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87화 (287/293)
  • 287.

    “그자가 왜 왕자를 돕는 척하겠는가? 당연히 혼란한 셔벗을 휘두르려는 속셈이겠지. 비스코티와 같은 촌구석에서 셔벗으로 진출할 교두보를 만들었으니 지금 얼마나 흥분하고 있겠는가? 그대처럼 영리한 사람이 왜 속아 넘어가는지 모르겠군.”

    미셸이 혀를 찼다. 그가 보기에 에드워드는 야심 넘치고 사악한 인간인 모양이다.

    네가 뭘 알아?

    “아, 그래. 에드워드가 셔벗을 무슨 수로 휘두르는데?”

    “그대가 그자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 않은가?”

    “…….”

    심장이 덜컥했다. 미셸이 알아챌 정도라고?

    그런데 미셸이 내 뒤를 돌아보며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뒤에는 협상용 카드로 따라온 파벨밖에 없었다.

    “저 파벨레 상송이 무슨 짓을 했는데 벌써 용서한 건가? 그대가 잘생긴 남자에게 약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너무하군. 세상은 외모가 다가 아니야.”

    뭐라는 걸까?

    “에드워드 그자가 당장은 그대의 검이 되어 줄 것 같겠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대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턱이 없는…….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아니, 계속 해 봐.”

    “내 말은……. 정말로 외모인가? 그자에게 반했다고? 그건 좀…….”

    미셸이 벌떡 일어났다. 점입가경이다.

    쓸 만한 얘기는 다 들은 것 같다. 난 알렉스에게 나가자고 하려고 했다. 그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나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설마, 전하께서 신경 쓰인다고 말씀하신 상대가…….”

    “…….”

    “헉, 그래서?”

    뒤에서 파벨이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얜 또 뭘까?

    내가 따라오라고 부를 때부터 기가 죽어 있더니 파벨은 갑자기 열을 내며 말했다.

    “전하, 정말로 그자에게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얼마나 음험한 자인지 전하께서는 상상도 못 하실 겁니다. 그자는 예전부터 전하를 옭아매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속셈?”

    이건 또 무슨 소리지?

    파벨이 침을 삼켰다.

    “이건 어디서도 말하지 못한 비밀입니다……. 제가 말했다는 걸 알면 에드워드 왕자는 저를 죽이려 할 겁니다. 제가 충심으로 말씀드린다는 사실을 알아주셔야 합니다.”

    “훌륭하네. 비밀 지킬 테니까 말해 봐.”

    파벨이 주먹을 쥐었다.

    “에드워드 왕자는 아카데미 시절부터 전하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하의 비밀을 퍼뜨리지 못하게 협박했던 겁니다!”

    “뭐?”

    * * *

    이델라는 놀랍게도 자신이 사랑의 정글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깨달았다.

    “예?”

    그녀가 되물었다. 조프리 전하의 비서 로웰 몽블랑이 잘생긴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레이 크래커 공작이 전하께 허튼 말 하지 않게 저희가 살펴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

    “와아, 그러니까 그 말씀은…….”

    “예. 그거죠.”

    로웰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래커 공작이 전하께 허튼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이델라도 깨달은 듯했다.

    이델라는 한숨을 쉬었다.

    “역시 몽블랑 씨, 전하를 좋아하셨군요.”

    “그럼요. 당연한 말씀을……. 예?”

    “그러지 않을까 짐작은 했어요. 걱정 마세요. 각하께서 먼저 고백하지 않게 제가 지켜보고 있을게요. 물론 선택은 전하의 몫이지만요.”

    “예? 아니, 그게 아니라…….”

    비서진 중 핵심 두 명이 전하를 짝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웰 몽블랑은 바람둥이로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에, 이델라도 처음에는 의심만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소문이 꼭 사실이라는 법은 없다고 믿었다. 그녀만 해도 조프리 전하와 염문이 나지 않았는가?

    무려 신문 1면에 실리기까지 했다. 신문 기자는 근거가 전혀 없어도 소설을 써내는 자들이었다.

    물론 로웰에 대한 소문은 전방위적으로 들어왔기에 좀 더 신빙성이 있었지만, 이델라의 눈에 비친 그는 왕자를 위해 목숨도 바칠 정도로 충성스러운 측근이었다.

    매분 매초 전하를 쳐다보고, 숨 쉬듯이 ‘저는 전하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 전하와 함께하는 매 시간이 소중하다’고 말하고, 전하와 눈만 마주치면 시간이 멈춘 듯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바람둥이란 원래 그런 존재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하지만 역시 전하를 좋아했던 것이다.

    이델라는 친구의 수많은 커플링이 망상이라고 생각했으나, 어쩌면 그녀는 천재적인 직감으로 둘 사이의 미묘한 감정들을 짚어 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로웰의 짝사랑은 진짜였다.

