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86화 (286/293)

286.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난 에드워드를 좋아한다.

인정한다고 하늘이 무너지진 않았다. 날은 따듯했고 새 지저귀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결혼은 다른 문제지.

에드워드는 상식을 배울 필요가 있다.

셔벗과 비스코티는 동맹이 필요하지만. 동성 결혼은 역사적으로 몇 차례 있었던 일이지만…….

어?

“…….”

아니. 이게 아니라.

애초에 고민할 일이 아니다. 그때는 양국이 국가적인 위기 상황이었고,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이게 아니라! 내 경우에는 가능하지도 않다.

비스코티로 돌아가는 것도 못 하겠다는데 결혼?

농담이 아니다. 돌 맞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미움이라면 내 옆에 있는 애한테 평생 받아 왔는데 좀 욕먹는다고 죽지 않겠지만.

“…….”

난 에드워드에게 설명하려고 했다.

에드워드는 벌받는 것처럼 따라오고 있었다. 저 체념한 얼굴이 익숙했다. 아무런 기대 없이 내 처분을 기다리겠다는 얼굴이다.

“그러면 일단……. 생각해 보자.”

나 뭐라고 했지?

에드워드가 걸음을 멈췄다. 놀라서 굳은 얼굴이 나를 쳐다보는 게, 귀여웠다.

귀엽다.

미친 걸까?

“일단 상황을 보고…….”

“조프리.”

차마 에드워드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앞만 보고 걸었다.

난 제정신이 아니다.

정신을 차리려면 쟤 얼굴을 안 봐야 할 것 같은데, 에드워드는 또 부지런히 따라오고 있었다.

내 한 걸음과 에드워드의 한 걸음이 같을 리 없어서 난 금방 따라잡혔다.

그럼 빨리 걸어서 가 버려, 너 바쁘잖아, 하는 타박은 나오지 않았다.

“조프리.”

에드워드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행복감이 내게까지 넘쳐흘렀다.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통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난 제정신이 아니다.

하지만 에드워드도 제정신은 아니니까. 우리는 균형이 맞을지도 모른다. 단 한 번도 그렇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역시 난 미친 걸까?

* * *

동맹군이 하나둘 합류하며 성은 다시 북적이기 시작했다. 필리프 왕은 에드워드에 대한 사심은 드러내지 않고 그를 동맹 영주들에게 소개했다.

반란군은 동맹이 모이는 걸 막기 위해 길을 차단했으나 결과는 전과 같지 않았다. 셔벗 왕성에서의 승리를 들은 귀족들은 몸을 사리는 것보다 빨리 왕에게 합류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듯했다.

빨리 도착하는 사람이 왕에게 더 많은 점수를 딸 것이다. 그보다도 전쟁이 필리프 왕의 승리로 끝나면 그들에게 끼칠 왕의 분노가 두려웠을지도 몰랐다.

아무튼 귀족들은 손해를 보지 않는 데는 도가 통한 사람들이어서, 모여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지금까지의 지지부진한 상황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동맹군의 수가 불었다.

그들은 합류하면서 작은 승전보를 하나씩 가져왔다. 작다는 건 객관적인 표현이었고, 본인들은 대단한 승리라고 믿는 듯했다. 그들의 말만 믿으면 이미 반란군은 열 번쯤 전멸한 듯했다.

하지만 승전보의 효과는 상대의 전력을 가늠하는 게 아니라 사기 진작에 있었다. 동맹 진영에는 활기가 돌았다. 모두가 반란군을 처단하고 공을 세우겠다는 전의로 가득했다.

그중 가장 많은 승전보를 가져온 사람은 단연 알렉스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하! 무사하셔서 정말……. 정말로 다행입니다.”

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말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려왔다.

한달음에 내게 달려와 팔다리를 들어 보게 하고 한 바퀴 돌려 가며 몸 상태를 점검했다.

발목 상태가 좋아져서 도는 데는 문제없었다.

물론 그건 내 의견이었고, 에드워드는 다른 듯했다.

“정말로 늦었군.”

“…….”

아무한테나 시비 걸지 마.

알렉스도 그를 발견했다.

“이자가 왜 여기 있습니까?”

“아니……. 왕자를 ‘이자’라고 부르면 안 되지.”

“죄송합니다, 전하.”

알렉스가 내게 사과했다.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은 에드워드였다.

“도와주러 왔어.”

“예? 왜입니까?”

“……동맹국이니까?”

알렉스는 그렇군요, 하는 표정을 짓더니 에드워드에겐 인사도 하지 않고 나를 번쩍 들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아직 부상이 다 낫지 않으셨군요. 제가 곁에서 보필하지 못해서…….”

“…….”

알렉스가 자책했다.

에드워드의 시선을 못 느끼는 걸까?

“괜찮다니까. 오래 포위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결과적으로 에드워드가 미셸 에이드를 잡아서 전쟁도 더 빨리 끝날 것 같아.”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쪽도 미끼 작전을 쓴 셈이다. 미셸 에이드가 국왕군의 심장을 노리겠다고 덤벼 준 덕분에 손도 대지 않고 적측의 주요 인물을 얻었다.

