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
‘제가 어리석어 전하께서 에드워드 왕자를 이용해 저를 괴롭힌 것이라 믿었습니다. 전하를 향한 저의 충정을 이리 끊어 놓았으니 에드워드 왕자의 성품이 얼마나 간악합니까?’
파벨은 슬퍼하는 척하며 내 눈치를 봤다. 원래 곱게 자란 귀족들이 연기에는 별 재능이 없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진 않았다. 에드워드가 파벨과 사이가 나쁜 건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에드워드가 파벨을 잡은 이유가 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을 뿐이다.
이델라를 돕기 위해서였다거나, 파벨이 단순히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라.
탑이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밝은 곳이었다면 틀림없이 내 표정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누군가 눈치챘을 테니까.
방으로 돌아오니 로웰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하, 에드워드 전하 말씀인데요. 제가 미쳤다고 생각하실 거 알아요. 하지만 한 번만 들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말해 봐.”
지금 에드워드 얘기를 들어도 될까? 내 상태가 그렇게 멀쩡하진 않았지만.
로웰도 멀쩡하진 않은 것 같았다. 에드워드에 대한 오해라면 지금 풀어 두는 게 좋겠지.
“그분이 전하께 집착하시는 것 같아요.”
“…….”
“없는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니에요. 처음부터 그분은 이상했어요. 누가 원수진 형제를 지키려고 납치해서 왕성에 가둬 두나요? 그 전에 싫어하는 형제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진 않죠. 진작 알아챘어야 하는데. 두 분이 형제라고 생각해서 눈이 어두워졌어요. 전하는 모르게 ‘전하를 외국으로 보내려는’ 귀족들을 처분하겠다고 하셨을 때 알아챘어야 하는데.”
이렇게 들킨다고?
로웰이 눈치 빠른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에드워드처럼 표정 없는 애 감정을 대체 무슨 수로 눈치챘는지 모르겠다.
걔야 워낙 시선을 끄니까 로웰도 안 볼 수 없었겠지만.
보통 사람을 좀 살펴본다고 누굴 좋아하는지 알아챌 수 있나?
로웰은 확실히 보통 바람둥이가 아니었다. 그 분야의 전문가라고 할까…….
현실 도피 해도 소용없었다.
로웰은 한숨을 내쉬더니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그분이 얼마 전에 몽블랑 상단에 들르셨대요. 뭘 주문하셨는지 아세요?”
“뭔데?”
“약혼반지요. 전 그분이 이렇게 극적일 때 등장하신 게 우연 같지 않아요.”
얼굴이 터질 것 같다.
“그분이 언제부터 전하의 비밀을 아셨다고 했죠? 형제가 아니라는 걸 안 순간부터 준비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긴 시간일지……. 전 소름이 돋는데요. 이 집착이 얼마나 지독한지……. 전하?”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가렸다.
별 어이없는 청혼을 다 듣는다 했더니 자기도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다. 청혼에 보통 반지가 필요하다는 상식은 갖추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닌가?
얜 대체 얼마나 티 내고 다닐 작정일까?
“……전하?”
손을 치워 보니 로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해명할 시간을 갖기도 전에 또 손님이 찾아왔다.
“전하! 전하, 죄송합니다! 저를 꼴도 보기 싫어하실 줄은 알지만, 제발 한 번만 제 말씀을 들어 주십시오! 꼭 아셔야 하는 일입니다!”
“이 사람이 또! 전하께서 만나고 싶어 하면 아무나 만날 수 있는 분인 줄 아나?”
말 한 번만 들어 달라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언제부터 오는 손님 철저하게 막았다고 경비병은 엄하게 굴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전하!”
기숙사장이 뛰어 들어왔다.
“로웰 몽블랑? 자네도 함께 있었군!”
“나가 있을까요, 전하?”
로웰이 물었다. 내가 답하기 전에 기숙사장이 먼저 말했다.
“아니, 있어도 돼! 한 사람이라도 더 아는 게 낫겠어. 내 판단력을 믿을 수 없군.”
“무슨 일인데?”
“에드워드 전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얜 어딜 이렇게 부지런히 다닌 걸까?
기숙사장이 침을 삼켰다.
“제게 이번 일을 잘 끝내면 왕실 기사를 독점으로 공급해 주시겠다더군요. 비스코티에 대한 제 충성심을 알고 있다고…….”
에드워드는 신문을 싫어할 텐데?
로웰이 물었다.
“그 일이 뭔데요?”
“조프리 전하와 에드워드 전하의 결혼 동맹 기사를 비스코티에 뿌려 달라고…….”
“…….”
“전하.”
로웰이 불렀다.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기숙사장은 혼란스러운 듯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결혼 동맹이 성사된다면 그 이후에 기사를 내는 게 선후가 맞지 않습니까? 제가 이유를 여쭙자 에드워드 전하께서는 조프리 전하를 이대로 셔벗에 빼앗기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비스코티 여론이 나빠지지 않겠냐고. 물론 그건 그렇겠지만, 미리 기사를 쏟아 내 기정사실로 만들라니…….”
