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88화 (288/293)
  • 288.

    “대가 좋죠. 뭐부터 받아 내시겠어요? 텅 빈 곳간부터 채우면 좋을 텐데요.”

    “재물? 비교도 안 되지.”

    “뭘 원하시는데요?”

    에드워드는 대답 대신 생각에 잠긴 듯 허공을 봤다. 그레이는 그가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상하게 경쾌하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본국에 사람을 보내 대신들에게 결혼 동맹 절차를 알아보라고 해. 이미 전대에 치렀던 행사니 준비가 어렵진 않겠지.”

    “예?”

    갑자기 결혼 동맹이라니? 물론 셔벗과의 동맹은 그 무엇보다 우선되는 일이긴 했다.

    셔벗 왕실도 상황이 좋지 않은 만큼 이번 동맹은 서로에게 더없는 거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셔벗 방계에 적당한 공녀가 없을 텐데?

    “……결혼하시게요? 누구랑 하실 건데요? 스프라우트 공작령의 상속녀는 피하시는 게 좋을 텐데요. 이십 년 뒤 나라가 둘로 쪼개져 있는 걸 보고 싶지 않으시면요.”

    그레이는 상식적으로 조언했다. 외국인 왕비의 전횡은 전대로 충분했다.

    에드워드가 되물었다.

    “스프라우트 공작의 딸과 왜 결혼해야 하지? 셔벗에 비스코티의 후계자와 이어질 만한 계급의 혈족은 한 명밖에 없잖아.”

    에드워드가 말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그레이는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되물었다.

    “설마 지금 조프리 전하를 말씀하시는 건 아니죠?”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접견실로 나갔던 이델라가 돌아왔다. 그레이는 문을 잠가 뒀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입을 딱 벌린 이델라 뒤로 알렉스가 나타났다. 그의 손에서 반으로 쪼개진 편지 상자가 퍽 떨어졌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 * *

    몽블랑 상단 셔벗 지부는 낮부터 분주했다. 지부장은 몰려드는 손님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지부장이 직접 맞이해야 할 신분의 인물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은 대단한 구매 없이 차만 마시고 갔으나, 이러한 신분의 손님들은 얼굴을 익히는 것만으로 득이었다. ‘앞으로 이 상단을 이용할 것’이라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지부장은 이들이 지부를 찾은 이유도 짐작하고 있었다. 로웰 몽블랑이 이 지부를 맡게 되었다는 소식을 이미 접한 것이다. 신분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정보력도 갖추고 있는 주요 귀족들인 셈이다.

    처음 상단주가 ‘셔벗 지부 로웰에게 줄까’ 했을 때, 지부장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 도련님이야 유명인이었지만, 좋은 의미로 쌓은 명성이 아니었다. 당장 귀족들 여럿이 하인을 끌고 와 ‘로웰 몽블랑 내놔!’라고 외칠 미래가 눈에 선했다.

    하지만 고용주는 상단주였고, 그는 후계자를 결정할 때 그랬던 것처럼 ‘사실 그대 의견을 묻는 게 아니었네. 이미 결정을 내렸어.’ 하고 대답했다.

    상단주는 고집이 세고 아들들을 끔찍이 아꼈다. 지부장이 큰마음 먹고 첫째 도련님은 후계자감으로 영 아니라고 충고했을 때도, ‘그 애가 좀 욕심이 많고 아둔한 데가 있어서 그렇지 설마 다 키워서 떠먹여 주는 사업도 말아먹겠느냐’고 눈과 귀를 막아 버린 적이 있었다.

    지부장은 체념했으나 한 주 만에 천지가 뒤바뀌었다. 에드워드 왕자가 원군을 끌고 와 셔벗 왕성을 구원하고 에이드 경을 포로로 잡았으며, 셔벗 왕의 동맹 영주들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얼어붙어 있던 왕성은 다시 활기가 돌았다.

    자고로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지부장은 사실 로웰 몽블랑이 천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교성이 상인의 덕목이긴 했으나 로웰의 사교성은 적만 만들고 다니지 않았는가? 그와 친한 아가씨들은 저 하늘의 별만큼 많았지만 그들의 가족들이 로웰을 흰 눈으로 봐서야 매출이 늘 리 없었다.

    하지만 로웰은 더 추문을 만들지 않을 모양이었고, 이제 사람들은 로웰과 친분을 만들고 싶어 했다!

    왕자의 비서와 연애하고 싶은 사람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지부장은 로웰이 신분 높은 애인을 만들기 위해 왕자의 측근이 되었다고 해도 웃으며 껴안아 줄 마음이 있었다.

    “저, 지점장님. 로웰 님이 오셨는데요.”

    “오! 그래. 어서 들어오시라고 해라. 우리 작은 주인님을 내가 맞이해야지.”

    지부장은 두 팔 벌려 로웰을 맞았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도련님? 부르셨으면 제가 왕성으로 갔을 텐데요!”

    “바쁜 분을 오라 가라 할 순 없죠. 그보다 조사를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뭘 알아볼까요?”

    지부장은 너그럽게 물었다. 어느 귀부인의 뒷조사라도 고민하는 척만 하고 들어줄 생각이었다. 이 작은 주인님은 복덩이가 아닌가?

    로웰이 웃으며 대답했다.