“도움이 됐어?”

에드워드가 착하게 물으며 내 등에서 알렉스의 손을 떼어 냈다.

“도움이 된 정도가 아니지. 전쟁 끝나면 네 이름이 공훈 서열 맨 앞줄에 있을걸.”

“그래? 잘했어?”

“당연하잖아.”

칭찬받고 싶어서 이러나?

생각해 보니 고맙다는 말도 안 했다.

“고마워. 잘했어.”

칭찬해 주자 에드워드가 웃었다.

정신 차려 보니 알렉스가 그를 미친 사람 대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필리프 왕의 정예병이 복귀하자 작전 회의는 가속도가 붙었다.

에슬턴 백작이 주장했다.

“지금 쳐야 합니다! 첩자의 말에 따르면 두 반역자는 서로를 믿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반역을 일으킨 신의 없는 자들이 서로에 대한 신의는 지키겠습니까? 미셸 에이드를 포로로 잡아 에이드 공작이 주춤할 때 코크를 쳐야 합니다. 에이드가 그를 도우려 하겠습니까?”

그는 셔벗에서 이름 높은 기사였다.

반대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귀족들은 왕에게 충정을 증명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때마침 에이드 공작에게 보낸 사신이 돌아왔다. 공작은 아들이 무사한지 알고 싶어 했다.

아들을 너무 사랑해서인지 하나뿐인 아들이 가문을 물려받지 않으면 곤란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아들만 무사히 돌려준다면 이 내전에서 발을 빼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배상금을 내는 건 물론이었다.

공작은 아들처럼 열정적인 성품은 아닌 듯했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안심이 빨랐던 모양이다.

“폐하. 포로가 탑에서 나오지 않겠다고 합니다.”

“뭐라?”

미셸 에이드가 석방을 거부했던 것이다.

* * *

미셸 에이드가 갇힌 탑은 시설 좋은 독방이었다. 보통 신분 좋은 귀족들이 포로로 잡히면 그렇듯 그도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대접을 받는다고 해도 포로 처지여서 미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뭐지? 억지로 끌고 나가도 소용없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조프리 왕자?”

“미셸 에이드.”

그가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기 전에 알렉스에게 잡혀 팔이 꺾였다.

“악! 조프리 왕자! 이 비겁한…….”

알렉스가 입을 막느냐는 신호를 보냈다. 좀 시끄러워도 비위를 맞춰 주는 게 좋겠지.

“손 안 댈 테니까 조용히 좀 해 봐. 왜 안 나가겠다는 거야?”

“몰라서 묻는가?”

알면서 묻는 사람도 있나?

“나를 흔들려 해도 소용없다. 비스코티가 연합군의 수중에 떨어질까 봐 서둘러 협상하려는 거겠지. 속셈을 뻔히 아는데 내가 왜 응해야 하지? 그대야말로 더 늦기 전에 나를 연합군으로 돌려보내고 자비를 비는 쪽이 좋을 것이다.”

믿는 구석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비스코티의 반란이라면 이미 정리됐다. 국왕군을 뒤에 두고 공작 연합군이 비스코티를 노릴 리도 없다.

공작들은 비스코티를 직접 도모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반란 세력을 돕는 척하다가 집어삼키려는 계획이라면 모르겠지만.

하는 짓을 보니 이 연합군은 필리프 왕의 동맹들만큼이나 몸을 사리고 있었다.

“늦기 전에 협상해야 하는 쪽은 에이드겠지.”

“무슨 뜻이지?”

“에드워드가 어떻게 지원을 왔겠어? 코크 공작은 비스코티의 반란에도 제대로 힘을 보태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에이드만 화살받이로 세우고 힘을 비축하면서, 코크 공작이 뭘 노리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설마!”

두 공작 중 비스코티의 반란을 부추긴 쪽이 어디일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일단 찍어 봤다.

정답을 맞혔는지 미셸의 반응이 좋았다. 충분한 의심을 심어 줬을까?

미셸이 의심했다.

“왜 이런 얘기를 내게 해 주는 거지?”

“그대처럼 훌륭한 기사가 명예롭지 못한 계략에 당하게 두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니니까?”

아무 말이나 하자, 미셸 에이드의 뺨이 씰룩였다.

“어쩔 수 없군……. 비겁한 코크를 두고 볼 수 없는 노릇이니. 협상에 응하겠다.”

“좋은 판단이야. 역시 결단력이 있군.”

혹시 몰라 파벨레 상송을 데려왔는데 그를 동원할 것도 없었다. 두 공작 세력은 서로에게 일말의 믿음도 없었던 모양이다.

일어나서 나가려는데 미셸의 진지한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조프리 왕자. 그대가 나를 인정하고 또 충고를 아끼지 않으니 나도 그 우정에 보답해야겠군.”

우리 사이에 언제 우정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에드워드 왕자를 경계하도록 해.”

“…….”

이 말을 외국까지 와서 듣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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