“그분 짐승이라도 잡으신대요?”
로웰이 모두의 심경을 대변했다.
“그겁니다! 마치 짐승 덫을 놓는 것처럼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저는 혼란스러워서……. 전하께 전해 드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전하, 제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기숙사장이 물었다. 에드워드는 좋은 일을 해도 의심받는 재주에 더불어 무슨 일을 해도 수상하게 하는 재능까지 있었다.
“비스코티 여론은 무슨 소리야?”
“예? 모르셨습니까? 에드워드 전하께서 실종되시고 조프리 전하마저 잃을 위기에 처하니, 용감하고 영리한 비스코티의 백성들이 가만있었겠습니까? 귀족들을 압박해 에드워드 전하를 구원하고 조프리 전하를 돌려내라고 연일 시끄러웠습니다. 수도 귀족들은 마차를 타고 어디 외출을 못 할 지경이었답니다.”
기숙사장은 어째서인지 기뻐하며 말했다. 이 사람도 귀족 아닌가?
비스코티는 거의 시민 혁명 직전 단계에 위치해 있는 모양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기숙사장은 내 의문에 대한 답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날 잃을 위기라는 게 무슨 소리야?”
“예? 비스코티의 조프리 전하가 셔벗의 전하가 되어 버렸으니까요. 전하께서 다시 돌아오시지 않으면 어쩌나 다들 눈물바다가 되어서…….”
역시 답이 아니다.
하지만 기숙사장은 질문부터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로웰이 정리했다.
“그러니까 다들 전하를 좋아한다는 얘기예요.”
그게 뭐야?
뭐 어린애들한테나 통할 얘기를 하고 있다. 내 신분이 왕자였다고 동화책 속에 살진 않았다.
로웰이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에요. 제가 그렇듯이요. 주인을 모신다면 수도의 책임감 없는 귀족들이 아니라 전하를 모시고 싶은 거죠. 저 무역항들이 있는 자유시가 그렇듯, 시민들이 주인을 선택할 수 있다면 전하를 모시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지만 비스코티는 자유시가 아니니까요.”
“예. 결혼 동맹으로 전하를 모신다면 그야 다들 기뻐하겠지만……. 그렇군요? 에드워드 전하에 대한 혹시 모를 불만도 막을 수 있겠군요!”
기숙사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드워드가 대단한 모략가라는 어투다.
걔가 모략 짜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목적이 권력 방어인 적은 없었다.
물론 이런 얘기를 기숙사장에게 할 수는 없었다.
에드워드는 몹시 티를 내고 싶은 모양이다…….
“진짜 이런 기사를 좋아할 거라고?”
“예? 물론이죠. 전하의 열애 기사 이상으로 잘 팔리지 않을까……. 죄송합니다.”
기숙사장은 신나서 떠들다가 눈치를 봤다.
“잘 팔리면 써야지. 네가 기자잖아. 왜 자꾸 무슨 기사를 쓸지 나한테 물어?”
“예?”
“에드워드가 셔벗 왕성을 구한 얘긴 썼어?”
“예? 물론입니다, 전하. 특집으로 바로 본국에 발송했습니다.”
“잘했네. 삽화도 넣었어?”
“아니, 그건 시간과 예산 문제로…….”
내 연애 기사 따위 말고 저기에 삽화를 넣어야 하지 않나?
“아쉽네.”
“예?”
아무튼 용건은 끝난 것 같다. 난 기숙사장을 내보내고 다시 로웰에게 변명하려고 했다. 뭘 변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런데 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델라와 알렉스가 찾아왔다.
로웰은 아까부터 머리를 부여잡고 있더니 그 상태로 물었다.
“저 나갈까요?”
나가고 싶은 건가?
하지만 이번에는 이델라가 가로막았다.
“아니요. 로웰 씨도 계시면 좋을 것 같아요. 아셔야 할 일 같아서요.”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델라는 눈을 감았다 떴다.
“전하, 아시죠? 모든 일을 전하께서 책임지셔야 하는 건 아니에요.”
무슨 얘기지?
“물론 그렇지.”
“결혼처럼 인생에 있어 중요한 일은 더더욱 그렇다고 생각해요.”
이델라가 내 손을 잡았다. 눈에 눈물이 글썽한데 얼굴은 열로 달아올라 있다. 화내고 있는지 슬퍼하는 건지 모르겠다.
“전하께서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이미 너무 고생하셨잖아요. 전하께서는 더 좋은 사람과 맺어지셔야 해요. 적어도 그런 무뢰한이 아니라, 전하께서 마음에 두고 계시는 그분이라거나…….”
“…….”
옆에서 자동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이던 알렉스가 이델라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