    게다가 체레니아는 룸메이트인 그레이가 전하와 실은 더 깊은 관계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는데, 이델라는 그레이가 전하를 사랑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사랑의 정글…….’

    그 외에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심지어 사랑의 라이벌은 이 두 비서만이 아니었다.

    이델라는 접견실에서 나와 비서실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 귀족들의 가신을 만나서, 양손 가득 편지 상자를 든 채였다.

    이델라는 이 편지 안에 무슨 말이 쓰여 있을지도 알고 있었다. 조프리 전하를 향한 구애가 가득할 것이다.

    전하께는 결혼 제의라고 뭉뚱그려서 보고드렸으나, 이 중에는 전하께 직접 구애하는 귀족도 여럿 있었다.

    성공하면 왕세자의 애인이다. 해 볼 만한 도전인 것이다.

    물론 그게 아니라도 전하께서는 매력적인 분이었다. 그러니까 구애가 끊이질 않겠지.

    편지를 확인하면 그레이는 또 기분이 나빠질 것이다. 오늘 일도 많은데, 또 짝사랑하는 사람 특유의 고민에 빠져서 얼굴이 파래졌다 빨개졌다 하겠지.

    어떡하지.

    이델라는 두근두근하며 복도를 걸어갔다. 그러느라 마찬가지로 상념에 빠져 걷던 사람을 발견 못 하고 부딪히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으십니까?”

    장신의 기사가 이델라를 붙잡았다.

    알렉스 바움쿠헨은 넋을 놓고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는 모시는 주인을 존경했다. 조프리 전하의 판단력을 언제나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은 그의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기에 충분했다.

    이게 맞나? 전하께서 잘못된 선택을 하신 게 아닌가?

    하지만 이건 전하의 사생활이어서 어디에 물어볼 수도 없었다. 바움쿠헨 백작은 믿음직하지 않은 상담 상대였으나, 막상 곁에서 사라지니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요. 주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경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그때 알렉스의 시야에 이델라가 들어왔다.

    그녀는 한때 에드워드와 만난 적이 있었다. 알렉스는 그녀가 누구와 만나는지 궁금해한 적이 없었으나, 그녀가 에드워드와 함께 춤을 추고 거리를 거닐었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었다. 조프리 전하와 함께 미행한 적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녀는 전하의 비서였다. 입이 무거운 데다 충성스럽다.

    “저…….”

    “말씀하세요.”

    이델라는 놀랐다. 예의상 물었는데 정말 용건이 있었다고?

    “소중한 분이 이상한 상대를 좋아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알렉스가 물었다.

    이델라는 다시 편지 상자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의 ‘소중한 분’이라면 조프리 전하밖에 없지 않은가?

    조프리 전하께서 좋아하는 분이 있다고? 그게 누군데?

    크래커 공작 각하는 이 사실을 아시나?

    * * *

    한편 그레이는 에드워드를 상대하고 있었다.

    에드워드의 등장은 극적이었다. 그레이는 그가 셔벗 왕실을 구원했다는 것을 셔벗이 결코 잊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실무적인 협상을 준비하느라 몸은 바빴다. 그러나 한편으로 머리는 냉정해졌다. 그레이는 어차피 돌아가야 할 사람이다.

    에드워드와 함께 돌아가게 되겠지. 그리고 그 일정은 그레이가 직접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실 그레이의 삶에서 그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어떤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지 잊지 않았다.

    올바른 왕자를 모시고 나라를 옳은 방향으로 틀어 놓는 게 그의 사명이었다. 한때 그레이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지금은 어린 생각임을 알고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적었고, 그의 의지로 사라지지 않는 감정은 가슴속 뿌리 깊이 박혔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빼내려 하면 고통만 주는 이것을 그레이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마 그의 힘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그레이가 의문인 것은 에드워드의 태도였다. 왜 저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거지?

    “끝을 보시게요? 셔벗의 상황이 비스코티에 큰 영향을 미치는 건 맞지만, 본국을 너무 오래 비우시는 것 같은데요.”

    “반란은 진압됐고 외부의 적은 문제가 되지 않아. 내부에서라면, 파이 공작이 두 번이나 용기를 낼 것 같지 않잖아.”

    “반역이 용기의 문제인 줄 몰랐는데요. 이제 어떻게 하시게요?”

    “셔벗에 도움의 대가를 받아 내야지.”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그레이는 의아했다. 에드워드가 약간 웃는 것처럼 보여서였다.

    비스코티는 오랜 시절 셔벗에 짓눌려 왔다. 입장이 역전된 셈이니 기뻐할 만도 했으나, 그레이는 에드워드가 그런 일로 즐거워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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