드워드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 와중에 에드워드는 이런 소리나 하고 있었다.

    “사실 나도 내가 불안해.”

    “뭐가?”

    “콜린 코크를 잡을 기회가 있을 때 내가 일부러 놓아줄까 봐.”

    “……왜?”

    “반란이 완전히 진압되면 셔벗 왕의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고.”

    “…….”

    “네가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어디까지 가려는 걸까? 에드워드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매일 저런 생각이나 하고 돌아다닌 모양이다.

    난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탓이 아니었다.

    이상한 짓을 하느라 날 피해 다닌 줄 알았는데 실은 못된 생각을 하느라 그랬던 모양이다. 난 화를 내려다 말았다. 사실 에드워드에게 나는 화도 아니었다.

    “넌 안 그래.”

    에드워드가 나를 쳐다봤다. 난 다시 말했다.

    “내가 싫어하는 짓은 안 한다며.”

    “응.”

    “그러니까. 넌 안 그래.”

    에드워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봤다. 얜 자기가 얼마나 착한지도 모르는 모양이다.

    일찍 철이 든 바람에 주위에 칭찬해 줄 어른도 없었다. 에드워드가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건 아마 그 이유도 있을 것이다.

    내 속을 갈라서 보여 줄 수도 없어서 난 그의 어깨를 도닥였다. 에드워드는 가만히 받고 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갑자기 내 손을 가져가더니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한숨이 손등에 닿았다.

    “돌아오면 청혼할 거야.”

    “…….”

    왜 그런 말을 선전 포고처럼 해?

    이제껏 한 건 청혼이 아니고 뭐였어?

    할 말이 많았지만 손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피부 아래가 간지럽게 느껴질 정도로 피가 빠르게 돌았다.

    나도 숨을 멈추고 그를 쳐다봤다.

    “다녀올게.”

    에드워드가 말했다.

    그가 나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문이 닫힌 뒤에야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에드워드가 출전 준비는 전혀 안 한 것 같다는 깨달음은 그다음에 찾아왔다.

    * * *

    한밤중에 호출당했는데도 파벨은 비교적 멀쩡한 모습이었다. 도중에 전향한 데다 그의 아버지가 필리프 왕의 총신이기도 해서, 그는 탑에 갇히지는 않았다.

    누구도 입 밖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조프리의 형제라는 것도 그를 처벌하지 못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내게 그를 처벌할 권리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조프리가 자신의 형제를 살리고 싶어 했을까?

    난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그를 처벌할 수 없었다. 파벨이나 모리스 상송은 내게 정말 아무래도 좋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조프리가 혹시라도 소중히 여길지도 모르는 사람을, 아무 관심도 없는 내가 처벌하는 덴 거부감이 있었다.

    하지만 파벨이 아예 처벌을 피할 순 없었다.

    일단 내가 그를 수도에서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조프리도 그를 처벌하긴 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왕비님을 팔았다.

    “전하, 부르셨습니까?”

    “우리 정리해야 할 일이 있지.”

    “예? 예…….”

    파벨이 침을 삼켰다. 한결같이 강자 앞에서 약하고 약자 앞에서 강한 모습이었다.

    조프리가 약자였을 때 그는 조프리의 비밀을 팔아넘기려 들었는데, 지금은 충신처럼 몸을 낮추고 있었다.

    난 그가 충신이든 아니든 관심 없지만.

    “내가 그대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비밀을 두 번 팔아넘긴 죄인을.”

    궁금한 듯 묻자 파벨은 몸을 더욱 낮췄다. 그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모습이 보였다.

    “전하, 살려 주십시오. 저는, 저는……. 전하의 형제가 아닙니까?”

    “응. 그런 일도 있었지.”

    “제가 어리석어 전하의 가짜 형제에게 속았습니다. 에드워드 그자의 이간질이 아니었다면 제가 전하를 감히 적대했겠습니까? 제가 아카데미에서 얼마나 마음 바쳐 전하를 모셨는지 떠올려 주십시오. 그자의 속내를 제가 용기 내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 가짜 형제인 에드워드가 내 목숨을 두 번 구하는 동안 그대는 나를 두 번 팔아넘겼지. 아카데미에서부터 그랬잖아.”

    파벨이 뻔뻔해서 머리가 맑아졌다.

    결정했다.

    좋은 판단인지는 알 수 없었다. 로웰은 파벨이 좋은 기사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한 적 없었다.

    파벨레 상송은 좋은 기사도 아닐뿐더러 좋은 학생도 아닌 전형적인 귀족이었다.

    전형적인 귀족들은 어쨌든 가문을 이을 자식은 보호하려고 했다. 모리스 상송이 그렇듯이.

    파벨을 전쟁터에 던져 놓으면 모리스는 그를 보호하려 할 것이다. 상송은 파벨이 자랑했듯 명문이어서 힘없는 가문은 아니었다.

    “이렇게 하자. 출전해서 그대의 충정을 증명해. 내 목숨을 구한 가짜 형제를 그대의 목숨을 바쳐 보호하도록 해. 에드워드가 무사히 돌아오면, 나도 그대가 무사히 영지로 내려가 칩거하도록 허락하지. 나를 팔아넘긴 만큼 내 은인을 보호하는 거야.”

    영지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오는 게 탑에 갇히는 것보단 낫겠지.

    공정한 거래라고 생각했는데 파벨은 입을 벌리고 나를 쳐다봤다.

    “전하께서는 자비로운 분이…….”

    뭐라는 거지?

    “자비롭게 그대가 쓸모 있는 일을 할 기회를 주고 있잖아. 이 방을 나가면 형제라는 말은 입에 담지 마. 널 위해 충고하는 거야. 에드워드는 좋아하지 않을걸.”

    마주 보자 파벨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조금 넋이 나간 듯했다.

    “예, 전하.”

    이로써 에드워드의 호위를 추가했다.

    에드워드가 좋아할지는 모르겠다. 속으로 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혼자 적진으로 돌격하진 못하겠지.

    다녀오겠다고 말했으면 안전하게 돌아오려는 노력을 해야 할 텐데, 에드워드가 아무 생각이 없어서 내가 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답을 듣고 싶으면 안전하게 돌아와.

    사실 내가 에드워드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그거였다.

    파벨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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