    “에드워드 전하 좀 조사해 주세요. 연애 취향이나 이상형, 뭐 그런 거 말이에요. 소문이라도 좋고요. 지금까지 누굴 만났다는 소식은 못 들었지만, 그분도 스쳐 가는 인연은 있었을 거 아니에요? 아, 전에 이델라 양과 무도회 파트너를 한 적이 있었지……. 그것도 어떻게 된 일인지 좀 캐 봐 주세요. 저도 개인적으로 조사할 테니까요.”

    지부장이 정색했다.

    “도련님, 아무리 그래도 다음 대 왕을 애인 삼으려는 건 좀…….”

    “…….”

    로웰은 오해를 해결하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대체 그의 평판은 무슨 영문이란 말인가?

    수많은 오해를 받아 봤으나 이렇게 식은땀 나는 오해는 처음이었다. 보통 에드워드 전하 같은 거랑 연애하고 싶어 하나? 로웰이라고 연애 상대의 얼굴만 보지는 않았다!

    소름을 식히며 복도를 지나가니 마주치는 직원들마다 그를 반겼다. 셔벗 지부는 아버지가 공을 들이다 몇 년 전 포기한 곳이어서, 전부터 일하던 직원들이 일부 남아 있었다.

    로웰이 셔벗에 있을 때만 해도 막내였던 직원이 지금 실장을 달고 있었다. 그녀가 로웰을 붙잡았다.

    “아! 도련님, 마침 잘 오셨어요. 혹시 몇 년 전 주문 제작 했다가 취소된 반지 기억나세요? 처분할 기회가 생긴 것 같은데, 일단 도련님께는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나한테 왜? ……설마 그 반지야? 아직도 처분 안 했어?”

    그 반지라는 건 로웰이 열다섯 살일 적 에브니아가 그에게 주려고 주문 제작 한 반지를 말했다.

    그 반지 때문에 약혼 소문이 더 신빙성 있어지지 않았나?

    물론 그따위 주문 제작을 수락한 상단도 상단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처분하려고 하잖아요.”

    “사람한테 처분하려는 거잖아! 사기를 쳐도 정도가 있지. 어느 가정을 파탄 내게?”

    “파탄이라니요! 저도 설마 결혼반지로 팔려는 거겠어요? 약혼용이라고 하셨단 말이에요.”

    실장이 정색했다. 로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약혼이나 결혼이나. 그러다 저주받는다.”

    “하지만 도련님, 그분이 얼마를 부르셨는지 아세요?”

    “얼만데?”

    실장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로웰은 금액을 듣자마자 또 직원들이 불쌍한 호구를 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직원이 끼어들었다.

    “들킬 위험도 없어요, 도련님. 그분 사랑의 도피를 준비 중이신 것 같았거든요.”

    “맞아요, 이 날씨에 로브를 머리까지 눌러쓰고 있더라니까요.”

    “얼핏 보기론 금발의 미남이었는데.”

    “그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건 국가의 불행…….”

    열심히 설득하더니 옆길로 새고 있다. 금발이라고 하니 로웰은 또 에드워드가 연상됐다. 로웰은 인상이 쓰이려는 걸 참았다.

    “그래, 그 빛나는 미남이 앞으로 행복한 도피 생활 하도록 그 반지는 넣어 두지그래.”

    “하지만 그분 급하다고 하셨는데요. 기한 안에 반지를 제작해 오면 보너스가 열 배…….”

    “기한이 언제까진데?”

    실장이 직원을 쳐다봤다.

    “좀 이상하긴 했어요.”

    “내전이 종식되는 날까지라고…….”

    금발의 에드워드 왕자는 내전 종식을 위해 출전할 예정이었다.

    로웰은 걸음을 멈췄다.

    “……주문하러 온 사람, 어떻게 생겼다고? 자세히 말해 봐.”

    * * *

    파벨이 말한 사연은 뭐랄까 예상 가능한 내용이었다.

    ‘조프리 전하께서 여성과는 연애를 못 하는 분이라는 걸 제가 알게 되지 않았겠습니까? 물론 제가 전하를 염탐한 건 아니고, 타고난 눈치가 빨라 알아채고 말았습니다.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

    ‘그걸 에드워드 왕자에게 말했더니 그자는 폭력으로 제 입을 막으려 들었습니다. 저는 조프리 전하께서 혹여 손을 쓰신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자가 전하를 홀리려고 드는 것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습니까?’

    ‘아, 그래. 언제?’

    ‘예? 틈만 나면 전하의 시선을 잡아끌려고 들지 않았습니까? 대전의 모두가 알아챘을 텐데요.’

    ‘…….’

    ‘그자는 그때부터 판을 짠 게 분명합니다. 아버지가 전하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비스코티로 떠난 것이 그즈음이니까요. 조프리 전하께서 미남계에 약하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일이 얼마나 쉬워졌겠습니까? 그 비밀을 다른 자들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제 입을 막은 게 틀림없습니다.’

    ‘…….’

    요약하자면 에드워드는 타고난 미모를 이용해 나를 홀렸고 난 절세가인에게 반한 왕자처럼 셔벗을 들어다 바칠 거라는 얘기였다.

    그런데 이 얘기는 아무리 들어도 파벨 쪽이 쓰레기였다.

    난 남색자가 아니지만, 진짜 남색자였으면 그 비밀을 에드워드에게 팔아먹으려고 갔단 소리 아닌가?

    그리고 현장에서 응징당했다.

    에드워드가 잘못한 점이 전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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